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저의 입원을 염려 해 주시고, 쾌유를 빌어 주신 모든 이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마음으로 그간의 저의 수술 경과를 글로 올릴까 합니다.
즐거운 일만 찾아 헤매도 바쁜 터에 누군가의 어려운 일을 까발리는 게 과연 적절한가 망설여 집니다만 읽을 마음이 생길 님께만 드리는 저의 얘기로 받아 들여 주시고 부담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2014년 8월 25일에 USC Urology암 병동에 입원하여 여덟 시간에 걸쳐 방광 제거 후 소장(intestine) 일부로 방광을 만드는 Radical Cystectomy 와 Neobladder 수술을 받고. 의사의 권유로 전립선의 제거(prostatectomy surgery) 수술과, 계획에도 없던 영구Pacemaker surgery후 혈관에 fungal infection이 일어나 일 주일 만에 다시 제거하는 수술을 받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8월 30일에 퇴원 하였다가 9월 1일 월요일에 다시 패혈증 증세가 나타나 Emergency로 이틀 전에 퇴원한 암 병동에 다시 실려 가 9월 17일까지 중환자실에서 역학조사를 하였습니다. 결국은 첫 수술과정에서 심장 박동이 스킵하는 현상이 있다 하여 심장 박동기를 심었었는데 이것이 패혈증을 유발하고 있음이 밝혀져 다시 그 박동기(pacer maker)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 현재는 집에 있습니다만, 간호사가 내방하여 매일 Anti fungal 약물과 Saline 링겔을 혈관에 맞고 있습니다. Saline Ivy는 곧 끝낼 예정입니다만 antifungal ivy의 혈관 투입은10월 7일 혈액 배양 검사 후 지속 여부가 결정 됩니다.
저의 방광암 증상은 혈뇨가 비치기 시작 하면서 2012년 늦가을부터 나타났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평소 물을 적게 마셔 그런 것이려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 하다가 점점 심해져 기본 메디케어와 함께 제가 들어 있던 Easy Choice HMO의 network list에 있는 한인 비뇨기과 전문의 Dr. 윤환의 LA진료실을 찾게 되었습니다.
내시경 진찰 후 닥터는 방광 내벽의 많은 부위에 튜머가 보이는 중에 돌출된 튜머는 제거가 쉽지만 두껍게 퍼져있는 부위가 문제라면서 우선 biopsy를 하여 조직검사를 함과 동시에 X-Ray, PT Scan(Positron Emission Tomography Scan), MRI(Magnetic resonance imaging) 등을 arrange 해 주었습니다.
검사결과 tumor가 악성 종양은 아니나 악성 튜머로 종양의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결론이었으며 1개월 후부터 주 일회, 총 6회에 걸친Bacillus Calmette- Guerin(BCG)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BCG 요법은 암 기운의 억제를 촉발하고 치료하는 약물을 요도 (urethral)에 삽입하여 방광까지 들여 민 튜브를 통해 주입하고, 튜브 제거 후 집에 가는 동안 한 시간 정도 홀딩하고 있다가 방출하는 것으로 아주 힘겨운 치료는 아니었지만 가장 보편적인 치료 방법 같았습니다. 방광암은 비교적 독립적인 방광 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초기에는 전이의 위험도가 적고 초기 단계에서는 BCG로 많이 치유되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나 4월말쯤 치료가 끝나고 다시 내시경 검사를 한 Dr.윤은 아직도 방광 내벽이 튜머의 기운이 잡히고 있으므로 2차 BCG가 필요 하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6월에 시작한 2차 BCG는 치료 도중 약을 구하지 못해 한달 여 중지 되는 등 가슴 졸이는 상황이 되더니 5회만 실시하고 8월 말에야 끝났습니다. 대개 BCG 같은 치료 과정은 약을 secure하게 확보 해 놓고 실시 하는 것이라는데 이것은 오히려 이변이었습니다.
드디어 BCG 치료 후LA의 St. Vincent Hospital에서 Dr. 윤의 biopsy 시술을 받아 조직검사 후 받은 소견서는 충격이었습니다. 자필로 쓴 그의 소견서에는 아직 1기이기는 하지만 악성 방광암으로 판명 되었으며 암 기운이 방광 벽의muscle까지 침투되어 있는지 deep biopsy가 필요하고, 심하면 방광을 remove 해야 할 것 같다는 소견에, 이를 위해서 필히 USC나 UCLA에서 2nd opinion을 받으라는 내용 이었습니다.
