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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기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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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기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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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byungk
(@moonbyun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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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단기4290년) 중3 제 2부  10월 29일 화요일 (비)

아침에 문득 잠을 깨니 비오는 소리가 귀에 요란하다. 걱정이다. 우산을 상원이네 다가 두고 온 까닭이다. 할 수 있나? 그냥 비를 맞고 가는 도리 밖엔.... 도시락을 열어보니 깍두기였다. 그리고 밥이라곤 살짝 퍼서 도무지 기분이 나지 않았다. 이불 속에 꾸겨 쳐 박고 그냥 집을 나왔다. 물론 비를 여전히 맞아가면서. 하루의 학교 시간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려 할 때는 그야말로 비가 막 쏟아졌다. 할 수 없이 상원이네 집은 들리지 못하고 기성이와 함께 집으로 오니 옷은 젖을 대로 젖었다. 나는 공연히 화가 났다.

저녁상을 보니 고기가 있었다. 나는 요사이 며칠 밥 먹을 때마다 느껴지는 것이 있다. 참으로 나는 집에 계신 부모님에겐 송구스러웠다. 집에선 고기를 자주 사 먹지도 못하는데 벌서 나는 서울서 이렇게 뻔뻔히 먹고 있지를 아니한가? 참으로 나는 아버님 어머닙께 죄송스러웠다. 피땀 흘려 버는 돈, 쓸데없이 낭비하는 것만 같았다.

저녁에 자리에 누우니 시골 생각이 절로 났다. 그리곤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10월 30일 수요일 (비)

집을 떠난 객지생활의 서글픔이라 할까? 어쩐지 집안에 들어오면 허전하고 쓸쓸한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가 다 증오스럽게 보여지는 것이다.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도 쓸데없는 생각만을 하게 되는 것일까? 나 자신도 모를 일이다. 당장 어머님이 앞에만 계시다면......

내가 이런 생각을 뼈저리게 느낀 것도 일리가 있다. 며칠 전부터 옮기기로 약속한 종각이 고모 댁을 찾아가서 몹시 기분 나쁜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집에 오니 어제부터 땐 구공탄이 미지근하게 방을 데워 오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 보니 갖가지 생각이 모두 났다.

아까 오후 학교에서의 일.

타닥타닥 길거리를 걷자니 비에 젖은 프라다나스 나뭇잎이 어깨 위, 머리위로 마구 떨어졌다. 떨어진 위에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그리고는 차디찬 눈의 시련을 받은 다음 새싹이 돋으리라.

인생은 허무하다…귀에 익다시피 듣던 말.... 그렇다. 인생은 허무하다. 이렇게 낙엽처럼 인생은 수 없이 지고 있다. 그러나 얼마든지 돋아나는 새싹이 있다. 그리하여 온갖 것 다 겪고는 또 낙엽과 같은 신세가 되고...

그러나 나서 죽는 것 만이 인간의 참다운 인생 항로일까?

현실에 만족하라…나는 종종 그런 말을 들어본다. 그렇다. 우리는 현실에 만족하여야 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자에게 나는 이렇게 묻고싶다. -너의 말이 맞다고 하자. 그러면 너는 우리가 원시시대의 돌 연장으로부터 오늘날의 원자력 세상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만일 현실에 만족한다면 왜 달나라로 가려 하는가? - 아마 목석의 머리가 아니고 좀더 이해성 있는 자라면 대답을 못 할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우리는 연구 본능이라는 것을 가리처 주어야 한다. 그들은 그럴 때 비로써 참다운 인생의 가치를 깨달으리라.

지구는 돌고 있다. 쉴 새 없이 돌고 도는 그 흙덩이 위에서 인생도 돌고 도는 것이다. 황혼이 스며들면 저승에 가서 닭 우는 소리에 깨듯, 인생은 태어남의 첮발을 딛고, 마치 길가에 떨어지는 낙옆처럼 사라지듯 그렇게 돌고 돌리라.

어느새 낙엽은 손에서 바스러지고 걸음걸이 무겁에 집에 돌아오다.

