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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우연은 없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다. 장소는 무제한 고기 뷔페식당이었다. 고기를 무제한으로 먹는다는 기대보다는 친구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소소한 기쁨이 앞섰다.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둘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종업원이 말했다. “지금부터 90분입니다. 시간 지나면 나가셔야 해요.” 마치 타이머를 켜놓은 것처럼 말하는 말투에 순간 당황스러웠다. 한 사람은 아직 도착도 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이미 시간에 쫓기는 손님이 되어 있었다.
밥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아무리 무제한 뷔페라고는 해도 식사에 앞서 사람을 몰아붙이는 그 말투가 썩 내키지 않았다. 잠시 후 도착한 친구는 얘기를 듣더니 자리에 앉기도 전에 “그냥 나가자”고 했다. 속이 후련했다. 우리 셋은 인근 식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익숙한 맛과 편안한 분위기의 가끔 찾는 식당이다. 삼삼오오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기 좋은 공간. 거기서 우리는 드디어 마음 놓고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 누님이 들어왔다. 두어 달 전에 다른 식당에서 친구와 식사하던 누님을 만나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니 “곧 동생도 올 거예요.”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편이 울렸다. 그날, 누님과 다른 테이블에 앉았던 친구가 내 테이블의 식사비까지 계산했기에 언젠가 신세 갚을 날을 기다렸었다. 마침 잘됐다. 또 친구에게 줄 선물도 차 안에 있었다. 바쁜 일상 속에 몇 번이나 마음만 있었던 일이었다. 선물을 차에 싣고도 전달할 틈이 없었다. 마주친 이 우연 같은 만남. 아니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친구는 내 초등학교 동창이다. 6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늘 맨 뒷자리에 앉아 있었던 조용한 아이였다. 키가 컸고, 말수가 적었던 아이. 나는 그와 그리 친하게 지낸 기억이 없다. 그냥 지나간 인연이었는데 놀랍게도 수십 년이 지나 LA에서 다시 만났다. 그것도 또 다른 초등학교 동창이 운영하는 치과에서. 그 두 사람은 같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서로가 같은 학교 출신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내가 먼저 그를 알아보는 바람에 셋이 모두 동창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거기서부터 인연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 후로 친구는 해마다 타운뉴스 시무식에 시루떡을 한 말씩 보내왔다. 직접 만든 식혜 두 통을 곁들여서. 처음에는 한두 해 하다가 그칠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덧 20년이 넘었다. 빠짐없이, 변함없이, 해마다 이어져온 정성. 나는 매번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고맙다는 인사도, 답례도 제대로 못했던 해가 더 많았다. 이번에도 그랬다. 바쁘다는 핑계로, 선물은 차에 실어둔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런데 그날, 그 시간, 그 자리에서 친구를 마주했다. 밥을 먹던 중 식당 문이 열리고 친구가 들어서자마자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친구에게 말했다. “잠깐 나가자. 줄 게 있어.” 그리고는 곧장 차로 가서 그 선물을 전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 마음에 품고 있기만 해도 이뤄진다. 만일 우리가 처음 식당에서 언짢은 기분 그대로 그냥 먹고 말았더라면 친구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차에 실려 있던 선물도 그대로 남았을 것이고, 고마운 마음도 또 묵히고 말았을 것이다.
불쾌한 식당 종업원의 말투 하나가 우리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고, 이 식당으로 방향을 틀게 만들었으며, 그곳에서 친구를 다시 만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에 품고 있던 인사를 전할 기회를 주었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세상이란 게 다 우연의 연속이야.’ 하지만 나는 믿는다. 우연처럼 보이는 모든 만남, 모든 상황에는 분명한 맥락이 있고, 흐름이 있다. 그 순간이 아니면 도달할 수 없는 필연이 있다. 이는 누군가의 의도가 아니라, 세상이 보내는 배려인지도 모르겠다. 인연이 엇갈리지 않도록, 감정이 흘러가지 않도록, 감사가 유실되지 않도록 조율해주는 어떤 손길.
그 손길은 때때로 불쾌한 말투로, 때로는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혹은 한 사람의 뒷모습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 삶을 살짝 바꿔놓는다. 식당의 작은 식탁처럼 오랜 인연을 다시 묶어주는 자리를 마련해준다.
인생의 어느 골목길에서 예기치 않은 사람이 손을 흔들며 다가올 때, 우리는 말한다. ‘우연이야.’ 그러나 그 뒤에 숨겨진 수많은 선택과 길의 갈림, 시간들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우연을 가장한 인연이자 운명이며 삶이 보낸 작고 조용한 신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신호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만이 삶의 진짜 의미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
타운뉴스 2025.6 안창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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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사람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해변가의 세월 품은 자갈들도 유심한 작가의 눈에 띄어
모래 먼지를 털고 요모조모 살펴지면 의미를 갖게 되고 보석 같은 비장품이 됩니다.
안창해 회장은 제가 몇 년 전 오렌지 카운티 부에나 팍 시의 랄프 클락 공원에서 주로 씨니어
분들의 아침 체조가 인연이 되어 가까이 지내고 있는 칠 학년 초입분으로 주로 팔 학년 대인
체조 멤버 중엔 '젊은 씨니어'입니다만 가주지역에서 많은 독자들에게 호응을 받으며 발행중인
'타운뉴스' 주간지의 칼럼 발행인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칼럼을 접할 때마다 마치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자갈 중 안창해 칼럼의 눈에
띄어 보석같이 빤짝이며 쉽고 정곡을 때리는 군살 없는 글로 그 일상 중 하나하나가 제 값을
찾는 일상을 읽으면서 이 칼럼을 저희 문리대 웹에 기꺼 히 올리고 있습니다.
옮긴이 문병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