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오렌지 카운티의 날씨가 쌀쌀해졌습니다.
오늘, 청마의 해라는 갑오년 새 해 저는 서울을 향합니다. 제가 말띠라서 인지 올해는 제 해 같습니다.
충남 구온양에 있는 조그만 아파트를 정리하고 그곳의 가구들을 그 동안 세주고 있던 마포구 신공덕동의 역시 조그만 오피스텔로 옮기기 위해 집사람과 불쑥 다녀오게 된 것입니다. 구온양은 저의 고향인 아산 세일(중리)에서 불과 반 마일도 안 떨어져 있어 몇 년 전에 마련 해 놓고 가끔 한국 나갈 때마다 머물면서 고향 마을에서 지금도 살고 있는 친구들과 만나곤 했는데, 서울을 오가자니 아내가 불편을 호소하고, 저 또한 너무도 변모 해 가는 고향 마을 풍경으로부터 실망과 소외를 느끼던 차에 뜻밖에 구매자가 빨리 나타나 급하게 비행기를 타게 된 것입니다. 마침 신공덕동 오피스텔도 재계약에 들어갈 시점이 되어 세입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계약을 종료하였으며 향 후 이 오피스텔은 한국 나올 때 머물 곳으로 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오피스텔을 비워두기보다는 인근 부동산의 홍실장에게 부탁 해 간간이 쓰고자 하는 이에게 며칠씩 임대 해 주도록 할 예정이지요. 오피스텔은 주거용 아파트 겸용이고 아파트 승강기로 지하 2층 내려가면 5호선과 6호선 및 인천공항으로 직결되는 공항철도가 연결되어 길 위로 나서지 않아도 지하철을 탈 수 있어 고국 방문이나 혹은 지방에서 서울 출장 오는 사람들에게 좋은 숙박지가 되리라는 홍실장의 말이었습니다. 지척간에 e-Mart, 롯데 마트, 공덕동 재래시장이 있어 잠시 시간 내어 고국의 첨단과 옛 모습을 두루 접할 수 있고 여의도는 전철로 두 역, 광화문은 다섯 역, 홍대는 한 역 사이입니다.
한국에서의 18일간 지낸 일들을 일기 쓰듯 이곳에 담을까 합니다. 너무 평범하고 개인적인 기록이지만 꼬박꼬박 적어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이번에 서울을 꼭 나가야 될 이유는 또 있었습니다. 저나 아내가 소지하고 있던 외국국적동포 국내거소 신고 증이 만기가 되어 2014년1월 중에 갱신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88올림픽 폐막식 즈음 미국 생활 18년 만에 한국에 들어 가 대기업의 해외 석유개발 부서에서 일을 시작 했는데 오클라호마에 미 국적을 갖고 살고 있던 가족이 합류하면서 초등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던 세 애들을 연희동 '서울 외국인 학교'에 보내야 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당시의 법은 아이들 보호자가 이중 국적을 포기하도록 되어 있어 부득이 한국 국적을 포기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한 편 직장과 연계된 국내 장기 체류를 위해서는 외국인 거소증이 필요 하였고 을 갖게 되었고 이것을 매 3년마다 연장하면서 지금껏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소증이 있다고 투표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국적 회복 청원을 계획하고 있고 작게나마 한국에 집을 소유하고 있는 저로서는 거소증이 꼭 필요 할 것 같은 생각인 것입니다. 최근에 법이 바뀌어 동포의 복수여권 소지가 허용되었으나 국적 회복을 위해서는 최소 3개월의 국내 거주가 필수여서 차일 피일 해 오던 터 입니다. 올 해 안에 할 계획입니다. 우뚝 서는 한국의 위상과 더불어 한국인임을 과시 할 날이 오는 것 같습니다.
밤 열한 시 LAX를 이륙하는 KE02편으로 새해 첫날밤을 비행기 안에서 보내게 된 것은 나름대로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만 비즈니스 석과 이코노믹 석의 너무 큰 대조는 자본주의 국가의 물질만능 관행을 그대로 들어 내놓은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었습니다. 이코노믹은 만석이라 하여 할 수 없이 비지니스로 끊었습니다만 저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비즈니스 석과 이코노믹 석의 심한 차이를 보며 자본주의의 냉정함을 느낍니다. 그런 느낌은 직장 다닐 때 으레 비즈니스 석에 앉아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더구나 일등석은 돈 쓸 곳 없어 안달하는 캐피탈리즘의 표상 같기도 합니다. 물론 세계 최강국 미국의 꽃이라 할 자유 경제주의 케피탈리즘을 이런 식으로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호화로운 것은 더 호화스럽게 넓히고 업그레이드 하는 중에 대중적인 이코노믹 석은 더 좁혀가는 항공사들의 상업 이기주의가 싫습니다.
1월 1일 저녁 11시에 LAX을 떠나 12시간을 날아 인천 활주로에 착륙하니 서울은 1월3일 새벽 6시30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1월 2일은 비행기 안에서 뺏긴 셈이 되었습니다. 출국 수속라인에서 양손 검지의 지문을 채취하는 것이 전에 없던 것이라 좀 새삼스럽다 싶었습니다. 전에는 KE02편을 타고 오면 공항에서 한 시간 가량 기다려야 첫 공항 리무진이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오늘은 7시 10분 천안/온양 행을 곧바로 탈 수 있어 기분이 좋았습니다. 대형 버스 안에 탑승객은 몇 안되었으나 제시간에 어김없이 출발하는 공항버스 시스템은 훌륭합니다. 천안에서 잠깐 정차 하는 중 버스는'버스 wash'에 들려 큼직한 브러시가 버스를 통째로 닦아 내는데 볼만 하였습니다.
두 시간 반 걸려 온양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였으며 택시를 잡아 기본 요금 정도인 아산시 장존동의 청솔 아파트에 도착하니 꼭 세시간이 걸린 셈이 되었습니다. 1월 3일 아침 열 시의 아산시 구온양은 약간 쌀쌀했지만 여기저기 그늘진 곳은 아직 녹지 않은 눈들이 지난달의 혹독히 추웠던 겨울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1월 4일(토요일)
아파트는 구온양의 외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름이 구온양이 된 것은 조그만 언덕을 넘어 신온양과 구별 짓기 위함 같습니다. 신온양은 그저 온양으로 불리는 인구 오만 정도의 큰 도시이고 구온양은 옛날 원래 있던 온양으로 인구 몇 백 정도의 조그만 마을입니다. 천안-온양간 기차길이 놓인 일제 말기 마을 노인들이 양반 사는 곳에 요란한 기차가 들어 올 수 없다고 하는 통에 철도를 지금의 온양으로 내게 되었고 따라서 구온양은 발전 못하고 지금 상태로 주저 앉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쪽으로 반 마일 정도 가면 어릴 때 살았던 세일 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곳 구온양의 청솔 아파트는 아직도 주위에 논밭이 펼쳐져 있어 도시의 맛보다는 시골 전경이지만 2년 전에 안 보이던 아파트와 건물들이 여기저기 들어 서 있어 점점 도시화 되어 가는 낌새가 완연 합니다. 아파트도 그야말로 주차 난을 겪고 있는 것이 세대별로 차가 한두 대씩은 있는 모양입니다. 저의 아파트는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어 바로 앞의 설화산과 좀 더 남쪽으로 외암리 민속마을, 그리고 강당 골까지 시야에 들어 옵니다. 설화산 왼쪽에는 저의 고향인 아산군 중리2구인데 옛날에는 세일 검배라고 불렀습니다. 강당 골 뒷산을 넘으면 광덕 사가 나오는데 그곳은 공주와 연결 됩니다. 이제 아파트 창 밖으로 한 폭의 그림을 선사하고 있는 산과 들, 안개에 반쯤 묻힌 농가에서 모락모락 피는 연기를 이렇게 바라볼 수 있는 것도 며칠 안 남았다 생각 하니 갑자기 아쉬워 집니다.
시차 탓에 저와 아내가 새벽에 깨는 바람에 몇 가지 짐을 챙겨 차에 싣고 이른 아침에 서울을 향했습니다. 마포 신공덕동의 오피스텔을 보러 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천안과 온양을 잇는 8차선 도로가 완전 개통되어 있었습니다. 신나게 달리면서 그 동안 몇 년을 끌던 도로확장 공사가 다 끝났는데 이제 사용 할 만 하니 이사 가게 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이 길은 초등학교 다닐 때, 육이오 전쟁 통에 버스도 변변치 못하던 때에 세일에서 천안까지 30리 길을 타박타박 걷던 길이기도 합니다. 봉강교 다리를 건너고 차돌고개를 넘어 한없이 가다 보면 천안이 나타나곤 했는데 그때 화차는 차돌고개를 기어 오르느라 속력이 낮아져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는 기차에서 뛰어 내려 자기 마을로 가는 광경도 눈에 띠곤 했습니다. 지금은 KTX가 지나가고 삼성에서 지은 65층 건물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며 2010년에는 천안까지 오던 전철이 온양을 내질러 신창까지 뻗어 서울에서 용돈능력 있는 노인들이 단돈 만원을 주머니에 넣고 온양까지 노인 우대 무료 승차하고 온양에 와 목욕 하고 설렁탕 먹고 서울가면 뿌듯한 하루 일과가 된다 합니다.
