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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단기4291년) 7월 2일 (고 1)
일기에 손을 대지 않은것이 벌서 3개월이나 지났다. 그동안 나는 나의 생활이 얼마나 무질서한 생활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며칠 전부터 고쳐먹고 고쳐먹고 하여 겨우 붓을 들었다.
그동안 나는 많은 파란을 격었다. 그리고 이곳 친구인 인용이의 알선으로 손바닥만한 방에 혼자 있게된 일, 하숙비는 형이 중앙에 교편을 잡은 관계로 형이 혼자 부담 하게된 일-. 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일은 몇천, 아니 수만가지다. 그러면서도 이걸 다 적지 못하는 내 마음도 안타까웠고 또한 나자신 뉘우쳐 졌다. 이곳 삼선교는 비교적 조용한 언덕받이 집이다. 이집은 어느정도 가정 분위기가 떠도는 가정이다.
나는 분명히 5월 12일 이곳으로 왔다.
연순이누나, 행자, 양숙이, 그리고 그렇게도 잘싸우던 국정이, 대교, 어른인체 뽑내던 인태, 같은 하숙생이던 형택이...
모두 얼굴들이 한 옛추억으로 남았다. 언듯 국정이와 그렇게도 철없이 싸우던 것이 뼈에 사무치게 후회도되었다. 결국 나는 이집에 와서 희미해가는 그네들의 옛추억 아닌 추억을 차차 잊을 수가 있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는 새지 않을가 하는 속담도 있다. 하여튼 이집에 온지 한달도 안되어서 트러블이 생겼다. 나와 같은 하숙생에 종의라는 애가 있는데 그애는 지금 경동고등 2년이다. 나는 나자신 그가 퍽 수준이 낮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지식(일반지식)이 퍽이나 유치하다는걸 알았다. 이로써 자존심과 투지력과 시기심으로 가득차 있는 나에겐 얼마간 쾌감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모든면에 세심한 이해관계를 맺으려 했다. 하어튼 몹시 용렬했다. 언제나 누구한테나 몹시 마음이 좁고 신경이 날카롭고 신경질이 많다는 나보다도 더 단수가 높은것 같았다.
이렇게 저렇게해서 어느날 트러블이 생겨 나는 그애한테 맞은적이 있다. 맞자 마자 나는 몇개월 전 나자신이 국정이를 때리던 생각을 하니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이상야릇한 웃음이다. 기뻐날뛰는 웃음도 아니요 또한 슬픈 미소도 아니다. 이리해서 날이 가는 동안 나는 이집에 어느정도 정을 붙이게되었다. 그렇다-! 남이 뭐라하건 나 자신 옳다고 생각되는 일은 끝까지 하자! 하숙생활을 하니 가끔가다가 나자신 비굴해지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때 내마음과 굳게 싸우자. 또한 여지껏 나는 몹시도 무질서한 생활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었다. 이제부터 새 출발이다.
1958년 7월 3일 수요일 (맑음)
결국 자리에 누어보니 별 생각이 안낫다. 오늘도 무미건조하게 보낸것만 같다. 우선 공부는 한자도 않했다. 학교에서 얼마나 결심에 결심을 거듭하였던 것인가? 이렇게도 실천력이 없었던가? 자기의 결점을알고 이걸 고치는 힘 나는 그 힘이 가장 위대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각자는 각인의 개성이 있어 뚜렸한 구별을 보이지만 단하나 모든 사람이 공통적인것. 사회앞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걸 위해 소위 체면이라는게 있게되고 그래서 자기자신 생존경쟁에 일생을 바치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이러한 결점이 왜 생겼을까?. 결국 간접적이고 직접적인 이유로써... 쓰다 보니 나도 모를 이상한 문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여튼 나는 내가 얼마나 실천력이 부족한가를 절실히 깨달았다.
1958년 (단기4291년) 7.7 월요일
오늘부터 우리는 머리를 기르게 되었다. 스포쓰가리인데 나는 꼽슬머리라 뭐그리 반가운 소식도 아니었다.
오늘 점심 시간에 시골서 아버님께서 올라오셨다. 반가왔다. 아버지는 몹시 초라하게 보였다. 아버지 말씀을 듣고 나는 몹시도 실망했다. 지금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이사실을 여러 번 들어 안 바 있지만 정작 아버님께서 듣고 보니 나는 몹시도 괴로웠다. 형과 같이 자취한다… 그러고 보면 방학 때 시골 내려가야 뭐 상점에만 틀어밖혀 있어야만 되지 않는가?
그렇다. 내가 상점에 있는것이 혹시 방학 동안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신의 계명인지도 모른다. 종각이와 맹경산 가자는 것, 귀상이 샛별희에서 가이도 캠핑 가자는 것… 아아 괴롭다. 그러고 보니 아버님이 너무 초라하셨다. 신고 계신 구두도 헌 구두이고 옷도 아까징끼로 얼룩이 진 옷이다. 와이샤쓰도 그렇고… 형편을 봐서 해야지 하시는 아버님의 얼굴…
나는 그만 울고 싶었다. 나는 아버지께서 백환짜리 스무장 내주는 걸 받았다. 순간 나는 지금도 상점에 웅크리고 앉아 진열장의 약병들을 보고 있는 어머님이 환상에 어린다. 순간순간 나는 너무나도 괴롭다. 왜 나만이 이럴까, 아버지께서는 우리보다 가난한 사람이 숱한데 뭘 그러냐고 하셨다. 허나 그 말씀 가지고 나는 하등의 자극도 받지 않았다. 종각이도 시계사고... 시골서 꼬박꼬박 보내주시는 돈. 나는 어디다가 다 썼단말인가? 몇번 결심에 결심을 거듭 하면서도 실천 못하는 나의 버릇. 아버님, 어머님, 이러한 가정환경에서 나는 나와 굳건히 싸워 이겨야만 한다.
1958년 (단기4291년) 7월 8일 화요일. 바람
학교가 파하자 종로3가로 가서 모타를 사려다 그만두었다. 도대체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어찌할 수가 없다. 선풍기를 만들어서 더위에 땀흘리시는 어머님앞에 놓아야 하겠는데,
버스에서 덜컹거리며 올때 아까 명_이에게서 온 편지를 다시금 더듬어 보았다. 그 보드라운 살결에 크고 영롱한 두 눈동자. 지금쯤 어떻게 지낼까? 언제나 희디한 얼굴에 웃음을 피고있는 예쁘장하고 복스러운 얼굴. 그가 그런 얼굴의 소유자였기에 나는 너무나도 그를 볼 때마다 외면했다. 왜 외면이 될까? 나의 자존심은 강했다. 나의 마음이 그쳤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는 나와 다투던 대상자가 아니었던가. 그가 타교로 간 뒤에도 한없는 적개심이 복바쳐 올랐으나 지금 이편지를 생각 할 때는 어디한번 보기나 했으면 하는 마음만이 간절하다.
