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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Topic: 4.19혁명 현재 진행형
Hongm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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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April 20, 2016,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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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현재 진행형

이선명/US News 주필

“긴 칠흑과 같은 밤이다. 어린 김주열의 참시를 보라!
그것은 바로 전제주의 전횡의 발가벗은 나상(裸像)이다.
저들을 보라! 비굴하게도 위하와 폭력으로 우리들을 대하려 한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임을 자랑한다.”
매년 4월이 오면 나의 기억은 나의 학창시절, 꿈과 낭만이 흐르던 서울대학교 문리대 구 동숭동 캠퍼스를 헤맨다. 교정에는 곳곳에 진달래와
개나리며 라일락꽃이 화사한 자태를 뽐내고, 플라타나스가 봄의 싱그러움을 머금고 대학로를 따라 흐르는 우리가 ‘세느강’이라고 부르던 개천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교정이 한폭의 아름다운 세잔느의 풍경화처럼 눈 앞에 펼쳐진다.
1960년 4월 초순. 모처럼 자유와 낭만을 만끽하던 대학 1학년을 보낸 우리는 이제 2학년 새 학기를 맞아 본격적인 '수업'을 다짐하며 등교한 어느 날 "봄이 제 오신" 그 화창한 캠퍼스에 때 아닌 비보(悲報)가 날아들었다. 우리들의 가슴에 일순 피가 솟구쳐 올랐다. 마산에서 타전된 AP통신의 이 보도는 짤막했다.
“낚시꾼은 굉장히 큰 놈이 물린거라고 생각하고 기분좋게 낚싯줄을 당겼다. 그러나 얼마 후 수면에 떠오른 물체를 보고 그는 그만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몸이 굳어져버렸다. 낚싯줄 끝에 매달려 올라온 물체는 다름 아닌 김주열의 시체였다.”
바로 3주 전 3월15일에 실시된 정부통령선거는 원천적 부정선거였다. 선거당일 전국 각지에서는 자유당의 선거부정을 규탄하는 항의가 빗발치듯 일어났다. 마산의 민주시민들도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이 시위대열에서 실종된 마산 상고 1년생 김주열의 참시(斬屍)가 낚싯줄에 걸려 올라온 것이다.
이 짧은 비보는 민중들의 가슴 속 깊이 농축된 잇 이승만 독재와 부정부패에 대한 울분의 화산을 폭발시켰다.
남해의 항구 도시 마산에서 솟아오른 불길은 삽시간에 전국을 덮쳤다. 김주열군의 희생이 점화한 한 점의 불씨는 요원(燎原)의 들불이 되어 소백산맥을 타고 북으로북으로 번져나갔다. 이 불길은 4월 15일에는호남의 고도(古都) 전주를 휩쓸었고, 이틀 후에는 서울을 덮쳤다. 4월18일에는 고대가 일어섰다. 고대생들은 안암동에서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여 연좌농성을 벌렸다. 이들의 해산 길은 당시 경무대의 지실를 받은 정치깡패들의 습격으로 선혈(鮮血)이 낭자했다.
드디어 4.19 혁명의 아침이 밝아왔다. 우리는 더 이상 좌시(坐視)할 수 없었다.
이날은 화창한 봄날의 해맑은 표정과는 달리 처연한 분위기가 동숭동 문리대 교정을 무겁게내리 누르고있었다. 우리는 등사판으로 민 선언문을 낭독했다.
“긴 칠흑과 같은 밤이다. 어린 김주열의 참시를 보라!
그것은 바로 전제주의 전횡의 발가벗은 나상(裸像)이다.