 

10월 31일 목요일 (비)(중 3)

날씨는 우중충했다. 교실의 맨 구석. 그것도 제일 앞에 자리 잡은 책상은 어떻게 생각하면 쓸쓸한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두드러진 자리 같기도 했다. 어느 때든지 나 혼자만이 바람에 흔들려 나뭇잎들과 하직하는 우수에 젖은 프라다나스 나무를 보는 것이 나는 한없이 서글프다고 할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슴에 벅차오르는 추억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이다. 점점이 횐 구름이 떠있는 하늘을 나 보란 듯 대하고 누어있는 논. 논. 그 논에 미루나무가 점점이 서있고 그리고 그 한 끝에 있는 초가집. 눈에 선하다. 그리고는 바로 이어서 국민학교의 꿈 많은 추억이 꼬리를 잇는 것이다.

아아. 정말로 아까운 추억 다시 한번 볼 수 없는 귀중한 추억이기도 했다. 한편 아쉽기도 하고 한편 즐겁기도 한 추억이었다.

나는 이것을 잊지않는다.

내가 국민학교 1학년 때 그때 집에서는 양복점을 제법 크게 벌여놓고 있을 때였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뭐든지 해야만 하는 개구쟁이 성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재봉틀을 가지고 장난하다 그만 왼편 엄지 손가락을 꾀 뚫어 버렸다. 그대 상점을 쓸고 있던 병직이 형이 달려와서 겨우 바늘은 빠졌다. 그때 어머님의 놀라움. 허둥지둥 고약을사서 부치든 때가 영원히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가끔 어머님으로부터 내가 어렸을 때 어찌나 신발바닥을 잘 핥는지 식구들이 그만 신발 둘 곳을 찾지 못했다는 좀 쑥스러운 추억들도 듣는다. 그러나 이것이 다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이겠거니.....

나는 왜 나 어릴 때의 사진이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은지 섭섭했다. 지금 6살 때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을 뿐이다. 나는 그것이 섭섭했다. 버젓이 부랄 내놓고 찍은 것이 없어 사진 볼 때마다 서글픈 것이다. 그만큼 나는 어릴 때 많이 앓았단다. 너무 앓아서 사진 찍을 여가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요사이 나는 사진을 무척 많이 찍는다. 소풍 가서도 그 숫한 사진을 찍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학창시절을 사진으로나마 회상하려 한다.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니 벌써 다음 시간 선생님이 들어오고 계셨다.

 

11월 1일 금요일 (맑음)

오늘도 또한 하숙문제로 종각이와 함께 안국동을 갔다. 그러나 아무도 없고 종각이 누님만 계셨다. 매일 하는 그 소리가 또 되풀이됐다. 그리고 올 때 규승이 집에 들러 전할 편지를 주었다.

그리고서 힘없이 집에 돌아오는 길이다. 문득 고개 숙여 발 밑을 보니 무참이 양키답배 하나가 자동차 바퀴에 눌려 납작 해저 있었다. 그것도 휠타가 달린 채 끝만 조금 빨다가 만 그러한 담배이었다. 그것을 보니 나자신 무언지 이상하게도 마음이 꺼리는 것이다.

국산품 애용 이란 표어를 우리는 가끔 본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로써 하는 것은 재목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목수에 비하고 싶다. 즉 아무리 좋은 목재라 할지라도 그것을 목수가 일 해야만 집이 지어지게 된다. 즉 아무리 미사여구로써 말만 꾸며 논들 그것만으로 어떻게 행동전부를 인정할 수 있는가? 재목이 좋다 하여 재목보고 집이라고 할 수 있는가?

나는 국산품을 아껴야 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전적으로 외제만 쓴다고 하자 국민의 자각심은 물론 우리의 경제는 얼마나 궁핍해지겠는가?

외국 물품에 압도되어 우리나라에서는 생산할 수도 없다.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나라보다 더 비참한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요사이 우리나라에서도 무엇을 좀 만들어 내는 것 보면 좁은 내 가슴에도 벅찰듯한 기쁨이 솟아오른다.

생각하며 걷는 동안 어느 새 발길은 대문 앞에 멈췄다.

 

1957년 (단기4290년) 11월 2일 토요일 (맑음)

하늘은 푸르다. 참으로 청명하고 고왔다.

종례시간에 통지표를 내주는데 받아보니 평균이 85점이었다. 점수 자체로는 대단히 나쁜 성적이었으나 전번보다 훨씬 오른 걸 생각하니 과연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앞으로 얼마든지 더해야 된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종례시간에 종각이 시골 가자고 했다. 가서 며칠 놀다 오자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집에 갈 때마다 환영 못 받는 것이 지금 나의 처지가 아닌가?

나는 일부러 돈 들여서 시골로 내려가 섭섭한 소리는 죽어도 듣기 싫었다. 물론 집에 가고싶은 마음은 많았으나 가기 싫은걸 억지로 갈 순 없었다.