1958.7.10 목요일. 바람,맑음
오늘도 하루가 다지났다. 시조 써낸것을 선생님이 읽는데 나는 내시조가 얼마나 유치하다는것을 깨달았으며 내가 얼마나 얕은 문학의 길을 걷고 있는지를 여실히깨달았다. 속으로는 마음으로나마 영어에 목적을 둔것이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밤에 잠자리에 들어서 나는 또 그짓을 했다. 이것이 나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치지 못하는 게 어쩔 수 없었다. 이걸하면 키가 커진다는데 아마 내가 다른애들에 비해 조금 더 자란것도 이것 때문이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허나 이것은 억측, 생물학상으로 버젓이 성장홀몬이 막혀 못나오면 발육이 늦어진다고 써있지 아니한가? 그치려 노력해도 할 수 없는것.
아아~ 일시적인 쾌감을 위해서 나는 총각에서 자꾸 멀어지는 것일까?.
1958.7.11.금요일 맑음
오늘 지능지수 검사표를 나눠 줬는데 50점으로 초 내양성으로 나왔다. 이걸 받자 나는 앗찔했다. 설마 설마하면서도 나는 내자신 역시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초내양성, 내가 얼마나 소극적이고 조밀조밀한가? 이성격을 고치려면 하루 이틀에 되는것은 아니리라. 몇년, 혹은 몇십년을 두고 꾸준히 노력해야 되리라. 아아… 오늘부터 일기장에 내 행동의 결점들을 하나하나 적어 보리라. 우선 나는 동근이 라디오에서 꽝꽝소리가 나는것이 속으로 은근히 시기가 났다. 이어찌 마음좁은 행위인가? 초내양성이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때 부모님들이 너무나 경솔하다고 매일 걱정한것이 그대로 생각 났다.
1958.7.12. 토요일. 맑음
나는 언젠가 윗사람한테 이런 말씀을 들은적이 있다. 자기 인격의 도야는 외부환경에 지배되는바 매우크므로 먼첨 착실한 친구를 사귀어야만 된다는것이다 라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이 여지껏 옳다고 주장해 왔고 또한 내 실지의 경험을 통한바 그 사실이 꼭 맞는 이론이다. 그렇다면 내주위의 친구들은 어떤가.
먼저 나와 가장 관계가 길은 인_이다. 인_이는 쾌활명랑한 아니다. 무슨일에 금방 화 났다가도 금방 풀린다. 초외양성이다. 그러나 한가지 줏대가 없다. 너무나 단순하다. 하여튼 우리들 친구 사이에는 상당히 원만한 애다. 다음은 융_이다. 도대체 나는 이 애 행동에 대해서 좋은점을 하나 발견할 수가 없다. 자기 혼자만이 선한 체하고 자기 혼자만이 착한체 하는데 밸이 틀린다. 저의 집에 놀러가면 대개 조그만 일 가지고 토라지기 일수다. 뭐좀 만들어 달래도 제 성미에 맞지 않으면 해 주지 않는다. 그러고 더럽게 마음이 좁다. 땜질하는 고대를 쓰려해도 옆에서 지켜보며 아주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나 내가 빌려쓰는 입장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정말 못참을 지경이다. 그리고 너무나 자기를 과대평가한다. 시험본 후 그애 말을 들으면 대개가 90점은 넘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아주 떨어진다. 서울 고등학교 시험 치룬다고 입시총정리 한번 보고 자신만만하게 나서는 아이라면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누가 보면 퍽 대담한 성격이라 하여 높이 평가할지 모르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몇년간 그와 사귄 나는 그의 성격을 속속들이 알고야 말았다. 새삼스러히 말하자면 과거 그는 종3에서 도둑질하다가 들켜 정학당한 도둑놈이 아닌가? 혼자서 선한 체 하는놈… 퉤퉤..
그 다음은 홍_이다. 이애는 비교적 줏대가 없어서 고집이 그리 세지는 못하다. 도대체 고집은 있어도 더럽게있다. 정말이지 요사이 두어달동안 라디오때문에 얼굴에 주름살이 펴질날이 없다. 어떤땐 그놈의 면상을 시원하게 조저주고싶다. 또 왜 그렇게 소극적인지, 내가 그애하고 함께 자취하다가 그만 둔것도 참으로 다행이다. 퍽이나 소극적인 아이다. 다음은 계_이다. 이애는 우리들중 제일 마음씨가 싹싹한애다. 그러나 좀 적극성이 없다. 무슨일이고 될대로 되라 형이다. 학교에선 퍽얌전한 학생이나 교문만 나서면 말광량이 요귀이다. 우리 친구들 중 제일 유순하고 싹싹한애다. 다음은 효_이다. 이애는 내가 과거에도 많이 격어봤지만 너무도 간사하다. 자기의 장점은 설명을 세부하게 붙여서 전달하기에 입에 침이 마르지 않는다. 하여튼 무리하게 타산력이 강한 애다. 다음은 한집에서 사는 종_다. 나는 거의 두달을 걸쳐 대강이나마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집에서 외아들로 컷기 때문에 밖에 나와서 그짓 그대로 할려고 한다.
- 퍽이나 소극적이고 조그만 일에도 신경을 쓴다.
- 제 주먹을 너무 믿는다. 언제 한번 데게 터져야만 제정신이 들 애이다.
- 자존심이 강해서 시기김으로 변한다. 남한테 지기를 무척 싫어해서 가끔 충돌이 생기기 쉽다.
- 누구든지 자기 아래로 내리 누르려하는 성질이 있다.
이상 말한 것 같다. 나는 먼저 이집에 들어왔을때 인_이가 우등생이라고 소개해 주길래 퍽이나 마음이 좋고 편한 애려니 생각하고 놀고 또 말한것이 첩보원 인_으로부터 듣고, 당장은 아니라도 나중에 큰 봉변 작은 봉변을 당했다. 이제부터는 얘에대해서 전적으로 조심 해야겠다.
이상 적은 것 같이 내 친구들은 너무나 소극적이고 신경질적이고 마음이 좁은 친구들인가 알수있다 그러면 나는 영원히 이애들과 접촉하며 환경의 지배를 받아야만 옳은가?
1958년 (단기4291년) 7월 16일 수요일. 맑음
통지표를 나눠줬는데 떨리는 손으로 펼쳐보니 수가 두개밖에 되지 못했다. 내성적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책상설합에서 도장 꺼내 찍었다. 금요일까지 내라는걸 낸들 어떻게 하란 말여?
방학도 이틀밖에 남지 않었는데 억울하게 지금 시골 가란 말여?
7월 17일 목요일. 맑음
오늘은 제헌절이기 때문에 학교에 가지 않게되었다. 집에 앉아있자니 심심해서 죽겠다. 제헌절이라고 기껒 감격적인 일시적 마음이나 만들어 보려고 애썼으나 내가 그때는 너무 어려서 뭐가뭔지 몰랐든고로 지금 터무니없이 감격할수도 없는 일이다.
10시부터하는 중앙청 광장에서의 제헌절 기념식을 청취하고 나니 무서운 졸음이 나를 엄습하여 한잠 자고 나니 12시 정오가 넘었다. 라디오를 보니 그래도 그 하찮은 라디오에서 소리가 나는데 신통해서 못견디겠다. 내일모레 시골 내려갈 생각을 하니 도무지 과제장 할 맘도 나지 않는다. 허기야 벌써부터 과제장을 하다니 속성과 치곤 너무나 지독하다.
