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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Topic: 혜화동 4.19
moonbyun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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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혜화동 4.19
on: June 12, 2014,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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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4.19때 고등학교 3학년 이었습니다. 1960년.

혜화동 로터리에 있는 동성 중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늘 옆 동네 문리대 학생들의 데모를 보고 지내 은연중 ‘데모 열’에 감염되어 있었는데, 그날은 아침부터 수업이 잘 안되고 전교가 뒤 숭숭 하더니 드디어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텍스트나 인터넷도 없던 그 시절에 그 모임은 마치 바싹 마른 솔잎이 불에 타듯 순식간에 이루어 졌습니다.

모든 학생들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해야 되겠다’는 잎이 한 단 한 단 쌓이다가 드디어 불이 붙여진 것입니다.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였으나 고등학생들만 데모에 참여 하기로 하고 대오를 정리하고 교문을 나서서 종로 쪽으로 가다 보니 마침 역시 거리로 뛰쳐나와 데모 행진을 시작하는 문리대 학생들 후미에 붙게 되었고 대열은 종로로 해서 광화문을 지나 지금의 청와대인 경무대 앞까지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경무대 앞은 겹겹의 철조망 바리케이드 뒤로 무장한 경찰들이 데모대의 진입을 제지하고 있었습니다.

교문을 나설 때 우리 모두가 존경 해 마지 않는 교장선생님이 걱정을 온 몸에 두르고 교문을 막아 섰지만 역부족이었고, 종로를 통해 행진하는 과정에서 호랑이 체육 선생님은 대열을 앞뒤로 살피며 오합지졸이 될까 보아 이리 저리 뛰면서 열을 정리 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경무대에 다다른 동성 고등학교 학생들은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정리하고 아스팔트길 위에 앉아 몇 십 분을 앉아 있기로 하였으며 그 동안 앞의 문리대 학생들과 이미 가 있던 타 대학 학생들은 연좌 한 채 몇몇 학생들이 바리케이드를 치우려다 경찰에 끌려가기도 하는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학생으로는 가장 선두에 있던 우리들은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장면이 보이지 않아 답답하기도 하였지만, 앞 뒤 대학생들 틈에 끼어 있으니 교복을 입고 있는 고등학교 학생이라는 게 오히려 두려움을 덜어 주는 면도 있었습니다. 한 편 그들과 달리 오열 종대로 줄을 맞춰 아스팔트 길 위에 앉아 있는 우리 자신들이 대견하기도 하였습니다.

내 일생 서울시내 거리 복판 에서 가부좌 틀 듯 앉아 있는 것도 이 한 순간뿐이리라는 묘한 생각도 해 보았으나, 큰 소리를 내기 위해 예까지 온 우리들은 그러나 체육 선생님 지시를 착실하게 따르는 얌전한 고등학교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오후가 되니까 어떤 대학생은 손이 피투성이가 되어 동료대학생들에게 업혀 나가는 것이 보이기 시작 했습니다. 아마도 바리케이드에 손을 대면 경찰이 손에 총을 쏘았던 것 같았습니다. 이때부터 뒤에 있던 저희 학생들이나 길가의 시민들이 두려워하는 기색이었지만 모두들 자리를 지키고 대오를 갖추라는 선생님의 지시에 한 사람도 이탈 않고 앉아 있었습니다. 설마 경찰들이 우리를 향해서 총을 쏘겠는가 하는 생각이 모두의 마음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후 누군가의 입에서 엎드려! 일어서지 마! 하는 소리가 외쳐지고 우리는 납작 엎드려 아이구 나 죽었구나! 하는 공포에 떨기 시작 했습니다. 총소리는 약 오분 간 계속되었는데 주위에서는 아! 하는 단말마의 비명도 들렸습니다.

총성이 잠시 멈춰지고 다시금 ‘모두 일어나 골목으로 피해!’ 하는 외침이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기막힌 장면은 일단의 경찰이 바리케이드 뒤에서 '무릎 꿇고 쏴' 자세를 취한채 광화문쪽을 향해 총탄을 쏟아 붓는 동안 길 위에 대오를 갖추어 엎드려 있던 사람들은 오직 우리들 뿐이었으며 앞 뒤로 길 위에 쓰러져 있던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일어서 도망가다 총알을 맞은 사람 들이었습니다.

모두들 벌떡 일어나 골목으로 뛰는데 여전히 길 위에 누워 신음하는 동성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가 그들을 부축하고 골목으로 들어 오는데 연이어 피 투성이가 된 일반인들도 손 발을 사람들에게 들린 채 골목으로 옮겨지는 거였습니다.

약 3분 뒤 다시 총성이 이어지기 시작 했는데 이 3분은 아마도 길 위에 일사 분란하게 엎드려 있던 동성고 학생들에게 피하라는 신호 같았습니다.

골목 뒤 여느 집 처마에 피해 있으면서도 벌벌 떨리는 가슴을 억제 하기 힘들었습니다.

설마 가지런히 배 깔고 엎디어 있는 학생들을 향해 총구를 내려 쏘라는 지시는 안 했을 것입니다. 그저 하늘에 대고 쏘든지 일정 높이로 쏘든지 하도록 지시가 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천인공노할 경찰들은 총구를 내려 쏜 것이며 그 바람에 저희 고등학생 몇몇도 총에 맞았습니다. 다행이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그로 인해 일생 불구로 산 동기도 있습니다.

