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퍼(gopher)는 두더지처럼 땅속에 굴을 파고 사는 동물인데 저에게는 속이 상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텃밭에 가지나 도마도 등을 심으면 이놈들은 참고 기다리고 있다가 열매가 무르익을 즈음 저보다 먼저 시식을 하고, 심지어는 밑동을 갉아 끊어 줄기를 통 채 굴속으로 끌고 들어 가 버리기도 합니다.

잔디에 수 없는 구멍을 내 잔디밭이 듬성듬성 빠진 머리처럼 되어 버리는데 잔디에 있는 지렁이를 먹기 위해 이런다 합니다. 한 번은 작심하고 구멍에 수도 호스를 박고 물을 틀어보았는데 한 시간이 넘도록 부어도 물이 솟는 구멍이 발견 안되어 이웃에게 물었더니 이들의 지하동굴이 사방으로 얽히고 설켜 물로 채우기는 불가 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고퍼 없애는 약을 구멍 입구 마다 놓아보아도 그 수는 늘 뿐이었습니다. 

고퍼는 공원에서 흔히 보는 다람쥐와 달라 밖에 나돌아 다니는 것을 본적이 없고, 도마도가 더 빨개지면 따 먹어야지 벼르다가 고퍼가 냉큼 가져 가 괘씸 하기 일쑤였는데 뜻밖의 후원자가 생겼습니다. 

동네에 주인 없는 고양이들이 가끔 나타나곤 합니다. 대체로 이 고양이들은 집 고양이와 달리 ‘애정 결핍’이 온몸에 배어 사람을 보는 눈에 겁과 독기가 있고 늘 경계하는 태도에 먹을 것을 던져줘도 쫓는 줄 알고 도망 쳐, 정 주기 힘든 ‘길 고양이’ 들입니다. ‘가출 고양이’인 이들을 동네에 독지가 부부가 있어 키티(어린 고양이)들은 트랩을 놓고 붙잡아 입양을 시킨다 하는데, 다 자란 고양이들은 애니멀 콘트롤 기관에 갖다 주어도 그대로 살 처분해 그저 방치하는 것 외에는 딴 도리가 없다 하였습니다. 

울타리가 없는 저의 집에 이런 불청객이 가끔 어슬렁거려 비호 감을 주곤 했는데 어느날 위와같은 장면을 본 후 마음을 달리 먹게 되었습니다.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고퍼 잡는걸 우연히 목격한 것입니다. 

고양이는 잔디밭에 뚫린 구멍에서 한걸음 물러나 자세를 낮추고 고퍼가 나타나기를 무려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리는 거였습니다. 저도 집 안에서 같이 ‘고퍼 사냥’하기로 작정하고 카메라 줌을 당긴 후 잔디위에서 언 자세로 시선을 꽂고 있는 고양이를 듬성듬성 카메라에 비디오로 담기 시작했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셔터를 눌러대는 저와 미동 않는 고양이가 고퍼는 반갑지 않겠지만 둘의 집요함은 대단했습니다. 

드디어 고양이는 굴 밖에 머리를 내민 고퍼 한 마리를 공략하는데 성공하여 바둥대는 고퍼를 입에 물고 의기양양하게 사라졌고 저 또한 이것을 비디오로 담는 ‘특종’을 거두었습니다. 고양이가 기다리다 달려 가 잡는 장면을 한꺼번에 잡지 못한 게 아쉽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둘 다 성공이라고 자찬합니다. 

며칠 전에 이 검은 고양이가 새끼 두 마리와 더불어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고퍼에게는 안됐지만 아마도 새끼들 먹이려고 그토록 끊기 있게 사냥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길 고양이가 잔디 도우미로 탈바꿈하는 날이었습니다.  문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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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전 비디오 파일을 정리하다 동영상이 있기에 동문 웹에 기고하려 했던 내용과 함께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