“어예 배우는 학생이 그러면 쓰는가?” “생명을 불어넣어서 훌쩍 떨쳐 일어나라” 김경한 선생님의 귀에 못이 박힌 말소리가 쟁쟁하게 들리는듯 싶다. 사실상 나는 김선생님을 몹시도 존경하면서 어딘지 모르게 염증을 느끼고 있는것은 역시 내가 참을성과 인내성이 없어서 인가 한다. 지금에서야 다시 생각나는 것이지만 그때 학급 헌장이랍시고 모두가 나가서 말 할때 나는 김선생의 말씀에 염증을 느낀다는 것을 막 힘주어 말하고 나서, 종말을 짓기위해 우리는 이러지 말자 선생님은 우리를 생각하고 걱정하시는 마음으로 하시는것이니까 다시는 절대로 뒤에서 욕하지 말자고 했다. 그후부터 선생은 날 볼적마다 “문병길이, 내가 잔소리 않도록 해야지” 하며 웃으신다. 그후부터 종례시간에 “한가지 말할게 있는데”하며 시작하던 훈화가 이제부터는 “한가지 잔소리할게 있는데’로 바뀌었으니 종례시간마다 나는 가슴이 찔끔거렸다. 어떤때는 나도 버럭 화가 나기도 했다. 아니, 그래 한마디 했으면 그만이지 무얼 저렇게 장시일을 두고 사람 기분만 상하게 하고 폐부만 찌르는 것일까? 내 오늘은 가서 담판을 지우고 오리라 하며 굳게 결심하면서도 나는 교무실 앞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곤 했다. 가서 말한댓자 형편없이 내가 질텐데 하는 생각이 앞서니 볼장 다 봤지 뭐. 이번 국어시험도 통지표를 보니 미로 나왔다. 나는 그러려니 생각하면서도 선생님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아무리 못하기로써니 내가 미 밖에 안된단 말야? 사람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하여튼 방학때 편지로라도 틀림없이 선생을 골탕 멕여 주리라.
그리구 벌써 며칠전부터 서둘른 일이지만 종각이, 무돈이, 나 이렇게 셋이서 맹경산에 가기로 했는데 이작자들이 모두 싱거워서 그런지 도무지 흥미가 없는 것 같다. 모이자고 하면 모이지 않고, 망할 자식들. 그러니 나는 가의도 계몽에도 이제 완전히 빠지게 되었단 말인가? 내 사실 가의도 가는 것은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처음엔 아는 애들이 많고 또 내 또래 애들이 많은지라 가고도 싶었는데, 이건 뭐 보성에 어른들 같은 커다란 등치들을 막 불러다가 넣으니 회원 질서만 물란해질 뿐이다. 그리고 나는 돈도 큰 문제중의 하나다. 회비만해도 1500환. 갈때돈만해도 3000환 그돈이 어디서 나와? 지금 집에서는 한참 죽어나는 판인데. 그리고 사실 형 말대로 학교도 형편없이 보잘것없는 학교에서 무슨 썩어빠진 계몽이냐. 나자신 배울점이 너무 많은데. 아 이렇게 말하면 이 바보야, 계몽이 곧 배우는 것이 아니냐 하지만 사실 나는 방학을 이용해서 좀 배워야겠어. 내 성적이 그렇게 엉망이면서 좀 배워야 되겠어. 그런데 사실 한가지 이유는 뭐 가의도로 계몽을 떠난다니 갈 회원들의 태도가 너무 애매해. 하여튼 이번 방학이 되어 시골에 내려가 지낼 때 나는 신의를 지키지 않는 친구로 낙인이 찍힐거야. 할 수 없지 뭐. 마음에도 없는 일.
하여튼 이번 방학 계획은 그저 시골 내려가면 우선 몇일 천천히 공부하고 한 닷새 종각이네 집에가서 놀고 또 공부하고 상점에서 아버지 일 거들고, 그저 되는대로 되라지 뭐.
그리고 방학때의 하루 일과를 한번 적어나 보아야겠어. 우선 방학때 가지고 갈 교과서 이름은
과학 - p1~p82. 익힘문제풀것
수학 - p1~p176. 과제장
영어 - p1~p45. 9과 과제장
국어 - p1~p85. 12과 과제장
독어 - p1~p56
영문 - p1~p68 p1~맨끝 Date
7월 18일 고1 월요일. 맑음
내일 방학이라 생각하니 여지껏 그리도 기다려졌던 방학이었건만 막상 별 마음이 나지 않는다. 뭐 이것이 인간의 속일 수 없는 심정인가보다. 내가 짐짓 마음을 점잖고 크게 먹으려는 하나의 허위인지도 모른다.
하여튼 집에와서 보따리를 꾸렸다. 이불 껍질도 뜯고 책보도 싸놓고 잠자리에드니 고단해서인지 잠은 오지 않았다. 나 참.
1958년 (단기4291년) 7월 19일 고1 화요일. 맑음
오늘은 방학이 되었다. 종례후 남아서 14일에 서울 올라오지 못하겠다고 말했더니 그렇게 가까운데서 올라오지 못하느냐고 하신다. 그 말에도 틀린건 아니다. 허나 그 하루 때문에 천환씩이나 없앨순 없다. 그렇게 말하면 선생님은 몰론 지당하신 말씀으로 나의 말을 묵살시키겠지만 그보다도 내가 만일 “돈 때문에”라고 말하면 “너의 집에 돈이 없다니 될 말인가?”하고 물으실것이다.
흥! 우리집은 뭐 돈이 쏟아지는 돈 생산처인줄 알으셔? 사실이지 내가 전번에 선생님한테서 “문병길네 집은 잘 살지 않는가? 하고 긍정하는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내 이 말씀 듣고 구태여 못사는 거 다 티 내기싫어 아무말씀 안했지만 도무지 선생님이 제자의 가정환경을 모른다는 것은 이건 엉불성설이다. 하숙비도 억지로 내는 판인데. 아마 하숙 할정도면 돈이 많겠지 하시는 모양이다.
내참! 하여튼 이렇쿵저렇쿵 골치아픈 얘기할 것 없이 오늘은 이사짐 싸들고 시골 내려간다. 찻간에서 관이 세윤이 주언이, 국정이 등등을 만났는데 다들 기쁜 모양이나 내 얼굴에는 어쩐지 그리 기쁜 표정을 짓지는못했다. 집에가야 뭐 약방에들어앉아 뜨염뚜염오는 손님만 쳐다보며 한숨짓는 부모님을 모시고 한달 있기는 차라리 내가 그것을 안보니만도 못하다.
몇시간뒤 시골집에와보니 어머니는 왜이렇게 새까맣게 탔느냐고하셨다. 한강에 갔더니 탔다고했다. 약장을보니 약이 통없고 뛰엄뛰엄있었다. 이거무슨약방이람… 보니 약은 전부 집뒤에갔다놓았다. 왜물어보나 마나 약방허가증이 없어서 조사나오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버지는 돈 쓸대로 쓰는데도 그망할자식들이 허가증을 내주지 않는단다. 그러니 왔던 손님도 도루 갈형편이다. 그저 이세상은 돈이 제일 이지 뭐. 큰어머니넨 돈을 막 벌면서 단돈도 꿔주지 않으려드니 참.
