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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Topic: 구력 40년
moonbyun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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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구력 40년
on: October 29, 2016,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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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봄, 텍사스 남부의 학교 촌 College Station시는 파란 하늘아래 봄볕을 받으며 온통 초록 일색이었다. Aggie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Texas A&M 주립대학으로 인해 생긴 이 소도시는 언제나 조용하고 아늑하여 휴스턴에서 미국 생활에 적응하느라 바짝 조여진 도미 초년생의 마음을 느슨하게 풀어주는 곳이었다.

휴스턴의 석유탐사 회사에 근무하며 스물여덟의 도미 1년 차 독신이던 나는 이렇게 두어 시간 지평선을 가로질러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양 선배를 찾곤 하였다. 자원공학과 선배로, 남영동의 국립지질조사소 물리탐사실에서 같이 근무 하던 소박하고 원만한 성품의 양선배는 이국 생활의 외로움도 달래고 ‘한국말’도 실컷 할 겸 찾아가는 나를 늘 반갑게 맞아 주었다.

둘이서 가볍게 산보나 할 겸 숲 속을 걷다 마침 하늘이 트인 것 같은 넓은 잔디가 나타나더니 그 끝자락에 거짓말같이 고운 잔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융단을 깔아 놓은 듯 싶은 잔디 위에서 따스한 봄 햇살을 받으며 얘기하기엔 안성맞춤으로 여겨져 자리 잡아 앉으니 전망도 일품 이어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피크닉 장소가 어디 있으랴 싶었다.

이야기 중에 우리와는 꽤 먼 거리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우리를 향해 고함치는 것 같아 보였다.

뭔가 이상하다 싶긴 했지만 우리완 무관한 일이거니 하며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는데 잠시 후 소리 없이 달려온 조그만 사륜차에서 덩치 큰 미국인이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자리를 피하라는 손짓을 하는 거였다. 결코 흔히 보아 온 친절한 텍사스 아저씨의 몸짓은 아니어서 혹시 남의 집 울타리 안에 들어 와 있는 거나 아닌가 싶어 황망히 그곳을 피한 후에라야 앉아 봄을 만끽하던 자리는 College Station의 한 골프장 끝자락에 있는 숏홀 그린이었고 클럽을 휘두르며 아우성 친 사람들은 그린에 볼을 한 샷에 붙이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는 골퍼들이었으며, 황급히 달려와 또박또박 말해도 알아듣기 힘들어 하는 우리에게 폭포 같은 영어를 쏟아 낸 다혈질 미국인은 골프장 관리가 평생 직장일 법 한 코스 진행 관리 요원이었다. 그리고 관리인 눈에 비친 우리는 꼼짝없이 어느 한심한 아시안들이었다.

낯이 화끈한 해프닝이었지만 그것은 서울에서 골프장 구경 한 번 못하고 미국 온 대한민국 국립지질조사소 직원으로, 골프가 대중화 된 미국을 오면서 골프장 사진이라도 들여다보지 않고 온 두 '동양 시골뜨기'의 벌서기이기도 했다. 70년대 전후 새마을 운동으로 허리띠 졸라매던 시절, 골프라는 스포츠가 있다더라 정도의 말만 들으며 남영동 일본 적산가옥 이층 건물의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오르내리며 조사소 물리탐사실에서 근무하던 우리에게 골프는 먼 나라 배부른 사람들의 사치스런 게임으로만 알았으며 어쩌면 어릴 때 곧잘 하던 자치기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였을 뿐이었다.

회사로 돌아 와 골프를 배우기로 작정한 나의 말을 귀담아 들은 직장 동료가 어느 날 골프 초년생은 헌 채가 제격이라며 가방과 함께 건네 준 클럽 한 세트는 내가 미국 와 처음 받아보는 큰 선물이 되었다.

직장 동료로부터 기본 폼도 배우고 여기저기서 동냥 레슨도 몇 차례 받으면서, 레인지 볼 연습장을 찾아 옆 사람 스윙을 눈 여겨 보아가며 연습을 시작했다.

머리 들지 말기, 왼팔 굽지 말기, 바른 발 떼지 말기, 반 스윙 말기, 뒤땅 치지 말기, 힘으로 치지 말기… 등등 하지 말아야 될 게 너무 많아 배울수록 힘 드는 스윙이었지만 미국에 와 골프까지 배우는 스스로가 대견하다 느껴지기도 했다. 동전 넣고 공을 받아 일열 횡대로 열심히 쳐 내는 사람들을 잠시 숨 돌리며 보면서 경쾌한 금속성과 함께 가볍게 멀리 날리는 골퍼들이 부럽기도 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프로로부터 정식 레슨 없이 여기저기서 동냥 코치를 받으며 골프를 시작한 나는 어느새 버릇대로의 자세가 되어 누가 바로잡아주면 공이 안 맞는 등 혼란을 겪곤 하였다.

드디어는 ‘실전’하며 배우는 게 낫다며 아직은 주춤거리던 나를 가까운 친구들이 골프장에 끌고 가 ‘머리’를 얹어주었다.

