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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Topic: "7-4 공동 성명"도 미국 독립 기념일에 발표되었다.
teddy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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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7-4 공동 성명"도 미국 독립 기념일에 발표되었다.
on: July 4, 2017,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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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미사일만 미국 독립 기념일에 발사된 것은 아니다

오늘 아침 뉴스엔 온통 “북, 미국 독립기념일 (7월 4일) 에 맞춰 탄도 미사일 발사” 라는 제목의 기사가 “톱 스토리” 로 올라왔다.

북한에서는 특별 방송을 통해 그들이 지금까지 행한 어떤 실험 보다 더 강력한 미사일 (화성 14호) 발사에 성공했고 이 신형 미사일 발사 성공으로 그들은 숙원이었든 ICBM (대륙간 탄도 미사일) 제작과 발사 성공을 이룩했다고 대내외에 선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여러 나라들이 어떤 행사/시위들을 할때 특정 국가의 기념일을 택해서 시행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 나라에 암묵적 메세지를 보내는 역할을 한다.

제가 1974년 봄에 미국에 이민으로 왔는데, 온지 얼마되지 않아 인도 (India) 에서 최초의 핵 (미소짓는 부처님: Smiling Buddha) 실험이 성공했다고 발표했는데,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1974년 5월 18일)은 미국의 국군의 날 (Armed Forces Day: 3rd Saturday of May) 이었다. 그 당시 미국은인도와 적대 관계인 파키스탄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인도는 핵 폭탄 실험을 하면서 미국에 한방 날린 셈이다.

7월 4일이 미국에서는 독립 기념일이어서 일반 시민들에게 무슨 애국심을 높이는데는 별로 상관하지 않고, 한 여름에 하루를 바베큐를 구워 먹으며 즐기거나, 저녁에 불꽃 놀이를 직접하거나 참관하며 하루를 쉰다는데 더 역점을 둔다.

이러한 미국 독립 기념일이 우리 한겨레에게도 아주 중요한 하나의 이정표로 남아 있으니, 그것은 바로 1972년 7월 4일에 남북한 간의 최초의 통일을 지향하는 목표와 방법에 합의해서 전세계에 공표한 “7-4 공동 선언”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7-4 공동 성명이 나오게 된 연유에 관한 기술은 이 자리에서 다루지 않지만,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시는 “왜 하필 그 날로 정했는지?”에 간단히 설명드리려고 한다. 지금까지 제가 쓴 부분을 의미를 곰삭이며 읽으신 분들은 이미 대충 답을 얻으셨을 줄 믿습니다.

당시 미국과 중국이 서로 대화를 트는(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 1972년 2월) 국제 정세의 변화에 발맞춰 남북도 긴장을 완화할 필요에 따라 남한과 북한도 암투를 그만 두고 짝짝궁을 하기로 해서 생각보다 빨리 공동 성명을 내놓았는데 그 것도 바로 미국 독립 기념일에 발표한 것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하겠다.

내일이면 중대 발표를 한다고 예고가 나왔는데 놀랍게도 그당시 용감무쌍한 (?)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에 귀뜸도 해주지 않자, 속이 탄 당시 한국 주재 미국 CIA 책임자가 저희 (남북 회담 사무국) 사무 총장을 찾아와서 성명서 내역을 브리핑 받고 갔다. 정부의 공식적 대미 통보 이전에 CIA 지부장에게 귀뜸을 해준 사무총장은 얼마 후에 그일로 인해 해임당하셨다. (사무총장님께서 별세했다는 뉴스가 나왔기에 이 일을 부담감을 적게 느껴서 이제 쓸 수 있읍니다.)

7-4 공동 성명을 하필 그날로 잡아서 발표한 것은 남한과 북한 지도부가 해방 이후 처음으로 한 마음이되어 미국놈 ( 이 단어는 우리의 존경하는 박 정희 대통령이 위대한 (?) 미국 사람들을 즐겨히 부르는 말입니다.) 에게 한방 먹인 것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어쩌면 7-4 공동 성명을 통해서 대한민국이 미국에 대한 사실상의 독립 선언 (?) 을 감행한 것으로도 풀이할 수 있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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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ddy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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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Re: 북한 미사일만 미국 독립 기념일에 발사된 것은 아니다
on: July 5, 2017,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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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필자는 대학 입학 (1960)부터 미국에 이민 올 때 (1974) 까지 한국에서 14년을 생활했는데, 대학 학부와 대학원에서 학생으로, 언론사에서 기자 생활, 대기업에서는 그들이 하는 나쁜 짓을 보았다. 그러나, 남북 대화 사무국에서 일할 때는 조국 통일이라는 대의 명분을 위해 일했기 때문에 힘든지 모르고 열심히 일했고 앞에 말한 그 14년 가운데 가장 보람되고 자랑스런 시기로 지금까지 생각한다.

우선 필자가 어떻게 그곳에 일하게 됐는지를 설명드린다. 1971년 12월 어느날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집 (명륜동)에서 쉬는데 고등학교 후배이며 외교학과를 나온 이모군이 삼청동에 있는 남북 대화 사무국에 있는 정모 선배를 찾아 가 보라고 했다. 그 당시 이군은 청와대 행정관으로 감사원 관련 업무 관계로 삼청동으로 자주 가는 길에 정 선배에게 인사차 들렀드니 "영어를 잘하는 친구를 소개해 달라"고 해서 필자를 소개했다고 설명했다. 필자는 지금도 여러 학과가 있는 문리대 다닌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선후배 간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져 이부분을 삽입했읍니다.

남북간 협상도 특수 관계이기는 하지만 국가간의 협상이므로 외교학과 (국제정치학과) 대학원생이었든 필자에게는 현장 실습하는 기분이었다. 예비회담 때는 판문점을 수도 없이 드나들었고, 적십자 본회담 평양 회의 때 참석했는데 그 현장 목격은 매우 값진 경험이었다. 회담 대표는 어떤 의미에서 배우에 지나지 않았다. 우선 수석 대표 발언문도 사전에 작성된 것을 읽어 나가는 정도요, 서울의 사무국 지휘소에서 회담 진행 상황을 모니터 하고 있다가, 북측에서 어려운/까다로운 질문이 나오면 바로 무선 통신 담당자를 통해 쪽지 (지령)이 들어오면 회담 현장 통제원을 통해 수석 대표에게 전달이 되어 그 지령에 나온대로 대응하였다. 마찬 가지로 상대 쪽도 거의 같은 방식으로 회의를 운영하여 쪽지가 움직여 가는 방향을 확인하면 누구에게 실권이 있는지를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수석 대표가 이 범석씨 였는데 저의 결혼 때 주례를 봐 주셨고, 뒤에 외무부 장관을 지내셨는데 아깝게도 아웅산 사태로 순국하셨다. 필자는 다행히도 Harvard MBA 를 받은 다음 (1983년 6월) 에 서울에 가서 이 장관께 인사를 드릴 수 있은 것만으로도 큰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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