하여튼 돈돈 돈만 있으면 되는거야.
7월 20일 수요일. 바람
내일부터 공부니까 오늘은 마구 놀아보자고 큰맘먹은것이 종일토록 집안에서만 뱅뱅돌았다. 시골왔다해서 뭐 별다른건 없다. 더욱 무미건조해 느껴지니 뭐 좀 살래도 돈, 돈때문에. 오늘 저녁에 “나그네 서름”을 가봤는데 참 감격했다. 그 영화는 비극이어서인지 잠자리에들어서도 자꾸 슬픈장면만 연상되었다. 여기 극장이 한가지 좋은점은 도대체 학생취체를 않는다. 이것이 나에게 불행이라면 불행이고 또다행이라면 다행이다.
7월 21일 금요일. 맑음
계획표대로 하자니 적어도 네시간은 걸렸다. 다하고서 나는 한숨을 쉬었다.
1958년 (단기4291년) 고1 7월 22일 금요일. 맑음
어쩐지 어디가 불안해지기도하고 또어디 나가고도 싶고 하여튼 마음이 들석들석하다. 바루 넘어다면 노타리의 군상들거기에는 손님모시는 애들도 있고(대개 깡패지만) 손님모시는 아줌마도 있고 떡장수, 사과장수, 빵장수, 옥수수장수, 오징어장수, 아이스케키장수, 모두가 다한 계통인장사끼리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가끔 기차가 역에 닿아서 인파를 내쏠을땐 그야말로 수라장이다.
아이스케-키사세요
사과사세요
빵사세요
강냉이요
옥수수요
차미 수밖요
물이요
오징어요
...................
이루말할수없다. 그러다가 경찰들이라도 오면 떡파는 아줌마들은 머리에 이고 또는 손에들고 줄달음질쳐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그걸볼적마다 경관이 그지없이 미워진다. 그 광주리되 하나에 밥줄을 이어가는 그네들에겐 법이란 냉혹한 천대밖엔 되어주지 못한단 말인가?
떡사세요 여전히 외치는 그네들 물부짓음에 나는눈을 감고 말았다. 더구나 한 7 8세 아이들이 목줄에 핏대를세우며 그나마도 다쉰목소리로 “아이스케기” 하고 소리 치는 걸 보노라면 10원짜리가 생기는 대로 사주구싶다.
생존경쟁 바로 이것이다. 저마다 먹구살기위해 물고 뜯고 할퀴고.
같은 약국끼리도 허가증없다고 터가 좋으니까, 마구 뒤로 쑥덕대고, 먹어야 산다는것. 이 얼마나 에누리없는 철측이냐?
나는 서울가서 20000환씩 내고 먹는다. 먹지 않으면 기때문일까? 아니다 좀더 낳은 학교를 다녀서 나자신 지식을 쌓겠다는 일념하에 또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자식을 좀더 가르치겠다는 일념하에 내가 한달 먹는 걸로 식구들이 한 댓달 먹을 만치 돈들여가며 공부를한다. 그러면 이것도 생존경쟁인가? 그렇다. 분명히 생존경쟁이다. 그러나 단지 다른건 미래를 바라보고 계약하고 준비하는 신성한 생존경쟁이다. 젊음의 고생은 노년기의 낙이라한다.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힘쓴보람이 언젠가는 나타나고야 말것이다. 또한 분명나타나야만한다. 생존경쟁이 어떤때 어떤곳에선 비참하기도하고 또한 이면엔 아름다운 투쟁도 되는것이다.
1958년 (단기4291년) 7월 23일 고1 토요일. 비
오늘은 어쩐지 종각이네 가고 싶었는데 마침 종각이가 우리집에 왔다. 종각이와함께 성환네 무돈이네 집을 찾아가니 반갑게 맛아주었다. 이곳에 와보니 이제 촌같았다. 집도 어찌나 넓은지 대문을 한세개거쳐야만 했다. 그리고 집안엔 탁구대가 있었다. 종각이와 탁구 칠생각을하니 흡족했다. 저녁에 과수원에 가봤다. 꾀넓은 과수원 나무마다 열려있는데 참탐스러웠다. 몇개먹으니 배가 불렀다. 나무에서 금방따서 먹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녁에 셋이서 극장에가서 청실홍실을 보았는데 먼저본거라 흥미도 없으려니와 화면도 억망이었다.
1958년 (단기4291년) 고1 7월 24일 일요일. 맑음
아침에 탁구좀 치다가 밖으로 나왔다. 성환은 촌치고 좀 큰셈이었다. 멀리 보이는 산앞에 무수히 푸른 논이 넓게 펼쳐있다. 저 논도 참으로 많은 역경을 겪었다. 난 서울에서 들은 이야기지만 한때는 가물어서 야단났고 한때는 장마저서 야단났고.
자연의 법칙이라니. 산을 올라서 또 과수원에 가서 실컨먹었다. 이제 복숭아에 완전 항복을했다. 가끔 분위기가 조용해질땐 명랑을 회복하기위해 우리 영어선생님의 전매특허별명인 「디 보이즈앤걸」「웬 더 선 이즈 솨이닝」들을 숭내내어 웃음판을 만들어 놓았다.
오늘 하루도 즐겁게 끝났다.
7월 25일 월요일. 비,바람
오늘은 내려갈 작정이다. 아침부터 비가 막 왔다. 왜 하필 이런때 온담. 복숭아를 하두 먹어선지 아침에 설사 하구나니 배가 아프고 골이 찌릿찌릿하다. 비가 그치는 틈을타서 과수원에 가서 또 먹었다.
목숭아만 싫컷먹고 두시 차로 내려왔다. 종각이는 저의 집으로 가고-
7월 26일 맑음
밀린 숙제니 복습이니 다 하고 나니 오후 다섯시다. 무척이나 오래 했다. 나는 내가 이렇게 배겨날수 있었다는게 신기할 정도였다. 어쩼든 할 거 다 하고나니 속이 다 시원했다.
7월 27일 바람
아침부터 한게 꼬박4시까지 했다. 무척 고단 했지만 배겨 났다. 감기가 몹시 걸려서 약을 먹었다. 할거 다하고 오랜만에 관이네 집에가서 주언이와 함께 권투도 하고 재미있게 놀다가 집으로 왔다.
7월 29일 맑음
아침차로 큰아버님과 함께 고기를 낚으러 성환으로 가서 친구 무돈이를 만났다. 저녁 차로 오려 했으나 시간이 없어서 거기서 자기로 했다. 하루 종일 고기가 얼마 잡히질 않았다. 저녁에 초롱불을 만드는데 재미가 있었다.
7월 30일 맑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저수지로 가 봤더니 그때까지도 큰아버지는 고기를 잡고 계셨다. 나는 그제서야 고기를 잡는데 얼마나한 노력이 든다는 걸 알았다. 하루 종일토록 잡고 저녁에 뻐스로 왔다.