공을 때린 후에도 머리를 들지 말고 클럽 헤드를 앞으로 밀어주면서 눈은 티에서 떼지 말라 하니 공이 날아간 위치를 파악 못하기 일쑤이고, 왼팔은 임팩트 시 반지름 역할을 하니 굽히지 말라 하므로 숙인 얼굴 턱 밑으로 뻗어 클럽 손잡이를 잡은 폼 자체가 힘겨운데 허리와 어깨를 유연하게 돌리며 내리 치되 시종 발을 땅에서 떼지 말라는 일련의 동작들은 따로따로 생각해서 될 일이 아니었고 오랜 실습 끝에 몸에 배어 한 동작으로 묶을 수 있어야 될 것 같아 갈 길은 멀고도 먼 것이었다. 그러나 조금씩 나아지는 스스로의 동작에 은근한 희열도 있었다.

텍사스 휴스턴 여름은 무더웠지만 날씨보다도 더 땀 흘리게 만드는 것은 벙커가 축구장처럼 크게 보이고 워터 해저드가 온통 바다같이 보이는가 하면 러프나 오비 사이에 페어웨이는 마치 논두렁같이 좁은 거였다.

필드에 따라 나서니 배워지는 게 많고 요령도 터득되곤 하였으나 라운드가 끝나고 식사까지 하고 나면 거의 하루를 잡아먹는 골프가 부담이 되어 자주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팀의 진행에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연습해야 되겠다는 마음은 한결같았다.

아침 안개가 아직 깔려있는 파란 잔디를 밟으며 코스마다 도전해오는 해저드들을 공략하는 골프는 가슴 벅차게 신이 나는 운동이기도 했다. 공이 잘 맞아주지 않아도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아침햇살을 가로지르며 코스를 마칠 때마다 다음코스를 향한 기대감에 설레기도 하는 골프는 심한 운동이 아니라서 음미 할 여유가 있어 좋았다.

초보자에게 특히 더하듯 벙커나 워터 해저드를 앞에 두면 그 옆의 훨씬 넓은 페어웨이는 안보이고 오로지 방해물만 크고 넓게 보여 겁먹은 샷은 에누리 없이 해저드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마치 불나방이 불을 향해 돌진하듯 인정사정 없는 듯 했다. 레인지 볼 연습장에서는 그런대로 맞아주던 공이 실전에서는 공 머리를 벗겨 또르르 구르는 탑볼이 되거나 아예 헛스윙이 되어 내지른 스윙 폼이 무안해지기도 하고 때때로 뒤땅을 쳐 따비 떼듯 잔디를 파 엎기도 한다. 그런 중 누가 자세를 고쳐주면 더 엉망이 되어 결국은 내 몸에 익은 ‘무 폼’으로 돌아가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큰 맘 먹고 한 훌 스윙이 공을 맞추지도 못하고 빗겨갈 때는 무안하고 계면쩍기 짝 없지만 동료들이 위로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나는 숨이 막히기도 했다.

휴스턴의 후덥지근한 날씨와 주말의 한나절을 앗아가는 골프를 핑계로 열심을 내지 않으면서도 마음은 늘 ‘탈 민폐’를 꿈꾸는 어중간한 욕심으로 몇 해를 넘기다가 오클라호마로 전근하게 되었다. 주말에 틈틈이 레인지 볼을 찾고 필드에 동료들을 따라 나서기도 했지만 혼자 골프장에 가 모르는 사람들 틈에 낄 자신은 없었다.

늘 강한 바람이 유별난 오클라호마로 전근 하면서 휴스턴의 습하고 무더운 날씨에서는 벗어났으나 골프는 여전히 코스마다 새로운 도전을 주는 운동이었다. 초조해 하고 마음이 급할수록 공이 나를 읽어 숲 속을 헤매게 하고 마음을 느긋하게 잡고 여유 있는 자세가 되면 공도 내편이 되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 투자에 인색한 자신의 골프 실력에 연연하기 보다는 초록과 바람이 신선한 야외에서 잔디를 밟으며 코스를 따라 게임을 즐기는 것으로 보완하자는 마음도 발동 해 골프에 죽자 사자 정력을 쏟는 동료들과는 게임이 안 되었다.

오클라호마 시 인근 골프장은 역시 평야 지대인 특성상 골프 코스들도 굴곡이 없는 반면 해저드들이 많고 러프가 험해 잃는 공이 많았다. 워터 해저드 앞에서는 헌 공으로 바꾸어 치면서 자신의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버릇으로 하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헌 공을 물속에 잃으면 새 공이 아니었기 다행이었다고 생각하였으니 뺨 한대 맞고 두 대 안 맞은걸 대견해 하는 꼴불견에 다름 아니었다.

매 샷 마다 헤드 커버를 벗겼다 씌었다 하는 골퍼들을 보면 그 정성에 감탄 하면서도 따분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동할 때마다 서로 부딪고 비벼대 상처투성이인 나의 소홀한 골프채 간수를 따끔하게 반성하는 계기도 된다. 드라이버 하나 값이 웬만한 아이언 한 세트 가격인 클럽을 애지중지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겠으나 대체적으로 골프를 제대로 치는 사람들은 클럽들도 늘 깨끗하였다.

샷마다 거리와 위치에 따라 재빨리 맞는 클럽을 골라잡을 실력이 안 되어 옆 사람 치는 클럽 번호를 훔쳐보기도 하는데 골프장에서는 친절한 사람들이 많아 거리를 또박또박 알려 줄 때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된다. 5번 아이언의 평균 거리가 160야드라지만 나의 5번 아이언 거리는 힘쓰는 정도에 따라 들쑥날쑥 이니 옆 사람의 친절한 거리정보를 십분 활용 못하는 속사정이 있다.