경찰들은 데모하는 학생들을 쏴 죽여도 좋다는 명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양심이 있는 경찰들이 많아 바닥을 향해 쏘지 않았기 때문에 희생자가 덜 났는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유일하게 질서 정연하게 엎드려 있는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총구를 내려 쏠 극악한 경찰이 많지 않았던 게 천만 다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로부터 오십 여 년 동안 우리는 4.19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혁명은 꼭 총대를 거머쥔 군인들만 하는 게 아니라는 긍지와 자랑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아울러 그 때의 암울했던 나라의 무질서와 부정 부패가 얼마나 심했으면 고등학교 학생들에게까지 그 악취가 풍겼겠는가 생각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방대한 구호를 외치거나 한심한 세태를 논할 조리 있는 논리를 갖추고 있지는 않았지만 물들지 않은 순수한 열정을 안고 거리로 뛰어나간 것이었으며 위대한 결과의 일익을 했다는 자부심은 긴 세월 동성인의 가슴속에 묵직하게 뿌리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십 년 넘는 세월은 아마도 열아홉의 순정들을 지속시키기엔 너무 긴 세월 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2013년이었던가, 절친한 동기로부터 이상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데모에 참가 한 동기 157명 중 다섯 명이 4.19 의사로 추대 되어 표창을 받고, 국가 보훈처로부터 일생 4.19 유공자 보상 지급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스팔트 위에 엎드려 있다가 총에 맞아 부상한 동기 몇몇들에 지난 수 십 년을 국가가 책임을 지고 보살핀 것과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들 다섯의 각자 명분은 있었던 모양입니다. 누구는 데모할 당시 격문을 썼다느니, 누구는 대대장으로 학생들 앞에서 구호를 외쳤다느니.. 누구는 그 후 기자가 되어 4.19에 관한 조명을 했다느니 하는.

그러나 매달 보훈 금을 받는 그들이 그 돈을 4.19 재단이나 동기 회, 또는 동문회에 자진 납부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없었습니다.

더더구나, 서울을 잠시 나갔다가 가까운 친구로부터 ‘그래도 한 사람이라도 더 그런 대우를 받고 보람 있는 국가 유공자 대열에 끼면 좋은 것 아니냐’하는 말을 듣고 저는 그만 꼭지가 돌아 버렸습니다. 그것은 마치 청와대 가는 아스팔트길 위에 엎드렸던 동료들 등을 밟고 올라서서 태극기를 흔들어 대는 꼴불견을 보는 기분이었기 때문 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친구를 둔것도 복이지만 애꿎은 그에게 화풀이를 하였습니다. 그 날, 차디찬 아스팔트 길에 엎어져 윙윙거리는 총알의 공포를 느끼던 모든 동기들이 모두 다 받기 전에는 아무도 안 받는 것이 보람 있는 고 3 때의 역사를 안고 사는 방법이며 그런 의미에서 약삭빠르게 보훈처에 등록한 이 다섯 명은 일생 후회 해 마땅한 '실수' 를 한 거라고 거나한 술기운과 더불어 친구에게 악을 썼습니다. 만일 그들이 보훈처에서 장고 끝에 선정 해 통지가 왔는데 거절한다면 4.19에 영원한 긍지를 갖고 있는 동성에 폐를 끼치는 것 아니냐 한다면 더더욱 가증스러울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답을 안 해 가치가 더욱 올라가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만일 진정으로 보훈 받을 기회가 있다면 그들이 죽을 때까지 받는 보훈 비 전액을 고스란히 동성 고교 동창회나 동기 회에 자진 반납 하는 길입니다. '모두가 받기 전에는 우리는 안받소' 하지 못했을 바엔.

웃기는 얘기지만 그들이 향유할 '보훈'이라면 그 때 키가 크고 용모 훤출한 탓(?)으로 대외 행사 때면 으레 기수가 되었던 샌디아고 동기나 버뱅크 동기, 키 작은 탓(?)으로 출석 번호가 한자리 숫자여서 맨 앞에 선 나 같은 사람도 받아야 됩니다.

오십 년이 지나다 보니 ‘별 일’이 많습니다. 인간의 정의와 가치 기준이 무디어 져 과욕과 자만이 머리를 드는 모양입니다. 혹자는 노욕이라고도 하는 모양입니다만 동료의 의기와 용기를 업고라도 내 이익을 챙기겠다는 발상이 꿈틀댑니다. 그리고 나이를 먹으니 다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성인 군자 연 하는 방관자가 되는 모양입니다.

이것은 시기나 질투로 버무려진 냉소가 아닙니다. 숭고한 다수의 행위를 상업적 전리품으로 챙긴 소수에게 뱉어내는 노여움일 뿐입니다. 속 맑은 사람이면 데모에 참여한 모든 동성 사람들과 똑 같은 마음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등수를 매기는 백 미터 경주도 아니니 모두에게 주던지 모두에게 안 주던지 해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받아 낸 다섯이나 부여 한 보훈처나 정신 나가기는 마찬가지 이겠습니다. 사양 했어야 할 것을 애써 구걸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는 저도 사실 서울 나갔을 때 절친한 친구에게나 화풀이를 했을 뿐 아무 동기에게나 이런 말은 못했습니다. ‘쩨쩨하고 속 좁은 놈’ 소리 들을 까 봐서였습니다. '사촌이 논 사면 배 아파 할 놈'소리 들을까 봐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돌아 왔습니다.

50년 넘게 지녀 온 나름의 4.19 자존심이 더 이상 상처 받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살아 일상 부딪지 않고 그저 잊을 수 있으니 다행입니다.

문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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