1958년 (단기4291년) 고1 8월 1일 토요일
오늘은 아버님 친구들 몇 분과 고기잡으러 직산으로 갔다. 거기서 고기를 잡았는데 생전 처음 고기를 그렇게 많이 잡았다. 거의 한바께스 다 잡았다. 어디서 약을 풀었는지 고기들이 거의 죽어 가지고 내려와서 많이는 잡히나 흥미가 나질 않는다. 나중에 배따는데도 한시간 넘어 걸렸다. 다 저녁차로 천안으로 왔다.
8월 2일 일요일
관이하고 권투시합을 했는데 된통 맞기만 했다. 하기 싫은 걸 자존심이 있고해서 지꾸 덤벼드니 자꾸 마질밖에. 한참 얻어맞고 씩씩거리며 집에 가는 나의 꼴악서니란 비참했으리라. 하하.
1958년 (단기4291년) 고1 8월 15일 토요일. 비
8.15의 기쁨과는 정반대로 아침부터 궂은 비가 부슬부슬 왔다. 학생들이 줄을 지어 데모 행진을 한다. 이층에서 물끄럼이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국민학교 동창생도 몇몇 끼어 있었다. 저자들은 날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자식 넌 서울가서 공부한다고 뻐기기냐?’ “너희집은 부자래서 서울서 다니고 있구나”하는 야유조의 친구도 있을게고 겨우 그따위 학교 다니면서 그래도 서울서 다닌다고 뻐겨? “하는 비웃음도 있을것이고 “나도 너처럼 서울서 다녀 봤으면”하는 부러움에 섞인 소리도 있으리라……
덧없는 망상에 잠기려니까 벌써 학생들은 다 지나간 뒤였다. 사람들은 독립의 날이라고 흥분해 날뛰지만 나는 도무지 그렇지 않다. 그저 일본 압제 밑에서 해방되던 날이겠지… 하기야 내가 직접 그때의 광경을 목목격했어야할 말이지 그렇지를 못하니 도무지 얼마나 열광적이었는지 알수가 없다. 기껏 눈을 감고 회상하려 들어도 겨우 유치원에나 다닐때니 무어 어린때 엄마한테 볼기짝 맞던 생각만이 아물거릴뿐니다.
이렇게 되면 8.15를 삭 무시하는것이 되지만 나자신 무감각한건 아니다. 우리가 불과 몇 달 동안 중공군 아래 목을 움추리고 아군이 올라오길 고대했는데, 무려 36년! 어린아기가 태어나서 어른이 되어 자손을 보기까지 기나긴 세월을 남의 나라 제국정치아래 제손 제발을 맘대로 놀리지 못하고 있다가 손발의 사슬이 풀러지니 그날이 바로 감격의 날 4281년 8월 15일 이 아니었던가… 지금 우리가 우리말로 제스스로의 기능을 발휘하여 각개인의 인격이 존중되어 서로 서로 돕게 된것도 이 해방의 덕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어떤이가 ‘정부는 미국이 세워줬지 뭐 우리가 세웠나? 하는 걸 들었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그렇게 보지 않는다. 우리 자신의 독립을 위해 목숨과 바꾼 저 3.1운동의 민족의 발버둥!
배움의 마당에서 진리를 탐구하며 오직 독립을 위해 분연히 일어선 광주 학생사건! 해외 망명객들의 눈부신 활약… 이 모든것들이 무엇을 위하여 일어섰단 말인가? 독립. 오직 이것하나 얻기 위해. 또한 자유. 이것을 얻기위해 싸웠지 아니한가? 그러한 민족의 투지를 무시하고 뇌까리는 이양반에게 나는 욕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 또한 그들은 코가 큰 미국놈들에게 존경하고 아양을 떨것이 니가 바로 국가의 명예 훼손죄로 고소될 놈이 아니고 무엇이냐? 광주 학생 사건이 말하듯이 그때의 학생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놈과 싸웠는데 지금의 학생들은 어떨까? 아마 괴뢰군 축출하자고 데모하다가 괴뢰군이 나오면 제각기 뺑손이 치기에 갈길이 바쁠것이다. 허나 학생이 다 이렇다는 것은 아님을 나는 안다.
민족의 현위치와 뒤떨어진 문화를 한탄하고 두주먹 뿔끈쥐는 학생을 볼 때마다 미덥고 또 고마웠다. 지금 내가 그정경을 못보아 모르지만 일본놈들이 마구 달아났았을때는 얼마나 통쾌 했을까? 어른들의 그러한 일본놈의 참패를 얘기할 때마다 나는 남모르게 통쾌감에 잠겨 야! 야! 하고 함성을 지르는 때가 많았다. 또한 어느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주권없는 국가의 민족이란 이루 말 할 수없이 참혹하고 또한 참패한 민족의 설어움은 더욱 참혹하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지금 우리의 떳떳한 주권을 가지고, 또한 각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어 각자의 능률을 올려 사회발전에 이바지하게 된것도 이 독립의 덕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가 일상 느껴보지 못하는 이 고마움이 지금에서야 뼈저리게 느껴진다. 지금부터 10년전 이날 우리 부모형제가 기쁨에 넘쳐 날뛰었을 그 때의 그 모습…
이제 우리 민족의 혈기를 더욱살려 반만년 역사를 굳게 그리고 오랫토록 이어나가기를 마음 속으로 빌었다.
저녁에 싸이클대회가 우리 천안에 도착한다 하기에 이층에서 구경했는데 비가 온 관계로 예정 도착시간이 무려 3시간이나 지나서야 무데기로 꼴인했다. 저녁에 8.15의 열광을 되씹어가며 잠자리에 들었다.
1958년 (단기4291년) 8월 19일 수요일. 바람
아침부터 서둘러서 오후 한시 차로 서울 올라가게 되었다. 올라갈때 아버님한테 하숙비를 달라고 했더니 겨우 5000환밖에 주시지 않으며 이것이 전 재산이라고 함없는 어조로 말씀하셨다. 순간 나는 앞이 캄캄해 왔다. 이제 하숙비를 안가져가면 어찌하나?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집 집안경제가 이제 말이 아니다. 하루에 2000환도 겨우 팔린다. 그것도 장날이나 그렇지 다른날은 형편없이 팔린다. 나하고 형하고 하숙비만도 하루에 2000환은 넘어쓴다. 그러나 약방에 약을 사놀수 없고 약은 자꾸 줄어가고 또한 약이 없으니 손님이 찾는것이 다 있을리 없고 그러니 약은 안 팔리고……
요새는 아버님께서 늘 걱정에 쌓이신다. 보기에도 답답한 노릇이다. 그러나 언제 한번 크게 일어날 때가 있으리……
8월 20일 목요일
한 달 동안 그리웠던 친구들과 만나게 되니 기쁘기 한량없다. 서로 악수하는 손과 손이 수집은 듯하면서도 강한 체온이 교환되었다. 무언중에 앞날을 약속이나 한다고 할까? 간단한 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하숙비 못주는 집은 쓸쓸하고 미안하기만 했다. 공연히 딴 마음만 자꾸 스며들었다. 나만 죽으면 좀 나을텐데 하는 철부지 생각도 들곤 했다.
1958년 (단기4291년) 고1 8월 21일 금요일
이미 펜을 들어 정식 수업에 들어섰으나 아직도 방학기분이 남아 있는지 도무지 강의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공연히 책을 들고 앉아 하숙비 걱정, 사친회비 걱정, 통학 걱정들로 시간을 흘렸다.