홀마다 몇 타를 쳤는지 까먹을 때가 있어 샷 마다 버튼을 누르는 타수 버튼을 사 허리에 꿰차고 다니기도 하였으나 그마저 누르는 걸 깜박 한다. 기록하는 팀 멤버가 타 수를 물어 올 때 멍하니 서서 필름을 꺼꾸로 돌려 보기도 하지만 안 되면 실수 안 하려고 한 개 더 붙여 보고한다. 대부분 그가 이미 알고 있다. 내 타수도 아리송한데 남의 타수를 훤히 꿰는 고수들이 경이롭다. 마치 바둑 고수가 판이 엎어져도 복기 하듯 골프 고수는 남의 타수를 꿰뚫어 보는 혜안이 있나 보다. 아무리 외진 러프나 나무 사이에 가려진 볼도 멀리서는 안보이겠거니 하고 라이가 고약하게 콕 박힌 공을 클럽 헤드로 살짝 움직이거나 아예 발로 슬쩍 공을 밀어내며 소위 ‘훝 웨지’를 하면 필시 누군가 나의 어색한 몸짓으로부터 그것을 감지한다고 보면 틀림없다. 그런 공은 마음이 켕겨 제대로 날아 가 주지 않는데 아마도 골프는 자기자신이 심판이 되어야 하는 유일한 운동이어서인지도 모른다. 숲 속에 들어간 공을 찾아 헤매다 유혹에 빠져 소위 ‘알까기’를 한 후에는 나머지 코스 내내 찜찜해진다.

오클라호마는 바람이 유독 심해 공이 바람을 탈 때도 있다. 그로 인해 훅이나 슬라이싱이 덜 할 때도 있어 하수는 덕을 보기도 한다.

골프에 열을 내지 않으면서도 시간을 너무 뺏긴다고 투덜대고, 잘 치는 사람들이 부러우면서도 그들이 쏟은 열정을 헤아리지 못하며, 골프보다 더 ‘생산적인’ 취미를 가져보겠다고 딴전 피다 미국 생활 20여 년 만에 놀랍게 발전한 고국에서 직장을 잡고 일을 시작한 나에게 골프는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왔다.

88 올림픽 폐막식 즈음 고국으로 취직이 되어 와 보니 서울을 떠날 때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전화기와 수세식 화장실이 집집마다 갖추어져 있었고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내던 자가용들로 동네 골목마다 차고 넘쳐 주차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일반 사람들한테는 인연이 없었던 골프가 중년층을 파고들어 골프를 쳐야 문화인 대열에 서는 듯 너도 나도 골프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고국의 눈부신 발전에 감회가 새롭고 어떤 것은 미국을 앞지르고 있는 것도 감탄이었지만 뒷골목의 하수도 냄새나 보도를 점거한 상점 좌판들로 인해 인도를 빼앗기고 사람들이 차도로 내려 서 걷는 등 화려하게 발전한 서울의 뒷길은 탈바꿈을 더디게 하고 있었다. 골프 역시 그 불균형의 탈을 못 벗고 있어 골프 대중화는 요원한 그림의 떡이기도 했다. 미국에서 열 번을 치고도 남을 라운드 비용을 한 번 치는데 써야 하는 고비용 스포츠가 되어 있었다.

88년 서울 올림픽 폐막식 즈음해서 화끈하게 변해버린 고국을 감탄할 사이도 없이, 골프를 못하면 임원의 품위 유지에 흠집이 될 수도 있는 여의도 LG 쌍둥이 빌딩에서 근무를 시작하며 나의 잘난 골프 전력이 까발려지는 날은 곧 다가왔다. LG는 한국 대기업 중에도 임직원간의 인화를 사훈으로 삼고 두 세 달에 한 번 꼴로 전 임원들이 LG소유의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 컨트리 클럽에 모여 단합대회 겸 친선 골프 토너먼트를 하는 터였다.

라운드 회동하는 날은 카풀로 3-4명이 동승하여 회사 소유 골프클럽에 모이는데 새벽 서너 시부터 부지런을 떨어야 아침 아홉시 티오프 타임에 대어 갈 수 있었다. 야간 기동 타격대도 아닌 터에 아직도 어두운 새벽을 뚫고 서울을 벗어나 동트기 전의 마을길을 달리면서 옆집 드나들 듯 쉽게 접하던 미국 골프장이 생각나는 골프 회동이었다.

정장 차림을 한 사람들이 골프백을 트렁크에 넣어가며 기사가 모는 차에 오르면서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묵묵히 골프장을 향하는 무리들은 그러나 한결같이 신이 나 있는 터였다. 다 들 오늘의 골프에 거는 짜릿한 흥분에 들뜬 데다 회사가 모든 경비를 부담 해 주는 골프 회동이니 이보다 더 즐거운 나들이가 어디 있으랴. 골프 실력이 미천하여 쪽 팔리기 십상인 나는 그리 들뜬 기분이 아닌데 그렇다고 전원 참여하는 단체 행사에 빠질 명분도 없어 이 호강을 덤덤해하는 ‘별난 놈’이 되어 있었다. 가까운 친구들과의 라운드도 아니고, 상하가 유별난 회사 조직을 필드에 옮겨 놓고 하는 행사이니 팀에 민폐를 끼칠까 염려되는 나에게 홀가분한 나들이는 아니었다. 때로는 ‘비나 억수같이 와 회동 계획이 취소되기를’ 바라기도 하는 구제 불능의 외인이 될 때도 있었다.

