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unity
https://www.youtube.com/watch?v=QvzMcgkfdco&t=1s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역사적 진실이 한 작가의 몰이해와 해당국가의 역사적 배경을 간과한 노벨
문학상의 안배 탓으로 가려지면 그가 속한 국가의 근간이 흔들릴수도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며 이점을 부각시킨 정동수 목사님의 설교가 있어 옮겼습니다.
위의 인터넷 링크를 더블 클릭하면 광고가 몇초간 뜨는데 우측 하단의 'skip'을 클릭
하면 정동수 목사의 방송내용이 시작되며, 방송 말미에 우측 상단의 X 를 클릭하면
불필요한 여타 방송에서 벗어납니다.
_____________________
위 유투브 방송 내용과 계시자의 첨언은 mulidae.com의 사고와 무관합니다.
한강의 작품을 정목사님 견해와는 다른 종교적 관점에서 본 시각도 있어 이곳에 올립니다. 한강의 소설을 많이 읽지는 못했습니다만 작가의 섬세한 문학적 표술에는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보석같은섬광이 내 뿜습니다. 한강의 표현력은 그의 어떤 적나나하거나 직설적 표현도 마치 마술을 펴듯 미학적으로 승화시키며 읽는이를 빨아들이는 마력이 있습니다. 이런 위력을 무기로 외설적이고 엽기적인 소설 흐름을 문학이라는 큰 배를 타고 파도를 가르며 달리고는 있지만 신성과 인성의 유일한 복합체로 스스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인 성경의 어느 내용과 괴를 같이 할 수도 있다는 유추는 무리가 아닌가 합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은 때아닌 이데올로기 혼란에 빠진 작금의 한반도에 떨어진 무거운 숙제인것 같슴니다.
문병길
끝으로 한강작가의 삼촌인, 대전 '행복이 넘치는 교회' 한충원 목사의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 (2024.11.7)를 아래에 첨부합니다.
한강작가의 글에서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 한강의 살얼음판같이 굳어있는 인성을 느낍니다. 소설 페이지마다 마술같은 표현의 전개에 읽는이는 머리를 파고드는 자극을 주지만 읽은 후 가슴에 남는것은 상실과 허탈의 빈 공간입니다.
한강작가가 삼촌의 편지로 북극의 빙하처럼 얼어붙은 한강의 가슴이 녹아 내려, 정녕 ‘한강의 봄’ 찾아 주기를!
문병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삼촌의 편지는 매우 긴 장문의 편지(total 46 pages)여서 본문 전체를 이곳에 싣는 대신 그 화일의 링크를 아래에 걸어 놓았습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한 후 우측 상단에 뜨는 화일을 다시 클릭하면 편지가 뜹니다. 아래 링크가 되지 않으면 이토픽의 맨 아래에 그 일부를 카피 해 놓았으며 편지 전부를 보시려면 yutube에서 타이틀을 찾아 시청 하실것을 권해 드립니다.
----------------------------------------------------------------------------
타운뉴스 1551호 11/18/24 발행인 안창해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카톡이 쉴 새 없이 울린다. 카톡 카톡...... 한강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어떤 모임에서 한 친구의 얘기를 듣고 있을 때였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와, 한강이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네!” 친구는 얘기를 중단하고 다른 친구들과 함께 박수를 쳤다. 정말 축하할 일이다. 대한민국의 경사다.
한강을 잘 모른다. 그녀가 몇 번인가 상을 받을 때마 다 뉴스를 들었고, 얼핏 그녀의 단편들을 몇 편 읽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의 작품들이 매우 독특했다고 느꼈던 기억이 떠올랐다.
