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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 돈으로 남의 나라 국경을 지켜야 하고 또 싸워줘야 합니까.” 운을 뗀 그는 급기야 정부의 아킬레스건을 찍어 눌렀다. “우리는 외국의 일에 간섭하지 않고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 미국의 국익 우선)’를 정책의 근간으로 삼았을 때 훨씬 더 잘 살았고 부강했습니다.”
대뜸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사를 떠올리겠지만 천만에. 꼭 85년 전, 그러니까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무렵 찰스 린드버그(1902~1974)가 한 말이다.
그가 누구인가. 사상 최초로 대서양을 논스톱 횡단 비행한 미국의 영웅이다. ‘아메리카 퍼스트 위원회(AFC)’ 대변인 격으로 활동한 그는 줄곧 “미국은 유럽의 전쟁에 관여해선 안 된다”며 고립주의 운동을 펼쳤다.
심지어 영국이 나치 독일에 점령당한다 해도 미국의 안보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AFC는 한때 회원이 100만 명에 육박했을 만큼 거대 단체였다. 전국의 주요 도시에 설치된 지부만도 450개에 달했다. 그것도 회비를 꼬박꼬박 내는 멤버들이어서 결속력이 무척 셌다. 공화·민주 정당원들은 물론 농민· 기업인, 공산당원까지 가입했다.
회원들의 면면은 굵직하고도 화려했다. 자동차왕 헨리 포드를 비롯해 싱클레어 루이스(노벨문학상), 월트 디즈니, 제럴드 포드(훗날 대통령) 등등. 존 F. 케네디도 100달러를 성금으로 냈다니 AFC의 존재감이 어떠했는지 알 만하겠다.
린드버그의 연설 사진을 보면 뒤에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가 크게 걸려 있어 눈길을 끈다. 왜 워싱턴을? AFC는 이 건국대통령을 ‘미국 우선’의 창시자로 꼽는다. 워싱턴의 퇴임사를 읽어 보면 이해가 간다. “다른 나라의 골치 아픈 일에 절대 얽히지 말라.” 한마디로 미국 우선, 곧 고립주의 노선을 걸으라는 얘기 아닌가. 워싱턴이 남긴 말이어서 ‘아메리카 퍼스트’를 건국이념으로 봐도 무방할 터.
이후 역대 대통령들은 워싱턴의 주문에 따라 중립적인 자세를 취해왔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 엮이면서 잠깐 ‘외도’를 했지만 이내 고향인 고립주의로 되돌아갔다.
이런 미국을 가리켜 당시 영국의 한 신문이 논평을 냈다. “미국은 ‘아메리카 우선’이라는 현명한 정책으로 번영을 이뤄가고 있다.” 대영제국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세계문제에 깊숙이 개입한 결과물이라는 분석과 함께.
린드버그가 주도한 AFC는 들불처럼 번져 너도나도 ‘전쟁은 노, 미국이 우선’을 외쳐댔다. 히틀러와도 거래를 해야 한다며 목청을 높이기도 했다.
린드버그는 유대계 큰손들이 장악한 언론이 전쟁을 부추겨 미국을 위험에 빠트리려 한다며 미디어와 대립각을 세웠다. 트럼프가 왜 언론을 지구에서 가장 정직하지 못한 집단으로 매도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트럼프에게 린드버그는 스승이나 다름없으니.
일본의 진주만 폭격 나흘뒤 AFC는 해체됐으나 이들이 주장했던 ‘미국 우선’ 주의는 트럼프의 재선으로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됐다. ‘미국 우선’이 처음엔 낯설고 때론 황당하게 느껴지겠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처럼 린드버그, 워싱턴에까지 맞닿아 있는 걸 알게 된다. ‘트럼프 신드롬’이 한낱 개인의 일탈행위나 레토릭(정치적 수사)으로 읽히지 않는 이유다.
어쨌거나 앞으로 4년은 ‘아메리카 퍼스트’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할 것 같다. ‘우리도 남의 나라 일에 간섭하지 않겠지만 미국의 이익에 딴지를 걸면 절대 참지 않겠다’는 엄포도 곁들여서.
그나저나 미국이 세계경찰의 역할을 포기하고 고립주의로 돌아서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미국이 떠난 공백을 메운다며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군국주의가 스멀대지나 않을지. 그리 되면 여지껏 미국이 피 흘리며 지켜온 인류의 보편적 가치관, 곧 자유민주주의가 위협받을 텐데. 알링턴 국립묘지의 혼령들이 분통을 터트릴지 모르겠다. 내 목숨 돌려달라고.
박용필의 미국인 이야기 칼럼 서울대 미주 동창회보 371호 20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