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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Topic: 시월의 유혹
teddy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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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시월의 유혹
on: November 3, 2015,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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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유혹

벌써 시월이다.

야구 열성 애호가인 필자는 미국 로스 앤젤레스 근교에 살지만 뉴욕 매츠 (NY Mets) 팬인데, 그 팀이 지금 아주 잘 해서 월드 시리즈 본선에 나가 캔자스 시티 로얄스 팀과 자웅을 겨루게되어 기분이 참 좋아서 날아 갈듯하다. 초등 학교 3 학년 어느 일요일, 우리 학교 (부산 사범 부속) 야구 시합을 보려고 부산 동대신동 공설 운동장에 갔는데, 정문에 헌병이 보초를 서고 있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시합이 없으니 집에 돌아가라고 하면서 이날 아침에 전쟁이 나서 군에서 운동장을 접수했다고 설명해줬다.

그날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6.25 사변” 이 일어난 1950 년 6 월 25일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우리 학교도 징발당해서 전쟁이 끝나고도 졸업할 때 까지 가교사에서 공부했다.
때가 시월인데다 한국 전쟁 생각이나서, 그 해 시월에 일어난 일들을 돌아보면서, 그 때 있은 일들이 어떻게 우리 나라/민족의 미래를 결정 지었은지를 살펴 보고저한다.

시월이 오기 조금 전에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여 ( 9월 15 일) 2 주 후에 서울이 수복되었다 . ( 9 월 28 일)

중공의 경고를 무시하고 북진 감행

인천 상륙으로 보급로가 끊겨서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와 있든 북한의 인민군은 급속히 패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38 선 이남이 단박에 모두 수복되었고, 38 선을 넘느냐 마느냐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 무렵에 중공에서 유엔군이 38 선을 넘으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방송을했다. 그러나, 유엔군 측의 반응이 없으니까, 주은래 중공 외교 부장이 인도의 파니카 대사를 불러서 “유엔군 (한국군 제외) 이 38 선을 넘을 경우에 중공이 좌시하지 않겠다”는 메세지를 본국 (인도)을 통해 미국 영국등 참전국에 통보해달라고 요청했다. (10월 3 일)

이에 따라, 미국에서는 이 경고를 어떻게 해석 하느냐를 놓고 잠시 내부 협의에 들어 갔다. 그러나, 대부분은 중공의 경고가 알맹이 없는 협박에 불과하다고 무시했으나, 대쏘 봉쇄 정책 (Containment Policy) 입안자로 유명한 국무부의 케넌 (Kennan) 씨만 이에 반대 의견을 내놨다. 그는 38 선에서 멈추면 유엔 결의를 지켜서 전전 원상 회복 (Status Quo Ante Bellum)을 이뤄서 봉쇄 정책에도 적합해서 좋지만, 38 선을 월경하면 봉쇄 정책을 넘어 롤백 정책 (Roll Back Policy) 이 되어서 중공이나, 쏘련의 개입을 초래하게 된다고 경고하였다. 그 당시는 외로운 반론객이었지만, 한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의 선견지명이 올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동부 전선의 국군은 38 선을 넘어 먼저 북상하고 (10 월 1 일) , 서부 전선의 유엔군은 패주하는 적을 섬멸하기 위해 북상이 필요하다는 맥아더 장군의 주장을 받아들여 10 월 9 일 북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열흘 뒤인 10 월 19 일 평양에 입성했다.

웨이크 섬의 회동

그러나, 어딘가 한 군데에 찝찝함을 느낀 트루만 미국 대통령은태평양 가운데 있는 웨이크 섬 (Wake Island) 까지 날아가 맥아더 장군을만나서 (10 월 15 일) 그가 가장 알고 싶어했든 “중공의 개입 가능성”을 슬쩍 회담 마무리 쯤에 지나가는 말인듯이 물었드니, 그 역시 별 것 아닌 것처럼, 그들이 감히 개입할 가능성은 별로 보이지 않고, 설령 압록강을 넘어 온다고 한들 그들은 우리 공군의 밥이될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해줘서 가려운 곳을 시원히 긁어줬다고 못내 회심의 미소를 지우며 맥아더 장군에게 다섯 번째의 공로 훈장을 달아주고 워싱턴으로 흡족한 마음으로 귀환했다.

