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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Topic: 러시아 수몰장병 추모비의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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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December 3, 2013,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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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칼럼] 러시아 수몰장병 추모비의 경고

[중앙일보] 입력 2013.11.14 00:35 / 수정 2013.11.14 00:35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하루밖에 안 되는 짧은 한국 방문 일정 중에도 어젯밤 출국 길에 인천 연안부두의 러시아 해군 수몰장병 추모비를 찾아 헌화했다. 2009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져온 검정 화강암으로 만든 추모비는 1904년 러일전쟁의 첫 전투 상황을 후세에 전하는 ‘기억의 비’ 같은 것이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 추모비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 어떤 경고를 주는 것인가.

 1895년에서 1905년까지의 10년간 조선은 중국(청), 러시아, 일본 세력의 각축장이었다. 청일전쟁(1895)에서 일본이 승리해 조선에서 중화질서가 무너지고 잠시 힘의 공백기가 생겼다. 청일전쟁으로 조선 지배 야욕의 절반을 달성한 일본을 남하하는 러시아가 가로막았다. 일본은 러시아의 만주 철도경영의 특수이익을 인정할 테니 러시아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라고 제안했다. 러시아는 조선반도의 북위 39도 이북을 중립지대로 하자고 맞섰다. 세기가 바뀌어도 러·일 간의 외교협상에 진전이 없는 사이에 일본에서는 군부를 중심으로 전쟁론자들의 세력이 힘을 얻었다. 전쟁이 하고 싶은 러시아의 군사 지도자들은 동양의 ‘노랑 원숭이’와의 싸움은 전쟁이라기보다 ‘군인들의 산책’이라고 자신했다. 1903년 말에 이르러 동양의 뜨는 제국과 서양의 지는 제국은 전쟁의 레일 위를 마주 보고 달리는 두 기관차의 꼴이었다.

 그런데도 그때의 열악한 통신 사정으로 이런 급박한 사태는 조선 주재 러시아 공사관과 제물포항에 들어와 있던 러시아 포함 카레예츠호와 호위 순양함 바랴크호에는 제때 전달되지 않았다.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포고한 것은 1904년 2월 10일. 일본은 이미 모든 외국 함정들에 제물포를 떠나라고 통보한 상태다. 일본이 러시아 함정을 공격하면 자칫 다른 나라 함정들이 피해를 볼 수 있는 절박한 상황이다. 카레예츠호와 바랴크호는 다른 나라 함정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중국의 다롄으로 가려고 제물포항을 떠났다. 팔미도 부근을 지키고 있던 일본 해군은 카레예츠호와 바랴크호에 어뢰 공격을 퍼부었다. 두 배에는 690명의 장병이 타고 있었다. 30분 동안 발사한 3000발 이상의 어뢰는 러시아 함정들을 피해갔다. 두 함정은 항해를 포기하고 회항했다. 그러나 바랴크호는 뱃머리를 돌리다 어뢰 3발을 맞았다. 선채는 기울고 장병 40명이 전사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시체와 부상자를 싣고 추격하는 일본군의 어뢰 공격을 받으면서 제물포 외항까지 온 바랴크호와 카레예츠호 함장들은 러시아제국의 해군 함정을 ‘동양 야만인’의 손에 넘길 수 없다며 ‘자살’의 길을 택했다. 장병들을 보트로 탈출시킨 뒤 카레예츠호는 화약고로 통하는 도화선에 불을 붙여 자폭하고 바랴크호는 수장됐다. 카레예츠호의 폭발 소리에 인천포구 주민들이 크게 놀랐다. 그 틈에 일본 육군부대는 제물포에 상륙했다. 프랑스의 파스칼호와 영국의 탈보트호가 러시아 장병들을 구조해 귀국길의 편의를 제공했다. 일본은 영국·프랑스·이탈리아 함정의 선장들에게 일본군의 포로인 러시아 군인들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유럽 3국의 함장들은 일본군이 선전포고 없이 러시아 함정을 공격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항의했다.

 그러나 유럽 3국의 일본에 대한 항의는 거기가 끝이었다. 미국은 일본과 이듬해 체결하게 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협상 중이었다. 미국은 일본의 조선 통치를,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상호 인정하는 비밀협정이다. 그래서 미국 해군 함정 빅스버그호가 제물포에 와 있었지만 미국은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영국은 2년 전 영·일 동맹을 체결한 처지에다 러시아의 동아시아 진출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을 적극 지원했다. 인도차이나를 식민지 경영하고 있던 프랑스도 러시아를 지원할 이유가 없었다. 이탈리아에는 영국과 프랑스와의 우호관계가 더 중요했다. 이렇게 러일전쟁 개전 때 구미 열강들이 취한 태도는 철저히 지정학적 이해에 좌우됐다.

 그들의 안중에 조선은 없었다. 서양의 외세들은 죽은 짐승의 시체에 덤벼드는 하이에나처럼 중국에서 이권을 다투고, 조선은 이제 막 제국주의 열강의 말석에 오른 일본에 넘겨도 이 지역에서 그들의 이익에 손해 나는 일은 없다고 판단했다. 조선의 운명이 주변 강국들의 손에 농단되고 있어도 무능한 조선은 말 한마디 할 힘이 없었다. 푸틴이 찾은 1904년의 수몰장병 추모비는 오늘의 우리에게 제 나라의 지정학적 이익을 희생하면서까지 힘없는 약소국을 지원할 나라는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다고 아우성으로 경고하고 있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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