어저께 지하 주차장에 커버를 씌어 놓은 채 1년 넘게 잠자던 차의 곰팡이를 제거하고 시동을 걸어 충전 해 놓았기 때문에 차가운 날씨에도 차는 잘 움직여 주었습니다. 서울 나오면 쓰려고 2년 전에 중고 시장을 뒤져 사 놓은 삼성 르노 차 입니다. 아파트 근처 주유소에서 거의 바닥이 난 연료 탱크를 채우는데 9만 오천 원이 들었습니다. 아마 오렌지 카운티 이었다면 4만원 정도 들었겠지요. 인근 주유소에서 연료를 꽉 채웠는데 세차장을 아직 열지 않고 있어 대신 무료 세차 쿠폰을 받아 들고 서울을 향했습니다.
천안 인터체인지의 하이패스 라인을 지나는데 차에 장착한 단말기가 먹통인 것이 이상했지만 서울 가서 체크 해 보기로 하고 경부 고속도로에 진입했습니다. 서울까지 고속도로는 막힘이 없어 한 시간 반정도 걸렸습니다. 평택을 지나려면 으레 고속도로 체증이 있었는데 술술 잘도 빠졌습니다. 서울 고속도로 요금 정산 소에서 하이패스를 지나는데 여전히 먹통이었습니다.
신공덕동 오거리의 대우 메트로 디오빌 30층 주상복합 아파트에 도착하여 조그만 아파트 형 오피스텔 문을 여니 그런대로 주인을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아파트 뒤편에 있던 넓은 개발단지의 몇 십 년 된 구 가옥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웅장한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서울에 올 때 마다 이 동네의 비좁고 꼬불꼬불하며 하수구 냄새가 물씬 나긴 하지만 그런 대로의 정이 담긴 골목을 돌아 옛날 이발의자에 앉아 머리도 깎고, 골목 식당에서 삐걱거리는 문을 밀고 들어가 된장찌개를 먹던 '재개발단지'이었는데 동네가 갑자기 초 현대식의 아파트로 바뀐 것입니다. 퀘퀘한 하수구 냄새는 없어졌지만 구수한 이발사 영감의 자취도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디오빌 아파트의 복도 창문을 통해 고층건물 사이에 보이는 공덕 재래시장의 납작한 모습은 오히려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시장 한 모퉁이에 걸려 있는 ‘재개발 반대’ 현수막이 불원간 몇 십층의 최신식 백화점으로 바뀔 저들의 미래를 말 해주는 듯 합니다.
오피스텔은 수리 할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 마침 디오빌 지하 상가에 인테리어 하는 회사가 있어 도배와 바닥 마루타일 수리, 그리고 청소를 부탁하였습니다. 그 동안 오피스텔의 세입자 관계를 보살펴 준 부동산 홍실장은 도배, 청소 등 여러 기술자들을 따로따로 소개를 해 주었지만 전화번호 048282를 ‘공사 빨리 빨리’라는 상호와 함께 두 달 전에 개점했다는 황사장이 맘에 들어 그에게 모든 것을 일임 하였습니다. 백사십만 원의 견적이 나왔습니다. 내주 목요일까지 수리를 끝내도록 합의를 보고 오후 세 시경 다시 온양을 향했습니다. 구온양의 아파트에는 이삿짐 센터에서 목요일에 트럭을 가지고 오기로 되어 있어 부지런히 내려 가 짐 정리를 해야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침에 올라올 때와는 달리 교통체증이 심했습니다. 하이패스 사무실에 들려 차량 번호를 대니 아침에 요금 안내고 통과한 기록이 바로 뜨며 서울 천안간의 도로 통행료 4500원을 미납한 기록을 보여 주었습니다. 바로 신고 하는 것이라 체납 벌금 없이 요금만 내면 되는 것이었지만 기막히게 완벽한 한국 도로망의 전자정보 통신 데이터 시스템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그리고 친절히 하이패스 단말기가 충전이 되어있지 않다고 일러주어 천안 내려가면서 충전을 하고 나니 인터첸지를 나설 때 단말기 스피커가 징수한 요금과 잔금을 친절히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아침에 단말기가 먹통이 되었던 것은 오랜만에 나온 제가 단말기를 충전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습니다.
1월 5일(일요일)
아침에 반 마일 떨어진 고향마을의 친구 김용선에게 전화 해 점심을 얻어 먹기로 하고 혼자 나섰습니다. 이곳 중리2구는 어렸을 때 검배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었는데 우로 설화산, 좌로 배방산, 그리고 안으로는 맹경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시골 마을 중 하나로 경관이 맑고 사람들이 여유가 있으며 후한 인심이 아우러져 정이 넘치는 마을입니다. 천안 역 근처가 본 고향인 저희 집안은 부친께서 이곳에 금광 채굴/제련소와 정미소를 운영하고 계시던 차에 육이오를 만나 폭격을 피해 이 동네로 피난을 오게 되어 저는 초등학교 3년간을 이곳에서 보내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 3년이 저로서는 잊을 수 없는 마음의 고향이 된 것이며 이 동네에서 같이 오리 길 되는 금곡 초등학교에 다닌 동무들 다섯 중 아직도 이 동네에 사는 김용선, 임현재, 임창수 세 동무들이 있어 저는 한국 나올 때마다 이 친구들을 찾습니다.
이 친구들은 당시의 이 마을 대부분의 소년들이 그랬듯 고교나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농사를 계속 짓고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의 삶의 지혜는 풍성하고 인격이 갖추어져 있으며 섣부른 지식이 범접 못하는 인성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용선이는 마을 이장도 하였고, 현재는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콤바인이나 기계화된 농기구를 능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의 논들은 옛날의 '제멋대로' 형태를 벗어 나 사각 모양으로 구획 정지되어 모든 농사가 모종부터 수확까지 기계화 되어 있었습니다. 벼 사이를 비집고 다니면서 메뚜기를 잡고, 논두렁에서 미꾸라지 잡던 옛날은 이제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고향 마을로 접어 들면서 제가 다니던 금곡 초등학교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삐걱거리던 초라한 목조 건물은 사라지고 멋진 3층 건물이 들어서 있지만 학교 앞의 큰 정자 나무와 우뚝 솟은 설화산은 여전히 60년 전 그대로였습니다. 그 옛날 가끔 학생들이 운동장에 나가 조막손들 흙을 날라 운동장 넓히는 작업에 동원 되기도 하였는데 그 운동장과 깎아진 산 벼랑은 여전히 거기 있었습니다.
내친김에 차를 몰아 고향 마을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배방산 위에 올라 갔습니다. 배방산 중턱에서 내려다 보이는 중리 고향 마을은 조용하고 한가로웠습니다. 40년 전 아버님이 하시던 금광건물과 정미소 자리는 이미 흔적이 없고 금광석을 캐내던 설화산만 웅장하게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곳 세일 마을은 육이오 전쟁 통에 피해가 극심했던 마을인데 폭격을 맞아 본 피해가 아니고 점령군이 인민군과 국군 사이를 바뀔 때 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소위 '반동'이 생기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던 것입니다. 금광을 운영하던 저의 아버님도 인민군들에게는 소위 '브르조아' 반동으로 죽임을 당할 처지였으나 동네 사람들이 탄원 해 죽음을 면 하셨다는 얘기를 어려서 들었었습니다. 착하게 살면 응답이 있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시고 사신 것입니다.
중리 친구 용선은 저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청국장이 맛있었습니다. 교회 장로로 있는 친구 현재도 들어 왔습니다. 아직도 어릴 적 뛰어 놀던 옛터에 사는 이 친구들은 이제 동네의 늙은이가 되어 우리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하던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이면 우리는 언제나 옛날에 머뭅니다. 서로가 말합니다. 우리는 그래도 운 좋은 세대였다고. 우리는 전쟁시기에 살았지만 너무 어려 총을 접하지 않았고, 어른들은 먹을 것 걱정에 전전긍긍하는 와중에도 우리를 굶기지는 않았으며 노년에는 이렇게 좋은 세상을 구경하며 살고 있으니 운 좋은 세대 아닌가 고 말을 나누었습니다.
