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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Topic: 이 승만 박사가 몰락의 길을 신나게 달렸다 (가제) 연재 예고
teddy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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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이 승만 박사가 몰락의 길을 신나게 달렸다 (가제) 연재 예고
on: June 17, 2016,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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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한국에 있을 때는 이 박사가 한 일들이 모두 옳다고 배웠으나

이곳 미국에 와서 미국측 자료를 보니 너무 엄청난 오류가 많이 발견되었읍니다.

특히 우리가 "영웅적 쾌거"로 알고 있는 "반공 포로 석방"은 시제 말로 그게 아니었읍니다.

물리학에 있는 "작용에 따른 반작용"이 국제 정치학에도 있는 줄 모르고, 이미 석방 10일 전에 유엔군 측과 공산 측 사이에 포로 송환을 자유의사에 따르도록 합의가 되어서 시간만 지나면 다 원하는대로 석방되도록 되어 있는데도 독자적으로 석방시켜서, 휴전에 올인하고 있든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격분시켜서 당장 에버레리 작전 (Everready Plan)을 시행해서 이 박사를 제거하도록 하였으나, 주위의 만류로 그 당시는 넘겼지만, 휴전이 약 5주 지연되어 미군들이 매주 평균 1,000 명 정도 인명 패해 (Casualties:전사상자)가 불필요하게 생겼다고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고, 결국 그 이박사를 권좌에서 축출하게 되므로 사실상 그 자신의 최악의 꼼수(자충수)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엄청난 것은 그로 인해, 우리 거의가 다 모르고 있는 금성천 전투로 우리 장병 약 3만명의 인명 피해가 났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최근에 있은, 천안함 사건 (약 50명) 과 세월호 사건 (약 300명) 의 피해로 나라가 온통 뒤집힐듯 야단을 부렸는데 그보다 몇 백배 더 큰 피해를 당했는데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입도 벙긋않고 나머지는 무슨 일이 일어 났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이승만의 많은 실책은 모두 아랫 사람들이 잘못했다고 그에게 면죄부를 주는데 이 일만은 아랫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이박사 당신이 명령을 내렸다고 자인을 했으니 면죄부를 주고 싶어도 줄 수도 없다.

이 박사가 휴전을 반대하고 "단독 북진"도 불사한다고 계속 되뇌이자, 공산측은 휴전 조인을한들 이 박사 말대로 단독 북진으로 나올 경우 휴전 조약은 휴짓 조각에 불과하게되므로 이 박사에게 본떼를 보여주려고 한국군 전담 지역인 금성천 돌출부를 포위하여 7월 13일 (1953년) 부터 약 1주간 맹공을 가하여 한국군에 심대한 인명 피해 (유엔사 자료: 약 3만명, 중국측 자료: 약 6만명)를 입혔다.

당시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대장은 "공산군이 7.13 공세를 편 이유는 "이 박사 콧잔등을 한방 들이쳐서 코피를 쏟개해서 "북진"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다는 점을 이 박사와 전 세계에 알리려 했다" 는 유명한 촌평을 남겼고, 백 선엽 장군도 그 전투 결과로 "이박사 체면이 조금 구겨졌다"고 약소하게 평했다. 이박사는 우리 장병 3만명의 인명 피해를 입은 다음에야 아무 끽소리 못하고 휴전에 응했다.

아무 것도 내새울 것이 없는데도 미국에 대들어서 이겼다고 내새우다 결국 4.19 로 단번에 나가 떨어지고 사실상 미국에 납치 당해 갔다. 며칠 전에 아이크의 비밀 특사로 와서 이 박사에게 후계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퇴임할 것을 종용한 져드 하원의원의 보고서를 입수했는데 4.19 가 일어나기 약 6 개월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4.19 당시 미국 부대사인 마샬 그린씨가 아이크의 비밀 특사가 6개월 전에 와서 벌써 하야를 종용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 박사가 미 대사와 유엔군 사령관이 퇴임을 강권하자 이것이 바로 미국의 뜻인 것을 알아 차리고 물러났다고 증언했는데도 자진하야를 우긴다면 정신나간 양반들이라 하겠다.

