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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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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특히 첫눈이 내릴 즈음이면 어김없이 귓가에 맴돌며 감상에 잠기게 하는 멜로디가 있다. 영화 ‘러브 스토리’의 주제곡 ‘Snow Frolic(눈장난)’이다. 하얀 눈이 수북이 쌓인 공원에서 “나 잡아봐라” 하며 뛰놀던 연인의 모습은, 시린 사랑의 기억을 가슴 깊이 새긴 영화사의 명장면으로 남아 있다. 실제 촬영 당시 공원에 눈이 쌓일 틈이 없어 인공 눈을 사용했다는 일화가 전해지지만, 진위와 상관없이 그 장면이 남긴 여운만은 분명하다.
에릭 시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불치병에 걸린 제니를 향한 올리버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렸다. 영화의 첫 문장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선명하다.
“스물다섯의 나이로 죽어간 그녀에 대해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녀는 아름답고 현명했으며 모차르트와 바흐, 비틀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사랑했다.”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의 딸 제니와 명문가 상속자 올리버. 뉴욕 맨해튼 센트럴파크에 내린 첫눈처럼 눈부시게 펼쳐질 것만 같던 두 사람의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멈춰 선다. 1970년대를 청춘으로 살았던 세대에게, 센트럴파크의 눈장난과 그 위에 흐르던 음악은 그것만으로도 젊은 날의 아름다움을 되살리기에 충분하다.
‘러브 스토리’가 반세기가 넘도록 생명력을 지닌 이유는 아마도 단 한 줄의 대사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절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
사랑의 명대사 10선에 빠지지 않는 이 문장은 시대를 넘어 회자됐다. 비틀스의 존 레논은 이를 패러디해 “사랑은 15분마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라며 오노 요코와의 사랑을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 미국 사회는 계층의 벽이 높아, 두 사람의 결합은 현실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오늘날엔 진부한 설정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 시절에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작품이 앨 고어 전 부통령 부부의 실제 사랑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명문가 출신의 고어와 달리, 아내 티퍼는 평범한 가정의 딸이었고, 소설 속에서 두 사람은 올리버와 제니로 재탄생했다.
현실의 ‘러브 스토리’가 가장 극적으로 연출된 순간은 2000년 민주당 전당대회였다.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고어는 전 국민이 지켜보는 TV 생중계 앞에서 티퍼와 진한 입맞춤을 나눴다. 많은 이들은 제니가 올리버의 품에 안겨 생을 마감하던 장면을 떠올리며 환호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몇 줄의 이메일로 이별을 알렸을 때 세상은 또 한 번 충격에 빠졌다.
어쩌면 러브 스토리는 고어의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 에릭 시걸 자신의 고백이었는지도 모른다. 15년 전 이맘때쯤, 그는 오랜 파킨슨병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순간까지 곁을 지킨 이는 아내 캐런이었다. 25년 동안 자신을 간호해온 아내에게 늘 미안함을 느꼈던 시걸에게, 캐런은 영화 속 그 대사를 조용히 건넸다고 한다.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고어는 정치인답게 사랑마저 연출했는지 모른다. 사랑의 불편한 진실이라고 할까. 그럼에도 ‘러브 스토리’의 여운이 오래 남는 이유는, 사랑이란 결국 믿음과 정직, 그리고 끝까지 함께하려는 책임 위에 서야 한다는 평범하지만 무거운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주변을 돌아보면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낸 동문들의 사별 소식이 부쩍 잦아졌다. 화려한 말이나 극적인 장면보다, 남은 이의 손을 끝까지 놓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진짜 사랑일 것이다. 첫눈처럼 잠시 스쳐 가는 감정이 아니라, 긴 겨울을 함께 견뎌내는 동행. 그것이 우리가 ‘러브 스토리’에서, 그리고 우리 삶에서 다시 되새겨야 할 사랑의 얼굴이 아닐까.
박용필 <편집고문>
Posted : 14/01/2026 11:09 a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