총무부서에서 새벽 배차로부터 시작 해 끝마무리 회식과 귀가까지 일체의 행사를 준비하고 두당 이삼백불 드는 비용을 임원들에게 베푸는 통 큰 오너의 배려에 들뜨지는 못할망정 재뿌리는 생각을 하는 나는 분명 미국서 골프를 등한히 하다 온 이단아임에 틀림없었다.

서울 근교의 웬만한 골프 클럽들은 소위 ‘드레스 코드’가 있어 미국에서처럼 골프복 차림이나 야외 나들이 차림으로 클럽에 들어서면 눈총을 받는데 곤지암 골프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넥타이는 꼭 매지 않아도 되지만 어느 정도의 정장을 요구하며 운동화를 신고 클럽을 들어서는 것은 골퍼의 매너가 아니었다. 서울의 골프장 현관은 한결같이 정장차림으로 차에서 내리는 골퍼들이 마치 결혼식장에 들어서는 하객들 같다. 프론트에 접수하고 탈의실을 거쳐 골프복을 갈아입고 필드 쪽으로 나가면 클럽 백이 실린 카트 옆에서 오늘의 캐디가 기다리고 있다.

골프 수준들이 한결같이 보통 아니다. 대기업 임원들은 대개가 몇 년씩의 해외 파견근무를 한 이력이 있어 타지에서의 무료함을 골프로 달랜 경험이 있는데다, 불과 이십 여 년 전에는 특이한 사람들이나 즐기는 운동으로 그 이름조차도 귀에 익지 않던 골프가 이제는 회사 부장급이거나 살만한 자영업자들이 골프장에 드나드는 것이 자연스러워 진 서울이었다. 골프 상식들도 대단하고 매너도 좋아 미국에서 골프 공부도 않고 눈썰미로 골프를 배운 나에게는 그들로부터 배울 점들이 많았다. 그러나 미국보다 곱절은 남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 서울에서 골프장이라고 예외일수는 없어 늘 조심스럽고 조금은 엄숙하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한국 골프장의 특색이었다.

'골프 천국’인 미국에서 살다 왔으니 골프는 제법 치겠거니 생각 했던 사람들이 죽을 쑤는 나의 행태에 ‘골프 천국 미국에서 골프를 등한 한 건 큰 실수’라고 대놓고 위로를 해 속으로 쓴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몇 해 전인가 서울에 사는 친구가 LA의 친척을 방문 해 2주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골프만 치다가 가면서 나에게 ‘한 풀고 간다’고 말했다. 골프 피가 이삼백불 드는 한국인데다 골프를 하기 위해 치르는 부킹 전쟁, 서울 시내를 벗어나기 위한 교통전쟁 등을 생각하면 한 풀고 간다는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회사에서 하는 임원 골프 회동은 티 오프 전에 모두 1번 홀 스타트 광장에 모여 단체 사진 촬영 후 팀 별로 티 오프를 하게 되는데 대체로 비슷한 실력을 묶어 조를 편성 해 라운드 한다. 고참 임원들이나 고수들 조는 후미에 나가게 되어 많은 눈이 지켜 보는 앞에서 티 샷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나에게는 아찔한 순간이기도 했다. 첫 샷이 엉망이 되어 사 오십 명 앞에서 어줍잖은 꼴을 연출할까 은근히 겁나기 때문이었다. 옛날에는 곤장을 대신 맞아주는 매품팔이가 있었다지만 이런 때 티샷품팔이가 있었으면 하는 한심한 생각도 해 본다.

이른 아침 골프장에 도착하여 으레 하듯 클럽 식당에서 우거지탕이나 해장국 등으로 식사를 해 배가 출출한 것도 아닌데 한국 골프장은 미국과 달리 두서너 홀마다 삶은 달걀, 떡, 국수 등 간식과 음료수를 판매 하는 소위 ‘그늘집’이라는 간이 쉼터가 있다. 앞 팀이 쉬어가니 우리 팀도 쉬어 갈 도리밖에 없고, 앉아 잠깐 쉬며 주전부리를 하게 된다. 그늘 집에 들를 때마다 잊지 않고 캐디들에게도 선심을 써야 매너 있는 골퍼가 된다. 딸 또래도 될 법한 젊은 캐디를 언니라고 부르는 것은 어디서 유래된 건지 모르겠으나 서울에서는 식당이나 노래방에서 가끔 듣는 호칭으로 캐디에게 별로 안 어울릴 것 같은 호칭인데 골퍼 아저씨들은 한결같이 ‘언니들도 뭐 좀 들어’다. 캐디들은 그늘 집 뒤 켠에 그들만의 테이블이 있는 모양인지 다들 뒤로 간다. 이렇게 캐디를 온종일 언니라고 부르다 집에 와 실수로 마누라를 그리 부르면 치매 1기라는 말도 있다. 모든 비용들은 그늘집과 전산망으로 연결된 프론트 프로샵 정산소로 연결이 되어 있어 최종 계산에 합산이 된다.

