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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미주 동창회보 제 354호 2023년 10월호
젖과 꿀이 흘러야 할 곳에 ‘데모사이드’?
소설 속의 주인공 존 뱅크스는 9·11 테러로 가족을 잃는다. 그를 절망에서 건져낸 이는 조이 핌이라는 동양계 여성. 뱅크스는 이 여성에 이끌려 한 비밀결사회에 가입한다. 대량학살의 현장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생존자들로 구성된 단체다.
두 사람은 조직으로부터 극비 임무를 부여받는다. 전쟁과 테러의 주범들을 모조리 제거해 인류가 겪을 참극을 사전에 방지하라는 것이다. 각종 첨단무기를 지니고 천문학적 자금을 지원받은 두 사람은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첫 작전지인 멕시코로 향한다. 때는 1906년, 교통수단은 타임머신이다.
루돌프 조셉 러멜(1932~2014)이 쓴 가상의 역사체험기 ‘네버 어게인(Never Again)’ 시리즈는 이렇게 시작한다. 멕시코에서 혁명과 내란의 수괴들을 색출해 제거하고는 민주정부를 세운다. 다음 목표는 일본제국. 조선을 집어삼키고 대륙침략을 획책한 일본 군부 강경파들을 속시원하게 제거한다. 이어 유럽으로 건너가 히틀러와 스탈린 등 악명높은 독재자들을 처단해 지구상에서 전쟁과 대량학살의 원인들을 없앤다.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여 재창조한, 이른바 '팩션(faction)'이어서 마치 20세기 잔학사 강의를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 등장인물들의 처절한 증언과 두 주인공의 목숨을 건 임무수행이 생생하게 오버랩되면서 감동이 몇 배로 다가온다.
‘네버 어게인’의 첫 편 제목은 ‘데모사이드(Democide).’ 물론 저자가 만들어낸 합성어다. ‘데모’는 ‘데모크라시(민주주의)’ 또는 ‘데모그래피(인구학)’를 뜻하는 접두어. 여기에 살인을 의미하는 ‘사이드’를 붙였다. 우리말로 옮기면 ‘민주주의 죽이기’나 ‘양민학살’ 쯤이 되겠다. 정권의 자국민 학살을 뜻하는 용어로도 자주 쓰인다.
러멜은 예일대학을 거쳐 하와이 대학 교수로 근무한 세계적인 정치학자다.18살 때 자원입대해 6·25에 참전한 바 있는 그는 당시 전쟁고아의 참상에 충격을 받고 평화연구에 몸바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생존시 그는 인민군의 포격으로 폐허가 되다시피한 서울거리에서 한 소녀가 어린 동생을 업고 울고 있는 사진을 서재에 걸어뒀다. 자신의 다짐이 약해질까 두려워해서다.
저자는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을 동원, 수백만명을 살상한 중국의 마오쩌둥도 암살조를 보내 단죄한다.
러멜이 문득 생각나는 것은 요즘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때문이다. 지난 10월 7일 팔레스타인의 무장세력인 하마스의 기습공격으로 촉발된 전쟁이 대규모 살육전으로 전개돼 양측에서 벌써 60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서둘러 이스라엘을 방문한 것만 봐도 미국이 이번 사태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 단적으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가자에서 벌어지고 있는 피의 분쟁의 역사는 3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경에서 ‘젖과 꿀이 흐른다’고 했던 가나안의 주인 자리를 놓고 두 인종이 또다시 복수극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러멜 교수에 따르면 1816-2005년 사이 지구촌에서 일어난 전쟁은 모두 371건이나 된다. 이 가운데 205건은 비민주적인 국가간 전쟁, 166건은 비민주와 민주국가 사이에서 일어났다. 흥미있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끼리 전쟁을 한 경우는 없었다는 점이다.
이를 근거로 러멜이 제시한 처방은 딱 하나, 바로 민주화다. 권력의 집중화는 필연적으로 ‘데모사이드’를 불러온다는 이유에서다.
러멜이 책에 쓴 시구는 지금 이 시간에도 끊임없이 희생되고 있는 무고한 죽음에 대한 추모사처럼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