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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QvzMcgkfdco&t=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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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진실이 한 작가의 몰이해와 해당국가의 역사적 배경을 간과한 노벨
문학상의 안배 탓으로 가려지면 그가 속한 국가의 근간이 흔들릴수도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며 이점을 부각시킨 정동수 목사님의 설교가 있어 옮겼습니다.
위의 인터넷 링크를 더블 클릭하면 광고가 몇초간 뜨는데 우측 하단의 'skip'을 클릭
하면 정동수 목사의 방송내용이 시작되며, 방송 말미에 우측 상단의 X 를 클릭하면
불필요한 여타 방송에서 벗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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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유투브 방송 내용과 계시자의 첨언은 mulidae.com의 사고와 무관합니다.
한강의 작품을 정목사님 견해와는 다른 종교적 관점에서 본 시각도 있어 이곳에 올립니다. 한강의 소설을 많이 읽지는 못했습니다만 작가의 섬세한 문학적 표술에는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보석같은섬광이 내 뿜습니다. 한강의 표현력은 그의 어떤 적나나하거나 직설적 표현도 마치 마술을 펴듯 미학적으로 승화시키며 읽는이를 빨아들이는 마력이 있습니다. 이런 위력을 무기로 외설적이고 엽기적인 소설 흐름을 문학이라는 큰 배를 타고 파도를 가르며 달리고는 있지만 신성과 인성의 유일한 복합체로 스스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인 성경의 어느 내용과 괴를 같이 할 수도 있다는 유추는 무리가 아닌가 합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은 때아닌 이데올로기 혼란에 빠진 작금의 한반도에 떨어진 무거운 숙제인것 같슴니다.
문병길
끝으로 한강작가의 삼촌인, 대전 '행복이 넘치는 교회' 한충원 목사의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 (2024.11.7)를 아래에 첨부합니다.
한강작가의 글에서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 한강의 살얼음판같이 굳어있는 인성을 느낍니다. 소설 페이지마다 마술같은 표현의 전개에 읽는이는 머리를 파고드는 자극을 주지만 읽은 후 가슴에 남는것은 상실과 허탈의 빈 공간입니다.
한강작가가 삼촌의 편지로 북극의 빙하처럼 얼어붙은 한강의 가슴이 녹아 내려, 정녕 ‘한강의 봄’ 찾아 주기를!
문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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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의 편지는 매우 긴 장문의 편지(total 46 pages)여서 본문 전체를 이곳에 싣는 대신 그 화일의 링크를 아래에 걸어 놓았습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한 후 우측 상단에 뜨는 화일을 다시 클릭하면 편지가 뜹니다. 아래 링크가 되지 않으면 이토픽의 맨 아래에 그 일부를 카피 해 놓았으며 편지 전부를 보시려면 yutube에서 타이틀을 찾아 시청 하실것을 권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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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운뉴스 1551호 11/18/24 발행인 안창해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카톡이 쉴 새 없이 울린다. 카톡 카톡...... 한강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어떤 모임에서 한 친구의 얘기를 듣고 있을 때였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와, 한강이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네!” 친구는 얘기를 중단하고 다른 친구들과 함께 박수를 쳤다. 정말 축하할 일이다. 대한민국의 경사다.
한강을 잘 모른다. 그녀가 몇 번인가 상을 받을 때마 다 뉴스를 들었고, 얼핏 그녀의 단편들을 몇 편 읽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의 작품들이 매우 독특했다고 느꼈던 기억이 떠올랐다.