이곳에서도 고수들은 입이 무겁고 특별히 부탁 않는 한 참견하지 않는데 간혹 실력이 그만그만한 상사의 조언을 감내 해야 할 때도 있다. 어깨 힘 빼라든지 머리 들지 말라든지 하는 코치로 시작 되어 그린에서 홀 컵을 스쳐 내달리는 공을 발이나 클럽으로 막아주며 청하지도 않은 배려를 자행하는가 하면 홀 컵에서 두어 퍼터 길이의 먼 공에도 오케이 선심을 써대 고맙다 해야 할지 씁쓸해야 할지 헷갈린다. 캐디의 원래 임무 중 하나가 골퍼에게 조언을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골퍼의 기분도 헤아리는 고참 캐디들은 오히려 입이 무겁다. 조심스럽게 '머리를 드시는 것 같아요' 해주는 캐디는 고맙다.

그린에 붙어있는 벙커에서 두 세 번에 헤어나지 못하면 마음이 바빠지면서 옆 사람들이 오히려 민망해 한다. 그런 공은 벙커 안에서 이미 충분히 닦달을 받은 듯 그린에 올라서서도 숨이 가쁘다. 서너 번에 탈출 못하면 손으로 집어 던져 '핸드 웨지'하고플 정도지만 한 번도 그래 본적은 없다. 그러나 롱 퍼팅이 홀인을 멋있게 해 주면 좀 전에 있었던 벙커에서의 진땀이 일시에 가신다.

한국 사람들의 빨리빨리 근성은 마지막 퍼트까지 기다려 주는 게 드물다. 그러나 깃대가 홀 컵에 꼬치기 훨씬 전에 다음 홀로 떠나는 사람들을 서운해 할게 아니라 내 퍼팅이 사람들 발목을 잡을 정도로 실력이 있어야 된다. 골퍼의 예의 운운하는 것은 마음이 바쁜 서울 사람들에게 사치스런 얘기인지 모른다. 사장이 퍼팅 할 때는 모두 끝까지 남아 '나이스 인'을 소리 쳐 준다.

여의도 성모병원 옆 스크린 야외 레인지 볼에서 황당한 일도 벌어진다. 멀리 맞은 편 스크린 너머로 한 남자가 지나가며 이쪽을 향해 삿대질과 고성을 지르는데 들어보니 ‘골프채 휘두르는 이 XX들아 참 잘났다’는 야유의 말과 함께 걸쭉한 쌍욕도 곁들이는 것을 보니 낮술로 거나해진 취한이다. 급성장의 용트림 속에서 골프 문화가 요란하게 번지고는 있지만 아직 서민에게는 위화감을 주며, 터무니없이 비싼 골프 비용으로 ‘귀족운동’이라는 인식을 못 벗는 한국 골프의 현주소였다.

하루는 같이 라운드하던 멤버로부터 어처구니없는 ‘우정 어린’ 충고를 듣게 되었다. 골프 클럽을 함부로 다루어 흠집도 생기고 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미국에서 갖고 다니기에 전혀 문제가 없던 나의 클럽이었는데 명품 일색의 장비를 갖추고 골프를 하는 서울 골프 분위기에 무신경했던 나의 불찰이었다.

‘골프채가 좀 후지네요. 그런 클럽은 사용하는 당사자 체면뿐만 아니고 같이 치는 팀의 위상에까지 영향을 줍니다’

숨막히게 아찔한 충고였다. 동네 뒷산 하이킹에도 브랜드 네임 있는 등산 장비로 몸을 감고, 콧날까지 오뚝 선 마스크로 얼굴을 통째로 감싼 뒤 고급 산행 스틱까지 동원해가며 야산을 오르는 서울에서 월마트 채를, 그것도 이리저리 부딪쳐 피곤한 기색이 완연한 클럽들을 갖고 나타나는 나는 여지없는 비호감임에 틀림없었다. 채가 부실하면 캐디까지 마스터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는 그의 말에 아연실색한 나는 다음날로 골프 가게를 들려 서울에서의 체면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클럽을 부탁했다. 돈도 돈이지만 내 실력에 걸맞은 클럽이래야 했다.

18홀이 끝나면 채를 정리 해 주고 있는 캐디들에게 삼십불 정도의 캐디피를 현금으로 지불하게 되는데 깜박 하고 탈의실에서 현찰을 골프복 주머니에 챙겨 넣지 않았다가 난처해지기도 한다. 캐디는 어떤 관행인지 골프장 측과 고용관계가 묘해 프론트에서 정산이 안 되어 마지막 홀 후 개인별로 지불해야 한다. 캐디는 개인택시 기사처럼 별도의 개인별 사업체 비슷하다는데 캐디들이 골프장 흐름을 돕고 패대는 골퍼들의 잔디 보수에 철저하며 골퍼들과 일선에서 접하여 골프장 이미지를 살리므로 골프장에서는 없어서 안 될 존재라 한다.

라운드 중 땀 하나 안 흘렸어도 대중목욕탕과는 비교가 안 되는 고급 샤워장을 꼭 들리게 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미국에서는 없는 시설로 나에게는 오히려 번거로운 순서다. 탈의실을 거쳐 샤워실에 들어서면 그것은 단순한 샤워실이 아니고 그 옛날 자주 찾던 대중목욕탕은 저리 가랄 정도의 호화스런 사우나 목욕탕이다. 스무 명쯤은 들어 앉을만한 넓은 온탕과 냉탕이 대형 유리벽으로 트여있고 낮은 울타리가 정원을 끼고 있어 외부와 차단된 채 그 너머로 펼쳐지는 파노라마는 가히 일품인데 맨몸을 온탕에 묻고 감상하는 경치이니 더욱 유별나다. 한국 오니 이런 맛도 있구나 하는 짜릿함도 가지지만 다들 당연한 표정으로 파노라마를 만끽하는 사람들을 보며 간간이 머리를 스치는 장면이 있었다.