중국 인민 지원군 개입

그런데, 맥아더 장군이 중공의 개입이 없을 것으로 큰 소리쳐서 미국군 통수권자 인 트루만 대통령을 안심시킨지 나흘째 되든 날인 10 월 19 일 중공에서는 그들의 군대를 “인민 지원군” 이란 명목으로 북한에 진입시켰다. 지금까지는 그들이 야간 행군을 하고 주간에 잠복해서 중공군 개입을 몰랐다고 하는데, 이는맥아더의 실책을 덮어주기위한 음모에 지나지 않는다. ( 미국 정보기관의 감청보고가 모두 동경 맥아더 사령부로 배포되는데도 몰랐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리고 대낮에 압록강을 넘어 신의주에 들어온 중공군을 환영하는 사진, 대낮에 압록강을 건너는 사진들이 등장하는데 동경 사령부는 모두 낮잠만 잤는가?)
맥아더는 인천 상륙 작전 성공의 기세로 계속 북으로 밀고 올라가면서, 처음엔, (미국) 추수 감사절까지 전쟁을 끝내고 크리스 마스 때엔 미군이 집에 돌아갈 수 있다고 독전했다. 19 일 북한 땅에 들어온 중국 인민 지원군은 유엔군이 북진할 행군 예정로를 미리 파악하여 산 기슭에 매복하고 그들을 맞이할 차비를 하고 있었다.

중공의 제 1차 전역

10 월 25 일 중공군은 초산 근처로 올라오든 한국군과 최초의 조우를하는데,한국군은 처음엔 패주하든 인민군이 반격하는줄 알았으나,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서 6 사단이 큰 피해를 당했고, 이 공백을 매우러 들어온 미 8연대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이 포로로 잡혀서 동경 사령부에 보고를 올렸으나, 한국군이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상대 (중공군)의 전세를 크게 부풀렸다고 보았다. 일단 유엔군은 청천강 부근으로 재집결했고, 중공군은 예상밖의 큰 성과를 올렸으나, 보급이 따르지 않아서 공세를 더 펼치지 않고 산간지역으로 잠적했다. (물론, 중공군은 장진호 쪽으로도 진군하여 전투를 벌였으나, 그 쪽 전투는 흥남 철수등으로 너무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의도적으로 기록하지 않은) 서부 전선의 미군과 한국군의 혹독한 참패를 알리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때 통일이 안된 것을 아직도 통탄하고 있다.)

맥아더의 크리스 마스 공세 를 무력화한 중공의 제2차 전역

중공군이 홀연히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졌기 때문에, 맥아더는 더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즉 중공의 개입 의도와 개입 정도 (군인 숫자) 에 대한 판단 착오를 이르켰다. 중공군과직접 전투를 경험한 단위 부대의 적정 판단이 8 군에서 취합해서 동경 맥아더 사령부에 올라 갔으나 , 그 곳에서는제 1차 전역 (공세) 에 보인 중공군은 압록강변의 수풍 발전소 방위 목적으로 들어온 소수에 불과하다고 사실과는 동 떨어진 평가를 하였다. 그래서 청천강가에 집결한 유엔군은 보급품의 보충을 받아서 (미국) 추수감사절의 명절을 좋은 칠면조 고기로 즐긴 다음 날 다시 “크리스 마스에 귀향 “ 이라는 모토로 공세 (Home by Christmas Offensive) 를 펼쳤다.

첫날은 전 전선에서 순조롭게 북상하였으나, 그 다음 날 미리 그물망을 치고 기다리고 있든 중공군에게 서부 전선 유엔군의 최 우측으로 북상하든 한국군 부대 (제 2 군단) 가 먼저 당하고, 한국군 부대는 모든 기록을 다 잃어버려서 자세한 손실 기록도 없고, 백 선엽 장군에 의하면 군단 자체가 해산되었다니 그 규모를 오직 추측할 따름이다. 그 다음으로 한국군 2 군단 좌측에서 북상하든 미 9 군단의 2 사단은 먼저 앞에 막는 중공군의 강력한 반격을받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는데 마침 들어온 길 옆이 산골이고 그 속에 중공군이 꽉 들어차 포위하고 산골 길에 있는 미군을 사격해대자 아비규환이 되어 도망을치는데 트럭등 군용차들이 사격을 받아 나아갈 수 없게되자 뛰어내려 골짜기를 도보로 달아날 수 밖에 없었고 버려진 차량들은 장애물이되어 도피에 큰 방해가 되었다.

