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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필의 미국인 이야기
쓰고 떠나는 삶의 미학
얼마 전 LA 한인타운의 한 한식당에 60여 명의 동문들이 모였다. 생일을 맞아 마련된 자리였지만, 참석 인원만큼은 웬만한 동창회 행사 못지않았다. 그 주인공은 임낙균(약대 64) 전 남가주 총동창회장. 60년대 학번으로는 처음이자 최연소 회장을 지낸 분이다.
그날의 초대장은 조금 남달랐다. “화환이나 축의금은 절대 사절. 아무것도 가져오지 마세요. 대신 돌아가실 때 제가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그의 당부에 혹시나 싶어 봉투를 챙겨간 사람들도 막상 현장을 보고는 머쓱해졌다.
임 동문은 평소 자신을 ‘쓰죽회’ 골수회원이라고 소개한다. ‘쓰고 죽자’의 줄임말로, 주변에서는 그를 ‘쓰 회장’이라 부른다. 그는 실제로 매년 1만 달러를 모교 서울대학교에 장학금으로 기부하고 있다. “앞으로 10년 더 살면 10만 달러, 20년 더 살면 20만 달러가 추가로 모교에 간다”는 그의 말에는 기부가 아니라 ‘삶의 계획’이 담겨 있다.
‘쓰죽회’를 영어로 옮기면 ‘Die Broke’. 말 그대로 ‘빈털터리로 죽는다’는 뜻이다. 25년 전 미국에서 한 재무설계사가 이와 같은 제목의 책을 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18주 동안 오르며, 돈의 쓰임에 대한 새로운 철학을 제시한 책이었다.
저자는 스티븐 폴란(Stephen Pollan). 부동산 개발과 벤처 투자로 큰돈을 벌었던 그는 어느 날 말기 폐암 진단을 받는다. 평생 돈을 모으는 데만 몰두해 정작 써보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해야 한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다. ‘젠장, 뭐 이런 삶이 다 있어.’
그런데 뜻밖에 반전이 일어난다. 세컨드 오피니언 결과 ‘오진’이었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돈은 모으는 게 아니라 쓰는 것’이라는 단순하지만 깊은 진리였다. 그 경험이 바로 ‘다이 브로크’라는 개념을 낳았다.
사실 이 생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도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다이 브로크’는 그보다 한층 적극적이다. 어차피 빈손으로 갈 인생이라면, 미련 없이 쓰고 가라는 뜻이다.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 같은 세계 최고 부자들도 이미 ‘다이 브로크’를 실천 중이다. 두 사람은 사후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비영리 자선재단에 기부하기로 했다. 결국 그들의 부는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밝히는 등불로 남는다.
요즘 들어 ‘쓰고 죽자’는 철학에 공감하는 7080세대들이 늘고 있다. ‘쓰죽회’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만들어 평생 쌓은 재산과 재능을 나누며 인생의 후반전을 풍요롭게 살아가고 있다. ‘쓰는 것’은 단지 돈을 소비하는 행위가 아니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다음 세대와 나누는 일이며, 사람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삶의 방식이다.
12월은 송년 모임이 줄을 잇는 계절이다. 100세 시대를 사는 지금, 물질보다 더 중요한 자산은 함께 웃고 나눌 친구와 가족, 그리고 신뢰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쌓아도 자린고비나 스쿠루지라는 딱지가 붙는다면 누가 곁을 내어주겠는가.
돈은 결국 ‘쓰기 위해 버는 것’이다. 번 돈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면, 평생의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임낙균 동문은 그것을 이미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 ‘다이 브로크’는 단순한 재테크 철학이 아니라, 나눔으로 완성되는 인생의 품격이다.
편집고문 박용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