한국사람들의 영민하고 부지런한 머리와 억척 같은 삶의 의욕이 오늘의 기적을 낳은 거라고 말하면서 낙후된 정치풍토가 그나마 발목을 잡고 있다는 한탄들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육이오 때 초등학교 다니던 코흘리개들이었습니다. 전쟁으로 인심이 흉흉하고 궁핍하던 시절이었지만 초등학교 삼사학년짜리 우리들은 놀기에 바빴던 것 같습니다. 땔감을 위해 산에 가 솔가지도 주어오고 솔잎을 긁어오는가 하면 양동이에 물을 길어오는 일은 우리 차례였지만 날이 밝기 무섭게 서로 붙어 다니며 놀았고 여름 저녁이면 모기 쫓느라 모닥불 피워놓은 어른들 옆에 조그만 멍석을 깔고 누워 나름대로의 ‘옛날 이야기’에 밤 깊은 줄 몰랐습니다. 냇가에서 흐르는 물에 돌로 의자를 만들어 책상다리로 앉아도 보고 수수깡으로 물레방아를 만들고, 긴 풀잎으로 공중 수로를 만들어 물레방아가 돌면 마치 큰 공사를 한 양 의기양양 하였습니다. 처마 밑 깊이 있는 새 둥지에 손을 뻗어 넣어 새 알을 거머쥔 조막손을 안간힘 써가며 서까래 사이로 빼 내보면 새 알이 터져 있어 속상해 하기도 하였습니다. 산으로 가 머루와 다래를 따 먹기도 하고 들에서 개구리를 잡아 뒷다리를 구워 먹기도 하였습니다. 새벽 이슬을 헤치고 밤 주우러 가보면 늘 부지런한 어른들이 한차례 지나간 뒤였습니다. 홍시가 떨어져 풀섶에 깨진 채 퍼져 있으면 엎드려 빨아먹는 억척도 부렸습니다.
그러나 구불구불 흐르던 냇물이 이제는 시멘트 둑으로 갇힌 수로를 따라 잡풀 사이를 흐르고 있을 뿐입니다. 20여 년 전 마을 중앙에 공주로 난 아스팔트 도로는 이 산골 마을을 변화시키고 평당 몇 백 원 하던 농지를 몇 십만 원으로 뛰게 하여 저의 친구들을 일약 갑부로 만들었지만, 친구들 말 대로 '그게 팔려야 돈이지 돈 인감! 우린 그저 농사가 젤 편해여!'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땅 값은 올랐지만 친구들 마음은 그대로인 것이 저는 좋습니다.
1월 6일(월요일)
이삿짐을 정리 하다 보니 15평 되는 작은 아파트에서 짐들이 한없이 나오는 거였습니다. 이사가야 할 서울 오피스텔은 열 평도 채 안 되는 면적이니 많은 것을 남을 주던지 버려야 합니다. 잘 버리지 못하는 저의 근성은 이곳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되어 스스로 애를 먹습니다.
짐들을 정리하며 내가 갑자기 죽으면 내가 쓰던 수많은 전기 제품들과 어댑터들, 아내에게는 전혀 생소할 그 많은 연장들을 어찌 할 것인가 생각에 이르자 작년 제가 사는 오렌지 카운티의 어느 부잣집 estate sale 생각이 나는 것 이었습니다. 우연히 지나치다 그 집을 들리니 그 집안의 모든 가구와 양말 한 짝까지 팔아 치우고 있었는데 저도 그 집에서 table saw를 거저 얻다시피 덜렁 사 들고 와 지금은 처치 곤란이 되고는 있지만 갑자기 저 죽은 후 미국에서 흔한 가라지 세일 해 가며 제가 아끼던 전자제품이 오전, 십전에 집혀 나가는 망상도 해 보았습니다. 지난 몇 년을 미국에서 쓰던 125볼트 전기제품들을 이곳에 가지고 와 변압기가 이외로 많이 나왔습니다.
점심은 온양 역 근처의 ‘무제한 리필’ 고기 집에 갔습니다. 음식을 남기면 일인당 삼천 원씩 charge하겠다는 경고가 붙어있는 식당이었는데 두당 만원치고는 음식이 정결하고 고기 맛도 좋았습니다. 충청도 인심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대부분 젊은 애들이었는데 우리가 어려 이곳에서 자랄 때는 생일이나 설날 아니고는 고기 구경하기가 힘들었는데 쟤들이 손에 만원 들고 와 무제한 리필을 즐기고 있는 것을 나라가 발전한 결과로 축하를 해야 할지 힘들었던 과거를 아랑곳 않고 발전의 혜택을 감사함 없이 당연시 하는 저 애들을 딱하게 여겨야 할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저녁 내내 짐을 싸느라 온몸이 나른합니다.
1월 7일(화요일)
구온양에서 4마일 떨어진 도고 온천에 사는 초등학교 친구 이익주와 연락이 닿아 점심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가는 길에 은행을 들려야 할 일이 있어 온양 역 옆에 차를 주차하고 신한은행과 국민은행, 우리은행을 들렸습니다. 은행에 들어가면 우선 번호표 빼내는 기계가 있게 마련이고 입구에는 안내하는 직원이 있어 도움이 필요한가 묻습니다. 번호표를 가지고 기다리면 전광판에서 번호가 차례대로 바뀌는데 미국의 자동차 관계 DMV건물에 들어가면 늘 하게 되는 그런 모습이 이곳 은행들마다 있는 것입니다. 창구 직원들은 하나같이 친절하고 능숙하며 완벽합니다. 시골 은행이나 서울 은행이나 그들의 언행은 표준 같고 찍어 낸 듯 똑같아 섬뜩하기도 합니다.
오늘 들린 초등학교 친구는 천안초등학교 친구입니다. 이곳 금곡 초등학교에서 다니다가 전쟁이 끝나고는 천안에 들어 가 천안 초등학교에서 졸업을 하였기로 저에게는 두 그룹의 초등학교 동기동창들이 있습니다. 친구 이익주는 서울에서 양복점 사업을 크게 하다 8년 전에 접고 선산이 있는 이곳 시골로 내려와 돼지도 키우고 농사일도 하면서 살고 있는데 서글서글한 성품에 매사 긍정적이고 열성 이어 동네사람들과도 융화되고 노인회관도 맡아 관리하는 등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이 토박이보다 더 촌사람이 되어 있다 했습니다. 동네 젊은이들과도, 젊은이라야 50대 60대들이지만, 막역한 사이가 되어 그들의 술판에는 늘 불려 나가곤 합니다. 주는 정이 있으니 오는 정도 있다고 부부가 늘 베푸는 성품이니 그런 것 같습니다. 농촌 정서도 많이 바뀌어 요사이는 경조사에 도회지 사람들은 오만 원 봉투를 건네는데 농촌에서는 으레 십 만원이라 합니다. 땅값이 올라 이름만 부자 일뿐이지 아버지 대에는 땅을 이고 살다가 죽으면 자손들이 땅 팔아 호강 하던지 거덜 내던지 하는 게 농촌의 실상이라는 말도 오갔습니다.
친구 부인이 해준 청국장과 풋풋한 산나물로 맛있는 식사를 하고 세상사는 이야기에 시간 가는줄 몰랐습니다. 이제 서울로 이사하면 이곳에 오기도 힘들겠구나 생각하면서 속으로 여간 서운한 게 아니었습니다. 이익주는 서울에서 살던 영등포 아파트에 장가 안 간 아들이 살고 있어 가끔 가는데 마침 내주에 올라 갈 일이 있으니 얼굴 한 번 더 보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1월8일 (수요일)
구온양 청솔 아파트의 아침은 밝아 왔습니다.
아파트 단지의 슈퍼에서 얻어 온 빈 박스에 이사할 물건들을 채워 넣으니 박스 숫자만 늘어 이것들을 부릴 서울의 조그만 오피스텔 공간이 걱정 되기도 하였습니다. 웬만한 것은 버리고, 남에게 줄 것은 따로 박스에 넣고 하여 나름대로 분류를 하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어느 아파트나 쓰레기를 버리는 곳에서는 철저한 분리수거를 요구 합니다. 종류만 해도 열 가지가 넘는데 음식은 물론 음식 통에 넣어야 하지만 비닐까지 같이 버려서는 안되고, 옆에는 유리, 플라스틱, 비닐, 옷가지, 종이 등 각각 이름이 붙은 큰 통들이 버리는 사람의 정직과 협동심을 호소하며 버티고 있습니다. 때로 경비 아저씨가 쳐다 보고 있기는 하지만 아파트 입주자들의 협동심은 감동 할만 합니다. 미국에서 쓰레기란 쓰레기는 모조리 섞어 비닐봉투에 싸서 버리던지, 기껏해야 음식찌꺼기와 그렇지 않은 것만 분리해 버리는데 익숙한 저에게 이렇게 세분하는 것이 때로는 번거롭습니다만 이곳의 분리 수거 질서는 정말 잘하는 일입니다. 오바마가 한국 칭찬을 가끔 하는데 교육 열 높은 것만 할 게 아니라 이런 관습도 칭찬 해 주어야 합니다.
아침 열 시에 약속한대로 LG 기술자가 와 벽걸이 식 에어컨을 떼어 놓았습니다. 에어컨 제거 작업은 창 밖의 콘덴서/cooling unit과 방안의 팬 unit, air tube등을 제거하는 작업으로 그리 간단한 작업은 아니었습니다. LG 직원은 서비스 차원이라며 삼만 오천 원만 charge 하였습니다. 이곳에서는 이사할 때 통상 에어컨을 가지고 간다는데 서울 오피스텔에 이것을 장착할 계획이며, 서울에 있던 것은 좀 오래 된 것인데 아직 작동을 잘 하므로 친척이 갖다 쓰겠다 한 터 입니다.