이십 년 전 아침 등교시간의 서울 시내버스였다. 버스가 출발하려 해도 아직 안으로 들어서지 못해 문에 매달린 채 안간힘 쓰는 학생 승객들을 여자 차장이 한아름 안은 채 운전수에게 신호하면 운전기사는 출발과 동시 큰 커브를 만들어 원심력으로 사람들을 버스 안으로 쓸어 담고 차장은 그 순간을 포착하여 문을 닫던 바로 그런 그 장면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20년 미국 생활로 고국의 변천을 건너 뛴 후 미국서도 못 가졌던 황홀한 분위기에 기죽은 오클라호마 촌놈의 향수 이었거나 고국이 너무 빨리 이리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옆 사람들처럼 나도 탕 속에서 자연스러워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룹 라운드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식당에 올라가 ‘시상식’ 겸 회식을 하는데 이때 될 수 있는 한 서열대로 앉아야 후환이 없다. 상무가 전무보다도 더 사장과 가까운 자리에 앉거나 전무가 부사장과 사장 사이에 끼어 앉다가는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티업 순서나 골프 성적순으로 착각했다가는 큰 낭패를 본다. 간혹 술이 거나해져 상사에게 입심 좋게 호기부리는 신참들을 보면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한다. 회사 일과 연계된 회식 자리는 그것이 노래방 자리라도 서열 순 안배가 철저한데 그 순서는 회식이 다 끝나고 헤어질 때까지 철저하다. 골퍼를 픽업하기 위해 대기하던 차들이 클럽 현관으로 들어오는 순서도 정확하다. 하루 온종일 골프클럽 기사 대기실에서 지낸 기사들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계급 순'으로 들어선다.

뒤풀이 회식 하며 챔피언 상이니 장타상이니 하는 트로피와 상품이 주어지는데 특히 꼴찌에서 두 번째에게 주는 ‘애석상’이라는 게 있어 그걸 받으며 조금은 쑥스러운 적이 있었지만 집에 가 시치미를 떼며 건네니 집사람은 상 탄 걸 놀라워하면서도 신나했다.

잘 가꾸어진 페어웨이와 주변 경치들, 그리고 적당히 부는 바람과 함께 공을 쫓다 보면 스코어에 연연하느라 귀중한 것들을 놓치는 나의 편협한 마음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라운드 자체를 즐기는 데는 고수 하수가 따로 없을 터이고, 주위 경치가 일급인 골프장 라운드 자체를 즐기지 못한다면 낭비라는 생각도 들었다. 애써 일구어 놓은 고국의 호화에 잠시 편승하는 호강도 미국에 돌아가면 없을 것이다. 어쩌다 사업상 용산 미 8군 골프장 회원권이 있는 퇴역 장군을 알게 되어 그의 호의로 부대 안의 골프장에 가 보니 미국 골프장과 골퍼들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어서 반가웠다. 그렇다고 나의 골프실력이 달라질 것은 아니었지만 두 개의 색다른 골프 분위기가 같은 서울에 공존하는 한국은 이래서 재미있다 싶었다.

'골프 천국’ 미국에서 어영부영 하다 '골프 마니아’ LG 군단으로 옮겨 와 닥달받던 나는 8년 후 골프가 회사의 관심사가 아닌듯한 대우㈜로 옮기게 되었다. 대체적으로 한국의 재벌회사들 분위기는 왕 회장의 성격과 깊은 관계가 있게 마련인데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대우의 왕회장은 출장 때 무게를 줄이기 위해 명함조차 얇은 종이로 만드는 실리적 성품에다 세계를 누비는데 시침보다는 분침을 쫒는 듯 바쁜 사람으로 골프는 너무 한가한 운동이 될 수도 있었다.

대우㈜에서는 나에게 미국에서 실수 했다고 애석해 하는 사람도 없었고, 골프채가 후지니 어쩌니 할 명품 마니아도 없었다. 회장의 남미 출장 때 따라갔다가 주말을 보고타에서 보내는 중 약속된 미팅이 차질이 생겨 회장 중심으로 급조된 골프 팀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그의 소박한 친근감과 나와 별반 차이 없어 보이는 골프실력에 편하고 즐거운 라운드를 했다. 다만 라운딩 후 '하급 임원 주제에 사양도 않고 회장이 권했다고 덥석 한 조가 되었다’고 일행 중 가신이 투덜거려 어안이 벙벙했었지만 이 또한 왕 회장이 임금인 재벌회사에서 가신의 눈에 상무 나부랭이가 왕회장과 골프 라운드의 한 조가 되는 것은 임금과 겸상하자고 대드는 대궐 문지기의 무례와 다름이 아니었다. 한국의 재벌회사에는 가신이 있게 마련이다.