부랴부랴 그녀에 대한 기록들을 찾아보았다. 그녀가 풍문여고를 졸업했다는 사실에서 먼 옛날의 기억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 풍문여고가 주최하는 백일장에 참가한적이 있었다. 그 당시 백일장은 교육청이나 교육위원회가 주최하는데 일개 학교가 주최하는 백일장은 흔치 않던 시절이다. 지금 생각해보 면 풍문여고가 그만큼 글짓기, 문학에 관심이 많은 학교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이러한 영향이 풍문여고를 다녔던 한강에게도 영향을 적지 않게 주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시인이며 가수인 박인희, 수녀이며 시인인 이 해인이 이 학교 출신이라는 사실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때 ‘은행잎 합창’이라는 풍문여고 문예반 학생들이 만든 문예지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교명인 ‘풍문(豊文)’은 배움을 풍성하게 한다는 의미와 학교설립자인 민덕기씨가 자신의 증조모‘안유풍’ 의 유지를 받든다는 뜻에서 그녀의 이름 끝자인 ‘풍’을 빌려 왔다고 한다.‘풍문여자고등학교'는 종로구 안국 동에서 강남구 자곡동으로 이전하면서 남녀공학이 되었고, ‘풍문고등학교’로 개명했다. 지금도‘은행잎 합창’ 이 발간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나서 한강의‘채식주의자’를 만났다.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 ‘ 맨부커 국제상’ 수상작이다. 육식을 거부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적 규범과 개인의 자유 의지를 탐구한다. 3부작 구조로, 남편과 본인, 그리고 언니의 시점에서 주인공을 바라본다. 평범한 주부 영혜가 채식주의자가 되면서 겪는 변화와 주변인들의 반응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펼치면서 개인의 선택과 사회적 압박, 인간의 폭력성과 욕망 등을 섬세한 심리 묘사, 상징적 이미지 사용 등을 통해 서술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집에 오자마자 책을 읽기 시작했다. 몇 페이지 읽다가 책을 덮었다. 읽기 쉬운 책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곁에 있을 때 읽기에는 거북한 책이다. 한밤중에 일어나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읽기 싫었다. 뭔가 강한 메시지를 주는것 같기는 한데 뭔지 모르겠다. 도대체 이런 작품이 노벨상을? 끔찍했다. 모욕감이 들었다. 세상 사람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책 아닌가.
그래도 결말에 뭔가 희망을 주고 세상을 밝히는 메시 지가 있을 거라 믿으며 끝까지 읽었다. 그러나 허망한 기대였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배신감에 허탈하기까지 했 다. 연신 욕이 나왔다. 책을 덮으며 역겨움이 밀려왔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소설 자체가 상상력과 창의성에 기반을 두어 이루어진 허구라는 사실을 잊고 현실과 관련시켜 이해하려는 발상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본래 소설이라는 것이 작가가 어떤 의도로 썼든지 간에 읽는 사람이 어떻게 읽고 받아들이는가에 의해 평가된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한강의 작품을 현실 윤리, 도덕과 결부시켜 이를 이해하려는 시도에는 무리가 따른다. 한 강은 기존 질서와 윤리 도덕을 억압과 폭력이라 규정하고 무조건 탈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풀어나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관점이 대치되는 것 같으면서 하나로 귀결된다. 작가에 의해 쓰인 소설은 독자 들에 의해 평가된다는 점을 잊지 않고 한강의 작품들을 보고 이해해야 큰 물의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책을 읽는 목적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라거나 즐겁고 유쾌해지기 위해서라면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선택하지 않기 바란다. 읽고 나서 기분이 나빠지기 때문이다. 기존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개혁과 혁신을 꿈꾸거나 기대를 갖고 있다면 책을 읽으며 그 답을 찾아보기 바란다. 그러나 작가는 명확하게 그 답을 주지도 않는다. 그저 억압과 폭력성에 굴복해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버리고 마는 나약함이 우리를 더 분노하게 만들 뿐이다. 분노 속에서 나 스스로 해답을 찾아내야 한다.
-끝-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에게 보내는 삼촌의 편지
사랑하는 조카, 노벨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조카 개인의 크나큰 영광이요 아버지 한승원 작가 형님 가문의 영광이요 대한민국의 쾌거네. 나도 조카와의 관계를 아는 지인들로부터 꽤 많은 축하 메시지와 전화를 받았다네.