부랴부랴 그녀에 대한 기록들을 찾아보았다. 그녀가 풍문여고를 졸업했다는 사실에서 먼 옛날의 기억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 풍문여고가 주최하는 백일장에 참가한적이 있었다. 그 당시 백일장은 교육청이나 교육위원회가 주최하는데 일개 학교가 주최하는 백일장은 흔치 않던 시절이다. 지금 생각해보 면 풍문여고가 그만큼 글짓기, 문학에 관심이 많은 학교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이러한 영향이 풍문여고를 다녔던 한강에게도 영향을 적지 않게 주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시인이며 가수인 박인희, 수녀이며 시인인 이 해인이 이 학교 출신이라는 사실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때 ‘은행잎 합창’이라는 풍문여고 문예반 학생들이 만든 문예지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교명인 ‘풍문(豊文)’은 배움을 풍성하게 한다는 의미와 학교설립자인 민덕기씨가 자신의 증조모‘안유풍’ 의 유지를 받든다는 뜻에서 그녀의 이름 끝자인 ‘풍’을 빌려 왔다고 한다.‘풍문여자고등학교'는 종로구 안국 동에서 강남구 자곡동으로 이전하면서 남녀공학이 되었고, ‘풍문고등학교’로 개명했다. 지금도‘은행잎 합창’ 이 발간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나서 한강의‘채식주의자’를 만났다.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 ‘ 맨부커 국제상’ 수상작이다. 육식을 거부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적 규범과 개인의 자유 의지를 탐구한다. 3부작 구조로, 남편과 본인, 그리고 언니의 시점에서 주인공을 바라본다. 평범한 주부 영혜가 채식주의자가 되면서 겪는 변화와 주변인들의 반응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펼치면서 개인의 선택과 사회적 압박, 인간의 폭력성과 욕망 등을 섬세한 심리 묘사, 상징적 이미지 사용 등을 통해 서술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집에 오자마자 책을 읽기 시작했다. 몇 페이지 읽다가 책을 덮었다. 읽기 쉬운 책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곁에 있을 때 읽기에는 거북한 책이다. 한밤중에 일어나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읽기 싫었다. 뭔가 강한 메시지를 주는것 같기는 한데 뭔지 모르겠다. 도대체 이런 작품이 노벨상을? 끔찍했다. 모욕감이 들었다. 세상 사람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책 아닌가.
그래도 결말에 뭔가 희망을 주고 세상을 밝히는 메시 지가 있을 거라 믿으며 끝까지 읽었다. 그러나 허망한 기대였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배신감에 허탈하기까지 했 다. 연신 욕이 나왔다. 책을 덮으며 역겨움이 밀려왔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소설 자체가 상상력과 창의성에 기반을 두어 이루어진 허구라는 사실을 잊고 현실과 관련시켜 이해하려는 발상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본래 소설이라는 것이 작가가 어떤 의도로 썼든지 간에 읽는 사람이 어떻게 읽고 받아들이는가에 의해 평가된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한강의 작품을 현실 윤리, 도덕과 결부시켜 이를 이해하려는 시도에는 무리가 따른다. 한 강은 기존 질서와 윤리 도덕을 억압과 폭력이라 규정하고 무조건 탈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풀어나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관점이 대치되는 것 같으면서 하나로 귀결된다. 작가에 의해 쓰인 소설은 독자 들에 의해 평가된다는 점을 잊지 않고 한강의 작품들을 보고 이해해야 큰 물의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책을 읽는 목적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라거나 즐겁고 유쾌해지기 위해서라면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선택하지 않기 바란다. 읽고 나서 기분이 나빠지기 때문이다. 기존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개혁과 혁신을 꿈꾸거나 기대를 갖고 있다면 책을 읽으며 그 답을 찾아보기 바란다. 그러나 작가는 명확하게 그 답을 주지도 않는다. 그저 억압과 폭력성에 굴복해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버리고 마는 나약함이 우리를 더 분노하게 만들 뿐이다. 분노 속에서 나 스스로 해답을 찾아내야 한다.
-끝-
최근 김태환 동문께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에 관해 작품 소개를 한 외신을 다음과 같이 문리대 카톡방에 영문으로 실은 바 있어 한글 원본을 mulidae.com에 실어주십사 부탁한적이 있었는데 애로가 있으신것 같아 그 영문을 google AI Korean으로 번역 해 올립니다. 문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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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23일 일요일 20:35 '우리는 헤어지지 않는다' 개요
작성자: Han Kang
번역: Yaewon과 Paige Morris.
