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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필의 미국인 이야기 미주 동창회보 2024.10월호
‘트루 빌리버’ 동문 변호사는 없을까
“묻혀있는 증거들을 찾아내야 해.” 변호사의 지시에 인턴은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그러다가 저 친구가 진짜 범인이란 물증이 드러나면 어떡해요.” 변호사가 퉁명스럽게 말을 받는다. “그가 살인을 저질렀는지는 오직 그 자신과 하나님만이 알고 있네. 그런데 어느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아. 그러니 죄가 없다는 걸 확신하지.”
지난 1989년 개봉된 법정 드라마 ‘트루 빌리버(True Believer)’의 하이라이트 대목이다. ‘트루 빌리버’는 정치적 또는 종교적 광신자를 일컫는 사회심리학 용어다. 독일의 나치즘과 일본의 군국주의,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 등은 이른바 ‘트루 빌리버’가 일으킨 역사적 사건들이다.
영화에서 ‘트루 빌리버’는 변호사를 가리킨다. 맹목적으로 살인용의자의 죄없음을 믿는 변호사. 왜 그랬을까. 피의자가 일관되게 범행을 부인하고 있어서다. 심지어 하나님까지 들먹여가며 그의 무죄를 주장했다.
영화는 그해 한인 커뮤니티에서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바로 이철수 사건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이다. 1973년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에서 갱단원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돼 처형될 위기에 처했던 이철수. 그러나 토니 세라(Tony Serra)의 변론으로 10년만에 무죄로 풀려났다.
스탠퍼드와 UC버클리 법대 출신인 세라는 당시 공익변호사(pro bono)로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던 인물이다. 이철수뿐 아니라 흑인 과격단체 ‘블랙 팬더’ 등 굵직한 사건들을 맡아 승소, 경찰과 FBI 등 법집행기관들엔 공적1호로 불려지다시피 했다.
세라 역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는 거의 문맹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런데도 아들 다섯을 훌륭하게 키워 하버드와 예일, 스탠퍼드, 버클리 등 명문대학에 보냈다.
고액연봉과 출세의 길이 보장됐는데도 세라는 수도승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양복은 10달러 짜리 중고품. 은행 계좌도 없어 주머니에 있는 현금이 전 재산이다. 방 하나 짜리 허름한 아파트에서 수십년 째 살고 있다. ‘빈곤서약’을 했다고 할까.
맨처음 이철수 구명운동에 나선 건 일본계 커뮤니티다. 태평양 전쟁 때 적성국 시민으로 간주돼 수용소에 감금된 뼈아픈 과거가 이들을 움직였다. 캐롤 야마다 등 로스쿨 재학생들이 자기 일처럼 뛰었다. 이 사건은 아시아계가 처음으로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됐다.
야마다는 세라에 이런 말을 들려줬다. “이 땅에서 소수계는 벌거벗긴 채 살아가야 하는 운명입니다.”
세라는 영화에서 경찰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다. “당신들은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 … 그런 따위엔 관심조차 없지. 차이나타운에서 (사건이) 발생했으니 진범을 잡을 생각은 안하고 아무 (동양계의) 목이나 가져오라고?”
공교롭게도 경찰이 쳐놓은 그물에 이철수가 걸려들었다. 마약에 폭력 전과까지 있어 그의 목에 살인범이란 딱지를 붙였다. 알리바이를 댔는데도.
장발에 히피차림으로 법정에 들어선 세라는 과격한 언어를 섞어가며 열정적으로 이철수의 무죄를 이끌어냈다.
짓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쓴 채 하마터면 형장의 이슬이 될 뻔했던 이철수. 세라는 그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나님이 심술을 부렸나 봅니다. 인간이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시련을 그에게 안겨줬어요.”
‘사형수’ 이철수가 무죄선고를 받고 풀려난지 40년이 지났다. 이번엔 동문(양민·공대 77)의 아들 양용이 LA 경찰의 과잉 대응으로 목숨을 잃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경찰이 관련 프로토콜을 무시한채 총을 쏜 것이다. 지난 9월 17일엔 많은 동문들이 참석한 가운데 LA 시의회가 공청회를 열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어 경찰국(LAPD) 본부 앞에서 경찰의 폭력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부모의 바람은 아들 양용의 목숨을 앗아간 경찰의 형사처벌과 LAPD의 공식 사과다. 이것이 정의라고 믿기 때문이다.
양용의 정의를 이끌어낼 변호사는 없을까. 남가주 한인사회도 이젠 한해 평균 100명이 넘는 변호사를 양산해 내고 있다. 동문 변호사들도 적지 않다. 이 가운데 과연 몇명이나 ‘트루 빌리버’를 자처할 수 있을지. 이미 은퇴한 토니 세라를 다시 소환해낼 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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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길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