나도 지난 40여 년 동안에 100여 편의 논문과 연구보고서를 쓰면서 체험한 바로는 한편의 작품을 쓴다는 것이 마치 자신과의 씨름처럼 힘든 일인데, 하물며 상상의 세계를 글로 옮기는 창작은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오죽하면 창작 활동을 임신과 출산에 비유하겠는가? 특히 분량 면에서 볼 때도 소설작품은 다른 장르에 비해 창작의 진통이 상상하기가 힘들 것이네. 나도 과거에 몇 편의 중․단편소설과 시와 수필 등을 써보면서 조금은 경험한 일이라서 공감할 수 있다네.
조카가 그런 세월을 3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이룩한 위업에 대하여 어떻게 몇 마디 말로 존경과 찬사를 표현할 수 있겠는가? 여하튼 가슴 벅찬 축하를 보내네.
게다가 조카를 낳고 키우신 아버지 한승원 작가 형님 내외분에게도 뜨거운 축하를 보내드리고 싶네. 어쩌면 형님은 자제인 조카를 통하여 젊은 날의 고된 나날에 대한 보상을 받으셨다고도 할 수 있다네. 교사 생활과 창작 활동을 겸하면서 자녀 3명을 부양하고, 어린 동생 3명을 돌보시며, 대가족 집안의 가장 역할까지 하셨으니 형님은 인간적으로 거인이셨네.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의 주인공 ‘조르바’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초인과 같은 모습이었다고 할까?
그래서 17살 아래 동생인 나의 청소년 시절에 형님은 나의 영웅이었네. 형님은 내게는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분이었네. 어떻게 보면, 나는 그분의 분신처럼 성장했다네. 형님은 나의 문학적 재능을 알아보고 나의 병역특례 기간(5년)이 끝나면 김원일․김원우 작가와 같은 형제 작가로 살아가자고 제안하셨네. 나는 형님의 은덕을 갚고자 형님이 교사직을 그만두고 작가로 활동하시던 초기 4년 동안 나의 월급 절반 이상을 형님에게 보내드리면서 형님의 전업작가 생활을 도왔다네. (그때 조카는 초등 시절이었네.) 게다가 형님은 나의 결혼 주례로 작가 이호철 선생님을 세워 나의 작가 활동 발판을 마련해주실 만큼 나를 아끼셨다네. 마치 아들을 챙기듯이.
내가 손위․아래 누이 둘과 함께 형님 집에서 살았던 10년 세월의 힘들고 슬프고 어려웠던 시절이 떠올라 목이 메네. 아버지의 생전까지 꽤 괜찮았던 우리 집안(9남매)은 아버지의 소천 이후로 갖가지 비극적인 불행들이 덮쳐오면서 암울했고 가세까지 크게 기울었다네. 그래서 나는 중등 1년부터 누이 둘과 함께 광주에 사시던 형님에게 맡겨져 함께 지내게 되었네. 우리는 두어 번의 이사 끝에 형님의 처가에서 지어준 한옥집에서 살았네.
그 한옥집은 광주 신역(新驛) 뒤와 로켓 배터리 공장 옆에 위치하였는데, 비포장도로와 퇴비 적치장에서 몰려오던 먼지와 파리를 막아내야 했고, 밤마다 근처 판자촌 남정네들의 객기 부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네. 그때 조카는 유년이었고 나는 고등․대학 시절이었네. 그 시절의 추억들이 가슴 아리게 되살아나네.
내가 고등 2년 어느 날 늦은 밤에, 형님은 술에 취해 퇴근해서 나를 툇마루로 불러내더니 나한테 이런 말씀을 하셨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문필가만 있다. 무관도 있어야겠다. 네가 육군사관학교에 가는 것도 좋겠다. 이사장님이 나를 불러서 내가 그런 작품을 계속 쓰면 나를 해직시키라는 경고를 어떤 기관으로부터 받았다는구나. 군사독재정권이 싫지만, 네가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괜찮겠다. 어떤 작가는 자기 형님이 고급장교라서 잡혀가도 바로 풀려나더라. 너한테 정말 미안하구나.” 형님과 나는 툇마루에서 서로 껴안고 한참을 울었네.