방문객은 비행기로 도착합니다. 활주로로 내려가면 검은 현무암 해안에 가까운 바다가 거품을 일으킵니다. 매년 1,3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한국 본토 남쪽에 있는 이 섬에 옵니다. 많은 사람들은 활주로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2007년에서 2009년 사이 수사관들은 공항의 일부를 파헤쳐 약 60년 전 정부군에 의해 학살된 수백 명의 시신을 발견했다. 한강의 최신작 '우리는 헤어지지 않는다'는 1947-54년 제주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파헤친다. 작가는 201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한 〈채식주의자〉, 1980년 고향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 시위대 살해 사건을 다룬 〈Human Acts〉 등 인간이 서로에게 가하는 폭력을 자신의 책의 주제로 삼았다. 지난 10월, 한 작가는 한국 작가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는데, 문학상 위원회는 그녀의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We Do Not Part"의 이야기는 두 여성의 우정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한 명인 인선은 휴직한 다큐멘터리 제작자다. 그녀는 학살에서 살아남은 연로한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제주로 이사합니다. 다른 한 명은 서울에 거주하는 작가 경하로, 'G-의 학살'에 관한 책을 쓴 후 편두통과 잊혀지지 않는 꿈에 시달리고 있다. (한 씨는 또한 오랫동안 쇠약해지는 편두통으로 고생해 왔다.) 인선은 경하를 병원으로 불러내고, 의사들은 경하의 꿈 중 하나를 영화에 담기 위해 잘라낸 손가락 끝을 다시 붙이려고 한다. 그녀는 경하에게 제주 산속에 있는 자신의 마을로 가서 애완용 새가 굶어 죽기 전에 먹이를 달라고 부탁한다. 경하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섬에 도착한다. 집으로 가는 그녀의 참혹한 여정은 섬의 비극적인 과거를 가로지르는 초현실적인 여행이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 제국주의 통치가 끝나면서 한반도는 반으로 쪼개졌다. 1948년 4월 3일, 제주에서 일단의 좌익 반란군이 분단에 항의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그해 가을, 한국의 초대 지도자인 이승만은 잔혹한 탄압을 가했다. 미국 고문관들은 훗날 자신들의 보고서에서 "무차별적인 공포 정치"라고 묘사한 것에 대해 노골적인 지지는 아니더라도 암묵적인 지지를 보냈다. 수백 개의 마을이 불에 탔다. 30,000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는 당시 섬 인구의 약 10%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제주 회담은 한반도의 분단이 어떻게 남한 내부의 분열을 부채질할 것인지, 그리고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가 얼마나 얽히고설킨 성격을 드러낼 것인지에 대한 전조였다. 그러나 한국의 통치자들은 수십 년 동안 학살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억눌렀다. 지속적인 공개 토론은 1980년대 후반 미국이 민주화되었을 때에만 가능해졌다. 21세기가 되어서야 완전한 공식 조사가 이루어졌다. 국가가 승인한 폭력의 기억은 지난 12월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려고 했을 때 한국인들이 격렬하게 대응한 이유 중 하나다. 그는 탄핵되어 현재 헌법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제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동아시아 밖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 사건들은 냉전의 주변부에서 잊혀진 공포가 되었다. 문학은 인식을 제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가장 먼저 나온 이야기 중 하나는 1957년 제주 출신의 한국 작가 김속폼이 일본어로 출간한 소설 "까마귀의 죽음"에 나온다. "선이삼천"("수니 아줌마")은 이 비극을 다루기 위해 한국에서 출판된 첫 번째 작품이다. 1978년 출간 후 소설은 금지되었고 작가 현기영은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 한 여사의 책과 그녀의 노벨상은 이 비극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라고 제주역사문화연구회(Jeju History and Culture Research Society)의 전영미(Chon Yeong-mi)는 말한다. 제주에 있는 평화기념박물관에는 현재 한 여사를 기리는 벽이 걸려 있다. "We Do Not Part"의 힘은 문학과 다큐멘터리의 능숙한 융합에서 비롯됩니다. 그녀는 7년 동안 소설을 집필했고, 그 중 두 번은 제주에서 파트타임으로 살았다. 책의 장면들은 실제 인물과 장소를 향한 몸짓이다. 인선의 어머니는 피투성이가 되어 간신히 목숨을 건진 여동생을 발견하고, 턱이 총탄에 맞아 산산조각이 난 여동생을 발견한다. 한 여사는 아카이브 자료의 인용문과 사진에 대한 설명을 자신의 소설에 통합한다. 