부지런히 짐을 정리하던 중 일전에 약속 한대로 세일 친구들과 부부동반으로 동네에 있는 두부 집에 모여 저녁을 하였습니다. 이사하는데 그대로 헤어질 수 없다는 친구들의 성의였습니다. 친구 중 임현재는 농사 일보다 콤바인 등 현대식 농기구를 다루며 인근 마을 벼를 추수하는 일 등을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그를 따라가 복잡한 기계를 다루는 그의 솜씨에 감탄한 적이 있었는데 옛날 같으면 낫으로 벼를 베어 볏 집단을 논바닥에 뉘어 놓은 다음 소 마차로 운반 해 와 탈곡기로 벼를 분리하고 가마에 넣어 정미소로 가던 것을 이 친구는 콤바인이라는 큰 기계로 벼 사이를 누비고 지나가면 기계가 벼를 베어 탈곡 해서 뒤로는 자루에 벼를 채워 봉해져서 밭에 떨어지며, 한쪽으로는 볏 집단이 가지런히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어 서로 보기 힘든 처지임에도 제가 이곳에 아파트를 가지고 있어 가끔이나마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었지만 이사하면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지난 몇 년을 '내가 운전 해 너희들 안내 할 수 있을 때 미국에 여행 오라'고 늘 말 했지만 그것은 공허한 말뿐이었습니다. 친구들은 가끔 동남아를 여행은 하지만 미국은 엄두가 나지를 않는다 했습니다. 열정과 정열, 그것은 연륜과 함께 편함과 안이함으로 타협 됩니다. 아무리 땅 값이 올라 부자가 되었어도 그들의 땅은 곡식과 풀을 자라게 하는 생명의 원천지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지폐로 환산되는 생활의 편이로 환산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들의 오늘 삶이 편하고 안락 하며 만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땅과 흙이 늘 함께 하는 그들이 부럽기도 합니다.
1월 9일(목요일)
아침 여덟 시 이삿짐 센터에서 두 직원이 1톤 트럭을 끌고 와 짐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온양 사람들인데 서울까지 이삿짐 운반 해 주는 비용은 데 30만원입니다. 인건비를 생각하면 매우 저렴한 가격입니다.
트럭에 들어갈 자리가 없어 싣지 못하는 짐들은 승용차에 차곡차곡 다져 넣었습니다. 김밥을 몇 줄 사 나눠 준 후 서울 아파트에서 만나기로 하고 열 두 시경에 구온양을 출발하였습니다. 큰 이불장은 아깝지만 온양 아파트 분리수거 처리장에 놓고 오는데 직접 관리실에 가 큰 짐 처리를 위한 ‘딱지’를 구입 해 가구에 부착해야 되지만 관리 아저씨가 자기가 하겠다고 호의를 보여 딱지 값 만원을 주고 떠났습니다. 이틀간 그 자리에 두었다가 누가 쓰겠다고 집어가면 그 딱지 값은 아저씨 수입이고, 없으면 그가 딱지를 사 붙인 후 시청 수거 반에 알린답니다. 시원섭섭한 가운데 4년간 방 귀퉁이에서 묵묵했던 이불장에게 좋은 주인 만나기를 바랐습니다.
일기예보대로 날씨가 추워지며 간혹 눈발이 날리기는 했지만 잠깐으로 다행이 큰 눈 비는 없었습니다. 오다가 들린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의 소변기 앞에 ‘남자가 흘리면 안 되는 것 두 가지 – 눈물과 오줌’이라는 문구가 있고 그 밑에는 '한발 짝 다가 서면 모두가 행복합니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서울 마포 공덕동 오거리의 대우 메트로 디오빌에 도착하니 오후 두 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아파트 경비실에 가 이삿짐 나른다고 신고하니 규칙상 승강기 사용료 삼 만원을 받는다 하였습니다. 온양과 서울이 좀 다르긴 다르구나 싶었습니다. 이 대우 주상복합 건물 내에서는 어디에서나 금연 빌딩이라는 푯말이 여기저기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아주 잘 되었다 싶었습니다.
이삿짐 옮기는 일이 끝난 두 직원에게 팁으로 오 만원 건네니 좋아했습니다. 누구 말에는 이런 팁은 미리 주는 것이 훨씬 낫다는 말을 하기에 한국 풍습에 미숙한 저는 역시 미국 물을 너무 오래 먹었다 생각 되었습니다. 받은 서비스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곧 팁이라는 개념이 이곳 한국에서는 때때로 받을 서비스의 질을 흥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모양입니다. 일식 집에서 카운터에 앉아 초밥 만드는 요리사나, 테이블 서비스 직원에게 팁을 먼저 건네면서 다분히 뇌물성 사례를 하는 경우를 보기는 했는데 아마도 미국에서 그런 짓 했다가는 웨이터가 도무지 이해를 못 할 것이 빤합니다. 팁을 주고받는 관습은 물론 미국에서처럼 서비스 후에 하는 식이 정석일 것이나 한국에서는 늘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차고 복도까지 늘어 선 짐을 정리 하는 것은 그야말로 도전이었습니다. 에어컨 등 가져다 쓰겠다는 친구들이 속속 가져 가 복도는 조금씩 정리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부족한 게 별로 없고 새것을 살 능력도 있는 친척과 친구들이 우리가 쓰던 것이라 하니 아까운 것 왜 버리냐고 이렇게 힘들여 가지고 가 주는 것이 내심 기쁘고 고마웠습니다.
지상 2층부터 지하 3층까지는 식당들과 세탁소, 편의점등이 있어 짐 정리 중 내려가 식사를 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시내 갈 일이 있어 지하 3층에 내려가면 곧장 지하철 역이 나타나는 게 온양에서는 꿈도 못 꾸는 일이었습니다. 저희가 온양에서 짐을 싸는 동안 서울의 아파트 오피스텔은 일전에 부탁했던 지하 일층의 ‘공사빨리빨리’라는 묘한 이름의 점포에서 대부분 완료 해 놓았고 에어콘 설치만 남겨 놓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할 일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TV를 벽에 부착하고 빨래 건조대를 다용도실 천장에 매어 다는 것과 세탁기 옆에 철제 선반을 만드는 것, 온양서 떼어 온 커튼과 비데 설치, 화장실 샤워 커튼 레일 설치 등이었고, 부서진 냉장고 손잡이, 오븐 위의 통풍 자동 스위치 등도 고장이 난 채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미국에서 유감없이 발휘되는 저의 맥가이버 아저씨 기질을 과시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연장이 없어 틈틈이 근처에 가 사 들고 오면서 서울에도 미국의 홈디포(home Depot)같은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만 아마도 그랬다가는 청계천의 수천 점포와 골목 골목의 철물점들이 전부 문을 닫아야 되리라는 생각이 들어 그런 바램을 지우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수년 내로 그리 될 것입니다. 서울의 코스코(Costco)가 그것을 말 해 줍니다.
1월 10일 (금요일)
난방을 아예 꺼 놓았는데도 아파트 안은 더웠습니다. 남향이어서 창으로 볕이 드는데다 옆 unit들이 더우니 저의 조그만 오피스텔은 덩달아 더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같은 아파트의 북향 unit들에는 극심하게 추웠던 몇 주 전에 다용도실 세탁기와 보일러 수도관이 얼어 터지기도 하였다 하였습니다. 거의 일년 내내 비워 두는 우리에게는 여간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화장실이 작다 보니 샤워 실이 따로 없고 샤워 꼭지만 벽에 부착되어 있는데 샤워 하면 물이 사방으로 튀어 변기를 온통 적시는데 비데위로 물기가 가면 위험하기도 해 욕실 천정에 커튼 레일을 설치하고 샤워 할 때만 커튼을 사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커튼 레일 사러 아내와 남대문 시장에 간 김에 시장의 순대 국 집 긴 의자에 앉아 국밥을 먹는데 그리 맛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인근의 대우, LG, 세브란스 진료센터 등에서 왔는지 넥타이에 정장을 한 차림으로도 무리들 틈에 끼어 땀 흘리며 국밥을 훌훌 비우는걸 보노라면 저도 이십여 년 전 서울역 앞 대우빌딩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부장들과 함께 점심시간에 이곳에 와 먹은 기억도 났습니다. 자리를 뜨며 2인분의 '투고'를 주문 해 비닐봉투에 싸 들고 왔습니다. 국물과 고기, 파 마늘, 양념들을 따로따로 싸서 주는데 냉장고에 넣어 놓으면 또 한끼의 맛있는 식사가 된다는 집사람의 준비성이 발휘되었던 것입니다. 이 골목은 이러한 국밥 집이 오십여 개가 나란히 있는데 소문난 국밥 골목입니다. 챙겨주는 주모의 손길을 바라보노라면 텍사스 주립대학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있는 아들의 지휘하는 모습을 보는 양 하나의 예술입니다.
1월 11일 (토요일)
시차 관계인지 아침 일찍 깨어 소리 안 내려 조심하면서 어저께 하던 작업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방 하나에 베란다와 화장실만 분리되어 있을 뿐 부엌과 침대, 식탁이 같이 있는 소위 efficiency 스타일 아파트이니 일찍 일어 나 부스럭거리면 부부라도 불편할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 아파트에는 이 크기에서 애와 함께 사는 젊은 부부도 있는 모양입니다. 가끔 서울 나와 며칠 묵는 것은 괜찮겠지만 장기로 둘이 살기에는 좁은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언젠가 뉴욕 맨하튼에 갔다가 친척이 번화가 빌딩의 아파트 방 하나에서 사는걸 본적이 있었는데 그것에 비하면 이것은 호사스럽게 넓은 공간이랄 수 있겠습니다.