평안 북도 군우리에서 부터 순천까지 가는 산골짜기 도로가 약 10 Km 정도가 되었는데 미군들이 그 산골을 죽음의 계곡 (Death Valley ) 또는 인디안 태형 (Gauntlet) 길 이라부른다. 여기서 미군이 약 4천이 죽고 3 천여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사단장 카이저 장군은 뒤에 지휘책임을 물어 직위해제 되었다. 우리 언론이나 역사에 아무도 이 사실을 자세히 말하거나 기록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미군과 한국군의 혹독한 참패를 모르기 때문에 거의 다 된 통일을 놓쳐버렸다고 애통해하고 있다. 현장 상황이 좋지 않을 것을 뒤늦게 깨달은 맥아더는 8 군 사령관 워커 중장과 10군단장 아몬드 소장을 동경으로 불러 그들의 전선 상황 브리핑을 듣고 일단 8군은 청천강 이남으로 후퇴하고 10 군단은 흥남으로 철수하도록 결정했다 (1950 년 11 월 29 일).

중화기도 없는 중공군에 참패 당한 맥아더 장군

초기에 개입한 중공군은 가장 큰 화기가 휴대해서 운반할 수 있는 박격포에 기관총 정도이고, 개인 화기로는 군인 일인당 소총도 다 가지지 못하고 전위병은 막대기 수류탄을 가지고 적군 (국군과 유엔군) 에 다가가서 집어던지는 수류탄 투척병들이었는데, 이들에게 어이 없게 당한 것은 전적으로 맥아더의 적의 전략적 목적 오판과 과 적군수를 과소 평가한 때문이며 또한 그들의 전술을 전혀 몰랐다는 점이다.그 당시 미국 장군 가운데 제 2차 대전시 유럽 전선의 아이젠하워와 아울러 태평양 전선의 맥아더가 쌍벽을 이뤘는데, 독일이나 일본보다 더 형편 없이 약한 중공군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겠다. 어느 책에서는 맥아더가 단순히 삼단 론법을 적용하여, 중국군이 일본군보다 약했고, 일본군은 미군에 약했으니까, 당연히 중공군은 미군 보다 훨씬 약하다는 결론을 내고 얕잡아 보았다고 설명했다.
중화기가 없고, 공군이 전혀 없었든 중공군은 지형을 잘 활용하여, 기습, 우회침투, 야습, 후방 교란, 역 V 자 ( 八字) 큰 자루 포위 작전을 사용하였고, 특히 척후병들의 우수한 전투 지경선 (부대단위의 경계선) 파악 능력으로 적 주공의 정면과 부닥치지 않고 지경선 쪽으로 파고 들어 왔다.

손자 병법 101도 몰라서 맥아더 장군이 당했다

쉽게 말해서 맥아더는 클라우제비츠 (Clausewitz) 의 전쟁론에 정통했을지 모르지만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 백승” 이라는 손자 병법 (孫子兵法) 101도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당시 중공군과 전투 경험이 있었든 국부군 장교 몇 명을 장개석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대려와서 그들의 조언을 들었드라면 참화를 예방은 못했드라도 적어도 피해는 줄일 수는 있었을 터인데… (여담이지만, 만주에서 군인 생활을했든 정 일권, 백선엽등이일찍이 미군 장성들의 눈에들어 일취월장하게된 것으로 보인다.)

일단 청천강으로 후퇴한 미군은 중공군이 보급부족으로 더이상 뒤를 쫓지 않았으나,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12 월 3일 북한을 포기하고 유엔군의 38선 까지 후퇴를 결정해, 못 가져갈 보급품은 불태우고 약 20여일 동안 전투도 없이 190 Km (120 마일) 를 후퇴해서 미군 사상 최대의 후퇴라 불리게 되었다. 그 당시 라디오 뉴스 시간에 ”국군과 유엔군은 오늘도 작전상 후퇴” 를 거듭했다는 발표가 지금도 귀에 선하다.

트루만 대통령의 핵 사용 위협

중공의 참전과 미군의 예상 못한 큰 인명 피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기자 회견에서 (1950 년 11 월 30 일) 트루만 대통령은 “우리가 가진 모든 무력 자원을 활용해서 중공의 공세를 막겠다” 는 말이 떨어지자 말자 어느 기자가 “그럼 원자탄도 사용한다는 뜻이냐” 고 묻자, 트루만은 다시 모든 것이 포함된다고 하여 원자탄 사용도 불사한다고 비춰지자, 유럽의 미국 동맹국등이 제 3차 대전이 나면, 나치 독일을 무찌른 쏘련이 그당시 동독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제 3차 대전이 일어난다면, 영국 프랑스등 서방 국가들이담박에 쏘련제 T-34 탱크에 짖 밟히고 영국은 쏘련의 공습에서 안전할 수 없다고 생각되어 영국 의회에서 크게 논쟁이 벌어져서 애틀리 수상이 자신이 워싱턴에 가서 트루만을 만나서 진의가 무었인지 확인하겠다약속하고 즉시 대서양을 날아가서 트루만을 만났다 (1950 년 12 월 4 일).

