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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사라져도 사랑은 남는다 ‘어쩌면 해피엔딩’ 토니상 수상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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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byungk
(@moonbyun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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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사라져도 사랑은 남는다

‘어쩌면 해피엔딩’ 토니상 수상에 부쳐

 

대학로 한 소극장에서 ‘어쩌면 해피엔딩(Maybe Happy Ending)’을 마주했을 때를 기억한다. 관객석과 무대의 거리는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웠고, 조명은 어둡고 소박했으며 등장인물은 로봇 둘과 한 사람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극장이 끝난 뒤 문을 나서면서 나는 자꾸만 무언가를 뒤돌아보게 되었다. 아주 작고 조용한 무대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정을 다시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또 까맣게 잊고 살았다.

여러 해가 지난 지금, 그 이야기가 지구 반대편 브로드웨이에서 찬란한 조명을 받았다. ‘어쩌면 해피엔딩’이 2025년 토니상에서 작품상을 포함한 6개 부문을 휩쓸었다는 소식은 단순한 수상의 의미를 넘어선다. 브로드웨이라는 세계 공연예술의 심장부에서 한국 창작 뮤지컬이 진심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하나의 작품이 이룬 쾌거를 넘어 한국 콘텐츠가 서사와 감성으로 세계 중심에 들어섰다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 뮤지컬은 가까운 미래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다. 더 이상 필요 없어 버려진 구형 로봇 올리버와 클레어는 오래된 낡은 아파트의 복도에서 마주친다. 감정 모듈(Module)이 장착된 이 로봇들은 기능이 퇴화되고 기억 저장 용량이 제한된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점점 가까워지고, 결국 사랑하게 된다. 인간으로 치면 노쇠한 노년기에 접어든 이들의 사랑은 유효 기간이 짧다. 기억은 삭제되고 기능은 서서히 멈춰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감정은 남아있다. 결국 그들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이별을 선택한다.

‘기억이 사라져도 감정은 남는다’라는 이 설정은 단지 SF적 상상력의 결과물이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를 통해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되묻는다. 기술의 진보 속에서 인간성은 점점 퇴색하고, 감정의 농도는 얕아지는 그런 시대에 로봇이라는 비인간적 존재가 사랑의 본질을 끌어안고 서 있는 모습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작품 속 한 장면이 떠오른다. 클레어가 자신의 기능이 종료될 것임을 감지하고 조용히 올리버의 곁을 떠나려 할 때, 올리버는 망가진 관절을 이끌고 그녀의 뒤를 따라간다. 미처 하지 못한 말, 붙잡지 못한 마음, 완전하지 않은 사랑. 그 모든 결핍 속에서도 사랑은 존재하고 있었다. 관객석에서는 울음과 웃음이 뒤섞여 나왔다. 그 날 이후로 내게 ‘사랑’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조금 바뀌게 되었다.

‘어쩌면 해피엔딩’이 미국 공연계의 중심에서 이토록 뜨겁게 환영받은 것은 단지 뮤지컬의 기술적 완성도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이 세계인의 가슴에 닿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감정의 결이 매우 섬세하면서도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상실, 존재와 소멸이라는 주제는 언어나 국경, 세대와 문화를 초월해 모든 인간이 공감할 수 있지 않은가. 특히 기억의 유한성 속에서도 감정은 끝나지 않는다는 메시지는 감정이 디지털화되고 관계가 일회용처럼 소비되는 이 시대에 묵직한 울림을 준다.

이번 토니상 수상은 대한민국이 그동안 쌓아온 K-콘텐츠의 축적이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그레미상(1993 조수미), 오스카상(2020 〈기생충〉), 에미상(2022 〈오징어 게임〉)에 이어 토니상까지 수상했다. 대한민국은 이제 미국 4대 시상식을 모두 경험한 나라가 되었다. 이는 단순한 콘텐츠 소비국을 넘어, ‘창작국가’로서의 위상을 입증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어쩌면 해피엔딩’은 수출용 포맷이나 겉핥기 문화가 아닌, ‘진심 어린 이야기’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그러나 이 한 편의 성공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 작품이 보여준 진짜 가능성은 기술보다 서사, 트렌드보다 감정이라는 창작의 본질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외연적 구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계의 보편적 감정을 한국의 정서로 다시 써내는 일이다. 그것이 한국 콘텐츠가 진정으로 세계와 대화하는 길이다.

뮤지컬, 웹툰, 게임, 문학, XR 공연 등으로 확장되는 K-콘텐츠는 지금 새로운 문 앞에 서 있다. 그 문을 여는 열쇠는 단순한 창의성만이 아니라, 잊힌 감정을 다시 꺼내는 힘, 그리고 그 감정을 진심으로 전달하려는 용기다.

마지막 장면은 조용히 묻는다. “기억은 사라졌지만, 그 감정은 여전히 나에게 남아 있다.” 우리가 끝났다고 믿었던 감정 속에서도 여전히 사랑을 기억할 수 있을까.

조심스럽고 섬세한 제목, ‘어쩌면’이라는 말 속에는 확신보다 희망이, 선언보다 기다림이 담겨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이건 정말 ‘어쩌면 해피엔딩’일지도 모른다고. 이어서 올리버와 클레어가 노래한다. ‘끝까지 끝은 아니다’

                                                                                   남가주 The Town News 1582호 6-23-25 타운뉴스 안창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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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길 옮김

 
 
Posted : 28/06/2025 10:34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