참으로 뜻 없는 생활이다. 집에 일찍 가기싫어 늦게까지 놀다가 왔다. 작은 가슴에나마 인생이 낙망되면 이렇게 비통하니 어른들의 세계야 어떠하랴? 자살이란 들어도 끔찍스럽지만 피치못할 하나의 숙명인데야 할 수 있는가?
자살은 세상에서 가장 큰 죄악이라 하지만 자기자신이 “이미나는 이 사횡에서 썩어빠진 한 폐물이 되고 말았다. 이제 나의 앞길에 구원의 길은 영원히 멀리 갔다. 오히려 죽음으로써 세상살이 청산하리라”하고 자위하며 죽음의 길을 택한 그들이야말로 얼마나 결단성 있게 인생의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인가? 그것도 못해 망서리며 갖은 비굴과 빈곤속에 허덕이는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틀리지 아니한가? 대개가 자살이라 하면 그 사람의 본 상태로 돌아와서 한단다. 죄인도 회개하면서 죽음을 택하는 것이지 결코 내가 이 세상에서 저지른 죄가 이리 작아서야 쓰겠나 하며 한탄하며 자살한 자는 없을것이다. 모두가 참회와 절망, 그리고 회개의 눈물로써 목숨을 끊는것이 아닌가? 이렇게 따지고 보면 자살을 하나의 인생 해결로 긍정하는 것이 되는것이겠지만 그렇다고 자살이 좋다는건 아니다. 이는 사회에서의 생존경쟁에서 뒤떨어진 비굴한 인간을 두고 일컫는 말임을 나는 확인한다.
1958년 (단기4291년) 고1 8월 23일 토요일
형님이 오셔서 하숙비 18000환을 주셨다. 나는 이 돈을 우선 만환만 주고 나머지 8000환은 남기리라고 결심했다. 저녁에 주인한테 10000환을 드리면서 좀 미안했다. 집에계신 아버님께선 이사실도 모르고 계실것을 생각하니 나자신 하숙비를 슬쩍 떼먹는것같이 예상되곤 했다.
8월 24일 월요일
이제 방학이 끝난지도 며칠 됐고 해서 남듷은 확고한 마음의 안정을 했는데 나는 어쩐지 종내 뜬 기분이다. 기분 나쁘다.
8월 27일 금요일
통학하기로 결심한 나는 오늘 대한 여생사에 갔다. 어제께 시간이 지나서 퇴자맞은 생각을 하고 일찍암치 떠났다. 통학 패스를 구하고 나니 앞으로 통학할 길이 막막했으나 한결 시원했다. 집에 와서 인용이 한테만 모든 걸 얘기했다. 종각이나 무돈이는 날 보기만 하면 비꼬는쪼로 네가 어떻게 통학을 해? 했다. 도대체 진실로 근심해 주는것인지, 야유에서인지 나는 불쾌하기만 했다. 보자! 너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이를 깨물고 통학을 하마 하며 굳게 결심했다.
8월 30일 토요일
오늘 주인한테 이집을 옯기겠다고 얘기하고 짐을 꾸렸다. 집을 나설 때 그래도 몇 달 동안 정들인 곳이라 생각하니 섭섭하기도 했다. 다섯시 차는 그대로 만원이었다. 관이와 만난 다음엔 세윤이와 호영이와 만났다. 차표 조사할때 관이가 도망가는걸 보자 나는 다시금 통학증을 쓰다듬으며 새로히 안심되는 것이었다.
집에 닿은다음 아버님께 온뜻을 여쭈니 의외라고 놀라셨다. 걱정해 주셨다. 어머님 마실간데로 찾아가니 거기는 동한이네 집인데 뜻밖에도 누님이 와서 살고 있었다. 알아본즉 빗에 쪼들리다 못해 오늘아침 동한이는 부인과 함께 도망 갔다는 것이다. 누님은 그걸 알고 이 집을 삿다는 것이다. 한 가정끼리 이리도 매정하단 말인가? 도망가고 빼앗고…
하하 망할 징조다. 내가 어떤이한테선가 “빗없는게 부자니라”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다. 빗없는게 행복하다. 우리만해도 당장당장 빗에 쪼들리고 있지 아니한가? 동한이는 150만환가량의 빗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생각만해도 괴로운 일이다.
1958년 (단기4291년) 고1 8월 31일 일요일
하루종일 책상을 꾸미고 이것저것 손질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8000환 남은것은 시계방에 매끼고 나중에 시계를 받기로했다. 하여튼 나는 그 세계방 주인을 전적으로 믿을터이다.
이제부터 통학! 고달프다. 그러나 고달픈 가운데 행복이 깃든다는 말이 있지 아니한가?
고 1 9월 1일 월요일
아침 네시에 일어나 세수하고 옷입고 밥먹고 그리고 5시 15분차로 기차에 올랐다. 디젤이 끌었다. 졸음이 엄습한다. 한참 자고 나니 그래도 날은 아직 어둡다. 한 70리를 왔을거다. 3시간 15분이지나 8시 40분에 도착했다. 지루한 여행이다. 천안-직산-성환-평택-서정리-오산-병점-수원-부곡-군포-안양-시흥-영등포-노량진-용산-서울역.
지루한 시간이었다.
뻐스를 타고 나니 8시50분. 학교 교문에 와보니 9시 20분. 꼭 20분 늦었다. 조회가 막 끝났다. 휴하고 한숨이 나왔다. 하루 종일 졸음 가운데 수업을 마쳤다.
종례 시간이 되어서 형이 와가지곤 사치회비를 주셨다. 방과 후 선생님께서는 형이 왜 학교까지 와서 만나려고 하지도 않는냐고 하시며 형도 꼭 너와 같은가 보지? 하시는 바람에 그만 나는 퉁명스럽게 “시간 생활을 하니까 그렇죠!! “하고 대답했다. 나자신 너무나 불손한 말이라 얼굴이 확근 달아올랐다. 더구나 옆에 선생은 하도 어이가 없으니까 허허 하고 웃고 말았다. 계면쩍은 장면이다.
하교 후 인용이네 가서 보따리하나 꾸려 가지고 5시반 차를 탔는데 다행이 자리가 있었다. 내가 앉고 나니 우루루 밀려왔다. 금새 자리가 차고 서는 학생이 늘어 갔다. 나는 시흥쯤에서부터 공부 했다. 뒤숭숭해서 도무지 공부가 안되나 용케 페이지는 넘어가고 있었다. 8시 40분이 되자 집에 도착했다. 고단했다.
고달프고도 재미난 하루의 생활은 막을 닫으려나?
1958년 (단기4291년) 9월 2일 화요일
고닲은 하루 생활이다.
