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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글.
저에게는 70년 가까이 저와함께 지내 온 몇권의 색 바랜 노트가 있습니다. 담임이셨던 김경한선생님의 독려로 중3시절부터 쓰기시작한 일기가 노트 몇권이 되어 때로는 하숙방 어느 은밀한 구석에, 때로는 자취 방 부엌 찬장 구석에, 아니면 천안 고향집 다락방에 한 권 한 권 쌓이다가, 이곳 미국에까지 따라 와 휴스턴과 오클라호마를 거쳐 캘리포니아 집 차고 위 지붕밑에 숨죽이고 있던 중 요사이는 저의 방 설합안에 따라 와 있지요.
일기를 쓸때는 늘 ‘나’를 앞에 앉쳐놓고 말을 거는 심정으로 썼습니다. 때로는 하루 삶의 푸념으로, 때로는 객지생활의 외로움을 털며 내 말을 들어줄 마땅한 사람은 나뿐인양 얘기하듯 거침없이 쓰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가식없이 썼으며 때로는 다듬없는 직설적 표현도 마다 않았습니다. 여과없이 독백하듯 쏟아놓는 자신과의 대화이기도 하여 일기 쓰는 시간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기다려지기도 했으며 누군가에게 내 속을 털었다는 해방감까지 생기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노트장을 넘길때마다 페이지를 봉인하면서 다시 읽지도 않을양 호들갑을 떨면서 깊숙이 숨겨놓았습니다. 남에게 읽힐 일이 없다는 생각으로 써 왔으므로 자유분망과 종횡무진의 기록이지만 지방에서 ‘국민학교’ 졸업하자 홀홀 단신 ‘서울 유학’와 자란 저의 삶은 나름대로의 저만의 값진 기록입니다.
이제 80 문지방을 훌쩍 넘고보니 주변의 것들과 헤어져여야 할 것들이 끈임없이 나타나는 중에 이 일기노트들도 그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언감생심 이 일기가 남에게 읽히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다가 이 나이가 되니 남는건 작고 무심하게 보이던 저의 일기 몇쪽이 아닌가 하여 제 인생과 인연을 맺은적이 있는 수많은 인연에게 용서를 빌고 관용을 바라며, 나름 저의 애증을 고백 하는 마음에서 이곳에 남기고 싶어졌습니다. 거칠고 적나나해 저의 영어권 자손들에게 득이될지 독이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훗날 언젠가 그들에게 발견되어 읽혀진다면 그것만으로 의미가 있겠다 싶습니다.
삼십여년 전에 이 일기노트들을 한글 타이피스트에게 민망하고 쑥스러워 타이핑을 계속 하기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그에게 ‘생각 멈추고 타자 키만 두들겨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여 만든 워드화일이 있어 감히 이와 같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언제까지 연재할 수 있을지 장담은 못하나 저 스스로 포기 할때까지, 혹은 읽는이들로부터 종료권고를 접할때까지, 아님 저 스스로 쇄잔 해져 연재를 멈출때까지 진행하고자 합니다.
일기계재 간간이 원본 노트도 사진으로 곁들일까 합니다.
남가주 문리대 웹은 그 옛날 동숭동 마로니에를 기억하는 동문들이 계신 한 지속한다는 일념으로 존속시켜오고 있습니다만 급변하는 스마트 폰 형태의 SNS편이성과 고령화 되어가는 동숭동 선후배 추세에 따라 문리대 웹도 데스크탑 콤퓨터의 이용 난이도와 함께 언젠가는 끝을 맺게 되겠지요. 차제에 남가주 문리대 선후배님들께서도 이 웹에 족적을 남기실 분 계시면 망설이지 마시고 님께서 간직하고 계신 자신만의 기록, 가족사 이민사 등을 이 웹에 남겨 보심이 어떨른지요. 오랫동안 쓰지 않아 본인의 ID와 Pw가 없는 동문도 이 웹은 ID:visitor와 Pw:mul1234로 login 하여(웹 본문*1) 토픽을만드시면 됩니다. (싣는 방법은 웹 홈페이지, *2과 *3,에 간단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단 이 경우 성함은 토픽 말미에 꼭 넣어 주시기 바랍니다.