인선은 공항 발굴 현장의 유골이 옆으로 늘어서 있는 사진을 본 당시를 회상하며 "몸이 안 좋을 때, 잠을 잘 못 잤을 때,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을 때 몸을 웅크리는 것처럼 그들의 무릎은 가슴까지 당겨져 있었다"고 회상했다. 인선은 이미지를 다시 살펴보고 같은 자세를 취한다. 그 의식은 그녀를 따뜻하게 하는데, "솜털, 깃털 또는 아기 피부의 여운이 남는 부드러운 감촉과 매우 흡사하다". 한 씨의 글은 겉보기에는 부조화처럼 보이는 감정, 동시에 불안과 진정을 불러일으킨다. 소설가의 딸인 한 씨는 어린 시절부터 부드럽고 서정적인 산문을 갈고 닦아 왔습니다. 그녀는 시인 이상과 같은 한국 모더니스트와 홀로코스트에 대한 프리모 레비의 작품과 같은 잔혹 행위에 대한 다른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그녀의 글은 학살에 대한 자연주의적 묘사와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무너지는 유령 장면 사이를 자연스럽게 오갑니다. 아름다움은 비극과 함께 지속됩니다. 상징은 그녀의 작품 전반에 걸쳐 반복되어 연상 네트워크를 구축합니다. 한국 문화에서 출생과 애도와 관련된 흰색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녀의 또 다른 책은 죽은 언니에게 바치는 엘레지로, "The White Book"이라고 불린다. 이 책은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눈은 트라우마에 대한 은유가 되며, 눈이 쌓이고 흩어지며 형태가 변하는 방식이 됩니다. 인선의 어머니는 언니가 부모를 찾느라 시체의 얼굴에 묻은 눈을 닦아내던 모습을 회상한다.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그들의 얼굴에 쌓인 눈과 같지 않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경하도 궁금해한다. 공항으로 돌아와서, 연구회(Research Society)의 천 씨는 유해가 여전히 활주로 아래에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탄한다. 그런 다음 그녀는 지평선을 향해 섬에서 가장 큰 봉우리인 한라산을 가리켰다. "눈 덮인 산이 너무 아름다워요."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하니안의 비전이다: 눈물을 통해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것이다.
이상은 한강 작가 작품,'We do not part',의 영문 번역(?)본을 이코노미스트에서 소개한 내용같은데 김 동문의 문리대 카톡 영문 내용으로 어렵사리 카피한 영문 작품개요를 구글로 번역해 본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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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작품 소개는 한강 작가의 문학적 가치에 무게를 준 것으로 노벨 문학상의 진솔한 타당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온 나라가 축복을 받은것이나 작가의 역사관과 제주사태의 진실의식이 보편성을 잃었거나 시대적 정의의 울타리를 벗어나 있다는게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2025.3.1. 문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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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상기 한강 소설 평에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에 관해 '국가가 승인한 폭력'이라는 멘트도 있어 다음 저의 글을 이곳에 인용하고자 합니다. 비상계엄 발표 후 한달여 온나라가 혼돈에 빠져 제가 다음 해 1월 8일 아래와 같은 글, '대통령의 비상계엄령 선포'를 문리대 웹에 올렸었는데 그 '여섯시간 계엄'이 넉달 넘은 지금까지도 나라를 반으로 갈라놓고 국정이 마비되다시피 하는 혼란의 위기를 맞고 있어서 입니다.
저는 기고문에서 그 옛날 오클라호마 고속도로에서 죽기아니면 까물어칠 각오로 남의 생명을 싣고 달린것을 회상하며 윤 대통령이 5000만을 싣고 달린것과 언감생심 비유한 것 자체가 생뚱맞아 토픽을 내리것이었습니다. 차제에 한강 작가의 작품 개요에서 위와같은 "국가 폭력' 멘트를 읽고 제주도 폭동이나 십이삼 계엄이나 이념적으로 편도 되면 역사에 중대한 오류가 생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다시 아래에 실습니다. 문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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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비상계엄령 선포
대통령 령으로2024년12월3일 저녁에 발동되었다가 7시간여 후 다음날 새벽 거대 야당과 일부 여당 의원들 동조 하에 결의된 계엄 해제 직후 다시 대통령 령으로 전격 해제된 대한민국 전국 비상계엄령은 마치 온나라에 아닌 밤중의 홍두깨 격으로 파장을 몰고 온 듯 그 후유증이 크다. 시국이 너무 어수선해 올 게 왔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국가 최고의 통수권자가 극단의 짧은 시간에 온나라를 들었다 내려놓은 '전에 경험 못하던' 이변이었다.
