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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록으로 만나는 서울대
그때 그 시절 우리들의 캠퍼스(1)
2024.01.09.
1946년 출범한 서울대학교는 당시 유일한 국립종합대학교로서 1개의 대학원과 9개의 단과대학(문리과대학, 사범대학, 법과대학, 상과대학, 공과대학, 의과대학, 치과대학, 농과대학, 예술대학)으로 구성되었다. 경성대학과 10개의 전문학교의 연합체인 서울대학교는 종합화 이전까지 전신 학교의 캠퍼스들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각 학교들이 소유하고 있던 동숭동, 연건동, 청량리, 공릉동, 종암동, 을지로, 소공동, 남산, 수원 등 여러 곳에 캠퍼스가 분산되어 있었다. 서울 곳곳과 수원에 자리 잡은 캠퍼스들은 자신들만의 학풍과 문화를 만들어왔다. 1975년 서울대학교 종합화로 각 학교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면서 이전 캠퍼스들은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이제는 종합화 이전 추억 속 캠퍼스의 모습을 사진과 기록들을 통해 부분적으로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낭만과 정의가 흐르던 동숭동 캠퍼스]
혜화역 대학로의 마로니에 공원 한가운데에는 ‘서울대학교 유지 기념비(遺趾 記念碑)’가 자리하고 있다. 이 기념비는 옛 동숭동 캠퍼스를 실물 크기의 백분의 일로 축소한 모양이다. 기념비 옆에는 캠퍼스의 상징과도 같았던 마로니에 나무가 여전히 사람들에게 휴식의 공간을 만들어주고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휴식하는 사람들 중 서울대학교를 떠올리는 사람은 이제 그리 많지 않다. 동숭동 캠퍼스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가고 하나의 기념비로만 남아있다.
1946년 서울대학교 개교 당시 동숭동 캠퍼스에는 문리과대학의 문학부, 법과대학, 예술대학이 위치했다. 여러 단과대학 뿐만 아니라 대학본부와 중앙도서관이 자리한 동숭동 캠퍼스는 서울대학교의 중심 캠퍼스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중심 캠퍼스로 제 기능을 하기도 전에 6·25 전쟁이 발발하여, 서울대학교는 미군 제8군에게 수용되었다. 1953년 미군으로부터 캠퍼스를 반환받았지만, 당시 교사는 전쟁으로 인해 크게 파손되어 있었다. 다행히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학교는 점차 안정되어 갔으며 캠퍼스에도 활기가 생겨났다.
동숭동 캠퍼스의 도서관 건물 앞에는 두 평 정도의 분수대가, 문리과대학 교정에는 서울대학교의 상징이었던 큰 마로니에 나무가 있었다. 학생들은 여름이면 마로니에 나무가 만들어주는 커다란 그늘 아래 앉아 휴식을 취했고, 가을이면 ‘사랑의 열매’라 부르던 마로니에 열매를 따며 추억을 만들었다. 대학본부와 문리과대학 앞에는 대학천이 위치해 있었다. 봄이면 강변을 따라 개나리 행렬이 노랗게 꽃 피었고 가을이면 교정의 은행잎이 강가를 장식하여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학생들은 이 대학천을 ‘세느강’이라고 부르며, 하천 위의 다리는 ‘미라보 다리’라고 불렀다.
세느강변(문리과대학 앞), 1965.
세느강이라 불리는 강변을 따라 개나리가 피어있고 좌측에는 미라보 다리라 불리던 다리가 있다.
“아기자기한 신화적 지도를 그리던 그곳은, 낙산의 염색 공장으로부터 울긋불긋한 물감이 흘러나오는 개천을 ‘세느강’이라 부르고 문학과 철학에 취해 ‘생명 연습’을 하듯 ‘미라보 다리’를 뛰어내리기도 하던, 김승옥의 소설에서 읽히는 60년대식 젊음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는 자리였다.”
(동숭동에서 관악으로, 「대학신문」, 1996.10.14.)
동숭동 캠퍼스 법과대학 정문 왼쪽에는 1956년 10월 20일, 개교 10주년을 기념하여 동창회에서 기증한 ‘정의의 종’이 있었다. 정의의 종은 낮고 작지만 역사를 응시하는 자세로 의연히 서있었다.