9월 3일 수요일
오늘 나는 과학 선생님 한테로 갔다. 가서 안양께다가 하숙을 정해 달라고 부탁해 봤다. 나로써는 최후수단이 아닐 수 없다. 허나 선생님께서는 안양도 서울이나 마찬가지니까 가정교사로 들어 가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하숙비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학교 중2학생인데 가르키면서 공부 하라는 것이다. 나는 귀가 솔깃했다. 허나…
9월 4일 목요일. 비
오늘도 식전에 일어나 밥도 먹으둥 만둥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는 학교로 왔다. 헌데 준식이가 시험 볼 동안 저희집에 가 있자고 했다. 내심 몹시도 고마웠다. 그러나 좀 꺼리는 점도 없지 않았다. 내가 여지껏 객지생활 몇년을 통해 친구집에 가서 있기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여튼 고마운 일이므로 나는 선듯 응했다. 그리고 나는 방과후 준식이와함께 준식이네 집을 알기 위해 가는 도중이었다. 나는 과거 준식이가 퍽 타락된 생활을 했었다는것을 그의 입을 통해 알았다. 나는 속으로 은근히 후회도 됬다. 허나 이미 말한 걸. 동무의 호의를 물리칠수야 있겠는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기쁘기도 하고 또 한편 후회라 할까? 뉘우침도 없지 않아 있었다. 하여튼 집에 돌아와서 그 얘기를 하고는 시계방에 갔더니 시계를 주었다. 참으로 갓고 싶던 시계! 뻔쩍뻔쩍 빛나는 시계이었다. 그러나 이시계도 누구의 손목엔가 차졌을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께름하기도 했다. 하여튼 시계하나 8000환주고 샀다는 그 기쁨은 누구에게나 표현할 수 없는 나 하나만의 기쁨이다. 시계를 차고 짐을 꾸렸다. 내일 그네집으로 가기 위하여… 이윽고 나는 잠을 자다.
1958년 (단기4291년) 고1 9월 5일 금요일
짐을 싸들고 준식이와 함께 준식이네 집을 들어왔다. 처음 오는 집이라 몹시도 서먹서먹했다. 짐을 풀어 놓으니 엄습하는건 졸음뿐. 인당산에 좀 올라갔다. 시험발표를 했는데 끔찍히도 어려웠다. 그런데 김태환선생님께서 나 보고 본교 중학교 2학년생을 가르치면서 있으리고 하셨다. 다시 말하면 나보고 가정교사로 있으라는 것이다. 나는 선생님의 이러한 호의에 뼈저리게 감사함을 느꼈다. 그러나 나자신 중학교2학년을 가르칠만한 지식이 완비되었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러나 한가지 마음먹어서 안되는 일이 어디 있으랴. 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한번 해보고 나서야 따질 문제가 아니겠는가? 선생님께서는 그런데 가면 자기의 자존심은 아주 꺽어 버리고 언제나 남을 가르키는 입장에 있다고 생각해야 된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셨는가? 남달리 강한 자존심을 가진 나로써 이런것을 이겨나갈수가 있을까? 그러나 그것도 내가 결심을하고 나서면 일소될 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예를 보아도 알 일이지만 그렇게도 호언장담하고 나선 통학도 일주일이 채 못되어 실증을 느끼지 아니하였든가? 그러한 나의 참을성과 인내성 없는 성격으로 어떻게 남의 귀한 자제를 맡아기르는 <가정교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유달리 가난하다는 걸 나태내기 싫어하는 내가 남한테 머리를 굽힐 수 있을까? 돈없는 놈이 낙타모자를 사야하고 또한 시계를 차야만 하는 그런 괴벽 임에도 불구하고 남의 종노릇 할수가 있을까? 이것도 하나의 경험이라고 할수있다. 그러나 하나의 경혐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나도 무책임한 일이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이런짓이라도 해서 서울서 학업을 계속해야만 할 것인가? 이 방법이 아니면 나는 전학을 해야 할터인데 전학은 죽어도 하기 싫다.
지금껏 곰곰히 생각하니 그런것도 해볼만 했다. 허나 제발 그집에 식구가 없고 단 외아들이었으면 하고 원할 뿐이다.
나는 지금 읽기책을 앞에 펴들고 도대체 뭐부터 써야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한갖 마음이 우울할적이면 읽기장을 펴들고 내려 써야만 속이 시원하든 나의 성격도 이제 식어서 읽기책쯤은 들여다보지도 않은지가 한달도 넘었다.
기분이 우울하던차에 막상 펜을 들었으나 그간의 수많은 추억들이 가슴에 메어지듯 꽉 몰려와 도무지 겉잡을 수가 없다. 결국 지금은 명륜동 산마루에서 만_이와 같이 하숙은 하지만 나는 앞으로 닥쳐올 또한 지나간 일들로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가 없다. 가을 방학이 되었을 때 인원형한테 그렇게도 부탁했건만 약속한 방은 구해줄 생각을 안하고 2주일을 끌었으니. 나는 그간 아마 난생 처음 남의 집에 구걸하는 식으로 다녔으니 말이다. 처음에 에이, 통학을 계속하지 뭐. 하는 결심도 생겼으나 다음순간 고개가 가로 흔들어짐을 어찌할수 없었다.
이러고보니 공연히 통학한다고 장담했던 내자신이 퍽이나 부끄러웠다. 그저 통학을 안하고 지내느라고 귀승이네 집에서도 자고 만_이가 독방쓰는 데도 하루밤 자고 밥은 가끔 짜장면 100환짜리로 때우고 아마 집 없는 설어움이 이런때야 뼈저리게 느껴지는가 보다. 생각했다. 이런 가운데 공부는 당치도 않는 소리다. 똑같은 책을 열흘이나 학교에 그대로 가지고 다녔다. 내자신 이렇게 해보기는 처음이다. 이러면 않된다 하면서도 내자신 비관되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나… 이 넓은 서울바닥에 내 몸하나 맞길 수 있는곳이 없단 말인가…
청운의 뜻을 품고 올라온 내가 이렇게도 처참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으니, 좁은 가슴에 벅차오르는 희망을 않고 올라온 꿈많은 이 서울이 이다지도 나에겐 고통의 화신이 되었단말인가? 괴롭다는 말로는 도저히 다 표현못할 설어움. 객지에서의 고독을 씹는다는것, 이것이 얼마나 내 가슴에 상처를 주었단 말인가. 눈에보이는 모든 친구들이 행복하게 보였고 나만이 동떨어져 지하를 걷고 있는 자포자기에 휩싸여 머리를 흔들며 고민하던 때가 한두번이었던가? 이러한 자포자기 속에서도 나는 억지로라도 희망을 가져보려고 하였으나, 크나큰 나의 고민속에서 그러한 희망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친구 집에서 밥 먹을때도, 잠 자리에 들어서도, 공부 시간에도, 나에게 그 걱정은 떠나지 못했다. 한줄기 믿고 믿었던 인원형도 막연하게 되었으니 나는 어찌하란 말인가? 당장 자고 먹고 할것이 막막하지 않은가? 그러기에 나는 굴욕을 참아가며 며칠을 귀상이 집에서 지나지 아니헸던가?... 창피, 굴욕, 아양, 간신, 그것들로만 이루어진것이 나의 생활 전부라 하고 싶었다. 어느 위인인가, 고생 끝에 성공이라 했다. 그말도 옳다. 그러나 고생끝에 낙이 온다는 그 끝이 가장 위험하지 아니한가? 미래의 행복을 모르면서 지내온 고생 끝에 결국 비참하게 영원히 죽음으로써 청산하는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란 말인가? 나는 그 경우까지는 가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나도 이러한 고생속에서 결심을 여러번 바꿨다.