그 후 며칠간의 뉴스 속보로부터 계엄군 내부에서 최고 통수권자의 ‘명령’을 하달 받은 군 장성급들의 불복종 또는 지휘 체계의 허점이 들어 나고, 비상계엄에 관한 국회의 대정부 질의 청문회에서 관련 군 고위 장성급들의 발뺌이나 배반 등으로 과연 대한민국이 외세 침입 같은 위기상황을 대처할 안보능력이 있는가 하는 불안이 앞서는 거였다.
새벽에 계엄병력이 철수하는 장면을 보며 ‘이게 뭐 야?! 뭔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했다가 새해가 된 지금은 나라를 활활 태우는 뜨거운 불길처럼 번지며 한반도를 달구고 있다.
예기치 않던 일련의 돌발 사태를 보면서 30년전 본인이 겪은 한 에피소드를 반추한다.
미국 오클라호마 시의 사무실에서 근무할 때였는데 그날은 멈출 수 없는 일로, 밤 열두시까지 사무실에서 일하다 귀가한적이 있었다. 당시 살고 있던 집은 시에서 북쪽 외곽, 차로 20여분 거리의 에드먼드라는 조그만 대학 도시였는데 시 경계를 벗어나면 중간에는 집도 없고 오클라호마 특유의 벌판만 펼쳐지는 시골 고속도로 뿐이었다.
그날따라 막 시 변두리를 벗어나려는 데 길가에 한 흑인 노인이 어둠속에서 홀로 목발을 짚고 히치하이크의 제스처를 하고 갓길에 서 있는 거였다. 나는 앞뒤 생각 없이 급히 고속도로 갓길로 차를 밀어붙이며 세웠다.
곧이어 몸이 불편한 목발의 노인이 어둠속에서 차로 와 뒷자리에 타는가 했더니 곧이어 어디서 나타났는지 젊고 건장한 흑인 청년 하나가 연이어 훌쩍 올라타는 게 아닌가!
순간 내 머리는 하얀 공포에 숨이 막혀버렸다.
당시 오클라호마 에서는 가끔 고속도로에서 선의의 운전자에게 강도로 돌변한 히치하이크의 뉴스들이 터지면서 인면수심(人面獸心)만도 못함을 개탄케 하는 사건들이 회자되고 있었다.
-아! 당하는 거 아닌가!’ - 긴장된 나는 걷잡을 수 없는 공포에 휩싸 버려, -나는 이제 불구 노인역의 흑인과 어둠속에서 나타난 젊은이로 된 2인조 강도단을 만났다! - 라고 속으로 외쳤다.
사방은 칠흑에 인가도 없고 지나는 차들도 뜸하다. 주저할 틈이 없다. 다음 마을이 에드먼드 하나뿐이니 -어디가시나요? 방향이 틀리는군요- 어쩌고 할 수도 없다.
더구나, -당신들, 속임수를 쓴 거 아냐! – 하며 내리랄 수도 없다.
핸들을 움켜 잡으며 순간 결정했다. 차를 최대 속도로 에드먼드를 향해 달려 이자들이 어찌 할 수도 없게 만드는 거다! 요행이면 고속도로 경찰이 미친듯 달리는 나에게 딱지 떼러 세우는 거고.
가속 페달을 차 바닥까지 짓눌러 밟으며 20분 조히 걸릴 거리를 단 몇 분만에 질주했다. 소위 말하는 ‘총알 택시’ 운전을 한 거였다. 드디어 마을 입구, 사방이 환하게 조명된 자동차 딜러 앞에서 갓길에 차를 멈춘 뒤 돌아보며 나는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뒤 좌석의 두 흑인은 공포로 창백 해져 흑인임에도 얼굴이 하얗다시피 질려 있는 게 아닌가.
“자, 어디가 댁이시지요?” 계면쩍게 묻는 내 말에 두 사람은 -아 됐어요, 됐어요-를 연발, 부들부들 떨며 에둘러 차문을 열어 제치고 황급히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거였다. 순간 나는 쑥스럽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직도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아... 미안! – 을 독백하곤 그들이 사라진 어둠에 시선을 둔 채 멍 했다.
그 둘은 평생 처음 보았을 지 모를 고속도로에서의 어느 싸이코 아시안 운전자에 아연실색 했고, 나는 착한 흑인 부자(?)를 강도로 정해 놓고 죽자사자 달린 거다.