저녁에는 모닝글로리의 한중석 회장 내외와 마포 서울대 회관 근처의 대교 보신탕 집에서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이 집은 제가 여의도 쌍둥이 빌딩에 있을 때 가끔 같이 가던 집으로 고기가 깔끔하고 맛이 일품 이어 소문난 집이기도 합니다. 보신탕 못 먹는 부인들이 삼계탕을 먹는 동안 저는 얼큰한 탕과 수육으로 미국서 못 먹는 보신을 하였습니다. 아내는 보신탕 집이니 모든 부엌 집기가 보신탕에 절었을 것이니 께름하다 했지만 덕분에 아내도 보신 한 셈이라면 잘못된 것 없습니다.
한회장 내외는 저희와 이제 이십 년이 넘는 친교를 나누며 가까이 지내고 있는데 한회장의 털털하고 넘치는 인간미와 부인의 소박하고 티를 안내는 겸손과 마음 씀씀이는 늘 우리를 매료시키는 멋진 사람들 입니다. 90년대 초 제가 LG 에 근무하고 있을 때 알게 된 한회장 내외는 인간미가 있고 사람을 잡아 끄는 매력이 있는 사람들로 기복이 심한 한국 대기업의 석유 개발 의지에 마음이 쓰이던 제가 한회장을 설득 해 그때는 시장 진출에 엄두를 못 내든 미국 오렌지 카운티의 쎄리토스에 아내로 하여금 모닝글로리 미주지역 제 1호 점을 개점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로 미주 전역에 150여 개 매장이 번창하는 2000년 초기와 미국 경기의 쇠퇴와 함께 숫자가 많이 감소하였지만 한회장 내외와 저희 부부는 늘 가까이 지내면서 서로 오가고 있습니다. 모닝글로리는 IMF 때 여타 기업들처럼 홍역을 치르기도 했지만 회생하여 한국 top 두셋의 문구 및 생활용품 회사로서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데 한회장의 인간미와 끈기가 그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미주 1호 점인 쎄리토스 매장은 아직도 저희가 가지고 있습니다.
식사 후 우리는 홍대 앞에 최근에 낸 모닝글로리 매장을 둘러보고 근처 영화관에서 ‘변호인’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시종을 실화 바탕으로 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노무현의 자서전 같은 영화로 배경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던 1970년대 후반의 중앙정보부(지금의 국정원)가 정치적 배후의 비호 하에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던 대학생들을 간첩으로 몰아 고문 치사하던 그 시절에 부산에서 부동산 변호사로 떼돈 벌던 고교 졸업 학력의 변호사가 정의감으로 돈 벌 기회를 박차고 억울한 수감자들을 위해 분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어찌하여 이런 영화가 나오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당시의 무시무시하고 암울했던 정치 폭력을 처절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제 값을 다 했다고 생각되는 통쾌한 영화였고, 송강호의 연기력이 한결 돋보이는 후련한 영화였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박정희 딸 박근혜 대통령 치하에서 빛을 보지 못했을 이 영화가 이렇게 높은 흥행 기록을 세운다는 것이 그런대로 Up된 고국의 문화적 자유를 말 해 주는 듯 하였습니다. 과거를 모르거나 모르기를 고집하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이런 암울한 시대가 있었다는 일깨움이 되겠지만, 뜬금없이 노무현을 영웅화 하는 편향성이 우려되는 영화 이었습니다.
홍대 앞은 젊음의 박동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끓고 있는 용광로였습니다. 그러나 어쩐지 방황하는 젊음의 낭비 같은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그곳에서의 우리 일행은 오히려 외계인이었습니다. 하나같이 이십 전후로 보이는 무리들이 새벽까지 사람들의 파도를 만드는 이곳 홍대 앞 광장과 골목은 그들의 부모대가 만들어 놓은 놀이터에서 그저 즐기는데 여념이 없는 철부지들의 놀이터 같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 만큼 막강한 힘도 지닌 젊은이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길거리로 내 몰리는 씨니어들을 장차 support 해야 되는 미래 세대 이기도 합니다.
1월 12일 (일요일)
공사하는 사람은 에어컨을 설치하고 저는 미국서 사온 TV 벽걸이를 설치하고 아내는 박스를 풀어 짐을 정리하는 등 부산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짐을 풀어 요리조리 ‘숨겨놓는’ 작업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데 아내는 요리조리 잘 해 내고 있었습니다.
저녁에 단짝 친구 이영이 찾아 와 집사람과 셋이서 공덕동 오거리에서 마포대교 쪽으로 조금 가다 바른쪽에 있는 수협 공판 횟집에 가 저녁을 하였습니다. 접시에 담아 계산대에 가면 무게를 달아 값을 매기는데 회 뜬 물고기 뼈로 매운탕까지 시켜 셋이서 육 만원이 들었습니다. 괜찮은 가격입니다. 이영은 중학교 때부터 저와 출석 번호 일 이 번을 다투던 사이로 둘 다 키가 작았었는데 지금도 작은 키들이지만 마음의 키는 훌쩍 커 제가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친구 입니다. 토지개발공사에서 오래 일한 이 친구는 지금도 사무실을 갖고 있으면서 공시지가 관계 일을 하고 있는데 주위 사람들에게 늘 진솔하고 척지는 일이 없는 성격으로 많은 이가 좋아합니다. 애석한 것은 아내 복이 없어 혼자 지내는 게 딱한데 짝을 지어줄 수 없을까 우리 부부는 궁리도 많이 해 보았지만 늘 답이 없었습니다.
청천 벽력같은 소식은 이영으로부터 지난 12월 31일에 성환에 사는 친구 황무돈이 죽었다는 말이었습니다. 황무돈은 성환이 고향인데 저에게는 몇 안 되는 막역한 벗이고, 이번에도 이삿짐 나르는 중에 처와 들리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삼일장이라면 바로 제가 서울에 도착한 날이 아니었던가 생각 하니 후회막급이고 기가 막혔습니다. 무돈은 저의 고향인 천안과 가깝고 하여 방학이면 늘 같이 붙어 다니고, 모친이 하시던 과수원에서 입시 준비한답시고 몇 달을 산적도 있을 만큼 식구들과도 정을 나눈 사이인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무심했던 것은 저였지만 공교롭게도 입국과 이사 준비 등이 겹쳐 이렇게 뒤 늦게야 알게 된 것이 원망스러울 뿐이었습니다. 내일 성환을 들리기로 하고 우선 무돈의 처와 얘기를 하고자 전화를 했으나 불통이었습니다. 이영과 헤어져 아파트로 향해 마포 길을 걷는데 매서운 서울의 밤 공기가 뺨을 때렸습니다.
1월 13일 (월요일)
온양에서 청솔 아파트 매입자와 정오에 만날 약속이 되어 있고 사전에 준비 해야 될 서류들이 있어 아침 일찍 공덕동을 떠나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온양을 향했습니다. 온양 아파트의 매매를 맡아 해 준 부동산에 들려 아파트 소유 증서를 건네고 잔금을 받은 후 아산시청에 가 세금을 내니 아파트 매매는 끝났습니다. 새 주인에게 키를 건네고 아직도 남아 있는 짐들을 차에 싣고, 친구 이익주에게 줄 가구들은 익주가 트럭을 몰고 와 가져가고 서둘러 성환 황무돈의 집을 향했습니다. 우선 성환 근처의 천주교 묘지공원에 들렸습니다. 이 묘지공원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무돈이 그의 모친을 모신 곳으로 재작년에 온 적이 있어 쉽게 찾았으며 무돈이도 이곳에 묻혔을 것이 틀림 없었습니다. 무돈은 재작년에 아흔 둘로 돌아가신 그의 어머님 옆에 묻혀 있었습니다. 재작년 무돈의 모친께서 돌아 가신지 한달 후 서울에 온 터여서 이곳에 무돈과 와서 성묘 했었는데 성묘하던 제 옆에서 ‘병길이가 왔어요 어머니’ 하던 무돈을 떠오르며 말문이 막히는 거였습니다.
인생무상을 얘기 할 만큼 아직 늙지는 않았다고 생각 해 왔지만, 갓 덮은 뗏장이 아직 자리잡지 않은 무돈의 무덤 옆에서 그저, 친구야 친구야, 소리치다 그곳을 떠났습니다.