골프는 LG와 대우 10여 년의 서울 생활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인연이 되어 3년여 눌러 앉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도 나에게 애증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열 달 가까이가 습한 여름 날씨인 자카르타의 골프는 그야말로 한증막에서 극기 훈련을 하는 양상으로, 라운드 중 땀에 절은 러닝 옷을 벗어 쥐어 짜 내는 해프닝까지 벌일 정도였다. 한여름, 마치 사우나에 들어 가 있듯 숨이 콱 막히는 더위에 18홀을 돌다 보면 내가 공을 때리는 게 아니고 공이 나를 연신 패대는 힘든 운동이었는데 교민들이 그토록 주말 골프장에 몰리는 것은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1998년 당시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경제권을 쥐고 있는 5%의 중국인들을 향한 국민감정이 폭발 해 자카르타 시내 곳곳에서 데모와 테러 방화가 극심한 가운데 중국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상점들이 공격을 받아 불에 타고 있었다. 주로 외국인 가족들이 입주해 있는 20층 아파트 옥상에 올라 가 보면 곳곳에 연기가 올라 마치 폭격 맞은 도시를 연상될 만큼 시국이 어수선했다. 입주 해 있는 아파트 건물이 습격당할지도 모른다는 루머 때문에 한 때는 호텔로 ‘피난’가 며칠 지내기도 했는데 사람들이 괄괄하다는 수마트라 섬에서는 선교사들이 살해당하기도 하는 등 살벌한 분위기에 중국인과 비슷해 보이는 한국 사람들도 몸을 사리는 그런 시절이었다.

그러나 유독 골프장만은 자체 보안이 철저해 교민들의 도피처 역할도 하고 있었다. 주중에도 한국 부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가운데 주말에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한국 부인들은 멀리서 보아도 단번에 식별이 가능한데 온 얼굴을 감싸고 눈만 빠끔하면 틀림없이 그들이었다. 골프는 해야겠고 얼굴은 태우지 말아야겠으니 이상한 패션이 되는 것은 서울이나 자카르타에서나 매 일반이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열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한인 주재원들의 골프 열은 대단하였으며 어떤 이는 36홀도 돌았다.

한때는 영사관에서 조그만 태극기를 교민들에게 나누어주며 차 뒤 좌석 유리창 밑에 놓아 데모군중과 마주칠 때 중국인으로 오해 받지 말라 해서 그 덕을 보는가 했더니 며칠 후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 시작했다. 운전하던 한인이나 뒷좌석에 앉아있던 한인이 데모군중에 끌려 나와 뭇매를 맞는 일이 가끔 일어난 것이었다. 알고 보니 당시 자카르타에는 많이 있던 한인 소유 제화/봉제공장에서 홀대 받은 현지인들이 데모 중 태극기를 보고는 오히려 분풀이를 한다는 얘기였다. 나를 포함 여러 교민들은 부지런히 태극기를 접어 감추었다.

자카르타 골프장은 서울과 달리 캐디들이 남자였는데 카트가 없는데다 날씨가 무더워 여자가 골프백을 메고 다니기엔 무리가 있어서였다. 규칙상 골퍼들은 캐디를 꼭 쓰게 되어 있어 캐디 짐을 덜어 주기 위해 필요한 클럽만을 챙겨 나서기도 하는데 하수는 손에 익은 채가 별로 없으니 가방이 꽉 차 왜소한 캐디에게는 더욱 미안하기도 했다.

자카르타의 골프장들은 안전관리가 잘 안되어 있어 코스마다 나이 어린 현지 아이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워터해저드마다 물속에서 머리만 내밀고 있다가 수장되는 공들을 지체 없이 자맥질 해 비닐봉지가 가득 차면 코스 간 길목 숲 속에 숨어 있다가 골퍼들에게 반값으로 파는 것이었다. 그들 ‘헤드 해저드’는 하수에게 큰 위협이 되곤 했는데 누군가가 이 아이들은 골퍼들의 샷 동작을 너무 잘 읽어 공에 얻어맞는 일이 전무하다고 얘기 해 줘 안심은 되었지만 여전히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공을 사 주지 않는 것만이 이들을 골프장에서 근절하는 길이라지만 공급과 수요가 균형을 이루는지 물 있는 곳엔 늘 한 두 명씩 물위에 머리만 동동 띄운 채 골퍼의 비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골프장에선가 페어웨이에 큰 동판 두 개가 발에 밟혀 자세히 보니 바로 그 자리에서 번개에 맞아 횡사한 골퍼의 이름과 날짜가 새겨져 있었다. 청명한 날씨가 순식간에 천둥번개 소나기로 돌변하기일쑤인 아열대 기후이고 보니 스윙 하던 골프채가 피뢰침으로 돌변한 참변이었다. 언젠가 홍콩 출장 중 주말 라운드를 하게 되었는데 천둥소리가 나니 즉시 야외 스피커로 모든 골퍼들을 철수시키던 것이 새삼 떠올랐다. 오비가 나거나 러프에 들어간 공은 숨어 있는 아이들을 생각 해 찾지 않는 게 배려 있는 골퍼라는 희한한 골프 매너의 자카르타 골프장 코스에는 천둥번개를 대비한 라우드 스피커를 볼 수가 없었다.

대리급 주재원도 낮은 인건비 덕에 도우미가 서넛이 있어 애보기 도우미, 부엌 도우미, 빨래 도우미, 심지어는 시장보기 도우미까지 두고 있는 터라 한국 부인들은 골프장을 자주 찾게 마련이었다. 파견근무 기간을 마치고 귀국할 때 제일 서운해 하는 것은 부인들이라는 말도 일리는 있었다. 한번은 교민 부인의 홀대에 자존심 상한 캐디가 골퍼의 따귀를 올려붙이는 일이 있자 입 소문이 퍼져 한인들이 일치단결, 그 골프장을 보이콧 한 적이 있었는데 운영에 압박을 받던 골프장 측이 영사관에 사정하여 경영 위기를 모면했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자존심 유별난 현지인들의 심사를 건드린 탓이었다. 어느 곳에서 무슨 일에 종사하던 일정시간에는 열 일 제치고 그들의 신이 있는 방향으로 무릎 꿇고 기도하는 그들의 신앙은 생소하지만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라운드 중 코스에서 그런 모습은 보지 못했다.