트루만 * 애틀리 회담

그는 트루만을 만나서 제일성이 “한국전 지휘 총책임자는 당신 (트루만)이요 아니면, 현지 사령관 맥아더요”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트루만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질문을 쏘아붙였다. 그로부터 4 박 5 일간 만나서 유럽 동맹국의 우려를 전하고 토의해서 다음과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첫재: 한국전을 국지전으로 제한한다. 둘째: 아시아보다 유럽의 방위를 우선한다 (Europe First). 셋째: 한국 무력 통일 방침을 포기한다. 넷째: 군사적 강세에서 무력 사용 정지 (휴전) 을 달성한다. 다섯째: 핵을 사용해야할 필요가 있을 때는 먼저 영국과 상의한다.

트루만 * 애틀리 합의의 주요성

이 선언은 남북 분단을 가져온 얄타 (Yalta) 회담 이후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한 최대의 국제 협약이다. 이점을 아무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알고 있는 소수는 입을 봉하고 말하지 못하고 있다. 비록 조약이 아니드라도 강대국간의 선언 또는 협약등이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것은 큐바 미사일 사태 해결 타협이 웅변으로 말해준다. 즉 그 때 쏘련이 큐바에서 미사일을 철거하는 댓가로 미국으로부터 큐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는데, 그 이후로 바로 코 밑에 있는 큐바를 미국이 50 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약속을 지켜서 눈에 가시 같지만, 손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1950 년 12 월 8일 발표된 선언하에 우리가 휴전선을 경계로 60 여년이 지나도록 트루만-애틀리 선언의 틀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이 선언 덕분에 첫째, 중국으로 전선이 확대 되지 않아서세계 대전을 방지했고, 둘째, 휴전을 막무가내로 반대한 맥아더는 다음 해 4월에 파직 송환당하고, 세째로는 아쉽지만 무력 통일로 가지 않고, 네째로 한 반도에 휴전이 달성되어 완전한 평화는 아니드라도 평화가 정착되어 적어도 남한만은 경제적 번영을 이룩할 수 있게되었다.

애틀리 수상으로부터 무안을 당한 트루만 대통령은 맥아더가 함부로 미국의 전쟁 수행 정책에 대해 대외적으로 발표하지 못하도록 합참을 통해서 맥아더가 대외 관계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기 전에 외교 문제는 국무 장관, 국방 문제는 국방 장관의 사전 허가를 먼저 받은 다음에 발표하도록하고 사본을 반드시 백악관에 먼저 제출하도록 합참의장 브래들리 장군을 통해 지시했다. ( 1950 년 12 월 6일: JCS 98134 )

입이 열개가 있어도 업신여기든 중공군에 당한 참패에대해 변명할 여지가 없겠건만, 그는 워싱턴이 자신에게 증원군을 보내지 않고, 한 팔을 뒤로 묶어 두었기 때문이라며,책임질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이 만주 폭격, 국부군의 본토 수복, 한국전쟁에 국부군 사용, 그리고, 한반도에 핵 폭탄 사용을 주장했다. 그는 잘한 것은 자기 공로요, 잘못되는 것은 모두 남탓만했다.

트루만 대통령의 휴전안을 뭉게고 맥아더는 독자적 최후 통첩 발송[/b]

크리스마스 직전에 워커 8군 사령관이 교통 사고로 사망하자, 당시 육군 참모차장이든 리지웨이 중장을 그의 후임으로 보냈다. 서울을 다시 내주고 (1951 년 1 월 4일) 평택선까지 내려간 유엔군을그는 더 이상 후퇴를 못하게하고, 다시 차근차근 북상을시도해서 서울도 다시 찾고, 38 선을 눈 앞에둔 상황에서 트루만 대통령은 중공에 휴전을 제의하는 문안을 국무부에 지시하여 국무부와 국방부 그리고, 합참이 문안을 다듬으면서 , 맥아더 장군에게도 그 문안을 검토하도록 보냈는데, 그는 그 것을 보고 (1951 년 3 월 20 일) 본국 정부가 한국 전쟁을 휴전으로 끝내려는데 반발해서, 공산군 최고 사령관이 자신에게 항복하도록 요구 하고, 그러지 않으면 중국 본토로 전선을 확대한다는 사실상 최후통첩을 발송했다 . (1950 년 3월 23 일)

이로서, 자신이 제의하려는 휴전안을 백지화 시킨데 대해 극분한 트루만 대통령은 맥아더를 해임시키기 로 작심하고 역사적 전례를 들쳐 보았다. 즉 종전에 대통령과 군 사령관 사이에 이견이 있을 때, 전임 대통령들이 취한 행적을 살펴 보았는데, 폴크 대통령이 단호한 행동을 취하고 그 결정 사항을 의회에 천명하는 용기를 보여 준 것이 마음이들어서 자신도 맥아더 해임 문제를 단호히 처결할 결심을했다.