그리고 집에 왔다.

집에만 오면 우울해지는 것이다. 참 이상한 노릇이다.

대교....국정이....병길이...

나는 이 집에 오면 셋이 어울려 공부가 잘 되리라고 믿었다. 또 그렇게 되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들이 나는 미웠다. 나는 내 마음이 좁은 탓인가 하고 스스로를 타일러도 본다. 그러나 더욱더 미워지는 것이 그네들 두 존재이었다. 내가 만일 그네들을 잡아놓고 싶었으면 벌써 완력으로라도 잡아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가슴이 답답해서 금방 주먹을 올리고 싶은 때도 내가 내자신을 타일러야만 하곤 했다.

앞으로 중학 졸업할 때까지 꼭 4달. 이제야말로 가장 크라이막스에 오른 시기가 아니고 무엇이랴.-----

 

1957년 (단기4290년). 11. 3. 맑음(중 3)

즐거움 뒤에는 괴로움이 온다는 것이 인간의 벗어날 수 없는 법칙이라 할까? 오늘 일요일은 너무 놀았다. 시공관에 가고 동무 집에 가고 그나마 집에선 공부도 않고…

오늘 시공관에 가서 본 연극 감상을 써보려 한다. 난생 처음, 16년 만에 보는 극인지라 미상불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시공관 앞은 사람으로 초만원이었다. 한시에 들어가기로 약속한 것을 사람들이 너무 많아 3시 반으로 하기로 했다. 그 동안 동화백화점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들어갔다. 삼 막 사장. 막이 열리자 무대가 나오는데 흡사 보통 집과 똑같았다. 제목은 인생차압’. 줄거리는 이러했다.

송정민은 강정수의 사위이었다. 그런데 송정민은 과거 일본 사람들이 관리하든 산을 자기 소유로 모략하여 돈을 벌다가 그만 발각되고 만다. 그리하여 감옥소에 들어 가 집안 식구들은 걱정에 싸인다. 무대는 바뀌어 장정수가 감옥에서 나온다. 집안 식구들은 모두 반가워했으나 후에 그의 이야기를 듣고는 실망한다. 즉 그는 사기, 협잡, 모리배의 죄명으로 붙잡혀 철 장 신세가 되었으나 자기의 재산 6억5000 만 환을 걸고 며칠 나왔으니 이제 언제 가는 다시 철 장에 들어가야만 된다는 것이다 이때 그의 친구 김숭의가 교묘하게 일을 꾸민다. 즉 강정수를 거짓 죽은 체하게 하여 이세상에 강정수란 이름을 없애 버리자는 것이다. 막 죽는시늉을 연습하고 있는데 무대 한쪽(문)에서 지게꾼이 관을 들고 나타난다. 일동폭소. 무대는 바뀌고 병풍 뒤에 시체를 놓고 중들이 열심히 염불을 한다. 그 귀에서 사위 송정민은 그만 꾸벅꾸벅 졸고 있다. 일동폭소. 송정민이 퇴장한 뒤 병풍 옆에 손이 쑥 나온다. 그리하여 산 송장인 강정수가 흰옷을 걸친 채 나온다. 이때 목탁을 뚜드리며 돌던 중들이 그만 기절 초풍을 하며 달아난다.

그리고선 다시 무대는 바뀐다. 이제 경찰서에서 의사 한 분과 함께 와 가지고 시체 조사를 한다. 이때 강정수의 친구 김숭의가 그의 유서를 다 외워버려 점차로 일이 폭로되는 원인이 된다. 그리하여 경찰은 다 눈치 채고 냉정하게 이 집 재산은 국가의 소유이며 상속자는 없다고 선언한다. 이 때 병풍 뒤에서 뭐라고? 하고 소리친다. 이에 모두 놀란다. 김숭의는 어쩔줄 모르고….

순경을 모든 것을 알고는 돌아간다. 그 후 강정수가 관에서 나와 걸상에 앉는다. 이때 식구들이 모두 나온다. 나와서 송정민(사위)을 보고 일을 신속히 처리 못했다고 야단한다. 이때 처음으로 송정민은 조잘대는 자기의 아내에게 분연히 일어나 꾸짖는다. 이때 송정민의 동생 정수가 나타나 식구들은 얼싸안고 기뻐한다. 그리고서 정수는 식구를 모두 데리고 퇴장하며 자기의 아버지 (강정수) 보고 질책한다. 혼자 남은 송정민은 그만 방에들가 떨어져있던 칼을 들어 자살하고 만다……….