아연해진 저에게 Dr. 윤은 방광 벽에 구멍을 낼까 봐 자기는deep biopsy를 하지는 않으며, 이제 그들이 저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들은 저에게 추천 해 줄 의사도, 명단도 없으니 환자 스스로 길을 모색하라는 말이었습니다. 방광은 내부 표피와 muscle, 외벽으로 이루어져 있는 바 muscle까지 침투되면 제거 수술을 해야 된다면서 deep biopsy 하다가 외부로 관통이 되면 암 기운이 복부로 전이 되는 등 자기는 그 위험을 감당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로서는 방광 제거의 경우 neobladder수술까지 받아 어떻게 하든 bag을 허벅지에 차고 일생 살아야 되는 것은 피해야 되겠다는 절박한 심정이었는데 이러한 수술은 USC나 UCLA에서나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제가 가지고 있던 Easy Choice HMO(Health Maintenance Organization) supplement 보험은 제가 거주하는 오렌지 카운티 지역으로 제한되어 있어 LA의 USC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미국 보험법 상 모든 supplement보험을 변경하는 것은 매 해 12월에나 가능하며, 설령 변경 하였다 해도 다음 해 1월 1일부터 진료가 가능하므로 번져가는 암을 속수무책으로 안고 지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급해진 저와 집사람은 USC나 UCLA에서 진료 받을 수 있는 PPO(Preferred Provider Organization) supplement 보험회사를 물색하는 한 편, 제가 가지고 있는 Easy Choice HMO에 list 된 닥터 중에서라도 deep biopsy 할 수 있는 의사를 찾는 과정에서 Montebello지역의 중국계 Dr. Yip 진료실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진료실은 대 만원으로 대기중인 환자들이 넘쳐 복도에까지 간이 의자를 놓고 순번을 기다리는 상황 이었지만 Dr. Yip을 만난 것이 저로서는 행운이었습니다.
그 동안의 저의 치료 과정과 기록들을 살펴본 Dr. Yip은 자기가 USC Urology Department 의 객원 닥터이니 USC방광 암 전문의 Dr. Daneshmand 에게 저의 상태를 말 해 보겠다는 뜻밖의 제의를 해 주었습니다. 그가 언급하는 Dr. Daneshmand는 USC Urology department의 top surgeon으로 그 계통에서는 미 동부에서 명성이 있는 방광암 수술 전문의였습니다.
Dr. Yip을 통해 저의 case를 접수한 USC에서는 저의 deep biopsy를 위해 HMO에 진료 허가를 신청하는 한 편, 저는Supplement Insurance를 Easy Choice에서 PPO로 바꾸되 내년 1월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보험회사를 찾기에 온 힘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저를 진료 하겠다는 USC 의 특별 요청에도 불구하고 저의 HMO 보험회사에서는 몇 주째 Approve가 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Easy Choice HMO 보험회사에 저의 USC 진료 허락을 계속 재촉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접수 창구에 한국인 agent가 있다기 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정을 설명하였으나 대답은 기상천외였습니다.
“아니, 아버님, USC에서 진료 하는 것과 기타 병원에서 진료하는 것과 비용이 얼마나 차이 나는지 아세요? 저희가 이곳에서 일하는 목적중의 하나는 회사(Easy Choice)의 지출을 최소화 시키는 겁니다. Deep biopsy는 꼭 USC 가 아니라도 되는 건데 network에도 없는 USC 진료 허락을 원하신다니 그런 기대는 일찌감치 접으세요!”
원칙적으로 자기들 구역 외의 병원 전문의들이 강력히 추천하는 경우는 어느 보험희사건 대놓고 거절 할 수는 없는 터인데 만만한 한국인 할아버지 할머니만 ‘마구’ 다루어온 이 한국인 agent들은 이런 식으로 시건방진 월권행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곧바로 바꾸어 달라고 한 미국인 agent는 'well, I'll resubmit your case to our evaluation department to prompt Mr. Moon's case' 하는 거였습니다. '아'와 '어'가 다르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겠습니다. 한국인 agent에게 기대를 건 것 자체가 과욕 이었으며 같은 한국인이니 좀 더 자상하게 대해 주겠거니 한 저의 소박한 바램은 오히려 번지수를 잘못 짚은 실수였습니다.