“이 종은 정의를 이념으로 하는 법학도들에게 부단한 각성(覺醒)을 채찍질하는 경종이며 동시에 온갖 학내외(學內外)의 비리에 대한 젊은 망루(望樓)이어왔다.(망루였다.) 4·19 의거날 아침 종은 성난 포효(咆哮)로 젊은이들의 피를 끓였고, 이날 민주제전(民主祭展)에 목숨을 바친 고(故) 박동훈군의 장례식에는 애끓는 조종(弔鐘)이 되기도 했다. 법이 정의의 실현이라면 종은 법의 감시탑. 지금은 역사의 그늘로 밀려나 고요를 머금은 채 있지만 종의 침묵에는 침묵 이상의 무엇이 있다.”
(캠퍼스 移轉을 앞두고 大學街 名所 巡禮(3) - 正義의 鐘, 「대학신문」, 1973.3.26.)
“정의의 종은 찬연한 전통의 상징이며 사회의 비리를 고발하는 자명고이었다. (중략) 억압받는 민중에 선 자유 지성의 상징이었다.”
([정의의 종]타종식 ‘가성과 경종의 소리되길’, 「대학신문」, 1980.4.28.)
법과대학 정문 앞에서부터 문리과대학 후문에 이르는 길에는 양쪽으로 우람한 플라타너스가 줄지어 있었다. 이곳이 바로 대학가였다. 대학가에는 서울대 학생들이 많이 찾는 음식점과 다방들이 있었다. 그중 학림다방은 강의실만큼이나 학생들이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다. 당시 서울대학교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그 다방의 찻잔을 만져봤을 정도였다. 학림다방은 80여 명이 앉아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차를 마실 수 있을 만큼 큰 공간이었다. 학생들은 학림다방에 있는 피아노를 자주 연주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빼놓을 수 없는 대학가의 명물은 ‘春’ 자 돌림의 중국집 두 곳, ‘진아춘(進雅春)’과 ‘공락춘(共樂春)’이었다. 이들 중국집은 학생운동이 한창일 때 전경을 피해 온 학생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80여명이 앉을 수 있는 이 다방에 들어서면 아직도 옛선배들이 자주와 연주했다는
피아노가 놓여있어 대학가 풍물을 말해주고 있다.”
동숭동 대학가에 자리한 진아춘은 배고픈 학생들이 즐겨찾던 중국집이었다.
관악 캠퍼스로 이전한 뒤 진아춘의 사장님은 동숭동 시절 서울대생들이
외상으로 짜장면을 먹으면서 맡기고 찾아가지 않은 시계들을 서울대 기록관에 기증하였다.
“시계탑 앞 잔디에 누워 맞았던 햇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열띤 토론을 벌이던 마로니에 그늘, 모차르트 40번을 들으며 모닝 커피를 마시던 학림다방, 학생증 맡기고 외상을 긁었던 튀김 집이나 짜장면 집 진아춘(璡雅春)의 낭만을 말한다.”
(동숭동과 관악산, 「대학신문」, 2003.9.8.)
[오랜 역사 속에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연건동 캠퍼스]
동숭동 캠퍼스 길 건너편에는 현재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연건동 캠퍼스가 위치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개교부터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연건동 캠퍼스에는 여러 단과대학들이 머무르고 또 떠나갔다. 의과대학은 서울대학교 출범부터 현재까지 연건동에 자리하고 있으며, 1959년에는 약학대학이 을지로 6가에서, 1969년에는 치과대학이 소공동에서 연건동 캠퍼스로 이전해 왔다. 음악대학은 1956년부터 1959년까지 연건동에 머물렀으며, 미술대학은 1963년부터 1973년까지 머물렀다. 수의과대학은 개교 당시 연건동에 위치하다가 1962년에 수원 캠퍼스로 이전하였다.
연건동 캠퍼스에는 오랜 역사를 품고 있는 사적(史跡)들이 있다. 먼저는 의과대학 안에 위치하고 있는 함춘원지의 석단(石壇)과 ‘함춘문(含春門)’이 있다. 함춘원지는 조선 성종 때 창경궁 앞 동쪽 언덕에 조성되었던 궁궐의 후원, 함춘원(含春苑)의 터이다. 조선 전기까지는 언덕이 모두 함춘원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와서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일부는 사도세자의 사당(경모궁(景慕宮))이 되었다. 함춘원지와 관련하여 현재는 경모궁의 유적인 석단과 함춘문만이 남아있다.