아이크가 왜 이 박사에게 하야를 종용하게 됐냐하면 그해 (1959년) 6월에 이 승만 박사가 노망이 들었다는 보고가 들어 와서 대한민국을 노망들린 늙은이 한테 맡겨둘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후계예정자인 이기붕 조차 거동도 못할 뿐 아니라 말도 제대로 못해서 대한민국이 "병신 공화국"이 될까 걱정한 까닭이다. 만약 4.19가 없었드라면 이 기붕이 후계로 대통령직을 받게 되지만 말도못하는 사실상 "병신"인 이기붕 대신에 그의 부인인 박마리아가 섭정을 하여 그 때 이미 "박 대통령"이 등극했을 터이다.

산타 크로즈는 없다

제가 이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국민들 특히 전쟁 세대로 이승만 독재 정권 시대에 살아온 분들이 지금까지 이 승만 박사와 맥아더를 신주 모시듯이 위하고 있는데, 그 이유를 따져보니 그 시대 정부의 집중적인 세뇌 공작에 물들어서 이 박사가 한 일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어려서 애들이 크리스 마스 때 아침에 깨서 선물을 보면서 산타 클로즈가 간밤에 갖다준 것으로 생각해오지만 어느 정도 철이 들면 산타 클로즈가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부모님이 가져다 주었다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도 이 승만과 맥아더에 연면하시는 분들은 산타 클로즈가 지금도 선물을 가져다 준다는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신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을 알려서, 그들 전쟁광들(Warmongers) 이 죽지 않아도 될 우리 장병 수만 명을 사지로 몰았고 트루만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제동을 걸지 않았드라면, 자칫했드라면 제 3차 세계 대전을 일으킬 뻔했다는 점을 알아 차리시기 바라며, 물리학에만 “작용에 반작용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국제 정치에도 역시 “작용과 반작용”이 어김 없이 작동하고 있다. 6.25 사변이 발생해서 미군이 개입하고, 미군이 38 선을 넘어 한만 국경으로 접근하니까 중공이 개입한 것은 국제 사회에서도 “작용과 반작용”이 어김 없이 적용되는데, 한쪽 (미국)의 개입은 옳고 다른쪽 (중공) 의 개입은 옳지 않다고 보는 것은 산타 클로즈가 아직도 선물을 가져다 준다고 믿는 어린 아이들처럼 아주 순진한 생각으로 국제 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모르시거나 알고도 외면하려는 심정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승만과 맥아더는 “국제 정치 101 (입문)”도 모르는 무식꾼들이었으며, 이승만을 지도자로 모시고 따라온 우리 국민이 가여울 따름입니다.

그래서, 필자가 차근 차근 이 박사의 몰락의 과정을 설명 드리려 합니다.

김 태환[b]

bongsoo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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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Re: 이 승만 박사가 몰락의 길을 신나게 달렸다 (가제) 연재 예고
on: July 24, 2017,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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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리한 관찰이십니다만 반공 포로 석방에 관한 다른 의견도 있음을 피력하는 바 입니다. 동일 사안의 이와같은 극명한
이견이 단지 촛불과 태극기의 견해 차로 치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견은 옳고 그름의 규명이 아니고 서로 다름의 견지에서
바라보아야 할 역사적 고찰이 아닌가 하며, 건전한 이견의 왕래는 민주사회의 밑거름이기도 합니다.

이하는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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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전명 에버-레디(Ever-ready)를 아십니까 ◈

韓·美 동맹 없이 휴전 없다는 이승만의 對美 필사 투쟁
동맹 거부 美, 李 제거 작전… 두 나라, 살벌한 갈등 연속
한·미 동맹이 어디서 어떻게 온 것인지 모두가 알아야.