두서너 코스 걸러 티샷 박스 옆에는 아이들 서넛이 쪼르르 앉아 골퍼들이 샷을 날릴 때마다 ‘굿 샷!’ 합창을 해 대는데 기분이 업 된 골퍼 아저씨들이 몇 전씩 주는 팁을 타 내기 위함이었다. 잘 치면 골퍼를 위해, 잘 못 쳐 훜이나 슬라이싱이 나면 숲 속에 숨어 있다 공을 줍는 자기 동무들을 위해 굿샷 임에 틀림없으니 꼬마들의 합창은 늘 옳은 셈이었다.

회사 팔순 회장의 샷은 특이했다. 공을 티에 얹은 후 몇 번을 연속으로 반 스윙 하는 중 하나가 샷이 되며 그게 어느 스윙일지는 그만이 아는 골프였다. 공이 멀리는 못 가지만 항상 페어웨이 복판에 올려놓는 ‘또박또박’ 골프였다. 하수에게 딱 맞는 스타일이긴 하나 마음은 젊은 나에겐 먼 훗날 얘기라는 생각이었다. 풀 스윙이 겁나 반 스윙을 곧잘 하면서도 멀리 곧바로 보내고 싶어 안간힘 쓰는 나는 회장의 '시계추 스윙'을 보면서 느끼는 게 많았다.

자카르타에서 오렌지카운티 고향(?)으로 돌아 와 이제는 골프 천국에서 ‘실수’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골프장을 찾기 시작한 지 15년이 되었다. 그동안 다시 서울 나가 4년 정도 석유관계 일을 했지만 출장이 잦은데다 골프에 끌릴 기회가 드문 회사 분위기여서 미국 돌아가면 골프를 열심히 하리라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미국에 다시 돌아 온 나에게 골프는 여전히 죽마고우이나 연애할 만큼 뜨겁지 않은 것은 아마도 여전히 빤한 실력에다 나름대로 ‘할 일’들이 있어 골프를 우선순위에 놓지 않는 미지근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골프는 늘 가지고 있어야 될 필연으로 나의 은근한 보호자 같은 존재가 되었다. 언제라도 친구하고 싶으면 덥석 품어주는 골프장이 가까이 있고, 골프 칠만큼은 성한 내가 행운이라는 생각이다.

언제부터인가, 용기를 내 풀 스윙을 해 샷을 하기 시작했더니 맞을 때는 제법 잘 나가주어 옆 사람들로부터 칭찬도 듣는다. 그리고 골프를 즐기는 것은 스코어 순이 아니니 공에 매어 따라가느라 헉헉대지 말고 풀과 나무, 숲과 경치를 즐기면서, 요모조모로 나를 방해하는 해저드를 젖혀가는 만족감 속에서 지루하지 않은 시간을 자연과 함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진다.

나가는 교회에 시니어 멤버들 몇은 주 3회 골프를 매주 하는데 처음 몇 주 열심히 따라 다니다 도저히 감당 못해 요사이는 가끔 끼기로 했다. LA와 오렌지카운티 골프장마다 경쟁이 심해 시니어 우대권을 발행 하는데 요사이 이곳은 서울에서 말하는 대로 골프 천국이 되어 있다. 월 40여불 회비를 내면 매일 레인지 볼을 두서너 바켓씩 주고 주중 언제든지 라운드 하는데 카트 대여와 함께 25불이면 족하니 한 라운드에 이삼백불 하는 한국에 비하면 가히 골프천국이라 할만하다. 레인지 볼을 맘대로 치니 전에는 아까워 못하던 웨지샷이나 피칭 연습도 많이 할 수 있어 좋다. 짐이 되는 ‘캐디 언니’도 없고 배불리는 '그늘 집’도 없으며 물위에 동동 떠있는 ‘헤드 해저드’도 없다. 집에 가 샤워하면 될 것을 굳이 욕탕 속에 들어가 때 불릴 필요도 없고, 골프장을 향하는데 정장 안 해 좋다. 무엇보다도 필요 이상으로 남을 의식하며 하는 라운드가 아니고 나에게 최상의 시간을 만들 편안한 골프장 분위기가 좋다.

텍사스 A&M 대학촌, 골프장 그린 위에서 소풍 하다 골프장 관리 요원으로부터 망신 당한지 40년이 넘었는데 골프에 연연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골프를 등진 것도 아니면서 아직 타수 100을 많이 웃도는 나는 확실히 골프 지진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을 한스럽다거나 못 났다 생각 않고 골프를 평생 친구로 삼으려 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지금 이 순간도 미국에서 큰 ‘실수’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문병길 (문리대 수학과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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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Re: 구력 40년
on: November 28, 2016,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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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허 형님 술술 내려가는 글 쏨시 부럷네요,, 펏팅이 안 좋은 이유를 알게도 되고 ㅎㅎ 서울 생활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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