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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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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itor mulid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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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빨리

대한민국은 바쁘다. 도로에서, 식당에서, 은행에서, 관공서에서 너나 할 것 없이 바쁘다. 어딜 가나 바쁘게 움직인다. 전철역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거의 뛰다시피 걷는다. 천천히 여유있게 걸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나 혼자 그렇게 걷도록 두지 않는다. 남들이 빨리 가니까 덩달아 나도 빨리 간다는 얘기가 아니다. 천천히 걷다가는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혀서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할 수도 있다.

앞에서 마주 보고 오는 사람은 내가 비키지 않으면 그냥 부딪히고 지나간다. 뒤에서 오는 사람도 나를 밀쳐내고 앞으로 간다. 부딪히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밀치거나 부딪히고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어제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났다. 계단으로 오르려다가 그 옆에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걸 보고 그쪽으로 가기 위해 방향을 틀다가 뒤에서 오던 사람과 부딪혔다. 부딪히는 순간 미안하다는 말이 나왔다. 나로 인해 빚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도 거의 동시에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마 미국에서 온 사람이 아닐까 싶다.

문을 여닫을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문을 열면 그대로 밀고 들어온다. 백화점 문은 엄청나게 무겁다. 내 뒤에 오는 사람들이 그 무거운 문에 부딪혀 다칠까봐 뒷사람이 올 때까지 잡고 있었다. 그 사람은 문을 잡으려 하지 않고 내가 잡고 있는 사이에 내 앞을 지나간다. 앞에서 오던 사람도 내가 잡고 있는 사이에 그냥 문 안으로 들어온다. 아니 몸을 밀어 넣는다. 그 누구도 고맙다고 하지 않는다. 벌받는 기분으로 한참을 문을 붙잡고 서 있어야 했다.

지난 토요일 중고교 동창생, 9명이 만나 한강변을 걸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두셋이 짝을 지어 이야기하며 걸었다. 이때만큼은 천천히 여유있게 걷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편안히 걷기는 어려웠다. 뒤에서 빠른 걸음으로 오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숨소리가 내 걸음을 빠르게 했고, 아무리 빨리 걸어도 그들 앞에서 걷기는 힘들었다. 몇 번인가 뒤에 오는 사람이 앞서 가도록 길가에 잠시 서있어야 했다. 한 40분 남짓 걷고 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지하의 커다란 식당이었다. 워낙 큰 식당이라 넓이가 얼마나 될지 궁금했다. 종업원에게 물으니 800평 정도 된다고 했다. 테이블에 장착된 태블릿 화면을 보고 음식을 주문하자마자 종업원들이 음식을 들고와 상을 차렸다. 그리고 불판에 고기를 올리고 재빠른 손놀림으로 굽기 시작했다. 잘 구운 후 먹기 좋게 잘라 불판 가장자리에 놓았다. 우리는 먹기 시작했다. 종업원은 고기가 익어가는 정도에 맞춰 신속하게 뒤집었고, 그 동작은 아주 리드미칼하면서도 경쾌했다. 먹는 사람들의 속도에 맞춰 적당하게 고기를 사람들의 앞 접시에 옮겨 주었다. 그 넓은 식당의 테이블마다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잘 훈련된 병사들의 움직임을 보는 듯했다. 종업원과 손님들의 손발이 척척 맞는다. '빨리빨리'가 몸에 밴 우리들의 익숙한 모습을 보면서 고향에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바쁘게 살고 있구나.'

부지런히 먹고 마시고 일어나 그 식당의 한 편에 마련된 장소로 이동했다. 종업원이 어떻게 차를 주문하고 팝콘을 꺼내다 먹을 수 있는지 알기 쉽게 이용법을 설명해주었다. 팝콘은 무제한 프리라고 했다. 그가 알려준대로 스크린의 그림을 보고 클릭해 주문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주말 아침식사를 했던 '오리지널 팬 케이크 하우스'에서의 느려터진 종업원들의 응대와 불친절한 서비스가 떠올랐다. 음식을 시키고 얼마나 오래 기다렸던가. 바쁘다고 손님을 함부로 대하는 종업원들의 태도는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800평이 넘는 커다란 식당에서 주문하자마자 신속하게 상을 차리고 웃으며 손님을 대하는 친절한 종업원의 자세와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손님들의 태도는 칭찬할만한 일이다. 역시 대한민국이 최고다.

지하철역에서 바쁘게 걸으면서 아까 잠시 느꼈던 서글픈 감정이 사라졌다. 우리의 '빨리빨리 문화'를 조급증과 성급함의 원인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빨리빨리는 근면성과 효율성의 상징이 아니었던가? 게으름과 나태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일을 처리하고 부지런히 일과를 추진하던 '빨리빨리'가 대한민국 성장의 원동력이었다는 사실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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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주지역의 주간지 타운뉴스 2025.5.19, 1577호  발행인 안창해 칼럼

'빨리빨리'제하의 글을 옮깁니다.  옮긴이:문병길

 
Posted : 22/05/2025 10:12 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