[b]마틴 의원이 맥아더의 편지 의회서 낭독

그런든 참에, 마침 4 월 5일 공화당 하원 원내 총무 마틴 의원이 자신이 보낸 서신에 대한 맥아더장군의 답신을 의회에서 낭독했는데, 그 편지에서 마틴의원이 제시한 국부군을 사용하여 중국 본토 수복을 위한 제 2 전선 구상에 맥아더 장군이 찬동을 표시하며 그가 애송하는 구절인 “전쟁에서 승리이외에 대안은 없다”를 되뇌였다.

트루만 대통령은 측근 고위 참모들에게 그의 의견을 제시하고 그 동안 합참과 맥아더 장군간에 오고간 서신을 주고 검토해서 다음날 다시 모여 회합한 결과 참석자 모두 해직에 찬성했다. (1951 년 4 월 9 일) 또한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합참 구성원들의 동의도 얻었다.

트루만 군기 잡으려고 맥아더 파면 소환

이에 트루만 대통령은 분노가 극도에 달해 맥아더에게 자진 사퇴의 명분을 주지 않겠다면서 “그 개 xx(SOB) 에게 사표를 낼 기회를 준다는 것은 말이 않되고, 내가 그의 목을 짤라 (파면시켜) 야 한다고” 그의 부관 조지 엘시에게 단호히 말했다. 혹시 회의내역이 미리 새어 나가서 맥아더가 먼저 사표를 낼까 염려 되어서, (백악관 교환수들이 한밤중에 출입 기자들에게 전화를해서 백악관으로불러서) 기자 회견을 밤 늦게 열어서 그의 해임을 전격 발표했다. (1951 년 4 월 11 일 새벽 1 시) 트루만 대통령이 내세운 파면 사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정한 대외 정책과 한국전 수행지침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고 (Insubordination), 둘째, 이 차제에 군의 통수권은 문민 우선인 전통을 재대로 살리며, 셋째, 한국전을 국지화하여 (맥아더가 저지를지모르는) 제3차 대전으로의 비화를 막으려했다.
맥아더의 파면과 본국 호출을 당한 것을 보고, 국부 이승만 박사는 “그 분 (맥아더 장군)이 나를 가장 잘 이해해줬다”고 못내 아쉬워했다. 왜냐하면 그의 가장 큰 빽이 나둥그러졌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 트루만이 휴전을 제의 하려했다는 사실이 밝혀 지지 않았기 때문에 마틴의원의 맥아더 편지 낭독 사건이 맥아더 파면 직접 원인으로 알려 졌지만, 실제로는 트루만의 휴전 제안을 뭉게버리고 자신이 내보낸 최후 통첩이 주 원인이다.

브래들리 합참의장: “ 한국전은 잘못된 전쟁”

파면당해 본국에 소환된 맥아더는 마치 개선 장군이나 되는듯이 행동했다. (뉴욕 맨하탄에서 5백여만명이 마중한 티커 테입 환영등) . 양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면서 “전쟁에서 승리이외의 대안은 없다” 고 자기 주장을 폈으나, 바로 그에게 갈채를 보낸 의회에서 증언하러 나온, 합찹 의장 브래들리 장군은, 지금 치루고 있는 한국전쟁은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적과 싸우는 잘못된 전쟁”이라고 지적했다. 즉 미국은 유럽 (장소) 에서, 더 적절한 시기에, 쏘련을 상대로 (주적) 해서 큰 싸움을 치뤄야지 현재처럼, 한반도에서 중국과 싸움을 치루는 것은 시기, 장소, 주적이 다 잘못 선택된 전쟁이므로 제한전으로 빨리 끝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그 이후로 트루만 대통령과 합참의 결정이 올았다는 점이 널리 알려져서 맥아더는 입을 다물었고, 세간의 뇌리에서 사라져 뉴욕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여생을 마쳤다.