-깊어 가는 밤에, 여러 차례 히치하이크에 실패하고 난 흑인 부자는 궁여지책으로 도로 갓길에서 '비정의 연극'을 하여 차를 얻어 탄 것 까지는 좋았는데, 놀란 토끼 아시안은 극단적인 공포감으로 차를 세사람의 폭탄으로 둔갑시키다. - 일련의 잊지못할 사건으로 뇌리에 오래 머문 씁쓸한 에피소드였다.
대통령의 6시간 비상 계엄령과 TV생방송에서 선포의 목적, 그리고 속속 나타나는 다음 날들의 정부 측 무질서를 보고 나의 30년 전 에드먼드 고속도로 해프닝을 되짚어 본 것은 나의 해프닝을 언감생심 대통령의 계엄령에 빗대려 하기보다 일어난 계기가 지극히 단말마의 결단이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과 함께 그 시행 과정에서의 난맥상 또한 큰 다름이 없어 보였으며, 기왕에 온국민의 가슴을 여미면서까지 ‘비상계엄’을 선포했으면 끝장을 내는 시늉이라도 제대로 할 일이지 ‘경고를 주기 위함’이었다 하니 소외당한 느낌이기도 했다.
나는 오밤중에 두 사람을 태우고 차를 몰아 댔지만 대통령은 6시간 오천만 국민을 태운 채 광폭 운전 한 거였으며, 나에게 고속도로 경찰차가 따라붙는 행운(?)도 없었던 것처럼, 화들짝 놀란 민심이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줄 여유가 없는 동안 그를 공격하는데다 전력 질주하는 거대야당에게는 절호의 찬스가 주어져 급기야는 한 나라의 대통령을 헌법 족보에도 없는 ‘내란죄 또는 내란 수괴 죄’로 ‘강제 연행’할 기세로까지 치닫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최근 며칠 동안은 헌재 측의 ‘내란죄’ 항목 삭제 종용으로 강제연행의 구실이 ‘부적절한 비상계엄 선포’로 한정되는 바람에 윤대통령 구속이 ‘헌법재판’ 받기 위함보다 정치재판으로 변질될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공수처와 경찰은 대통령 손에 채울 수갑을 떠 넘기며 한남동 대통령 관저 진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여하튼 만천하에 창피한 노릇이다.
대통령은 거대야당의 국정 횡포와 선거부정을 밝혀 낼 길은 대통령 고유 권한인 비상계엄령 발포 밖에 없었다는 성명을 낸 바 있으며, 거대 야당의 폭거에 백의 종군하겠다는 결의를 천거했고, 아울러 최하로 내려갔던 그의 지지도도 숨돌린 자유 우파 보수 부대들의 호응과 민주우방국들의 관심속에서 조금씩 만회 중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무시못할 대한민국 국민인 종북 주사파는 일당 백의 엄청난 조직과 거대야당의 기세와 물러서면 죽는다는 필연으로 이 기회를 극대화하고 있다. 이런 필사의 각오로 그들의 담합은 극한선을 넘나들며 보편성을 잃고 있지만 그들 또한 우리다.
나라는 온통 열병을 앓듯 골병이 들고 있다. 오염된 리더를 추종할 수밖에 없는 거대야당의 탄핵남발과 국정농단, 기회주의적 무 소신의 소수여당, 뿔 뽑힌 대통령의 안쓰럽고 외로운 호소, 그리고 연일 서울을 메우는 두 다른 이념의 수십만 시위행진 각축전에서 한국의 앞날은 예측 불허의 늪으로 빠져만 가고 있다.
에드먼드 자동차 딜러 앞의 사라진 두 흑인부자가 남긴 어둠을 향해 가슴 두근거리며 멍하니 초점잃은 시선을 주듯 나라의 내일 일에 모두가 멍해 있거나 열 불 나 있는듯하다.
아울러 선관위 부정을 윤 대통령이 얼마나 밝혀 냈는지 뚜렷한 발표는 없으나 자신이 부정선거 경험을 톡톡히 치렀다고 벼르고 있는 미국의 트럼프가 1월 20일 취임을 전후해 윤대통령이 계엄을 통해 밝히려 했던 한국의 작년 4월 대선 부정선거와 어떻게 괴를 같이 할지가 관심사이기도 하다.
