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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필의 미국인 이야기
’12번째 사나이’가 만든 기적
마이크를 잡은 가녀린 손이 심하게 떨렸다. “대체, ‘12번째 사나이(the 12th Man)’, 그들은 다 어디 있나요?” 울먹이는 목소리에 수만 명의 관중이 숙연해졌다. 15년 전 영국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에서 실제로 있었던 장면이다.
그 주인공은 델리아 스미스, 노리치 시티의 구단주다. 전반전 내내 강호 맨체스터 시티에 밀려 무기력한 경기를 펼치는 팀을 보다 못한 스미스는 하프타임에 마이크를 잡았다.
축구는 11명이 뛰는 경기지만, ‘12번째 사나이’가 있다. 바로 서포터즈, 팬을 뜻한다. 선수들의 기량이 아무리 뛰어나도 응원이 없다면 승리하기 어려울 터. 스미스는 관중석의 응원 열기가 부족해 선수들이 힘을 내지 못한다며 분발을 호소했다.
“제발, ‘12번째 사나이들’이 힘 좀 보태주세요!” 그녀의 읍소가 통했을까. 후반전 휘슬이 울리자마자 응원이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전반전 몇 골을 내주며 패색이 짙었던 노리치 시티는 끝내 역전기적을 만들어냈다. 스미스에게 ‘12번째 여인’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유럽이나 중남미 프로리그에서는 등번호 12번을 단 선수를 거의 볼 수 없다. 대부분의 구단이 ‘12번째 사나이’를 기리기 위해 12번을 영구결번(retired number)으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펠레, 마라도나, 메시가 모두 10번을 달았던 것도 이런 이유다.
그렇다면 ‘12번째 사나이’의 기원은 어디일까. 의외로 프리미어리그가 아닌 미국 풋볼에서 시작됐다. 풋볼 역시 11명이 뛰는 경기. 100여 년 전 텍사스 A&M대학이 처음 이 말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이 대학 스타디움에는 ‘12th Man’이라는 대형 사인이 걸려 있다. 이 전통이 유럽으로 건너가 축구 문화에 뿌리내린 것이다.
‘12번째 사나이’는 이처럼 심리적으로 막강한 효과를 발휘한다. 홈팀 선수들에게는 사기를 북돋우는 보약이지만, 원정팀에는 큰 압박이 된다. 심판도 예외가 아니다. 홈팀에 불리한 판정을 내렸다간 쏟아지는 야유에 위축되기 쉽다.
하버드대 연구에 따르면, 홈팀은 관중 1만 명당 0.1골의 추가 득점 효과를 얻는다. 지난 20년간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분석한 결과다.
세계 최대의 스포츠 축제인 월드컵에서도 팬의 힘은 절대적이다. 1994년 월드컵은 사상 처음 ‘축구의 불모지’ 미국에서 열렸다. 개막 몇 달 전, 워싱턴 포스트가 여론조사를 해보니 미국인의 70%가 월드컵을 여자축구로만 알고 있었다. 당시 미국 여자대표팀이 세계 최강이었기에 생긴 해프닝이었다.
미국 축구의 인기는 리오넬 메시의 메이저리그사커(MLS) 진출을 기점으로 달라졌다. 3년 전 메시가 마이애미에 입단하자 관중석은 연일 매진됐고 티켓값은 수백 달러로 치솟았다. 여기에 최근 손흥민이 LAFC에 합류하며 최고의 흥행 카드로 떠올랐다. 동부에는 메시, 서부에는 ‘쏘니.’ 두 스타는 마치 미국 축구 부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파견된 사절단 같았다.
지난 8월 27일, 손흥민은 LA 다저스와 신시내티 레즈의 홈경기에서 시구를 맡았다. 5만여 ‘12번째 사나이’가 쏘니를 외치며 응원한 덕분에 다저스는 난적 레즈를 꺾고 월드시리즈 진출에 한 걸음 다가섰다.
내년에는 미국에서 월드컵이 또 한번 열린다. 메시와 손흥민의 맞대결이 성사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뜨겁다.
미주 동창회보 제 376호 2025년 0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