문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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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중학교 3학년
1957년 (단기4290년) 6월 1일 토요일 (맑음)
나는 오늘 처음으로 나의 나아갈 앞길을 확실치 못하나마 알게 되었다. 문학! 문학만이 나의 생활을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글을 쓰면 마음이 아름다워진다는 말이 있듯이 정말로 나의 생각에도 글을 쓰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앞으로 더욱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글 짓기. 이 얼마나 성스러운 인간의 책임인가?
5월 2일 일요일 (맑음)
오늘은 일요일인데도 나는 한 일이 별로 없었다. 이곳 저곳 돌아다니다가 보니 저녁때가 되었다. 나는 참으로 마음이 초조했다. 시험을 앞두고도 책을 들면 글자가 머리에 안 들어가니 말이다. 나는 내자신이 왜 이렇게 방탕해졌나 하고 따져보았다. 확실히 요사이 나의 마음 속에는 무엇인지 꽉 잡히지 않는 무엇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좀처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없다. 참으로 딱한 일이다. 내자신이 그러니 할 수 있는가? 아-- 참 어찌해야 좋을지.
어머님, 제발 하숙 방좀 옮겨 주소서.
5월 3일 월요일 (맑음)
오늘부터는 내가 당번이 되었다. 아침등교 30분전인 9시까지 집합하고 방과 후 6시 이상 되어야 집에 가게 되는 것이다. 시험 때라 잘못 걸렸구나 생각하며 책임을 다했다.
5월 4일 화요일 (바람)
바람이 몹시 불어제쳤다. 집이 넘어질 것 같았다.
나는 옆집인 대길이네 집에 갔다. 경상도 사람들은 다 이런가? 어머니부터 아들 하인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마음들이 좁았다. 자기네 물건은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가 하면 조금만 수 틀려도 골을 내고 야단이었다. 나는 얼른 그 집을 나왔다. 다시는 못 갈 집이라고 생각 하였다. 전번에 안 오리라 결심하고 온 내가 원망스러웠다.
1957년(단기 4290년) 5월 5일 수요일 (맑음)
한 일 별로 없음.
5월 6일 목요일 (맑음)
오늘은 현충일. 이 나라 이 국토를 지키기 위하여 피를 흘린 용사들의 넋을 숭고하는 이 뜻 있는 날에 10시에 사이렌이 불자 묵념하는 자는 씨알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당장 우리 학교만 해도 그냥 무관심하게 수업을 진행하고 있으니 이것이 소위 같은 피를 물려받은 단일 민족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한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네들 용사만 아니었던들 우리가 이렇게 자유 분위기 속에서 공부할 수 있는가! 저네들이 활기 있게 걸 수 있고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었던가. 없었던가?!
고인의 넋이여. 고이 잠들라---.
5월 7일 금요일 (맑음)
수학시험을 보았는데 엉망이었다. 아마 과락이리라고 생각하니 아음이 쓰려서 참을 수 가 없었다. 내가 공부 안 한 탓이지. 내가 공부 안 한 탓이지- 나를 한없이 탓 하면서도 나는 어머니를 탓 했다. 왜 나를 공부할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주지 못할까? 집에 가면 애기 울고 학교 오면 귀찮고. 아-- 고달픈 하루여.