형님은 교사 생활과 창작 활동을 병행하기가 힘들었는지 자주 아프셨다네. 창작 활동에만 전념하길 갈망하셨지. 나는 거의 매일 밤과 새벽에 형님의 타자기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중․고․대학을 마쳤다네. 측간(변소)에 들어가면 형님이 퇴고하신 원고지(휴지)를 읽느라 다리에 쥐가 나기도 했다네.
조카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 눈에 선하네. 항상 차분하고 다소곳하며 혼자 방에 누워서 무슨 생각엔가 골몰하곤 하던 조카의 모습이 기억나네.
조카가 아기 때 엄마 형수님이 담장 없는 1층 양옥집 마당에서 밥 짓는 불을 지피는 동안에 조카를 업어주었는데, 조카가 하도 울어대는 바람에 짜증이 나서 내가 조카의 엉덩이를 꼬집어 더 울렸다네. (이 자리를 빌려 용서를 구하네.)
내가 대학 1년 때 교양 영어 작문 리포트를 써놨는데, 5살 조카가 내 책상에 올라가서 리포트에 색연필로 그림을 그려놓아 황당했다네. 리포트를 새로 베껴 쓸 시간이 없어서 색연필 그림이 그려진 이유를 리포트 위에 써서 그대로 제출했는데 교수님한테서 ‘Excellent’를 받았던 일이 떠오르네.
형님의 제안으로 조카가 중등 2년에 영어교과서를 다 외우면 상금을 주기로 했었는데 석 달 후에 조카는 거짓말처럼 한 자리에서 교과서 전체를 연습문제까지 단 한 문장도 틀리지 않고 다 외웠네. 나는 기겁했고 그때 이미 조카의 비범함을 직감했네. 나는 어깨에 힘주면서 형님 내외분 앞에서 조카에게 상금을 주었다네.
지금부터 18년 전에 형님의 김동리문학상 시상식에서 내가 조카의 얼굴을 본 이후로 편지로나마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네. 지금부터 37년 전에 셋째형님의 장례식에서 그 형님의 구원 문제로 형님과 나 사이에 큰 충돌이 일어난 후로 형님 집안과 소원해져 있었지만, 그래도 나의 인생에서 은인이신 형님의 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려고 갔던 자리였네. 그 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조카를 가끔 매스컴을 통해 보곤 했다네.
그 동안에 멀리서 조카의 맨부커상 수상 소식을 들었지만,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자 나는 복잡한 감정에 빠졌다네. 솔직히 말해, 기쁨에 앞서 적잖은 충격과 놀라움과 걱정에 빠졌다네. 노벨상 수상으로 인하여 오히려 형님 집안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더 멀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조카의 작품에 대한 평가로 한국 사회가 두 쪽으로 갈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라네. 20여 일이 지나는 동안 충격과 놀라움이 많이 사그라지고 마음이 정리되어 이제야 축하 편지를 보내네. 형님 집안과 아예 단절된 상태에서 조카의 전화번호나 주소를 전혀 몰라 불가피하게 공개편지를 보내게 되었네.
사실, 조카와 나의 단절도 예수 그리스도 신앙을 미워하고 배척하신 형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이 자리에서 밝히고 싶네. 지금부터 39년 전에 2년 동안 형님과 나는, 알코올중독에 빠져서 인생이 망가져 가는 셋째형님의 치유 방법을 놓고 두 해
P.S.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에게 보내는 삼촌의 편지'를 이곳에 복사하는 과정에서 화일이 너무 커 이곳에 불가하여 지속 카피가 안되는군요. Yutube 에 들어 가 위 내용의 계속을 시청 해 보시는것을 권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