트루만의 휴전 노력

맥아더에 의해 트루만 대통령의 휴전 제안이 불발로 그쳤으나, 그는 그것으로 휴전 노력을 그친 것이 아니라, 애치슨 국무 장관에 밀명을 내려 공산권과 접촉해 휴전을 추진하도록 지시했고, 애치슨 장관은 국무부의 쏘련통이지만 당시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연구중이든 대쏘 봉쇄 정책의 입안자 케넌(Kennan) 씨에게 쏘련의 유엔 대사 말리크를 접촉해서 휴전회담을 추진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케넌씨는주 쏘련 대사관 (모스코바)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말리크와 선이 닿아서 그의 롱 아이런드 (Long Island) 별장에서 만나서 그를 설득하여 휴전 제의를하게하여 말리크 대표가 유엔 평화 관계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휴전을 한국전 교전 당사자들에게 제의하였고 ( 1951 년 6 월 23일 ) 그 이후는 다 잘알려진 사실이라 생략한다. 이면 교섭이 있었다는 것을 당시에 발표하지 않아서 쏘련이 먼저 휴전을 제의한 것으로 알려 졌으나, 인기 없는 전쟁에 미국의 젊은이들이 계속 희생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결자해지의 뜻으로 트루만 대통령이 휴전 교섭을 강력히 추진했다.

맥아더의 알려지지 않은 엉뚱한 속셈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맥아더는 트루만 대통령이 합참을 통해 내리는 전쟁 수행 지시를 따르는 것을 한 걸음 넘어서 한국전에서 북한군을 궤멸시켜 한반도의 통일을 이루는데 그치지 않고 (이승만 박사에게 주는 선물), 내친 김에 중국 수복을 꾀했다 (장 개석 총통에게 주는 선물) 는 증거가 속속들이 들어났다.

첫번째로는 전쟁난지 얼마 되지 않은1950 년 7 월 말에 대만에 가서 장개석 총통을 만나 회담을 했는데 갔다와서, 국부군 33,000 명을 한국전에 참가시키자고 주장했고, 미국 정부가 반대 했지만, 계속하여 틈이 날 때마다 이를 되풀이하였으며, 회담이후로 두 사람 사이에 틀림 없이 모종의 묵계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했다.

둘째로, 북상시 한중 국경 5 마일 이내는 한국군이외에 접근하지 말도록한 합참의 지시를 어기며 미군도 제약 없이 작전을 해야한다는 주장을 해서, 중공과 직접적 충돌을 야기시키려한 면목이 많이 발견된다.

세째로, 맥아더 장군이 웨이크 섬 (Wake Island) 으로 트루만 대통령을 만나러 가기 전에 이 승만 대통령과 중공의 한국전 개입 가능성을 희석시키도록 하자는 데 합의하는 서신을 직접 읽어 봤다는 정일권 장군 (후에 총리 역임) 의 회고록에 적힌 사실은 신빙성이 매우 높다고 사료 되며, 정 총리가 없었든 일을 일부러 만들어 두분에 험집을 입히려 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네째로는, 웨이크 섬에서는 중공의 개입 가능성이 거의 없을 것으로 말한 맥아더 장군은 정작 중공군이 개입하자 처음엔 묵살하다가, 소총도 한자루씩 가지지 못하고 당시 최대의 화기라고는 박격포 밖에 없든 스스로 보잘 것 없어보였든 중공군에게 미군이 평안 북도 산골짜기에서 미국 역사상 최대의 참화를 당하자, 총 사령관으로서 책임감은 느끼지 못하고, “38 선을 넘을 때는, 중공의 개입을 가정했어야 했다”고 남의 일인양 말을 바꿨다.

다섯째로, 미국의 극비 감청 기관 (National Security Agency) 이 동경 근교(아츠키 공군 기지) 에서 적성 국가 (주로 중공)의 교신을 감청할 뿐만 아니라, 일본에 있는 우방국의 외교 사절이 본국과 주고 받는 통신까지 감청하는데, 1951 년 3 월 중에 스페인과 폴투갈 대사관에서 맥아더 장군이 그들에게 한국전쟁을 중국으로 확대할 것이라고 확언했다는 보고문을 본국에 보낸 것을 감청으로 잡아냈으며, 이 보고문들이 트루만 대통령에게까지 알려져서 , 트루만이 그 보고서를 보고 책상을 치면서, “이것은 명백한 배신행위이다” 라고 소리질렀다 한다.
이상은 정황 증거라 하겠으나, 필자는 맥아더 장군이 실제로 중국 본토로 전쟁을 파급시키려는 실제 행위를 포착하여 한국 미디어에 최초로 뉴시스 통신을 통해서 최근에 발표하였다.