독약만 있으면 꿀꺽 삼키고 싶도록 나는 고민했다. 나는 멀리 떨어져 있는 고향을 생각하니 절로 그리운 마음이 솟구쳐 참을 수 가 없었다. 소극적이나마 옆에 있는 전봇대를 주먹으로 탁 쳤다. 그러나 속이 시원하질 못했다. 지금 내 심정으론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왜 이리 마음이 기쁘지 못할까? 남들은 저렇게 좋아라고 뛰 노는데 나는 왜 이리 고독해야만 하는가? 집이 서울이라면 당장이라도 뛰어 가 어머님 품에 안겨 울고 싶었다. 나의 이러한 심정을 탁 터놓고 호소할 한 사람이 없어 더욱 고독하다. 집에 와 어둑컴컴한 방에 들어 앉았다. 모든 것이 쓸쓸하고 귀찮았다. 힘이 하나도 없어서 나는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식모가 쌀쌀하게 구는 것을 보니 나는 그야말로 참을 수가 없었다. 억지로 몸을 이끌어 산에 올라 갔다. 올라 갔다. 더 올라 갔다. 나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올라 가고 더 올라 갔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산꼭대기에 올라가 시가를 내려다보았다. 저 게딱지 같은 집들, 자동차들, 이게 내가 항상 그려왔던 서울! 서울!
갖 서울에 올라와 형님과 단둘이서 바라보던 그 서울과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바라보는 저 서울과는 너무나 차이가 있다. 한낱 신기하게만 바라보이던 저 꿈 많든 서울이 이제는 고생 많은 서울로 변했다. 나에게 그토록 변천 많은 서울, 나를 3년 동안 지지리도 속 썩이던 저 변천 많은 서울, 나의 서울 생활에서 오는 감정은 오직 복잡하고 인색하고 악의 근원이라고 해석하고 싶었다. 내가 앞으로도 몇 년이나 더 정 들일 서울이 이렇게 나의 머리 속으로는 한낱 복잡한 악의 추억으로 물들고 있다. 저 남쪽 하늘을 우러르며 나는 눈물이 글썽해졌다. 아아. 떠나고 싶은 서울, 떠나지 못할 서울, 나는 시골이 그립다. 그립다.
5월 8일 토요일 (맑음)
오늘 2주일 만에 시골로 내려가려고 했더니 내일 백운대 간다 하기에 그만두고 집에 있게 되었다. 잠이 오질 않았다.
5월 9일 일요일 (맑음)
아침에 일어나니 7시10분! 시간이 없다. 나는 부랴부랴 차리고 밥도 안 먹은 채 거리로 나왔다. 전차를 타고 돈암동 종점에 다다르니 학표 형이 와 계셨다. 나는 퍽 반가웠다. 학표 형과 김선생님 댁에 가서 9시에 출발했다. 일행을 세어보니 18명! 큰 숫자이었다. 여자가 5명, 남자가 13명. 일행은 산을 타고 올라갔다. 세 시간가량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간 결과 드디어 백운대 맨 꼭대기에 오르게 되었다. 아- 그때의 시원한 맛. 저 멀리 아물아물 보이는 서울 바닥. 손 바닥만 한 남산! 생전 처음 이러한 높은 산에 오른 것이다. 문득 옆을 보니 수학 선생님이 와 계셨다. 성낙흥 선생님은 나를 보자 반갑게 웃으시었다. 이런 데서 만나는 것도 인연이었다. 이럭저럭 줄도 타고 하여 내려와서 밥을 먹었다. 밥을 먹는데 학표형은 계란 후라이를 해 먹느라고 이것저것 다 못 먹었다. 밥 먹은 다음 내려오다가 깨끗한 냇물에 몸을 씻었다. 차고 써늘한 그 맛! 도회지의 목욕탕과는 천양지차이었다. 집에 오니 7시 반이었다. 모든 것이 재미만 났다.
5월 10일 월요일 (바람)
별로 한일 없음.
5월 11일 화요일 (비)
집에 오니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애기들이 자꾸 울어서 자꾸 신경질만 났다.
5월 12일 수요일 (비 and 맑음)
수학 점수를 알아보니 100점 만점에 55점!
