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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지갑은 자식의 실력을 만든다.” 이 말처럼 씁쓸한 진실이 또 있을까.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Meritocracy)’의 신화를 믿도록 교육받는다. 그러나 정작 현실은 그 신화를 정교하게 포장한 ‘신귀족제’에 가깝다. 능력은 점점 세습되고, 엘리트는 이전보다 더 은밀하고 견고하게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능력주의는 원래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발상이었다. 혈통이나 출신이 아닌, 오직 개인의 실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주어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말만 들으면 정의롭고 민주적인 제도처럼 보인다. 1958년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이 용어를 처음 썼을 때도, 그는 능력주의가 결국 또 다른 불평등 체제가 될 것을 경고하는 풍자적 의도로 사용했다. 역설적이게도 이 단어는 이제 이상적 가치로 받아들여진다.
한국 사회는 특히 이 능력주의 담론에 민감하다. 수능, 내신, 스펙, 토익, 공무원 시험 등 온갖 평가 시스템은 마치 공정함의 상징처럼 기능해왔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표면적으로는 ‘누구에게나 열린 기회’를 강조하지만, 기회의 출발선은 애초에 같지 않다.
부유층 자녀들은 유치원부터 다른 길을 걷는다. 강남의 사립 유치원, 해외 어학캠프, 스카이캐슬식 대입 컨설팅, 유학, 인턴, 경력관리까지 부모가 깔아주는 레일 위를 달린다. 반면, 지방의 중산층 이하 자녀는 여전히 학원비 걱정에 알바를 병행하며 공부한다. 결국 시험은 능력을 재는 게 아니라, 부모의 시간과 자본을 얼마나 물려받았는지를 측정하는 잣대가 되었다. 능력주의가 아니라 ‘능력의 세습주의’인 셈이다.
엘리트주의(Elitism)는 말 그대로 소수의 엘리트가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작한다. 고대 아테네의 귀족정치(Aristocracy)나 중세 유럽의 세습 귀족제, 조선시대 양반층의 ‘문벌 사회’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현대에도 엘리트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방식이 예쁘게 포장되고 세련되게 바뀌었을 뿐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명문대 출신 네트워크는 ‘학벌 엘리트주의’의 대표적 사례다. 특정 대학 출신이 고위 관료, 대기업 임원, 언론사 간부, 법조계 요직을 독점하는 구조는 이미 익숙하다. 사법연수원 수석이 대형 로펌으로, 카이스트 박사가 대기업 연구소로, 서울대 출신이 청와대 비서관으로 자연스럽게 진출하는 현실은, ‘능력의 결과’라기보다는 ‘출신의 연속성’에 가깝다.
물론 이들은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 실력은 개인이 혼자 획득한 것이 아니다. 사회적 자본, 정보력, 네트워크가 종합된 ‘배경 능력’의 결과인 것이다. 결국 엘리트주의는 출신 배경을 기반으로 한 공고한 권력 세습 체제이며, 외부인이 뚫기 어려운 벽으로 작동한다.
문제는 능력주의와 엘리트주의, 이 둘이 결합할 때 더욱 강력한 세습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겉으로는 공정한 경쟁을 강조하며 능력주의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엘리트주의적 카르텔이 그것을 조종한다. ‘공정 코스프레’는 수단일 뿐, 결과는 이미 정해진 게임이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영국의 옥스브리지(Oxbridge)와 미국의 아이비리그를 들 수 있다. 하버드대학 신입생의 약 43%가 졸업생, 기부자, 교수 자녀 등의 ‘우선권 대상자’라는 통계가 있다. 이는 명문대 입학이 이미 세습화되었음을 보여준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SKY 입학생 중 상당수가 강남 3구 출신이며, 교육에 쏟아 붓는 사교육비가 매년 신기록을 경신한다. 이제 능력주의는 능력을 측정하는 제도가 아니라, 능력을 만들어주는 자원을 얼마나 보유했는가를 증명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이처럼 능력주의와 엘리트주의가 손을 잡을 때 사회는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걷어차게 된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통계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지고, 사회는 점점 더 고착화된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일까. 첫째, 기회의 평등을 진정성 있게 보장해야 한다. 사교육 시장을 제한하고, 공교육의 질을 끌어올리며, 입시 구조를 개선하는 일은 단기적으로는 어렵지만 중장기적으로 필수적이다. 둘째, 사회적 자본의 독점을 깨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예컨대 국회, 언론, 사법부 등 공공성이 강한 분야에서는 ‘출신 다양성 지수’를 평가 지표로 삼는 방안도 고민해볼 수 있다. 셋째, 성과 중심 사회의 정의 개념을 재정의해야 한다. 노력과 결과 사이의 격차가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먼저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능력주의는 한때 우리가 꿈꾸던 이상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점차 엘리트주의의 도구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밖으로는 공정을 내세우면서 안에서는 은밀한 세습이 이뤄지고 있다. 능력이 진짜 능력일 수 있으려면, 출발선이 먼저 평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능력주의는 겉만 그럴듯하게 변질된 또 다른 신분제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불평등이 아니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것이 문제다. 자칫하면 능력주의가 엘리트주의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 되어 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기우(杞憂)이기를 바란다.
타운뉴스 2025.8 안창해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