또 다른 역사를 품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도 연건동 캠퍼스를 지키고 있는 시계탑 건물이다. 이 건물은 빨간 벽돌로 이루어진 조적식(組積式) 구조의 형태로 시계탑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시계탑 건물은 1908년 세워진 구(舊) 대한의원의 본관으로 사용되다가 서울대학교가 개교함에 따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병원의 본관이 되었다. 1970년대 말 새로운 건물이 세워진 뒤에는 부속건물이 되었다.
[학문과 자연의 향기가 가득한 종암동 캠퍼스]
종암동 캠퍼스는 1920년까지만 해도 울창한 소나무 숲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종암동 캠퍼스에는 상쾌한 솔 향기가 가득한 소나무 숲이 캠퍼스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학생들은 상과대학 본관 건물 앞 150여 평, 도서관으로 가는 100여 평의 소나무 숲을 ‘향상림(向上林)’이라고 불렀다. 제1회 홍릉제 개최 당시 첫 야외음악제가 향상림에서 열렸는데, 이때 상과대학생들의 패기를 기르는 뜻에서 ‘향상’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향상림은 평소에는 소나무 숲길이 하늘을 가려주어 학생들을 위한 쉼의 공간이 되기도 하고, 축제와 같은 특별한 날에는 운치 있는 야외무대가 되기도 했다. 특히 눈이 오는 겨울날의 설경은 가히 절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향상림은 학생들에게 여러 시간 속 특별한 공간이 되어주었다.
상과대학 향상림, 1962.
“도서관族과 데이트族이 밤 늦게까지 공존하며 老松의 풍취를 즐기던 곳, 소나무 사이사이 마련된 벤치와 잔디 위에서 동료간의 토론과 閑談이 오가던 향상림”
(옛 캠퍼스를 찾아서, 「대학신문」, 1982.10.18.)
상과대학은 서울대학교 개교부터 종합화 전까지, 6·25 전쟁 시기를 제외하고 홀로 종암동 캠퍼스를 지켰다. 상과대학 학생들은 종암동 캠퍼스에서 축제, 문학의 밤, 음악회, 체육대회, 카니발, 학술대회, 토론회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했다. 학생들은 파고다 공원까지 행진하며 역사적 인물을 추념(追念)하고, “우리 학생들은 젊은이들의 낭만을 찾고, 청춘을 구가하며, 젊은 기백으로 나라를 지키고 부흥시켜 나갈 것이다.”라는 취지가 담겨있는1) 홍릉제 결의문을 채택하는 등 자신들만의 향상(向上)적인 캠퍼스 문화를 만들어 갔다. 서울대학교가 관악으로 모여들 때, 종암동 캠퍼스의 교사들은 일부 헐렸지만 많은 건물들이 서울대 부속 중·고등학교의 교사로 쓰이게 되었으며, 그 터도 고스란히 교정으로 보존되었다.
이처럼 옛 전신학교 자리에 위치했던 서울대학교 캠퍼스들은 각자의 독특한 학풍과 정체성을 만들어 나갔다. 서울대학교 종합화 이전까지 중심 캠퍼스 역할을 했던 동숭동 캠퍼스, 개교부터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연건동 캠퍼스,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탐구했던 종암동 캠퍼스 외에도 그때 그 시절 캠퍼스들은 수원과 서울 시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60년사』, 2006.
서울대학교 7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70년사』, 2016.
서울대학교 기록관, 『지성과 역동의 시대를 열다, 1953-1975』, 2016.
“캠퍼스 移轉을 앞두고 大學街 名所 巡禮(3) - 正義의 鐘”, 「대학신문」, 1973.3.26.
“캠퍼스 移轉을 앞두고 大學街 名所 巡禮 - 商大 向上林.”, 「대학신문」, 1973.4.30.
“含春苑 略史”, 「대학신문」, 1974.4.1.
“[정의의 종]타종식 ‘가성과 경종의 소리되길’”, 「대학신문」, 1980.4.28.
“옛 캠퍼스를 찾아서”, 「대학신문」, 1982.10.18.
“연건캠퍼스 봄 대동제 개막”, 「대학신문」, 1992.6.1.
“연건캠퍼스 후문준공”, 「대학신문」, 1992.3.2.
“연건 기숙사 기공식 가져”, 「대학신문」, 1996.9.9.
“동숭동에서 관악으로”, 「대학신문」, 1996.10.1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
향상의 탑(SD magazine) http://www.sdmagazine.kr
- 1)[제182호] 1960년 제1회 홍릉제 - 서울상대 대학축제[향상의 탑(SD magazine)], http://www.sdmagazine.kr/gr4d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