나는 눈 앞이 콱 막히는 듯했다. 내가 왜 이런가? 나는 무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울고 싶었다. 집에 와서 나는 결심을 했다. 절대로 나는 수학이 만일 60점 이하로 또 내려가면 일기를 그만 쓰리라고. 공부를 열심히 하리라고 결심했다.
7월 6일 토요일 (비)
오랜간 만에 일기를 펴 드니 벌써 두 달을 빼먹었다. 나는 그 동안 내가 얼마나 정신 차리지 못했는가 뉘우쳐 졌다.
오늘은 토요일이기 때문에 분주히 차려 가지고 시골로 내려갔다. 가자 마자 나는 강아지 새끼를 가 보았다. 일곱 마리가 어미젖을 빠는 광경이란 참으로 가관이었다.
7월 7일 일요일 (비)
시골에서 밥 먹기란 참으로 맛이 있었다. 서울에서 구미에 당기지 않게 먹히던 밥과는 전연 딴 맛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개목에 있는 누님 집에 가서 설 익은 도마도를 많이 따 먹었더니 배가 좀 쌀쌀하게 아팠다.
7월 8일 월요일 (비)
요사이 근 이 주일을 두고 장마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갑갑해서 못 견딜 정도였다. 아아- 탁 트인 하늘이 그리워졌다. 오늘 우리학교도 인프루엔자 관계로 내일과 모레는 놀게 되었다. 나는 한없이 기뻤다.
7월 9일 화요일 (비)
라디오를 얼추 만들었다. 조바심이 났다.
1957년 7월 10일 수요일 (비)
라디오를 다 만들었다. 그런데 스피커가 없어 실망이었다.
7월 11일 목요일 (비)
한 일 없음
그간 나는 일기를 근 석 달 쓰지 않았다.
어제부터 또 일기장을 향하여 붓을 드는 이때 나는 과거의 가지가지 추억을 억제할 수 없다. 비록 날자는 지났지만 회상해 보면 당장 눈앞에서 일어난 것처럼 기억에 선하다.
그러니까 여름방학 이 시작 된지 일 주일 후, 다시 말하면 8월 말. 이날이 그렇게도 슬픈 날이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으랴? 내가 어머니 젖을 빨 때부터 지금까지 아주 처음 당해보는 인간의 죽음이었다.
인간의 죽음! 그렇다. 그것은 분명히 장엄하고도 지극히 슬픈 일이기도 했다.
할머니. 올해 74를 맞이하여 다 꼬부라진 허리로 내 손 쥐고 밭으로 가시던 할머니! 그 할머니께서 별세한 것이다.
돌아가시기 전 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머니와 둘이 수족부터 차가워 오는 할머님의 병환을 간호해 주느라고 사정없이 엄습해 오는 잡을 물리치기 어려웠다.
집에 와서 새우잠을 잔 다음 아침 일찍 가 보았다. 할머님께선 의식 불명이 되어 눈은 딱 감으시고 말이 없이 숨만 할닥 할닥 괴로운 듯 내쉬고 계셨다.
이제 몇 시간 후엔 이 세상을 하직한다는 것이 확정되어 있었다. 어머님은 어느새 볼 위에 눈물 방울을 흘리고 계셨다.
할머니께서 병세가 심할 때 가까스로 입을 열어 가죽만 남은 손으로 내 보들보들한 손을 만지며 "병길--아-" 하시며 눈물을 쏟으시던 그 순간을 나는 영원히 기억한다.
나는 죽는 사람은 그 순간만은 자기가 죽고 있음을 인식한다고 들었다. 나는 할머님께서 눈만이라도 떠 주셨으면 하였으나.... 할머니는 애석하게도 영원히 가셨다. 열 두시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림과 동시에 할머님도 영원히 이세상을 하직하셨다. 이제는 가셨다. 많은 추억과 많은 희한을 남겨둔 채 영원히 하직하셨다.
"할머님-"
대답이 없다.
할머..............님.............
그만 분수같이 터져 오르는 설움을 억제할 길 없어 눈물이 자꾸만 나왔다.