성환 읍에 있는 무돈의 집에 가니 부인이 맞아주는데 재작년에 보았을 때보다 많이 늙어버린 것 같아 그 간의 마음고생을 읽는 듯 하였습니다. 작년 10월에 무돈은 허리의 실핏줄이 터지고 그것이 악화되어 15년 전에 수술한 심장에 합병증을 유발, 두 달간 병원에서 치료받다 끝내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하필이면 미국에서 나는 나대로 심각한 병치레 하는 동안 무돈이 고생 했구나 생각하니 전화 안 했던 것이 몹시 후회 되었습니다. 전화는 하고 싶었지만 잘 지내는 그에게 번거로운 말 해 무엇 하랴 싶었고, 더구나 연초에 한국 나가 만나 얘기 하지 하고 접은 게 후회막급 이었습니다. 응접실에 차려 놓은 그의 영정 사진 앞에서 분향하며 저는 친구야, 친구야 만 몇 번 부르고 부인과 작별 인사를 나눴습니다. 성환 시 복판에 큰 건물을 짓고 3층에 살고 있는 그의 집 문을 나서서 층계를 내려오는 내내 그의 부인은 흐느끼고 저도 울컥 솟는 슬픔을 삼켰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같이 다니면서 거의 매 해 단 둘이서 사진관에 가 사진 박은 것들을 생각 했습니다. 잘 있어 나의 그리운 친구 황무돈.
이제는 온양 집을 처분했으니 세일 오기도 힘들어졌으며, 무돈이도 가 버렸으니 성환 올 일도 힘들어졌다 생각하니 짧은 순간에 많은 것이 제 곁을 떠난 것 같았습니다.
서울 공덕동의 메트로디오빌 아파트에 도착하니 깜깜한 밤이었습니다.
1월 14일 (화요일)
이제 미국 들어가야 할 날도 며칠 안 남아 모든 공사와 정리를 부지런히 끝내야 했습니다.
빨래 건조대를 다용도실 천정에 매달아야 하는데 다용도 실 천정은 석고보드 한 장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는 공간으로 되어 있어 무거운 빨래를 널 수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석고보드에 적합한 볼트와 너트가 인근 철물상에는 없어 을지로 3가로 나갔습니다. 세운상가 옆 고옥들에 다닥 다닥 붙어있는 가게들에서는 물건을 사면서 영수증 교환이라는 것이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요구하면 마지못해 주겠지만 아마도 나사못 몇 개 사면서 영수증을 요구했다가는 하루 장사 다 망칠 재수 옴 붙을 놈 왔다는 악담을 들을지도 모릅니다. 물건 살 때 ‘세금’이 따로 없으니 간편하긴 하지만 어쩐지 끝 마무리가 허전합니다. 저의 미국병인지도 모릅니다.
비록 석고보드에만 의존하는 빨래 건조대를 설치 하였지만 뚫고 들어가 쫙 벌어지며 석고보드에 걸터앉는 앵커를 사서 다니 그런대로 건조대는 튼튼한 것 같았습니다. 아내는 그걸 달자마자 쌓아 놓았던 빨래를 세탁기에 잡아 넣으며 너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건조대에 무거운 빨래를 널 때마다 속으로는 걱정이 되었지만 건조대는 버텨내고 있었습니다.
세탁기 옆 벽에 선반을 설치 할 계획이었으나 벽이 튼튼치 않아 철제 선반을 구해 보려고 을지로 3가로 나가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중 드디어 한군데 찾았습니다. 집에서 재가지고 온 치수를 대니 두 시간 내에 만들어 택배로 보내겠다 하기에 선반 값 8만원과 택배 값 만 원을 주고 돌아 왔습니다. 물론 영수증은 없습니다. 미국처럼 영수증은 ‘으레 주는 것’이 아니고 ‘으레 안 주는 것’이 되어 있는 이곳에서 저는 연신 께름칙한 뒷맛을 안고 가게 문을 나서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문 한 것이 틀림없이 오는 것을 보면 한국 사람들의 순발력은 대단합니다.
집에 와 있으니 주문한 선반 철 빔과 나무 선반, 나사 등이 택배로 왔는데 그 무겁고 긴 물건들을 오토바이로 이곳까지 홍수같이 밀려 다니는 차 사이로 곡예하며 운반한 택배 기사의 기술에 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제가 아파트 1층 수위실 앞에 쌓여 있는 택배 물건 중 그것들을 집어 드는 것을 보고야 길가 오토바이 위에서 기다리던 기사는 부르릉 하며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고맙다는 말 할 사이도 없고, 그 또한 다음 배달을 위해 한 순간이 아까운 터라 이렇게 바쁜 찰나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서울은.
인터넷으로 해야 할 일들이 있어 인근의 롯데 호텔로 가는 길에 인터넷이 되는 커피숍이 있기에 들어 가 커피를 시키니 영수증 하단에 인터넷 패스워드가 있었습니다. 전원 플러그가 있는 테이블을 찾아 가지고 간 노트북을 펼치고 일을 보는데 가만히 보니 자리를 차지하고 저처럼 붙박이 한 잔 손님들이 많아 과연 이 커피숍이 영업이 될까 의심스러웠습니다. 미국의 스타벅스에 가면 몇 시간이고 노트북이나 아이패드에 묻혀 인터넷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서울도 마찬가지구나 싶었습니다.
저녁에는 교수 하다 정년 퇴직한 친구 조동행과 대우 디오빌 바로 옆의 공덕 재래시장 튀김 집에 가 막걸리와 함께 한 그릇 가득한 튀김을 먹었습니다. 튀김은 그때 그 때 기름에 튀기면서 먹어야 제 맛인데 추운 시장의 비닐 칸막이에 식어가는 것들을 먹다 보니 맛이 좀 덜 했습니다. 단지 조동행교수의 걸쭉하고 구수한 입담이 튀김보다 맛있어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집 사람도 자리를 같이 했습니다만 조교수 쪽은 손주 보느라 집에 매어 있어 서운했습니다. 정년 퇴직은 했지만 제자 회사에도 나가고 대학 연구실에도 나가면서 바쁜 날을 보내고 있는 그가 이렇게 멀리까지 와 같이 시간을 보내주어 고마웠습니다.
1월 15일 (수요일)
오피스텔은 점점 모양새가 갖추어 지고 이제는 몇이 앉아 커피를 마실 공간이 생겼습니다. 베란다를 꽉 채웠던 짐들이 정리되자 빌딩 숲이지만 밖의 경치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여 한결 나았습니다. 만리동 고개를 넘는 차들이 보이고 새로 지은 옆 아파트의 광장을 21층에서 내려다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저에게는 불과 2년 전 저곳에 있던 수많은 구옥들과 골목길, 여관과 이발소등이 뇌리에 새겨 져 옛 것과 새것이 겹쳐 보일 뿐입니다.
오늘은 인터넷과 TV line을 엘지플러스 사에 신청 하였습니다. 미국에 살다 이곳에 와 감탄하는 것 중의 하나는 각종 아프터 서비스의 신속한 처리입니다. 미국에서 방문 서비스를 받으려면 며칠을 기다려야 되고 그 비용도 만만치 않으며 한 번 부르는데 출장비만 70불 100불 드는데 비해 이곳에서는 길어보았자 이틀이고 출장비도 일 이 만원 정도면 해결 됩니다.
정오에 기술자가 와 인터넷 과TV케이블을 설치 하였습니다. 가장 빠른 광속 인터넷을 깔았노라고 자랑하였습니다. 3년간 계약을 해야 했는데 매달 이만 팔천 원의 사용료를 내게 되고 만일 3년 안에 해지하면 꽤 큰 벌금을 내야 합니다. 인터넷과 TV는 상비 되어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사람이 없어도 늘 작동하게 해 놓았습니다. 사용료는 은행 구좌에서 자동 이체 되도록 조처 하였습니다. 가입자에게 보너스로 8만원 상품권이 문자 메시지로 나왔는데 가까운 E-mart에 가 전화기 메시지를 보여주니 E-mart 상품권으로 끊어 주었습니다. 상품권이 신세계 백화점인 것을 보고야 E-Mart가 신세계 계열인 것을 알았습니다.
점심에는 코오롱글로벌사의 자원개발 팀장으로 있는 박정빈씨가 찾아 와 근처의 북창동 순두부 집에 갔습니다. 이곳의 북창동 순두부는 LA지역에 20군데가 넘게 번창하고 있는 북창동 순두부가 서울에 역진출한 식당인데 점심때라 그렇겠지만 손님이 기다릴 정도로 붐볐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처럼 밥을 지은 뚝배기 채 안 나와 약간은 실망 되었습니다. 밥을 뜨고 물을 부어 누른 밥 먹는 재미가 없어져 그렇습니다. 박정빈 팀장은 제가 세하 근무 시 채용하려 했던 젊은이인데 사람이 진솔하고 듬직하여 가까이 지내고 싶은 사람입니다. 제가 온 것을 알고 바쁜 중에도 송도 IT 센터 직장에서 예까지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 온 그의 정성이 고마웠습니다.
온양 아파트에서 쓰던 비데를 설치했지만 사용은 하지 않고 있었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가 나더니 작동이 안 되는 거였습니다. 내일 아침 열 시에 제조사 대우일렉 서비스를 받기로 하였습니다.
요즈음 TV를 온통 도배하고 있는 뉴스는 은행들의 고객 정보 도난 유출 사건이었습니다. 수백 수천 만 명의 크레딧 카드 정보가 유출 된 것입니다. 그것도 핵커가 도둑질 해 간 것이 아니고 정보 관리자가 팔아 넘긴 것이었습니다. 저는 큰 돈 거래가 없어 걱정 없지만 한국에서는 은행 사고가 가끔 나 서민을 울리는 게 연례 행사 같습니다. 과도하게 발달한 전자 정보 시스템에 허술한 구멍이 나 있는 것 같습니다.