즉, 여섯번째로, 1951 년 3 월 초에 친 장개석 파인 공화당 원내 총무 마틴의원이 맥아더에게 “장개석 군대 (국부군) 를 활용하여 중국 본토에 제 2 전선을 개설하는 것에 대한 그의 의견을 물었는데, 맥아더 장군은 그에 대한 답신에서 귀하의 의견은 논리에도 어긋나지 않고 전통에 비춰도 틀린 점이 없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서 그는 또다시 “전쟁에서 승리 이외에 대안은 없다”고 자기 주장을 다시 한번 펼쳤다.

마침, 마틴 의원이 맥아더 장군의 답신을 의회에서 읽어서 (4 월 5 일), 그러지 않아도 파면을 벼르고 있든 트루만 대통령은 그를 파직할 마음을 굳혔고, 그러한 반면에, 동경의 맥아더 장군은 마틴 의원이 자신의 편지를 의회에서 낭독했다는 것을 알고 이 것이 대 중공 본토 수복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신호로 받아들여서, “중공이 대만 상륙 작전을 계획한다”는 있지도 않은 사실을 구실로, 4 월 7 일 저녁 에 한국 동해안에서 작전을 마친 제 7 함대의 주력 신속 제 77 기동대 (항공모함 박서, 항공모함 필리핀 해 와 호위함 포함) 를 대만 해협 에 보내 4 월 11일 11 시부터 중국 본토 동해안 가까이 에서 “공중 무력 시위 퍼레이드” 를실시하고, 동시에 구축함 보일 호 (USS John A. Bole) 를 샨토우 항구 (중국 광동성 동부) 3 마일 (4.8 Km) 까지 접근하여 무력 시위를하자, 중공은 즉시 자국 영해를 침범한 적함을 47 척의 무장 동력 정크 선으로 포위하고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이 때 공중 퍼레이드를 벌이든 미 함재기들이 대치중인 상공을 날아 와서 위협하며, 샨토우항구 근처까지 가서 무력 시위를 했다,

맥아더는 구축함 보일 호와 250 여명의 승무원들을 죽거나 생포되는 위험속으로 내몰고 중공의 무력 도발을 유도하려고 시도한 역역한 증거를 남겼다. 다행히도 쌍방이 자제하여 무력 충돌 없이 기동대가 물러나면서 사태가 수습되었는데, 그 무렵 확전을 위해 발버둥치든 맥아더 장군은 트루만 대통령이 보낸 파면 소환 통보를 받았다. ( 동경 시간 하오 3 시: 중국 시간 하오 2시) 아주 극적인 장면이 연출 되었으나, 최근에야 이 사실이 당시 보일호에 탔든 승무원들이 청원을하여 동 구축함의 항해 일지를 찾아내서 세간에 알려졌다.

맥아더는 단순히 중국과 의 결전에 열을 올렸으나, 당시 중공은 쏘련과 상호 방위 조약을 맺은 상태이기 때문에 중공 (본토)이 미국의 공격을 받게 되면 쏘련이 자동 개입하여 중공을 방어해야 했기 때문에 미 합참과 트루만 대통령은 중공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쏘련과의 접전은 곧 제 3차 대전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이를 피하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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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byun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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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Re: 시월의 유혹
on: November 4, 2015,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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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환 동문님의 글은 우리가 듣고 지내 온 표면의 역사적 인식 뒤안길에 있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들이어서 매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맥아더의 '승리' 지향적 옹고집과 트루먼의 고압적인 자존심이 충돌하여 수많은
군 병력이 소모된것은 참으로 역사적인 비극이었다 하겠습니다. 중공군 인해전술의
위험을 맥아더가 의도적으로 간과한 것이라면 몇년 전 맥아더 동상을 없애자고
떼를 쓴 편협한 무리들을 마냥 매도 할 수도 없겠지만 그러나 맥아더가 있어
'제주도 대한민국'이 되는 비운을 벗어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기는 남북이 갈라진것이 강대국들의 이해 타산에 의한 것이고, 그러한 한반도의
비극은 오늘날도 여전히 존재 하고 있으니까요. 거기에 일본이 아직 끼어 있는것도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구요.

혹자는 맥아더의 퇴진이 대한민국 통일의 유일한 기회를 앗아 갔다고도 하고
혹자는 그나마 남한 만이라도 온전한 민주 국가로 발돋음 해 오늘의 번영이
있지 않았느냐 하기도 합니다.

혹은 어떤이들은 그 때 압록강까지 접수 했다 해도 수준 이하의 역대 정치 행태로는
남한 내 좌편향의 창궐과 공산 치하에서 다져진 북녘의 주체사상에 녹아 버려 지금쯤은
'대한인민공화국' 같은 기형아가 되어 있을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김동문님의 글은 '맥아더와 트루먼의 감정싸움에 등 터진 새우'에 촛점이 맞추어진
느낌입니다만 그때의 상황이 60여년이 흐른 지금의 대한민국에 어떤 역사적 의미가
부여 되었는지, 객관적인 인과 관계의 유추가 있었으면 더욱 흥미롭겠습니다.