아이고...아이고... 어머님의 애끓는 울음을 뒤에 둔 채 나는 홀로 뒷동산에 올라갔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두 손이 모아졌고 그 손위에 눈물이 떨어졌다.
할머니.할머니.자꾸만 불러 보고 싶었다.
할머니는 상여에 올랐다. 떠나는 상여에 매달려 애닯게 우시는 어머님을 동네 어른들이 억지로 떼 놓고 상여는 무심이 앞으로 나갔다.
어허, 떨렁 어허, 떨렁....
상여는 나간다.
이윽고 할머님이 매일 갈던 고추 밭에 왔다. 벌써 그곳엔 뫼 자리가 파여 있었다. 할머님은 관에서 나와 그리로 들어 가셨다. 이제 마지막 세상 구경하신다. 옆에서 구경하든 할아버님마저 눈에 눈물이 글썽대는 것을 아무도 몰랐으리라.
관 위로 흙이 사정없이 덮혔다. 그런데 이상하게 뫼 자리가 정 가운데가 아니고 한쪽 구석에 자리가 남아 있었다. 관을 넣을 자리를 왜 저렇게 한쪽에 하나…하는 나의 의문은 노인들께서 주고 밭은 대화에서 다 알 수 있었다. 할아버님께서 돌아 가시면 모시려고 일부러 옆을 비워 놓았다는 것이었다.
아…. 할아버님의 심정인들 오죽 하리오.
날은 저물어 석양의 붉은 노을이 뫼를 비쳐 주고 있었다.
1957년 (단기4290년) 10월 28일 월요일 (바람)
날도 저물어 차디찬 바닥에 이불을 펴고 들어 누었다. 눈을 감았다. 나는 조용히 홰상 해 보았다. 지난 날의 많은 추억들...... 가슴에 벅차듯 많은 회고였다.
중학교 1학년... 형님의 손을 잡고 "저기가 창경원이야" "저기가 광화문이구"... 형님의 말씀에 신기한 듯 고기를 끄덕끄덕하던 때도 어언 3년 전!
이제 또 다른 인생의 문, 고교 입학을 바로 앞둔 나라는 인간에 너무도 무심했던 과거를 청산해야 하겠다. 부모님 슬하를 떠나 이 집 저 집 쓴맛 단맛 다 보며 떠돌던지 이미 3년 나는 눈을 감고 과거를 회상해 보았다.
서울역에 내리자 헽트라이트가 나 보란 듯 몸을 감쌀 때의 황홀함!
서울의 처음 생활은 형이 있던 신생숙에 며칠. 그러나 그곳은 대학생들만의 합숙소로 내가 있을 곳이 못되었다. 그리하여 형 친구가 자취하는 청량리로 찾아갔다. 반찬이 고추장밖에 없음을 알고 적지 아니 놀랐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어 뛰쳐나와 아버지께 진 빗이 많다는 서대문 아버님 친구 댁으로... 그러나 한 달 후 그 집 아주머니가 편지 써 주는 것을 어머님께 전해 드린즉 그 내용은 ‘병길이 때문에 죽 쒀 먹지 않고는 못 배기겠습니다’ 였다.
할 수 있나? 주인 아저씨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대담하게 통학을 결심. 아침 6시에 기차 타서 학교로 오면 10시. 언제나 1시간 아니면 두 시간 늦기가 일수. 저녁은 5시까지 기다리다가 천안 역에 닿으면 밤 9시. 그만 골아 떨어져 자버리고 그리고 또 아침이 다가오고... 이주일간 하니 도저히 못함을 알았다. 그리하여 원효로 하숙집으로... 거기서는 큰형, 상호형, 승호, 넷이서 안락하게 꾸몄으나 어쩐지 3달도 못 되서 갈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관이가 자기 누님과 자취하는 곳으로 옮겼다, 내가 밖에 나가 없을 때만 맛있는 김을 먹곤 하던 관이 누님의 성질이 까다로운 것도 기억에 선하다. 한 달 후 관이 누님이 이사 간다 하기에 같은 고향사람 천홍이네서 하숙. 그 식구와 한방에서 잤다. 천홍이란 애가 우리학교에 보결로 들어오려고 애쓴 것도 기억에 남고....