이때 아범(일꾼)이 밥상을 들여오다 이것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사지를 와들 와들 떨고 그만 상을 엎는 것이다. 그리고선 그렇게도 아쉬운 무대는 점점 어두워진다.

시공관을 나와 병욱형을 찾아가니 시골서 나에게 보낸 돈을 3000환 밖에 주지 않았다. 천환을 덜 준 것이다. 나는 화가 났다. 당장 집 같으면 대들겠는데 남의 집이라 꾹 참고 오는 수밖에 없었다.

 

11월 4일 월요일 (맑음)

나는 아버님께 굳게 약속했다. 이제부터는 새 출발을 하리라고.  나 자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저녁때 나는 소위 양갈보라는 색시 아닌 부인들이 끌려 가는 것을 목격했다. 한 7명이 손에 밧줄로 묶여져 한데 뭉쳐있었다. 길 갈 때 밝은 데만 보아도 그들은 기겁을 해서 뛰어가곤 했다.

아. 나는 그네들이 불쌍했다. 저 타락된 인간들은 어찌하여 밝은 곳을 피해야만 하는가?  저네들도 분명 착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저네들은 이제 인간 세계에서 한 걸음 물러난 패배의 무리들이리라. 이윽고 그들은 경찰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내 눈에도 퍽 음탕 해 보였다. 매혹적이라고 느껴졌다. 마치 그네들은 직업에 무슨 귀천이 있느냐는 듯이 태연했다. 나는 그네들 얼굴에다 침을 뱉어주고 싶었다. 도대체 인간으로써 저럴 수 있겠는가?

미국 놈들도 퍽이나 점잖지 못하구나 생각한다. 그러한 야수 밑에서 갖은 곤욕을 치르는 것이, 그리고도 그런데 대한 아무 반성도 하려 하지 않는 그네들이 퍽이나 동정심도 가고 또한 한민족으로써의 저주가 가곤 하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기차를 타고 갈 때 미국 놈들이 지나가는 찝차에 양갈보를 그냥 집어 던지는 장면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 이것이 한국의 처지를 가장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슬픈 지경에 놓여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 동시에 우리 젊은 청년이 나라의 기둥이 되어 이러한 모든 부패한 점을 고쳐야 된다고 생각했다.

 

1957년 (단기4290년) 11월 5일 화요일 (맑음)

화신에 있는 영화관에 갔다 종각이와 함께.

집에 와서 보니 저희들끼리만 과자를 먹고 있었다. 화나는 김에 저들이 자는 틈에 나머지 과자에 쓴 산토닝 가루를 넣고 도루 제자리에 넣었다.

그리고 또 비누가 없어졌다.  이제 두 번째다 그놈의 쥐가 물어 가는 것이다.

나는 정말이지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미상불 의심스러운 마음도 생겨나는 것이다.

참으로 화가 났다. 당장 가서 하나 사오니 마음이 풀렸다. 그러나 오늘만도 근 400환을 쓰지 않았나? 집에다 한 편지가 생각 날 때 마다 마음이 꺼렸다.

 

11월 6일 수요일 (맑음)

도대체 먹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가 보다.

그 먹는 것에는 체면도 염치도 없는 것 같았다. 학교에 가서 좀 먹으려고 사탕 몇 개 산것이 몽탕 없어져 버렸으니. 하여튼 그런 일 가지고 탐정하긴 싫지만 가져 간자는 맛있게 먹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분했다.

방과 후 학급 신문 관계로 원고를 쓰느라 늦었다. 서울 문리대에 가니 형은 없었다. 돈 떨어져 신발 떨어져 앙말도 떨어졌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집에 오니 배가 몹시 고팠다.

가만히 드러누워 공상을 해보았다. 나는 이러한 공상의 시간을 갖는 것이 참으로 즐거웠다.

내가 만일 고교입시를 무난히 돌파하면 고등학교에서 사친회비를 안내고 다니게끔 하겠다. 그리고 또 대학시험에 통과하면 4년간 또 공부하고 다음 학사가 된 다음 대학원을 나와서 석사가 되면 몇 년 더 배워 박사가 되고, 더 나가 미국 유학을 갔다 온 다음 일생을 교육사업에 바치리라.

