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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의 딸’이라는 이름의 무게
부모가 유명하면 자녀도 덩달아 유명해진다. 특히 연예계에서는 이런 현상을 일컬어 ‘Famous for being famous’라 한다. 말 그대로 ‘유명해서 유명한’ 사람. 다만 이 표현에는 대개 약간의 조롱과 비아냥이 섞여 있다.
이 범주에 속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할리우드의 사고뭉치’ 패리스 힐튼이다. 힐튼 호텔 창업 가문의 장녀였던 그는 뉴욕 맨해튼의 가톨릭계 명문인 성심여고(Sacred Heart)를 다녔다. 이 학교는 케네디 가문의 여성들이 주로 다녔고, 팝스타 레이디 가가 역시 이 학교 출신이다.
그 당시 패리스가 거주하던 곳은 뉴욕의 전설적인 호텔 월도프 아스토리아. 미국의 근현대사를 함께한 이 호텔에는 후버, 아이젠하워 등 전직 대통령들이 여생을 보냈고, 맥아더 장군 부부도 전망 좋은 펜트하우스에 무상으로 거주했다. 한국 대통령들도 유엔 총회 참석 시 이곳에 묵는 게 관례였다.
그 호텔의 오너 딸이었던 패리스는 말 그대로 ‘수퍼 갑’이었다. 학교 등하교 시 호텔 직원들이 줄을 서 인사했으며, 방 청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종업원을 무릎 꿇리는 등 온갖 ‘갑질’을 일삼았다. 직원들은 생계를 위해 그저 참을 수밖에.
졸업 후 패리스는 단박에 연예계 스타가 됐다. 리얼리티 쇼 ‘심플 라이프’를 통해 이름을 알렸다. 방송국 측은 힐튼 호텔이 주요 광고주라는 이유로 마지못해 패리스에게 진행을 맡겼다. 노력 없이 얻은 자리였다. 할리우드에서는 전형적인 ‘famous for being famous’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부러움보다는 냉소와 경멸이 섞인 말이었다.
평범한 가정 출신 인물이 같은 스캔들을 일으켰다면 감옥에 갔을 일. 하지만 패리스는 오히려 더 유명해졌으니, 결국 ‘갑’으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유리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몇 해 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땅콩 회항’ 사건도 유사한 맥락이다. 대한항공 총수의 장녀였던 부사장의 갑질은 비행기를 되돌릴 만큼 심각했다. 수백 명의 안전을 책임진 기장이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회항한 건 이례적이었다. 자녀의 자질과 능력이 검증되지 않았다면, 부모라도 과감히 손을 떼야 했던 건 아닌가 싶다.
하지만, 한국 재벌가 가운데 ‘부모 덕분에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겸손함과 실력으로 인정받은 인물도 있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장손녀, 이미경 동문(생과대 77)이 대표적이다.
CJ그룹에서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총괄하는 그는 얼마 전 USC 영화예술학교 졸업식에서 연설자로 초청받아 졸업생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USC는 스타워즈 제작자 조지 루카스를 비롯해 수많은 영화인을 배출한 명문 대학이다.
이 동문은 연단에서 서울대 입학 당시를 회상했다. “서울대에 들어갔을 때, 절반 이상이 시골 마을 출신이었어요. 그 동기들이 (고액) 과외 없이 혼자 공부해 들어온 걸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는 너무 작게 느껴졌고, 그래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죠.”
이는 패리스 힐튼이나 ‘땅콩 부사장’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유명한 집안 출신이지만, 그것이 자만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를 낮추는 계기가 되었던 것.
이 동문은 지난 5월, 미국 이민자 권익 증진에 기여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엘리스 아일랜드 명예훈장’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남가주에 거주하며, 할리우드에서는 ‘미키(Miky)’라는 이름으로 존경받는 영화 제작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미주 동창회보 375호 2025.8. 편집고문 박용필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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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회보 발행을 앞질러 칼럼을 옮겼습니다: 문병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