늘 허술한 구석이 있는 한국, 특히 과속으로 예까지 달려왔기에 지금 한국이라는 열차는 기름 칠 곳, 갈아 끼워야 할 부속, 열이 나 있는 부속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뒷골목을 걷노라면 사람 걸어가라고 만들어 놓은 인도가 골목 가게들의 진열장과 껑충 뛰어 올라 주차시킨 자가용에 다 빼앗겨 행인은 요리도리 피해 다녀야 하는 형편입니다. 수리 해야 되는 한국 열차의 부품들입니다.
오후에 용산전자상가에 갈 계획이었습니다. 500기가짜리 USB에 지난 15년간의 사진을 담아 놓았었는데 이 USB가 작동 불능이 되어 미국 Best Buy에 맡긴 적이 있었는데 자기들은 데이터복구를 못하겠다 하면서 전문기관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전문 업소에서는 복구에 천 불 이상 들어간다 하며 그 조차도 100% 복구의 장담을 못한다 하기에 포기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번 여행에 그걸 가지고 나왔는데 한국의 전자 기술은 어떨까 하는 기대감이 있어서였습니다.
낮에 인터넷을 설치 해 준 LG 기술자가 일러준 대로 고장 난 SUB를 들고 반 마일 가량 떨어진 한 겨레 신문사 근처 컴퓨터 수리소에 갔습니다. 꼼꼼히 살펴보던 젊은 주인이 25만원에 데이터 복구를 해 주겠다 하여 돈을 건네주고 토요일까지 해 달라 부탁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코스를 바꿔 만리동 고갯길 큰 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왔습니다. 걸어 내려오는 인도의 바른쪽으로는 몇 십 년 넘었음직한 고옥들의 연속인데 이 고옥들은 재래식 한옥도 있지만 대부분 육이오 전후 전쟁을 딛고 지어진 낡은 집들로 아마도 재개발 제약에 묶여 큰 수리도 못하는 건물들일 것입니다. 길 왼쪽으로 보이는 삼성 래미안 고층 아파트의 높은 빌딩 숲과 눈 아래로 지붕만 보이는 재래 가옥들은 너무 큰 대조였습니다.
저녁은 천안 초등학교 친구인 도고 온천의 이익주 부부가 영등포 자기 아파트에 올라 왔다고 미국 가기 전에 저녁을 하자 연락이 와 지하철 네 정거장 거리인 영등포 역에서 만나 저녁을 하고 친구 아파트에 가 커피를 하였습니다. 마포에서 여의도로 해서 영등포까지 소위 '귀빈로'라 해서 8차선이 뻗어 있고, 과거의 진창길 영등포는 없어지고 지금은 강남 못지 않게 발전 해 있었습니다.
집에 도착한 우리는 이제 미국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이것저것 설치 하느라, 아내는 빨래하랴, 살림들 정리하랴 시간을 쪼개며 움직였습니다.
1월 16일 (목요일)
아침에 대우일렉의 기사가 와 비데를 점검 하더니 모쥴을 갈아야 할 것 같으며 비용이 십 이 만원 가량 들 것 같다 하기에 새것을 사는 게 낫겠다 생각 했습니다만 좀 더 테스트 해 보더니 물 호스가 막혀 있는 것이었습니다. 호스 연결 부분이 잘 못 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고치고 나니 비데는 정상적으로 작동이 되었으며 출장비 일만 오천 원으로 문제는 해결 되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꼭 보고 가야 할 친구가 있었습니다. 고향 친구이자 나이 들어서도 체면과 격식이 필요 없는 오세윤 입니다. 전화를 하니 세윤은 마침 점심 스케줄이 어긋나 잘 되었다 하면서 아파트에 오겠다 하였습니다. 부인은 손주 보느라 못 나온다 하여 아내와 셋이 공덕동 오거리 근처의 소문난 게장 집을 향했습니다. 세윤은 작년 말까지 오래 동안 몸 담고 있던 회사에서 퇴직 하였으나 아직도 잔무가 남아 있어 사무실을 오가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세윤의 모나지 않은 성격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 그리고 상대방에게 호감을 주는 매너는 오래 붙어 있어도 실증을 느끼지 않게 하는 매력이 있는 친구입니다. 오래 전에 돌아 가셨지만 자상하신 세윤의 할머니는 제가 가면 밥상을 차려 주시고, 으레 자고 갈 줄 알고 이불을 펴 주시어 학교 다닐 때 저는 그의 집을 제 집 드나들듯 하였습니다.
전차부대 소대장으로 있을 때 세윤이 저의 부대로 면회 왔는데 기동 훈련 나가려던 참이라 얘기 할 틈도 없어 그의 머리에 헬멧을 덮어 씌우고 전차의 전방 사수 석에 밀어 넣어 머리만 나오게 한 후 행군 하고 돌아 온 적도 있었습니다. 둘 다 일종의 모험을 한 셈인데 그의 저를 향한 믿음과 저의 그를 위해서라면 위험도 감수 하겠다는 우정이 만든 에피소드이기도 했습니다. 게장을 좋아하는 집사람은 셋 중 오늘 점심을 가장 즐긴 사람이었습니다.
오후에는 처제가 찾아 와 가구 정리를 도왔습니다. 일산에서 캐주얼 드레스 점을 운영하는 처제는 우리 일로 늘 수고를 해 줍니다. 한국에서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처제는 해결사 역할을 해 주곤 합니다. 재산 세나 자동차 세 등 중요한 통지는 처제 주소로 해 놓아 처제가 우선 납부 해 주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닙니다. 요즘은 한 살이 채 안된 손주 보는 재미도 쏠쏠 한 모양입니다. 처제는 저희 애들 결혼식에 미국까지 와 우리와 여행도 몇 번 하였습니다. 저녁은 저와 집사람, 그리고 처제 셋이 디오빌 빌딩 일층의 샤브샤브 체인점인 채선당에서 했는데 음식이 좋아 손님을 대접 할만 하였습니다.
1월 17일 (금요일)
최근 몇 년간 세금보고 할 때마다 미국시민권자의 한국 은행 계좌를 신고 하라는 말이 많았는데 저는 그럴만한 큰 계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몇몇 한국 은행구좌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파트 관리비와 전화기 사용료 등의 자동이채에 사용 해 왔습니다. 한국에 구좌를 가지고 있으면 가끔 친지의 경조사나 모임의 회비 납부 등을 위해 미국에서 인터넷으로 국내 은행끼리 이채 할 수 있어 매우 편리합니다. 증권 거래를 할 수 있는 구좌를 처제 이름으로 열어 놓고 미국에서 온라인으로 가끔 한국 증권을 사고 팔기도 해 보는데 단지 취미 차원에서 소량을 해 볼 뿐입니다. 입금을 하려 하니 본인 확인이 필요하다 하여 처제가 또 수고를 해 주었습니다. 한국 장은 LA 시간 오후 다섯 시쯤 개장하여 오후 열 시에 끝나게 되는데 미국의 다우 지수와 한국의 코스닥 지수가 분명 어떤 함수 관계가 있을 법도 합니다. 증권은 치매예방에 좋을 듯도 합니다.
정오에 광화문 시민회관 식당 가에서 아내의 친구인 여정이 엄마를 만나 점심을 할 계획이어서 광화문 광장을 걸어 보았습니다. 세종대왕이 앉아 있는 동상은 상상외로 장대하였습니다. 매서운 날씨라 관광객만 몇몇 있을 뿐이었는데 여름에는 이곳이 인파로 덮인다 하였습니다. 시민회관 건물 내에 고급스런 식당에서 점심을 대접 받았는데 코스마다 나오는 음식이 정갈하고 맛이 있어 친구의 세심한 배려를 느끼게 하였습니다. 여정이 엄마는 아내의 오랜 친구로 평생 봉사 활동을 해 온 사려 깊은 사람으로 작년에 큰맘 먹고 미국 여행을 와 우리와 함께 RV로 여행을 다녔는데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다고 몇 번이나 말하였습니다. 감사 해야 할 사람은 저였습니다. 즐거운 여행이 되기 위해서는 동행하는 사람들의 호기심과 열의, 감동이 모든 이의 흥을 돋우는 것인데 여정이 엄마의 진솔하고 가식 없는 성격은 언제나 즐거움을 돋우어 주었습니다.
데이터 복구 작업이 다 되었다는 연락이 와 한 겨레 신문사 근처의 컴퓨터 상점에 가서 찾아 오는데 데이터의 40%가량만 복구 되어 있었습니다. 실망이 컸지만 40%나 복구 했다고 생각 하기로 했습니다.
저녁은 80년대 오클라호마 씨티 근교 에드몬드의 센트럴 스테이트 대학에서 학생신분으로 저희와 가까이 지내게 되어 지금은 한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으면서 친분을 계속하고 있는 이성림씨 부부가 찾아 와 아파트 일층 김밥 식당에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저와 연배 차가 있지만 인성이 좋고 흉허물 없으며 마음 씀씀이에 변함이 없어 30년 가까이 우정을 나누며, 서로 기쁘게 만나고 헤어지기가 늘 서운한 사람들입니다. 이성림씨 부부는 사업관계로 미국을 자주 오는데 우리한테 꼭 들려 묵어 가곤 합니다. 이사하느라 바쁜 틈이라도 흉허물 없이 만나 서로 부담 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가까운 후배 부부가 저희 마음을 훈훈하게 해 줍니다.