다급한 마음에서 자비로 하기로 하고 UCLA 대학병원 내 Urology 병동에 마침 짬이 난다는 닥터에게 2nd opinion을 받았습니다. 그 동안의 X-Ray, Pet scan, MRI 등 자료와 치료 기록들을 본 후 의사는opinion을 말 해 주는데 Deep Biopsy를 해 봐야 결론이 나겠다는 말이었으며 적절한 보험으로 바꾸어지면 deep biopsy를 해 보겠다는 언급이었습니다.
지난 몇 년을 건강보험 agent로 수고 해 온 진경순씨 도움과 저희 부부의 노력 끝에 드디어 11월 1일부로 효력을 발생하는 Blue shield PPO 를 찾게 되었으며 USC의 Sergeant Urologist인 Dr. Daneshmand 진료실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Dr. Yoon 진료실에서 내몰리다시피 한 후 아무 치료도 받지 못한지 4개월 만 이었습니다.
'만에 하나 불필요 하게 방광을 들어 낸다면 환자에게는 비극이요 의사에게도 불명예입니다. 신중히 검토 해 봅시다' 하는 의사의 말로 저와 Daneshmand 수술의 의 만남은 시작 되었습니다.
Dr. Daneshmand의deep biopsy의 결과는 역시 암 판정 이었습니다. 아직 muscle까지 침투하지 않은 1기 상태이나 우선 BCG를 받아 본 후 수술 여부를 생각 해 보자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주 1회씩 여섯 차례의 약물 투여를 하고 2014년 4월에 최종 검사를 하였습니다.
검사 결과는 뜻밖이었습니다. 암 기운이 모두 사라지고 저의 방광은 암에서 해방 되었다는 진단이었습니다. '7월에 다시 한 번 확인 차 검사를 해 봅시다'하는 Dr. Daneshmand의 말을 뒤에 두고 저는 환희에 들떠 날라가는 기분으로 Keck Hospital을 나섰습니다.
그러나 2014년7월이 되어 USC Keck Hospital의Urology 병동에서 내시경으로 방광 내부를 스캔하던 Dr. Daneshmand으로부터 콩팥과 방광 연결부위인 ureter부근에 반경1cm정도의 튜머가 새롭게 나타났다는 진단과 함께 조직검사 결과 그것은 전에 없던 희귀 성 악성 암으로 확산속도가 빠르고 매우 active 하다는 암울한 소식이 전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위치가 콩팥 연결 부위여서 전이의 위험도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muscle에는 침투하지 않은 제 1기 단계지만 Mr. Moon의 경우는 이미 세 차례나 BCG치료를 받은 터여서 방광 제거 수술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Cystectomy 와 neobladder 수술 대신 키모와 radiation therapy를 받아 나을 수도 있지만 그 확률은 33%이고 나머지 66%중 33%는 암이 치유되지 않은 채 전이되는 fatal case이며, 마지막 33%는 치유가 안되고 방광을 제거해서 암에서 벗어나는 경우지만 그 때는 이미 장기가 radiation에 노출되어 neobladder수술은 불가능 해 집니다. 즉 Bag을 차고 일생 살아야 되는 케이스 입니다"
Dr.의 말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Mr. Moon은 그래도 건강한 편이라서 neobladder 수술을 시도 해 볼 처지이나 그렇지 못한 환자도 많습니다. USC에서는 대형 수술 전에 반드시 전문의 다섯 명으로 구성된 committee에서 주무 sergeant인 내가 Mr. Moon의 모든 상태를 presentation하고 위원들 사이의 discussion과 동의를 얻어야 수술에 들어갑니다. 이 committee에는 수술 대신 키모나 radiation therapy로 암의 치유를 시도하는 Oncologist도 두 명 있습니다. 이들도 저의 수술 제의에 동의 하리라 생각합니다."
달리 생각 할 방도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 동안 저의 문제로 뉴욕의 둘째와 텍사스의 첫 아들은 자기들 의사 친구나 교회 의사 친구들에게 저의 기록들을 주면서 꾸준히 상담 하여 왔었고, 특히 biology를 전공한 둘째 며느리는 이곳에서 저의 진료와 관계된 의사들과 통화를 하며 뉴욕 urologist지인들과 상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들 내외는 Oncology(non surgical bladder treatment) 분야는 동부가 우세하다 하면서 그 계통의 권위자까지 선을 대어 직접 면담, 진료를 받아 수술을 피하고 치유 할 수 있을지를 저보다도 더 열심히 알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이곳 Dr. Daneshmand의 committee member중 두 oncologist들이 이들과 같은 대학 출신으로 서로 잘 아는 사이인 것이 밝혀져 자기들끼리 discussion하게 되었으며 그들도 수술이 최선이라 는 결론이었습니다.