양상훈 주필

!
에버-레디(Ever-ready)는 6·25전쟁 중이던 1953년 5월 유엔군사령부가 극비리에 수립한 작전 계획이다.
중공군 격파 작전이 아니다.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를 붕괴시키고 이 대통령을 감금하는 작전이다.
이승만의 피눈물 나는 대미(對美) 투쟁과 파국 직전의 한·미 갈등 끝에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1951년 시작된 휴전 회담을 한국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국토와 국민이 결딴났는데 통일도 없이
분단된다는 것은 새 지옥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7만명 이상의 미군 인명 손실에 대한 국내 여론
악화와 막대한 전쟁 비용 때문에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웠다. 이승만은 이대로 휴전이 이뤄지면 미군은
한국을 떠날 것이고 고립된 섬으로 남는 한국이 중·북·소련에 의해 적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보았다.
아니더라도 일본 세력권에 편입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전망이었다. 미국이 그걸 원하고 있었다.
이승만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1953년 5월부터 7월까지 3개월간 '이승만 대(對) 미국'의 살벌한 갈등은 약소국이 살아남는 지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한편의 교과서다. 노르웨이 대사를 지낸 최병구씨가 지은 '외교의 세계'는 그 드라마
같은 3개월을 잘 기록하고 있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죽자 휴전 회담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이승만은 4월 22일 중공군의 북한 주둔을
허용하는 휴전 협정이 맺어지면 한국군은 유엔군에서 이탈해 독자적으로 싸울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클라크 주한 유엔군사령관은 이승만 보호 감금과 임시정부 수립을
미국 정부에 건의하기에 이른다. 미 국무부까지 동조해 5월 에버-레디 작전이 수립된다.

한국은 독자 전쟁이 불가능했다. 전쟁 유류가 단 2일치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이승만이 독자 전쟁을
선언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한·미 동맹(상호방위조약) 체결이었다. 그것만이 공산 세력과 일본의
재침을 막는 유일한 방패라고 보았다. 예지(叡智)였다. 미국에선 한국과의 동맹은 불필요하다는 견해가
다수였다. 한국은 가치 없는 나라였다. 한국이 미국을 동맹으로 만들려면 '너 죽고 나 죽자'고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미국 국무부, 국방부, 합참의 합동 회의에서 격론이 이어졌다. 5월 30일 이승만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
외에는 6·25전쟁을 중단할 방법이 없다는 결론이 났다. 에버-레디는 폐기됐다. 한국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같은 날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친서를 보내 한·미 동맹을 맺으면 휴전에 동의하겠다고
했다. 아이젠하워는 동맹이 아니라 미 정부의 '한국 방어' 성명과 군사 지원 행정 협정을 맺자고 했다.
10억달러 경제 원조도 제시했다.

이승만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조약'이 아니면 미국을 붙잡아둘 수 없다고 보았다. 이런 가운데 6월 8일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포로 송환 문제가 타결됐다. 한·미 동맹을 못 얻었는데 휴전이 목전에 온 것이다.
이승만은 6월 18일 3만5000여명 반공 포로 석방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린다. 휴전 회담을 무산시킬 조치였다.
이승만은 그 다음 날 주한 미 대사에게!
"이것이 자살 행위라 해도 그것은 우리의 특권이다"고 했다. 한·미
동맹 없이 휴전이 되면 자살도 불사하겠다는 결의였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을 '정신착란자'라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이승만은 굴하지 않았다. 아이젠하워에
편지를 보내 '한·미 동맹 없이 휴전되는 것은 한국에 대한 사형 집행장'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7월 9일,
휴전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약속과 함께 한·미 동맹 조약 초안을 제시했다. 미국은 이승만이 어떤
행동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젠하워는 어쩔 수 없이 방위조약을 맺을
특사를 한국에 파견했다.

그러나 미국 측 초안에는 '한쪽이 공격받으면 다른 한쪽이 자동 개입한다'는 동맹 조약의 핵심 부분이
없었다. 이승만은 미 특사에게 한·일 합방과 한반도 분단에 대한 빚을 갚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전쟁 참여는 행정부 아닌 상원의 권한이었다. 이승만은 우회로를 택했다. '한쪽에 대한 공격을 다른 쪽에
대한 공동 위험으로 보고 각자 헌법에 따라 행동한다'는 조항을 신설하고 바로 그다음에 '미군의 한국
주둔'을 규정했다. 미군이 주둔하면 유사시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외교 귀재의 발상이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됐고 8월 8일 서울에서 한·미 외교장관이 동맹 조약에 서명했다.

한·미 동맹은 국민의 피와 모든 것을 건 한 지도자의 필
사적 투쟁으로 이뤄낸 것이다. 이승만은 한·미 동맹으로 "우리 후손들이 여러 대에 걸쳐 갖가지 혜택을
누릴 것"이라고 했는데 그대로 적중했다. 한강의 기적은 한·미 동맹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에 힘이 없다"고 토로했다. 우리는 괄목할 성장을 했으나 더 큰 나라들에 둘러싸여 있다.
한국의 지도자는 한·미 동맹사(史)를 읽고 또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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