저들을 보라! 비굴하게도 위하와 폭력으로 우리들을 대하려 한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임을 자랑한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 정의, 진리의 서울대 기치를 앞세워 스크럼을 짜고 교정을나섰다.
국회의사당과 중앙청 및 경무대 입구까지 진출한 이 날의 시위에는 서울대를 비롯, 고대, 연대등 서울의 거의 모든 대학이 참가했고, 대광중고를 비롯하여 어린 중고생을 포함하여 십만을 헤아리는 학생들이 참가했다. 오후에는 시민들까지 가세하여 서울일원은 혁명의 불길이 뜨겁게 타올랐다. 그리고광주를비롯,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에 뛰쳐나와 (민주주의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이승만 독재정권은 이 민주시위를 “공산당의 사주에 의한 폭동”이라고 주장하고 경찰을 동원하여 시위군중에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이 날의 발포로 1백15명이 숨지고 1천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휴교령이 내렸다.
그러나 드높게 치솟아오른 혁명의 불길이 계엄령으로 자즈러들 수는 없었다. 죽음인들 우리의 분노를, 그리고 자유, 정의, 민주쟁취의 다짐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계엄령에도 시위는 계속되었고, 26일앤 대학교수들이 거리에 뛰쳐나오 자 사태를 예의 주시하던 미국은 뒤늦게 이 사악한 독재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이승만은 하야(下野) 이 외의 다른 선택이 없었다.
자유당정권의 몰락은 파쇼 전제주의, 민족 분단주의, 사대매판주의 및 부정부패에 대한 조종(弔鐘)이자 민주주의, 민족자주 및 민족통일 의지의 승전고(勝戰鼓)였다.
세계가 한국인의 민주주의에 대한 결의에, 그리고 그 결의를 실천하는 용기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국에 민주주의가 꽃피기를 바라기 보다는 쓰레기통에 장미가 피기를 기다리는 편이 낫다”고 악담을 퍼붓던 영국의언론이 먼저 경의를 표했다. 런던타임스는 “마치 이 나라가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을 맞는 날과 같았다. 스스로 자유를 찾은 것이다” 라고격찬했다.
동학혁명, 3.1독립선언과 함께 민족사에 자랑스런 이정표를 세운이 4월혁명은, 그러나 이듬해 5월16일 미명 박정희 휘하 특공대의 한강 도강(渡江)으로 좌절되었다.
그러나 4.19정신은 그후 30년에 걸친 군사정권과의 대결의 고비마다, 그리고 광주민주항쟁, 6월항쟁등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결전에 동기를 부여했으며, 마침내 군사독재를 굴복시킨 원천적 동력이었다.
4.19혁명의 위대성은 우리겨레가 스스로의 역량으로 민주주의의 지평을 열어제낀 데 있다. 기미년 3.1독립운동이 자주의 선언이었다면, 4.19는 바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선언이었다. 그리고 그 것은 8.15해방 후 남북단일정부를 세우려던 김구선생을 비롯한 민족세력의 좌절로 고착된 분단을 깨고 통일을 성취하는 것이 민족의 정의를 바로세우는 작업이라는 진리를 일깨워준 경종(警鐘)이었다.
최근 유신잔재 세력에 의한 역사의 역류(逆流) 속에 극단적 매카시즘의 발호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민중이 통일대장정(大長程)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바로 4.19정신이 한국민중의 심장에 내연되고있 기 때문이다.
따라서 4월혁명의 봉화(烽火)는 우리민족이 통일을 성취하고 정의와 자주에 입각한 진정한 해방을 실현하는 그 날까지 우리의 발걸음을 밝혀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Editor-USNews@gmail.com)