막상 수술 날자 까지 2014년 8월 25일로 잡히고 보니 두려움과 아쉬움이 앞서기도 하였습니다. 의사는 수술 하는 김에 문제는 없지만 아예 전립선도 제거하는 게 낫다 하였습니다. 저의 나이를 고려하고, 향후 문제점만 안고 있는 전립선은 소임을 다한 노병이니 사라져 주는 게 낫다는 얘기였습니다.
수술을 준비하는 수 간호사가 저의 배에 두 개의 원을 그리며 하나는 neo-bladder를 만들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외부 bag을 차기 위해 호스를 뽑을 자리이며 또 하나는 neo-bladder를 만든 후 요도(Urethral)와 연결이 불가능 할 때 호스를 뽑아 외부 bag과 연결 할 자리라고 설명 하는 거였습니다. Bag을 차고는 못 살겠다는 저의 집념에 도전 해 오는 불안한 그림자였습니다.
25일 새벽 6시 Keck USC Hospital에 입원 하니 수술에 관한 모든 준비들이 기계처럼 순서를 밟으며 진행 되었습니다. 아침 8시에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아내에게 웃어 보이려 했으나 얼굴이 굳어있는 저 자신을 발견했을 뿐이었습니다.
오후가 되어 마취에서 깨어나 침대에 실린 채 회복 실에서 나오는 저에게,
"여보. 수술은 아주 textbook case처럼 잘 되었대!"
하는 아내의 말소리가 저를 반겼습니다. 저는 속으로 아! 살았구나 싶었습니다. 힘든 수술이 끝났다는 안도감과 두 개의 검정 마크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뻤던 것입니다.
살아 난 것이 감사 했고, 저를 위해 기도 해 준 많은 마음들에 감사 했습니다.
병실로 돌아 온 저에게 는 지독한 아픔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간호사들은 저의 고통은 산부가 애기를 낳고 나서의 고통과 맞먹는 거라 하였습니다. 배가 뒤 틀리고 숨쉬기조차 힘든 매 시간의 고통을 진통제로 가라 앉혀야 했습니다.
문제는 밤에 체온이 떨어지며 온 몸을 떨고 진땀과 함께 맥박이 50미만으로 떨어지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었습니다. USC 심장부서(Cardiology)의 진찰 결과 저의 맥박이 불규칙적 일 때가 포착되었으며 이는 소위 Arrhythmias 라는 현상으로 하부 심방이 자체 힘으로 부족 할 때 상부 심방으로 시그널을 보내면 상부 심방이 더 큰 압력의 펌핑작업을 도와주게 되어 있는데 이 시그널을 상부 심방이 감지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pacemaker 를 앞가슴에 심고 혈관으로 전극을 심장까지 삽입하여 지속적으로 시그널을 감지케 하는 수술이 필요하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8월 29일 왼쪽 앞가슴에는 조그만 pacemaker box가 피부 밑으로 심어졌으며 그 기계와 연결, 가느다란 센서가 혈관을 타고 심장에 장착 되었습니다. 덤으로 수술을 하나 더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센서는 일생을 저와 더불어 살며 미국 어디엔가에 있는 센터와 위성 시그널로 연결되어 제가 지구 상 어디에 있던 저의 심장 활동이 실시간으로 모니터링 된다고 하였습니다.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몸 여기저기 부착되어 있는 모든 계기들이 화장실을 가려 해도 부담이었습니다. 요도로는 튜브를 neobladder까지 삽입하여 콩팥으로부터 끊임 없이 나오는 소변을 받아 내는 catheter 가 bag과 연결되어 있고, 아랫배에는 수술 후 장기 사이에서 고이는 이물질들을 빨아내는 Jackson Pratt(JP) 이 매달려 있으며, 팔뚝에는 높이 매달린 두 세 개의 liquid 약품들이 ivy로 주입되고 있고 가슴에는 24시간 심전도 모니터링을 위해 문어발 같은 wire들이 가슴 여기저기 부착되어 주먹 크기의 기계에 연결된 채 매달려 있게 되었습니다.