그러고 보면 앞으로 공부할 햇수가 10년, 지금까지 공부한 것이 10년 그러고 보면 일생동안 20년, 즉 일생의 1/3을 공부 하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길기도 하다. 공상을 하다 보니 벌써 졸음이 왔다. 나는 문득 국어책을 집어 들며 이공상이 다음에 꼭 실현되기를 빌며 공부에 들어갔다.

 

11월 7일 목요일 (맑음)

요사이 나는 무엇인가에 자꾸만 생각이 사로잡힌다. 뭘 꼭 만나도 보고 싶고…시골의 할머님 생각이 나는가 하면 국민학교 때 같이 다니던 동무들 생각이 나고 또한 지금 동무들도 자꾸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리고는 나쁜 잡지를 볼 때마다 공연히 무엇에 마음이 사로잡히는 것이다. 요사이 나는 그러한 생각이 부쩍 늘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사춘기인가 생각도 되었다. 하여튼 모든 잡념을 죄 버리고 학업에 열중해야 할 내가 자꾸만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 도무지 공부가 안되는 때가 있다.

오늘 방과후 남아서 원지를 긁었다. 그런데 나는 집에다 놓고 온 밥 생각도 있으려니와 요사이 도무지 매일 늦게 가기 때문에 공부가 통 안됐다. 그래서 일찍 가려고 서두른 것이 그만 선생님도 눈치 채신 모양이다. 빙그레 웃으시면서 병길은 애인이 기다리나 보지?’ 하시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예사말로 한 것이나 나는 가슴이 찔금 했다. 매일매일 사로잡히는 악귀의 생각(망상)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주위에도 이런 사람들을 얼마든지 본다. 소년윈의 소년들 대다수가 매춘 굴에서 적발되었다는 것. 사회에선 그네들을 변태 성욕자라고 하나 나는 그렇게 간단하게 판결 내리는 사회가 의심되었다.

그리고는 내 동무들 중에도 그러한 애를 많이 본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나쁘다고는 절대로 생각치 않는다. 누구든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한 존재로써의 생명을 가진 이상 이러한 시기를 갖는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인간의 진리가 아닌가? 만일 이것이 죄악이라면 인류사회는 모두 한 번씩 죄를 지었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만일 이세상 사람들 모두가 언챙이라면 서로 언챙이라고 비난할 것인가? 그건 절대로 아니다. 따라서 나는 이 변태성도 비난할 것이 못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망상하며 동경하는 정도면 괜찮을 것인데 나는 그 정도를 지나치니 탈이다. 신문이나 잡지에 보면 매일매일 소년 소녀들의 치정사건이 신문면이 좁다고 날뛰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가? 하여튼 그들을 변태성욕자라는 인간 외의 인간으로 치부하는 것은 잘못이라 생각한다.

나와 국민학교 동창인 규승이도 내가 보기엔 너무 조숙한 듯했다. 도시 그 애하고 다니면 여자만이 눈 안에 들어온다. 늘 하는 얘기가 여학생이 어쨌다는 등, 누이하나 삼았는데 편지 좀 써야 되겠다는 등….

그러나 절대로 난 그를 불량배 아니면 변태성으로 보지는 않는다. 어렴풋이나마 나 자신도 그런 생각을 가지면서 누구를 탓한단 말인가? 그리고 또 내 주위에서도 수많은 얘기를 듣는다. 입술이 좀 부르터 가지고 오면 하도 키스해서 입술이 부르텃다고 하고…하여튼 우리는 지금 사춘기에 놓여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남자 친구가 얼굴이 좀 예쁘장하면 여자이름을 붙이면서 그대여 나를 사랑해달라….어쩌구 저 혼자 감격에 넘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꾸 그를 건드리다가 맞고는 오 나는 그대에게 맞는 것이 행복 하도다…하는 것이다. 들을수록 우스운 말이나 그것도 나쁘게 생각할 순 없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나마 가져보는 우리야말로 얼마나 재미있나? 인간의 즐거움을 이런 데서 맞보는 것이 아닐까? 내가 국민학교 때 놀던 생각을 하면 참으로 갖 가지 추억이 새롭다.