moonbyun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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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Re: 4.19혁명 현재 진행형
on: April 22, 2016,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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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명 주필님의 글 감동으로 읽었습니다.

잊혀지고 있는 4,19의 기억을 되살리고 젊은 세대들에게 4.19의 의미를 되새겨
주는 좋은 글입니다.

4.19와 관련 해 나름대로 긍지가 있는 저로서 한가지 첨언코자 하는 것은 본문 중,

국회의사당과 중앙청 및 경무대 입구까지 진출한 이 날의 시위에는
서울대를 비롯, 고대, 연대 등 서울의 거의 모든 대학이 참가했고, 대광중고를 비롯하여
어린 중고생을 포함하여 십만을 헤아리는 학생들이 참가했다.

는 주필님의 구절에 포함 된 '어린 중고생' 중에는 바리케이드를 목전에 둔 채, 고등학교
학생으로는 경무대 입구에 가장 깊숙이 접근 해 시위한 학교로 서울 혜화동의 동성고등학교
학생이 있었습니다. 경무대 입구의 철조망 바리케이드에 막혀 실랑이를 벌이던
문리대 대학생들의 후미에서 동성고 학생들은 질서 정연하게 대오를 갖추고 구호를 외치던 중
이열 횡대로 '무릎 쏴'와 '서서 쏴' 자세를 취한 경무대 경찰들이 지상에서 일정
높이로 실탄을 발사하기 시작 하였으며 걱정스러워 같이 따라 나섰던 체육선생님이
뛰지 말고 그 자리에 엎드려 있으라고 소리쳐 학생들은 대오를 흩트리지 않고 모두
엎드려 있었습니다.

경찰이 잠시 발포를 멈춘 사이 '골목으로 피하라'는 소리에 일어 나 보니 동성고교
학생들 앞 뒤로 도로는 텅 비어 있었으며 여기저기 총 맞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엎드려 있던 동성고등학교 학생들도 사상자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상자는 황급히 뛰다가 당한 대학생 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엎드려 있던 학생들이 다친 것을 보면 발포 경찰 중 총구를 내려 쏜 자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여하튼 몇 십 초인지 모르겠으나 경찰의 지속적인 발포 중 텅 빈
효자동 길 위에 유일무이하게 대오를 지어 엎드려 있던 동성고교 학생들을
경찰이 '배려'했던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골목으로 피신 한 다음 경찰의 지속적
발포는 다시 이어졌습니다. 듣기로는 대광고 학생들도 사상자가 많았다 합니다.

혜화동 로터리 교정에서 당시 거의 매일을 데모와 시위로 조용한 날이 없었던
동숭동 문리대 생들을 보면서 대학생들은 공부를 언제 하는가 고 생각을 해 보기도
했지만 동성은 썩어가는 정부에 대항하는 문리대 엘리트들의 열기를 가까이서 느끼는
일상이었습니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저의 오랜 일기가 있기에 여기 옮겨 보았습니다. 일기는
오직 본인만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신념을 갖고 써 내려간 저의 일기는 매
페이지 마다 스스로에게 하는 일상의 독백이기도 했습니다. 일기장 페이지를
채울 때 마다 밥풀로 종이 띠를 이겨 붙이고 도장까지 찍어 대는 괴벽을 발휘 하며,
일기를 써야 하루를 마감한듯한 편한 마음이 되기도 했고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아예
며칠이고 일기에 손을 대지 않아 일기가 주기도 되고 월기도 되곤 하였습니다.

저의 4.19 날자 일기를 새삼 읽어 보니 가장 4.19 학생 답지 못한 자화상이긴 하나 그 때
그 사회의 부조리를 질타 할 논리도 미흡하기 짝 없던 주제에 그나마 조그만 가슴 한
구석에 쌓인 부정부패에의 불만을 일기에 나열하기보다는 그때 그 순간 굳게 닫힌 교문을
밀고 나가는 급우들의 열기에 동참하며 흥분되었던 저를 솔직하게 표현하기에 바빴던 것
같습니다. 일기 속의 단기는 서기로 1960년이니 56년 지나면서 미국까지 따라온, 누렇게
바랜 일기 입니다만 4월 19일 저녁 아직도 콩닥거리는 가슴을 쓸어 안고 써 내려간 저의
필체가 혼란스러워 부끄럽기도 합니다.

여담입니다만, 독백하듯 혼자만의 망상을 마구 써 내린 후 밥풀로 봉인 하는 걸 깜박
잊은 저의 일기를 어쩌다 읽게 된 하숙 집 파출부 아가씨가 여드름투성이 하숙생 일기
속에서 그리도 처절하게 구겨지는 자기를 발견하고 대성통곡하는 바람에 하숙집주인한테
혼 줄 나기도 한 기억이 있습니다.

문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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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복사 분은 한 번 클릭 할 때마다 글씨가 커져 읽기 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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