환자가 하루에 적어도 3회 정도 간호 병동 복도를 걸으며 '운동'을 하는 것이 필수인데 이래야 한바탕 뒤집어 놓은 내장들이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움직이기 위해서는 위의 각종 부착물들을 끌고 다녀야 하니 그 번거로움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Keck Hospital입원실은 독방으로 되어있고 환자 외에 간병인 한 사람이 잘 수 있는 의자용 간이 침대가 있어 아내는 매일 병원에서 보내며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환자는 앓느라 정신 없다지만 간병하는 아내가 또 하나의 환자가 될까 봐 걱정이었습니다. 일요일만 제외하고 매일 registered nurse, practice nurse, charge nurse세 명의 간호사가 한 팀이 되어 몇 개의 병실을 돌보는데 이들은 오전 7시와 오후 7시에 교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밤이나 낮이나 일정 시간간격으로 환자의 혈액 채취, 혈압. 당. 체온 등을 체크 하며 catheter bag과 JP 를 비우고 약을 먹이며 시트도 갈고 하였습니다. 빈틈없이 맡은 일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환자는 밤에도 몇 번이나 깨어야 했습니다.
입원 해 있는 동안 둘째가 뉴욕에서, 딸이 오크랜드에서 날아 와 곁을 지켜 주었습니다.
병원에서는 8월 30일 퇴원을 시켰습니다. 우선은 병실을 떠나는 것이 시원한 일이었지만 온몸이 아프고 불편한 상태에서 퇴원하는 것이 어쩐지 불안 하기도 하였습니다.
집에 온 후 병원에서 arrange 해 준 간호원이 와 ivy를 놓아주고 토요일을 보냈으나 일요일 밤에는 체온이 떨어지며 온몸을 떨고 땀으로 이불이 흠뻑 젖는 예의 그 고통이 엄습하는 것이었습니다. 월요일 아침이 되자 또다시 이런 상황이 엄습하며 이번에는 제가 혼수상태에 빠지면서 병원에서 팔에 만들어 놓은 소위 semi permanent ivy 'line'을 잡아 뽑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황한 아내는 병원에 연락, 병원에서는 급히 다시 입원하라는 통지를 받고 , 때마침 병 문안 차 왔던 손위 동서가 운전을 해 Keck USC병원을 향했습니다. 병원에 거의 도착 해서야 제 정신으로 돌아온 저는 집에서부터 병원까지 저자신의 모든 비 정상적인 행동을 기억 못하고 있었습니다.
퇴원의 기쁨도 잠깐, 이틀 만인 2014년 9월 1일 다시 입원실에 돌아 온 것입니다.
병원에서는 저의 혈액에 fungal infection이 발생 한 것을 포착하고 원인 파악을 위한 역학조사를 시작 했습니다. 매일 혈액을 채취해 배양 검사를 하고 X-Ray, MRI, ultra sonic scan등을 집중적으로 하면서 발생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혈관에 radiation 액을 주입하고 nuclear lab에 가 scan을 하는 거였습니다. 방사능을 주입 후 간호원도 30분 이상 저와 가까이 있지 못하게 하고 간병인도 밤에 머무는 것을 금지 시켰습니다. 속으로는 아내에게도 쉴 틈을 주게 된 것 같아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요란을 떠는 방사능 물질을 혈관 속에 담고 있는 나는 어찌 하라는 말인가 하는 한심한 생각도 드는 것이었습니다. 재입원 후에도 간헐적으로 체온이 떨어지고 온몸이 땀에 젖으며 안절부절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지만 병원에서는 Antifungal injection과 antibiotic ivy를 투여하며 원인을 찾고 있었습니다. 저의 혈액을 뽑아 곰팡이를 배양하고 그것을 박멸하는 맞춤형 약을 만들어 혈관에 투입한 후 혈관 속의 곰팡이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으면 다시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되풀이 하는 지겹고 지루한 치료 과정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과연 패 혈병이란 무서운 것이었으나 USC병원의 철저한 치료 과정을 저는 그저 감사 할밖에 없었습니다.