1월 18일 (토요일)
이제 짐 정리도 대강 끝나고 설치하는 작업도 끝나 오늘은 둘이 외출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집사람과는 고등학교 친구인 주순씨 부부를 만나기 위해 분당을 향했습니다. 주순씨 내외는 LA북쪽 벤추라에서 손님이 늘 붐비는 일식 집을 운영하다 작년 후반에 사업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 와 용인 근처 동백이라는 새 단지에 입주 해 사는데 우리가 그곳까지 갈 틈이 안나 이번에는 못 보고 가나보다 했더니 마침 분당에 나올 일이 있다 하기에 부랴부랴 만나기로 한 것입니다. 차를 몰고 강변 강북도로로 가다가 청담대교로 한강을 넘어 분당으로 가는 간선도로를 이용하니 경부 고속도로보다 훨씬 빠르고 편하였습니다. 친구 부부는 한국 생활에 만족 해 하는 것 같아 우선은 잘 되었다 싶었습니다. 근처 제과점에 넷이서 둘러 앉아 한국에 정착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남편은 군사 강대국 틈에서 안정적이지 못한 한국의 입지에 일말의 불안을 토로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에 사는 친구들은 못 느끼거나 안 느끼는 이런 기우가 해외에 사는 교포 눈에는 민감하게 잡히는데 아마도 미국을 떠나 한국에 살려고 온 주순씨 남편에게는 중국이나 미국 등 강대국 사이에서 무슨 일이 터지면 별 볼일 없게 될지도 모를 한국의 지정학적 불안정성이 께름하게 와 닿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사회에서 마이너리티 신세인 한인들의 안간힘을 생각해 보면 세계 어느 곳에 살던지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에둘러 말을 맺었습니다. 동백 단지는 골프장과 수영장 등 모든 시설이 두루 갖추어진 레저 타운 형태의 주거단지인데 최신 최고급의 주거 환경을 갖추고 있는 듯싶었습니다. 너그럽고 매사 신중한 이들은 우리와 마음이 맞아 자주 오가며 가까이 지냈는데 다음에 한국 나올 때는 필히 동백에도 가볼 참입니다.
주순네와 헤어진 후 분당 뒤 산을 넘어 광주로 가 장인 장모가 모셔진 시안 공원 묘지를 들렸습니다. 온통 개발되어 고가 도로가 생기고 공원 묘지도 넓어지는 등 많이 변해 찾는데 힘들기는 했지만 남향으로 햇볕 잘 받는 장인 장모의 묘는 여전히 저희를 반갑게 맞아 주는 듯 했습니다. 묘석에 새겨진 햇수를 헤아려 보니 장모님은 육십 전에, 장인어른은 칠십 전에 돌아 가신 것이어서 지금의 제 나이가 꽉 찬 느낌 이었습니다. 장인 어른이 갑자기 뇌일혈로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저희는 아이들과 저의 부모님, 그리고 장인 어른을 모시고 40일간의 대륙 횡단 여행을 했었는데 그것이 장인어른과의 고별 여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여행 중 장인 어른은 한결같이 경이로워 하시고 신나 해 하셨으며 즐거워하셨습니다.
성묘 후 왕십리 역 근처에서 수입 미국 소고기 전문 식당인 ‘참토우’ 체인점을 운영하는, 아내의 친구인 복희네를 들렸습니다. 손님이 많아 제대로 얘기를 주고받지는 못했지만 북적대 덩달아 기분 좋은 가운데 복희는 틈틈이 좋은 고기를 불 판에 올리며 많이 들라 하기에 바빴습니다.
저녁 8시경 참토우 식당을 나와 택한 신당동과 퇴계로 길은 곡예 같은 운전 길 이었습니다. 서울의 도로 표시는 운전자를 헷갈리게 하기를 밥 먹듯 합니다. 안쪽 차선을 택해 가다 보면 좌회전을 할 차 뒤에 꼼짝없이 갇히게 되는가 하면, 직진과 좌회전이 둘 다 가능한 차선인데 바닥에는 좌회전 화살표만 그려져 있어 부랴부랴 차선을 바꾸게 하는 불친절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기는, 서울에서 운전 하겠다고 나선 제가 우선 무모하다 해야 되겠지요. 이제 이사 해 왔으니 이 차를 없애야 될 것 같습니다.
1월 19일 (일요일)
짐을 꾸리다가 소형 스피커가 발견되었습니다. RV에 설치 되어 있는 소형 스피커인데 오래 쓰다 보니 음질이 떨어져 새로 구입하려 했으나 미국에서는 여의치 못해 한국에 나가는김에 알아 보리라 생각하고 짐 속에 넣은 것인데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요일이지만 세운상가에 가서 시도 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6호선 전철을 타고 세운상가를 향해 가는 중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두 명이 조그만 박스를 가슴에 걸고 자기들은 대학생이며 청량리 역 근처에서 고아들을 가르치는 봉사대원인데 기금을 마련 중이라는 안내를 하고 모금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천 원 짜리를 그들 앞가슴의 함에 넣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도 넣었습니다만 그 학생들이 관등성명이라도 대고, 고아들 가르치는 학원 이름이라도 분명히 말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스쳤습니다.
종로 3가에서 내려 출구로 나가는데 지하철 광장에는 많은 노인들이 죽치고 앉아 있어 일요일 식구들을 피해 나온 노인들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런 광경을 볼 때마다 늙음에 최소한의 존엄마저 지켜주지 못하는 사회는 이미 병 든 사회가 아닌가 싶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세운상가는 대부분 문을 닫았는데 한 스피커 전문점이 문을 열었기에 지니고 간 스피커를 보여주니 똑 같은 스피커 네 개를 내일 아침에 구해 택배로 보내 줄 터이니 대금 구 만원과 택배 비 만원을 택배 아저씨한테 주라 하였습니다.
저희 부부는 전철을 갈아타며 강남 교대 역을 향했습니다. 천안 친구 오세윤이 부부가 함께 못 만난 한을 풀자고 오늘의 자리를 애써 만든 것입니다. 둘째 가라면 서운할 식도락가인 그는 그러나 마음에 둔 식당이 일요일이라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보고 실망이 대단했습니다. 미안 해 하며 택시를 잡아 타고 자기의 아파트 근처 국수 집으로 갔는데 꽤 소문난 집인 듯 빈자리를 겨우 얻어 넷이 둘러 앉았습니다. 몇 시간이라도 모자랄 얘깃거리를 접고 헤어지면서 회사 일이 정리되면 미국에서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집에 돌아 와 밤 늦게까지 내일 공항에 가져 갈 짐을 꾸렸습니다.
1월 20일 (월요일)
아침에 그 동안 우리 일을 관리 해 준 대우디오빌 부동산의 홍실장이 찾아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간의 수고를 치하하고 향 후 이 오피스텔을 며칠간 사용할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하고 관리를 부탁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용 회수가 적어도 괜찮으니 믿을만한 사람에게만 제공할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홍실장은 방이 깨끗하고 가구들 정리가 훌륭하다 하면서 하루에 오십 불에서 백불 사이는 부과 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10시경에 전철로 배달해 주는 나이 지긋한 택배 아저씨로부터 스피커를 가져 왔다는 전화에 지하 이층으로 해서 6번 출구로 내려 가 대금을 지불하고 스피커를 받았습니다. 배달원은 영수증을 가져 오지도 않았지만 저 역시 묻지도 않았습니다. 서울식 결재에 익숙해 지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옛날 마포가든 호텔 맞은편에 정차하는 KAL리무진을 타려고 짐을 챙기는 중에 호텔 옆에 본사가 있는 모닝글로리의 한회장이 차를 보내 인천공항까지 데려다 주는 호의를 베풀어 공항에 도착하니 오후 한시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공항까지 데려다 준 이 부장은 모닝에 20년 넘게 몸담아 오면서 오로지 모닝과 회장을 보좌하는 일에 충직한 근면한 사람이고 사람이 진솔하여 신뢰를 받고 있습니다. 어려운 부탁이었지만 지하에 놓아 둔 차의 배터리 분리를 깜빡 했다 하니 회사가 가까우니 자기가 해 놓겠다 하여 고마웠습니다. SK Telecom 에 전화로 우리 둘의 전화 휴면 신청을 했습니다. 휴면 신청을 하면 다음에 한국 나와 재개 할 때까지 월 만원 정도만 부과 합니다. 갑자기 내리는 함박눈으로 비행기는 기체 제설 작업을 하고 30여분 늦게 이륙하였습니다.
1월 20일(월요일)
LAX공항에 도착하니 20일 아침 열 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지구가 도는 방향으로 날았으니 하루를 번 것입니다. 숨가쁜 3주간의 일정 이었습니다.
끝까지 읽어 주시어 감사합니다.
문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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