그때는 남녀 공학이었다. 우리는 곧잘 여자와 싸웠다. 싸우느라고 공부를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자 중에서 왕초, 지금도 잊히지 않는 그 이름, 박금자, 그 왈가닥이, 우리보다 나이가 서 너 살 위였다. 나의 그때 생각에도 그 여자 애는 참으로 남자 이상이었다. 나는 항상 그 애보다 키가 작고 또한 힘도 약했기 때문에 항상 눌렸다. 오직 내가 복수할 방법은 말로써 하는 것이었다. 겨울철에 눈싸움을 하는데 나는 그 애만 때렸다. 내가 던진 눈덩이가 그 애의 눈을 맞혔다. 전부 교실에 들어왔다. 아니나 다를까 박금자가 엉엉 울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가슴이 찔끔했다. 들어오자마자 그 자리에서 남자들을 하나씩 하나씩 심문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무서워서 뒷문으로 슬슬 빠져나갔다. 지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와 참지 못하는 것이다. 그 박금자를 요전번 여름 방학 때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때도 우리는 너무나 반갑고 또한 번개같이 스쳐간 그 옛일이 회상되어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웃음을 그쳤다. 지금 생각하면 국민학교 때 나에게는 둘도 없는 적이었으나 어찌 보면 그가 나를 퍽 귀여워해준 것 같았다. 하여튼 이것이 과거의 일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 나이도 어느덧 어른기에 들어간 것이 아닌가. 때로는 장래의 달콤한 생각을 상상하는 것도 즐거우리라. 하여튼 나는 주위에서 이러한 것을 수없이 듣는데, 지금은 절대로 잡념으로 시간 보낼 때가 못 된다. 좀더 진리를 탐구하고 또한 커다란 문을 눈앞에 둔 나로써 이러한 잡념은 일단 보류해야 될 것이다.

 

1957년 (단기4290년) 중3  11월 8일 금요일 (맑음)

아침에 학교에 가니 웬 대학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형의 친구이었다. 그런데 내가 상탄 것, 영어 편지식 책과 돈 천 삼백 환을 보내셨다. 그 대학생 말이 낼 모래가 네 생일이니까 그날 쓰라고 어머님께서 삼백 환을 더 넣어 주셨다는 것이다. 나는 참으로 고마웠다. 대학생과 헤어진 후 가만히 생각 해 보았다. 그간 나는 내 생일도 깜빡 잊고 있었던 것 아닌가? 나 자신 모르고 있었던 것을 어머님께서는 다 알아주시고 돈을 보내지 않으셨나? 나는 참으로 감사했다. 어머님의 위대하심을 다시 한번 느껴보는 것이다. 아마 일부러 외우려고 해도 외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걸 어머님께서는 다 아신다. 나 혼자만이 아닌 것이다. 형들 생일 아버지 생일 할아버지 와 삼촌, 할머니 생일 이런 것을 다 외우시는 것이다. 도시 모성애란 이런걸 두고 말 하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부모님의 지극하신 정성엔 삼가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님! 참으로 지극하신 그리고도 다정스런 어머님이시다. 아버지한테 매 맞고 나면 과자 사주며 달래는 것도 어머님이기도 하다. 영어에도 아버님은 집을 만드시고 어머님은 가정을 만드신다는 말이 있듯이 정말 아버님은 집을 만드시는 것이다. 대개의 가정이 아버님은 엄하시고 어머님은 인자하신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어머님 곁에서 어리광만 부릴 때의 나는 벌써 지난 것이다. 미국에서는 나이 20세 이상이면 집에서 일체 돈을 대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와 비길 수나 있는가? 나도 가끔 생각하는 일이지만 나이 20세 이상이면 내가 벌어먹고 살겠다고 생각해 본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여튼 어머님의 고마움을 오늘에야 절실히 느꼈다. 그런데 나의 기쁨이라면 기쁨이랄까. 나는 나서부터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싸움하시는 걸 통 못 봤다. 어머님은 어머님대로 생활고를 이겨나가며 꾹꾹 참으시고 또 무던하신 아버님께 그런 표정도 지으시지 못하시는 것이다. 다같이 질 고생인데 누구를 탓하겠는가? 우리집 같이 원만한 집안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집에만 가면 나를 망난이로 취급하고 장난꾸러기로 취급하는데 심통이 터졌다. 그래도 객지에 나와서 버젓이 있는데 아마 집에선 내가 객지에 나가서도 그런 생활을 하고 있는 줄 아나 보다. 집에서는 집에서 새는 바가지가 나가면 안 새나’ 하는 격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튼 모든 것을 알 날이 오겠지…. 하여튼 어머님은 고마운 하나의 등불이기도 하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공연히 마음이 뒤숭숭한 게 신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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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 21/03/2026 11:54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