역학조사 결과 드디어 지난 주에 심은 pacemaker가fungal infection원인이었음이 밝혀져 다시 제거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pacemaker에서 일종의 거부 반응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Cardiology 닥터가 pacemaker기록을 관찰 후 쓰인 빈도가 낮아 제거해도 큰 위험은 없으며 추 후 필요하면 다시 설치하기로 하였습니다. Pacemaker는 설치보다 remove가 더 힘들다는 제거수술을 무사히 받았으며 antifungal 치료는 지속 되었습니다. 거의 매일 지속되는 blood 배양검사에서 연속적으로 fungal infection이 negative 가 나오기 전에는 퇴원시키지 못하는 게 USC의 policy였습니다. 답답하기는 하지만 환자로서는 오히려 안심이 되고 신뢰가 가는 병원 process였습니다.
드디어 3회 연속 fugal infection이 negative로 나와 9월 15일 퇴원하였습니다. 우선 살 것 같았습니다. 퇴원 후 지금까지 아침마다 간호사가 집에 와 병원에서 보내주는 antifungal ivy와 saline ivy를 혈관에 놓아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3-4주 더 맞아야 된다 했습니다. 막 퇴원해서는 시도 때도 없이 먹어대던 진통제의 횟수도 점점 줄여가고 있으며 이제는 집 주위를 조심스레 걸어 보기도 합니다.
인생은 태어나 걸음마부터 시작해 배우던 것을 나이 먹어 다시 역순으로 배운다더니 제가 그 짝이 되었습니다. 이제 기저귀라는 말 대신 젊잖게 adult guard 라는 이름으로 코스코에서 사 늘 차고 소변조절의 연습을 해야 하니 말입니다. 밤 낯으로 두 세시간 알람을 설정해 놓고, 소위 괄약 근 운동을 하며 Potty train중입니다. 정상인의 소변 배설에는 두 개의 개폐 근육이 작동하게 되어 있는데 수술하며 한 개가 없어진다 합니다.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몇 달이 걸린다는데 아마도 neobladder수술 후 제일 힘든 관문 중의 하나가 이 train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다리에 백을 차고 지내는 것보다 성가시진 않을 것입니다.
생지옥 같았던 수술 후 2-3주에 비해 지금은 집 주위를 한 바퀴 돌 정도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식욕이 없고 20파운드 정도 몸무게가 줄었지만 이만하기를 얼마나 다행인가 그저 감사 할 뿐입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고 쾌유를 빌어 준 모든 마음들께 감 사합니다. 앓는 사람 못지 않게 고생하고 있는 아내가 새삼 귀하게 느껴집니다. 큰 수술을 잘 견디어 낸 저 자신의 등을 스스로 팔을 뒤로 해 토다 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의 심신을 받쳐주고, 끝까지 지켜주신 저 높고 완벽한 힘, 저의 인생에서 몇 번이나 고비마다 저를 붙잡아 주신, 보이지 않는 그 손길을 감사 합니다.
2014년 10월 1일
문병길
수술 한지 일년 하고도 두 달 가까이 지났습니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잠자리에 들 때 마다, 운전 할 때마다, 걸을 때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순간을 옆구리에 백을 차지 않고 사는 저를 의식하며 감사 합니다.
그러나 수술 후 25 파운드 가량 줄어 든 저의 체중은 늘어 날 기미가 없습니다. 수술 할 때 어쩔 수 없이 손상된 괄약 근 때문에 작은 창자방광이 꽉 차면 부지런히 화장실을 찾아야 되는 불편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그래도 어지간히 버틸 수 있습니다. 괄약 근 강화 운동을 지속적으로 해야 되는데 이런 데에 의지력이 약한 저는 늘 뒤쳐지는 오류를 범합니다.
아울러 저를 낙담 시키고 있는 것은 수술 후 저의 왼쪽 신장 기능이 중지 되다시피 한 것인데 의사들은 아마도 수술 직후 몸을 덮친 blood fungal infection 때문이 아니었나 말하고 있었습니다. 한 쪽 신장으로도 살아 가는 데는 지장이 없으나 항상 조심 해야 되는 운명일 것 같기는 합니다. 신장은 기능이 저하되면 되돌릴 수 없다 하는군요. neo-bladder 만드는 기술이 옛날엔 없었듯이 신장 기능 회복 하는 기술도 언제가 생길지 모르긴 합니다.