전라도 무안 공항에서는 지난 해 마지막 일요일에 비행기 비상착륙 사고로 179명 사망자가 생기는 참사가 일어나 그렇지 않아도 뒤숭숭함을 더하는데 무슨 일에도 정치 냄새가 스며들면 역한 냄새를 내뿜는 한국의 정치 가와 그릇된 뉴스미디어들에 의해 이 참사가 정치 테이블의 각축전 자료로 변질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바라고 바라건 대...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가? 억세고 억세며 억센 나라. 칠전팔기의 나의 조국 대한민국, 또 하나의 -한강의 기적-이 만들어 지기를!
2025.1.8. 문병길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에게 보내는 삼촌의 편지
사랑하는 조카, 노벨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조카 개인의 크나큰 영광이요 아버지 한승원 작가 형님 가문의 영광이요 대한민국의 쾌거네. 나도 조카와의 관계를 아는 지인들로부터 꽤 많은 축하 메시지와 전화를 받았다네.
나도 지난 40여 년 동안에 100여 편의 논문과 연구보고서를 쓰면서 체험한 바로는 한편의 작품을 쓴다는 것이 마치 자신과의 씨름처럼 힘든 일인데, 하물며 상상의 세계를 글로 옮기는 창작은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오죽하면 창작 활동을 임신과 출산에 비유하겠는가? 특히 분량 면에서 볼 때도 소설작품은 다른 장르에 비해 창작의 진통이 상상하기가 힘들 것이네. 나도 과거에 몇 편의 중․단편소설과 시와 수필 등을 써보면서 조금은 경험한 일이라서 공감할 수 있다네.
조카가 그런 세월을 3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이룩한 위업에 대하여 어떻게 몇 마디 말로 존경과 찬사를 표현할 수 있겠는가? 여하튼 가슴 벅찬 축하를 보내네.
게다가 조카를 낳고 키우신 아버지 한승원 작가 형님 내외분에게도 뜨거운 축하를 보내드리고 싶네. 어쩌면 형님은 자제인 조카를 통하여 젊은 날의 고된 나날에 대한 보상을 받으셨다고도 할 수 있다네. 교사 생활과 창작 활동을 겸하면서 자녀 3명을 부양하고, 어린 동생 3명을 돌보시며, 대가족 집안의 가장 역할까지 하셨으니 형님은 인간적으로 거인이셨네.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의 주인공 ‘조르바’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초인과 같은 모습이었다고 할까?
그래서 17살 아래 동생인 나의 청소년 시절에 형님은 나의 영웅이었네. 형님은 내게는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분이었네. 어떻게 보면, 나는 그분의 분신처럼 성장했다네. 형님은 나의 문학적 재능을 알아보고 나의 병역특례 기간(5년)이 끝나면 김원일․김원우 작가와 같은 형제 작가로 살아가자고 제안하셨네. 나는 형님의 은덕을 갚고자 형님이 교사직을 그만두고 작가로 활동하시던 초기 4년 동안 나의 월급 절반 이상을 형님에게 보내드리면서 형님의 전업작가 생활을 도왔다네. (그때 조카는 초등 시절이었네.) 게다가 형님은 나의 결혼 주례로 작가 이호철 선생님을 세워 나의 작가 활동 발판을 마련해주실 만큼 나를 아끼셨다네. 마치 아들을 챙기듯이.
내가 손위․아래 누이 둘과 함께 형님 집에서 살았던 10년 세월의 힘들고 슬프고 어려웠던 시절이 떠올라 목이 메네. 아버지의 생전까지 꽤 괜찮았던 우리 집안(9남매)은 아버지의 소천 이후로 갖가지 비극적인 불행들이 덮쳐오면서 암울했고 가세까지 크게 기울었다네. 그래서 나는 중등 1년부터 누이 둘과 함께 광주에 사시던 형님에게 맡겨져 함께 지내게 되었네. 우리는 두어 번의 이사 끝에 형님의 처가에서 지어준 한옥집에서 살았네.
그 한옥집은 광주 신역(新驛) 뒤와 로켓 배터리 공장 옆에 위치하였는데, 비포장도로와 퇴비 적치장에서 몰려오던 먼지와 파리를 막아내야 했고, 밤마다 근처 판자촌 남정네들의 객기 부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네. 그때 조카는 유년이었고 나는 고등․대학 시절이었네. 그 시절의 추억들이 가슴 아리게 되살아나네.