문병길

teddy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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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Re: 시월의 유혹
on: November 4, 2015,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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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문 동문께서 한국에 계시면서 졸고에 훌륭한 평을 하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알리고져한 것은 그 글 속에 다 있읍니다. (다시 요약 정리합니다.)

1. 맥아더의 기상에 말려들어 중공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트루만 대통령이 북진을 허용하였으나

2. "인민 지원군" 이라는 명목으로 중공군이 10 월 19 일에 이미 북한의 평안 북도 산간에 은익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3. 맥아더 장군의 진군 명령에 따라 다시 올라 가다, 한국군이 먼저 당하고 (1950 년 10 월 25 일) 미군도 당했으나,

4. 중공군이 보급이 딸려서 더 진군하지 않고 다시 산간으로 은폐하니까,

5. 맥아더가 중공군의 목표와 규모를 오판하여 다시 진군 명령을 내렸으며, 한국군 2 군단이 대 타격을 입고 종래 군단 자체가 해체됨(백 선엽 장군 증언),

6. 미 제 2 사단이 죽음의 계곡 10 Km (군우리 - 순천 간의 협곡) 사이에서 약 4,000 명이 죽고 3,000 몀이 생포되는 "혹독한" 참패를 당했고 사단장도 직위 해제 되었읍니다. 이는 미국 자료와 책에서는 다 나와 있으나, 우리 기록에는 없읍니다. 마치 임진난 때 왜놈들이 죽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산 사람의 코까지 베어 갔으나 초 중고등에서 뿐만아니라 대학을 나올 때까지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안 것과 같이 중공군 개입으로 유엔군과 한국군이 엄청나게 당했으나 우리들은 거의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 때 트루만이 맥아더를 잘라서 통일이 안되었다고 안타까워 하고 있읍니다.

7. 중공군을 막기위해 트루만 대통령이 모든 무기를 다 사용한다고 하여 (1950 년 11 월 30 일) 원자탄까지 사용하게 될 것을 염려한 영국의 애틀리 수상이 워싱턴으로 날아와 (12 월 4일) 트르만과 협의하여 트루만*애틀리 공동선언을 발표했는데, 그들은 한국전을 제한전쟁으로 한반도에 국한하고, 무력 통일을 포기하고, 힘의 우위에서 휴전을 달성하며, 원자탄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영국과 협의한다고 했읍니다.

8. 현재 우리는 트루만 *애틀리 공동선언의 틀 안에서 지내고 있읍니다.

9. 전쟁 확대를 획책하고 트루만의 휴전제안을 방해한 맥아더 장군은 파면되어 본국에 소환되었고, 트루만 대통령이 애치슨 국무 장관에게 명해서 휴전 교섭을하도록 하여 케난이 쏘련의 유엔 대표 말리크와 비밀리에 만나서 휴전 회담이 시작되도록 하였읍니다. 즉 휴전 회담 시작은 트루만의 기획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말리크가 휴전을 먼저 제의한 것으로 되어 있읍니다)

10. 다시 말하자면, 제한 전쟁을 하기로 결정한 이상 전투를 계속하면 인명 피해만 가중되므로 휴전으로 나서게 됩니다.

11. 또한, 전쟁을 계속하면, 쏘련도 개입할 챈스가 많기 때문에 3차 세계 대전을 막기 위해 트루만이 내린 결단입니다.

12. 지정학적으로 미군 (미국)이 중국 과 쏘련 국경에 근접하는 것을 그들이 용인하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현 분단 상황이 적어도 100 년은 더 연장될 것으로 봅니다. 우리는 8.15 때 부터 지금까지 벌써 70 년을 갈라져서 살아 왔읍니다.

13. 오는 토요일 (11 월 6 일) 시 주석과 마 총통이 중공 수립후 처음으로 만난다고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중국도 분단 국가 입니다. 우리도 중국의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읍니다. 홍콩을 바로 밀고 가서 뺐을 수 있었지만 99 년간의 조차 기간 만기까지 기다리고, 또 50 년간 더 자치를 허용하였읍니다.

14. 지나간 일을 가지고 안타깝게 생각해봤자 정신 건강만 해로울 따름입니다. 인내를 가지고, 때가 오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읍니다.

요약을 했지만, 중요한 말은 다 들어 있읍니다. 한줄 한줄을 음미하시기 바랍니다.
읽어 주시는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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