더구나 형도 나의 이러한 어려운 생활에 도무지 무관심하니 몇번이나 천안으로 전학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금전문제로 내가 이러고 있는데 당장 전학하려면 money 가 필요하지 않는가? 그것도 그렇다 하지만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이다.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렇게되면 천안 간다고 별르는것도 한갖 망상이 되고야 마는구나 생각이된다. 그러나 내 자신이 이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하지 않는가? 나폴레온은 남의 집 머슴도 했다 하지 않는가? 나는? 머슴? 아마 나의 머리위에 머슴이라는 직책이 씌어졌어도 나는? 아마?- 최종에가선 인간최대의 발광적인 발악- 자살을 하고야 말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경을 헤치고 오직 공부만을 위해, 앞으로 전진하는 것만이 나의 직책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니 직책이라기보다도 내가 뭐 의무감이 느껴서져 꼭 그뒤의 보수를 바라고 하는 노동도 아니다. 무한대로 뻗어간 장래를 위해 나는 오늘의 고생을 묵살하고 오직 검은 제복에 펜만을 들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나의 현 사생활은 그야말로 무질서의 연장이 아닌가? 통학을 했기 때문에 공부를 못했고 친구집에 가 있노라고 못했고, 이제 하숙했으나 또 며칠 후면 자취할 생각을 하니 공부가 않된다. 자- 이러고 보면 나는 참으로 이유도 많은 놈이다. 그저 뭐 쪼금만 불편하면 모든것을 포기하려 드는 놈이니 말이다. 내가 이렇게 의지가 약해서야 뭣을 하겠단 말인가? 내 혈액형이 B형이라서 그런가.
그러나 이것도 또 하나의 이유이고….
어짜피 나는 하숙을 할 처지도 못되며 또한 만_이와 영원히 재미있는 하숙도 못할 것 같다. 오늘(10월26일)아침. 오래간만에 시골도 안내려가는 한가한 일요일이기에 마음놓고 아침늦게까지 수면을 취했다. 그런데 오전9시쯤해서 재용이와 무돈이가 놀러왔다. 내가 이방을 나가면 무돈이가 오기로 되어있다. 그런면에선 언듯 생각하면 무돈이가 미워지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만_이는 나보고 언제 나가게 되느냐는 둥, 뭐 서로 콤비가 맞아야 된다는 둥, 너하고는 콤비가 않맞아 틀렸다는 둥, 무돈이와는 콤비가 맞는다는 둥, 마치 나보고 얼른 나가 달라는 뜻으로 말을 하는게 아닌가? 이것도 기분 나쁜데 이제는 과거 자기가 간직하고 있던 불만을 표시하는 게 아닌가? 도대체 나를 자기 옆에 붙어다니는 부속품 취급을하니 기가 막힐 뿐이다. 나는 나대로 같이 하숙하는 처지에 이건 뭐 언제부터 자기가 이 방의 주인이 됬는지 이따위 말을 지꺼리고 있는 것인가? 솔직히 말하지만 나는 만_이가 첫인상에 퍽좋았다. 그가 꼭 천안 이웃집에 있는 영근처럼 생겼기에 나는 그와 꼭 친하고 싶었다. 그러든 차 하숙을 같이 하게 되서 아주 기뻣었다. 그러나 지내고 보니 그는 상당히 나쁜 아이였다. 그렇다고 원래 악의가 있는 아이는 아니다. 주위 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보다. 그가 나한테 비밀로 말 해 준 것이지만 그가 중2때 옆집에 순자(묵호)라는 애와 관계를 했다는 것이다.
그저 주위 사람들이 그런 걸 하면 좋다고 하길래 순자를 공원으로 불러 그것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말을 종래 믿으려 하지 않았으나 그의 얼굴 표정이라든지 행동으로 보아 넉넉히 그렇게 할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요사이는 거의 매일 같이 밤마다 깡패들 한테 얻어 맞고 들어 오는것이다. 자기가 그따위 짓을 하면서 나보고 콤비가 안 맞는니 뭐니하니… 그러니 나도 저와 같이 행동을 하란 말인가? 나-참!
그가 옆집애와 관계했다고 얘기해 줬을때 나는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도 그에게 손 장난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처음 해 보는 것인지 숨을 가쁘게 쉬며 그것이 나오게 손장난을 했다. 그 다음날 하루 종일 나는 몹시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도 도무지 맹랑한 나 자신을 보았다. 나도 귀승이 한테 배우고 또 남에게 가르쳐 주다니-.
이렇게 해서 나는 그가 절대로 순진한 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늘도 그는 깡패한테 얻어 맞고 미리 그 얘기가 학교에 떠 돌까봐 선생한테 가서 사과하러 갔다 왔다. 그런데 선생까지 우리들 둘이 모두 성질이 정 반대니 어쩌니 하니 도대체 나는 선생이 그런 말을 왜 자주하는지 이해 못하겠다. 그렇지 않아도 만_이는 콤비가 안 맞느니 어쩌니 하는데 그 뒤에 담임이 자꾸 그런말을 하니 만_이도 더욱 그러한 마음만 일어날게 아닌가? 아닌게 아니라 내가 그와 성질이 같은 점은 찾아 낼수가 없다. 유달리 깔끔한 내가 구리텁텁한 그의 행동에 몇 번이나 튀어 나올 말들을 꾹꾹 참은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이 애는 그저 꺼떡해서 자기성미에 맞지 않으면 주먹을 사용하려고 한다. 자신은 그게 남아다운 행실이라 하지만…
아니 도대체 남의 집에나 뚜드려 부수는 힘센 왕초에게 누가 용감하다고 찬양하겠는가? 자기 주먹을 믿으면 반드시 훗날 보복이 온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같이 하숙하던 국정이를 한대 치고는 요사이도 만나면 서먹서먹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요컨대 나는 도무지 그와 성미가 안만는다 해도 그러한 구체적이고도 사소한 일까지 생각 해 본적이 없는데 도무지 그가 그러한 세세한데까지 파고 들어갔다는것은 그의 용모에 맞지 않게 쫄쫄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여튼 어짜피 내가 이집을 나갈것은 뻔한 일인데 그 동안 서로 기분만 나빠가지고는 무엇을 하겠단 말인가. 후에도 하숙 했을때의 아름다운 추억은 커녕 그러한 기분나쁜 추억만이 둘의 머리를 스칠것이 아니겠는가? 하여튼 기분좋게 헤어지자 하는것이 나의 주관이다.
그런데 만일 자취하게 되면, 아아 골치 아프다. 그런걸 생각하면 골치가 아파 못견디겠다. 오늘은 너무 피곤하다. 내일 시험도 있고한테…아주 단념 해 버리려 했으나 수학 성적이 괜찮게 나왔기 때문에 기권할 수도없다. 그러나 내일의 세 과목을 위해서 나는 좀더 악착같이 study해야겠다. 그런데 오늘 나는 박재웅이 의외로 고아라는 걸 들었다. 확실치는 못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그와 함께 자취할 생각도 난다마는, 그러나...
아-아- 졸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