수술 전에 저를 괴롭혔던 왼쪽 다리 아픔이 수술 후 사라져 수술로 얻어지는 이익도 있는가 보다 하고 기분 좋았었는데 두어 달 전부터 다시 통증이 되돌아 와 요사이 physical therapy를 받고는 있습니다. 큰 수술로 복근이 많이 줄어 허리만 가지고 상체를 지지하다 보니 등 뼈가 힘이 부치게 되고, 척추 뼈 사이의 신경을 눌러 다리가 아픈 거라 하는데 어찌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는 나이와 함께 잔병은 '안고 사는 것'이라 말 하지만 노후화 되어 가는 기계를 살살 달래가며 써야 되는 법을 터득하기에 아직도 젊은 '척' 하는 '마음'이 문제 인 것 같습니다. "내려 놓는 법'을 익혀야 될 제가 선반에 무거운 짐들을 자꾸 쌓는 우매를 저지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마도 내려 놓기 시작 하다가는 이제는 주저 앉는 길 밖에 없다는 강박감에 사로 잡히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터낼 끝은 보였다고 믿으렵니다.
2015년 10월 13일 문병길
심장 박동기 얘기를 마저 해야 되겠습니다.
터낼 끝을 보는 것이 그리 만만치는 안았습니다. 2015년 12월에 아내와 서울을 나갈 기회가 있어 마포에서 한달 여 지내며 허리가 계속 아파 한의사로부터 침을 맞았는데 영 낮지를 않고 몸 컨디션은 계속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서울공대 식품공학과를 나온 후 다시 한양대학에서 한의사 과정을 거쳤다는 그의 이력이 매우 호기심을 자아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좁은 공간에 벌집처럼 침대를 배열하고 환자들에게 몇 분씩 침 놓는 일을 하루 종일 기계처럼 반복하는 의사가 조금은 덜 존경스럽다는 생각도 가져 보았습니다. 숨이 답답하고 걷기도 점점 힘들어져 원래 한방에 열정이 부족한 저는 도중에 접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다 접고 미국의 오렌지 카운티 고향(?)으로 돌아 오고 싶었으나 New Jersey의 둘째네를 들려 며칠 지낼 계획이었던 터라 무리를 해서 뉴욕을 향했습니다.
그것이 끝내 탈을 내고 말았습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보행도 힘들지만 손주들과 온 식구가 맨하튼에 나가 좋은 시간을 가지면서 저는 찻집에 앉아 기다리곤 하였습니다. 이틀 후 가주로 가게 되면 다니는 USC 병원에 가 보겠다는 제가 불안하기 짝 없는 아들은 자기 친구인 심장전문의에게 연락 해 일요인데도 불구하고 친구가 집에까지 찾아 와 저의 맥박을 재 보더니 두말 없이 뉴욕 대학 병원 응급실에 집어 넣었습니다.
맥박 30 미만의 상태로 비행기를 탔다가는 비행기 안에서 쓰러진다면서 이런 맥박으로 여태 버텼다는 게 오히려 이상 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에서 한의사로부터 맥박을 짚어 침 맞고 약까지 먹은 저는 맥박이 낮을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안 한 터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방광 수술 할 때 심었다가 패혈증의 주범으로 판정되어 보름 만에 뽑힌 Pace maker가 1년 후 뉴욕에서 다시 저의 가슴에 메달처럼 찾아 오게 되었습니다.
심장 박동기는 5년 지속되는 배터리가 장착된 전자 제품인데 일정 간격으로 미세한 전류를 심장에 보내 두 개로 분리 된 심실이 피의 흡입과 방출을 정확한 박자로 하도록 도와주는 기계인데, 이 기계는 장착 되는 순간 위성을 통해 유럽 어디에 있는 센터와 직결, 제가 지구상 어디에 위치 해 있어도 제 심장의 박동에 무슨 문제가 생기거나 배터리가 약해지면 그것을 감지 해 저의 닥터에게 연락이 간다 하니 제가 드디어 ‘칩’을 심은 현대인이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강한 펌프가 피를 온 몸 구석구석까지 보내주니 저의 발가락도 전보다 더 강해 질 것으로 믿습니다.
밤에 한 두 번은 꼭 일어나 화장실을 가야 하는 신세 입니다만 그런 얘기에 저의 친구들은 나는 내 방광 가지고도 두 세 번 간다 하며 위로(?) 인지 호소인지를 합니다. 여하튼 몸이 수술 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살아야 되겠는데 마음은 그게 아니어서 아직도 철이 안 들었나 봅니다.
2016년 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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