내가 고등 2년 어느 날 늦은 밤에, 형님은 술에 취해 퇴근해서 나를 툇마루로 불러내더니 나한테 이런 말씀을 하셨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문필가만 있다. 무관도 있어야겠다. 네가 육군사관학교에 가는 것도 좋겠다. 이사장님이 나를 불러서 내가 그런 작품을 계속 쓰면 나를 해직시키라는 경고를 어떤 기관으로부터 받았다는구나. 군사독재정권이 싫지만, 네가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괜찮겠다. 어떤 작가는 자기 형님이 고급장교라서 잡혀가도 바로 풀려나더라. 너한테 정말 미안하구나.” 형님과 나는 툇마루에서 서로 껴안고 한참을 울었네.
형님은 교사 생활과 창작 활동을 병행하기가 힘들었는지 자주 아프셨다네. 창작 활동에만 전념하길 갈망하셨지. 나는 거의 매일 밤과 새벽에 형님의 타자기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중․고․대학을 마쳤다네. 측간(변소)에 들어가면 형님이 퇴고하신 원고지(휴지)를 읽느라 다리에 쥐가 나기도 했다네.
조카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 눈에 선하네. 항상 차분하고 다소곳하며 혼자 방에 누워서 무슨 생각엔가 골몰하곤 하던 조카의 모습이 기억나네.
조카가 아기 때 엄마 형수님이 담장 없는 1층 양옥집 마당에서 밥 짓는 불을 지피는 동안에 조카를 업어주었는데, 조카가 하도 울어대는 바람에 짜증이 나서 내가 조카의 엉덩이를 꼬집어 더 울렸다네. (이 자리를 빌려 용서를 구하네.)
내가 대학 1년 때 교양 영어 작문 리포트를 써놨는데, 5살 조카가 내 책상에 올라가서 리포트에 색연필로 그림을 그려놓아 황당했다네. 리포트를 새로 베껴 쓸 시간이 없어서 색연필 그림이 그려진 이유를 리포트 위에 써서 그대로 제출했는데 교수님한테서 ‘Excellent’를 받았던 일이 떠오르네.
형님의 제안으로 조카가 중등 2년에 영어교과서를 다 외우면 상금을 주기로 했었는데 석 달 후에 조카는 거짓말처럼 한 자리에서 교과서 전체를 연습문제까지 단 한 문장도 틀리지 않고 다 외웠네. 나는 기겁했고 그때 이미 조카의 비범함을 직감했네. 나는 어깨에 힘주면서 형님 내외분 앞에서 조카에게 상금을 주었다네.
지금부터 18년 전에 형님의 김동리문학상 시상식에서 내가 조카의 얼굴을 본 이후로 편지로나마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네. 지금부터 37년 전에 셋째형님의 장례식에서 그 형님의 구원 문제로 형님과 나 사이에 큰 충돌이 일어난 후로 형님 집안과 소원해져 있었지만, 그래도 나의 인생에서 은인이신 형님의 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려고 갔던 자리였네. 그 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조카를 가끔 매스컴을 통해 보곤 했다네.
그 동안에 멀리서 조카의 맨부커상 수상 소식을 들었지만,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자 나는 복잡한 감정에 빠졌다네. 솔직히 말해, 기쁨에 앞서 적잖은 충격과 놀라움과 걱정에 빠졌다네. 노벨상 수상으로 인하여 오히려 형님 집안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더 멀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조카의 작품에 대한 평가로 한국 사회가 두 쪽으로 갈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라네. 20여 일이 지나는 동안 충격과 놀라움이 많이 사그라지고 마음이 정리되어 이제야 축하 편지를 보내네. 형님 집안과 아예 단절된 상태에서 조카의 전화번호나 주소를 전혀 몰라 불가피하게 공개편지를 보내게 되었네.
사실, 조카와 나의 단절도 예수 그리스도 신앙을 미워하고 배척하신 형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이 자리에서 밝히고 싶네. 지금부터 39년 전에 2년 동안 형님과 나는, 알코올중독에 빠져서 인생이 망가져 가는 셋째형님의 치유 방법을 놓고 두 해
P.S.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에게 보내는 삼촌의 편지'를 이곳에 복사하는 과정에서 화일이 너무 커 이곳에 불가하여 지속 카피가 안되는군요. Yutube 에 들어 가 위 내용의 계속을 시청 해 보시는것을 권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