그러나 마침내 의견 충돌로 천홍이와 싸우고, 고달픈 신세가 할 수 있나, 이젠 할 수 없이 자취하기로 결심, 명륜동 3가 높은 언덕 꼭대기의 ‘박 떠벌이’ 네 집에서 석 달 살았다. 처음은 혜자가 와 도와줬다. 그러나 여자가 아니었다. 분명히 여자이나 내 눈엔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 내 어린 생각으로도 시집가면 매일 부부싸움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은형하고 같이 지냈다. 그 후로 개목 누님이 오셨다. 개목 누님이 오시자 나는 그야말로 행복했다. 반찬이 꼬추장 한가지 일지언정 나는 누님 곁에 있는 것이 행복했다. 그 후 그 아래 동네인 재만네로 옮기게 되었다. 여기서도 웬수 병호형하고 헤어지진 못했다. 도대체 학교도 안 다니면서 서울 와 있는 것이 못마땅했다. 누님은 가고 어머님께서 올라오셨다. 아버님과 말다툼하시고 올라온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머님 곁에 있으니 참으로 즐거웠다. 그러나 그것도 한 때였다. 어머님은 곧 내려 가셔야 했다. 그 후 내가 재촉을해서 동예를 데려왔다. 그러나 그 애는 너무 추잡스러웠다. 매일 코를 흘리고 옷도 기워 입을 줄 몰랐다. 정말이지 그 애는 데려고 있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 후 올라온 아이가 흥렬이라는 여자 앤데 나보다 나이도 더 많이 먹었다. 그러나 그 애의 성질을 나는 당해 낼 수 없었다. 자꾸 집에 가겠다는 것이다. 심심한 것이 고생스럽다는 것이다. 그 후 어느날 그는 도망갔다. 도망가게끔 한 내가 잘못이었다. 후 나 혼자 이럭저럭 자취한지 6달. 그 후 그곳에서 나가라고 했다. 사정이 다 딱하게 됐던 것이다.
후암동에서 명륜동으로 이사한 신생숙에 있기로 결심했다. 숙장 부인이 있어서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나의 큰 과실이었다. 어린애가 둘, 즉 상원이와 애기가 있었는데 시끄러워 공부 못 할 지경이었다. 방도 비좁았다. 지내지 못할 지경이었다.
방학이 시작되었다. 그 후 방학이 끝나자 상원이네 집에 있게 되었다. 천막 집이란 꿈도 꾸지 못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꾹 참고 지난지 2주일. 드디어 나는 이곳 서장댁 하숙생으로 오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또 옮기지 않으면 안 되지 않는가?...............................
회상을 하고 보니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추억을 억제할 수 없었다. 아니 나는 억제하려 하지도 않았다.
이렇게도 복잡하던 과거를 그대로 지나쳐 버릴 수는 없었다. 그러면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만 옳단 말인가?
열심! 그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의 처지는 너무 괴롭다. ‘공부하려면 환경이 좋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믿어온 사고방식이었다. 그렇다 분명히 나는 이 환경에 지배를 받고 있다. 공부는 안됐다. 또한 다른 사람도 나로 인하여 공부가 안된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기에 나는 이렇게 하루하루 있는 것이 바늘방석에 앉은 것과 같이 불안한 것이다. 하여튼 과거는 과거다! 이, 참담한 과거 위에 새로운 희망을 쌓는 길이 바로 나의 인생 항로다.
그리고 아까 종각이와 나란히 걸으며 한 소리도 잊지 않았다.
만일
네가 훌륭해지면 나를 돕고 내가 훌륭해지면 너를 돕겠다고 굳게 약속한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