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이승만 후계자로 조봉암 비밀지원"
죽산 조봉암
'조봉암 사형집행 막기위해 이승만정권에 줄기찬 압력'
뉴욕 노창현 = 이승만 정권이 간첩으로 몰아 사형을 집행한 조봉암(1898-1959) 전 진보당 당수 구명에 미국이 끈질긴 노력을 전개했으며, 조봉암을 이승만의 후계자로 지원한 사실이 23일 밝혀졌다.
오는 25일 '죽산' 조봉암선생 탄생 117주년을 앞두고 로스앤젤레스의 현대사연구가 김태환 하버드대남가주한인동창회장은 "이승만정권이 정치사법살인을 자행한 조봉암의 구명에 미국이 소극적이었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다. 미국은 조봉암을 이승만의 대안으로 생각했으며 사형을 막기 위해최선을 다했다"며 당시 다우링 주한미국대사가 본국에 보낸 보고서와 미 국무부내 고위간부들의 대화록을 제시했다.
그는 "미국은 자신들이 지원하는 '후진국(Client Country)'의 지도자가, 영향력을 벗어날 경우를 대비해 항상 대타를 키우고 있다. 한국에선 이승만과 조봉암이 바로 그러했다. 한국전쟁 중 북진통일을주장하고 반공포로석방에 독재까지 골치아픈 이승만정권의 교체를 위해 미국은 조봉암을 비밀리에지원했다. 무소속으로 2대 대선과 3대 대선에서 연속 출마할 수 있었던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고 분석했다.
1956년 5월15일 3대 대선에서 조봉암은 국민의료제도, 국가보장교육제도, 노동자들의 경영참여, 농촌 고리채 지불유예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23.8%의 표를 얻어 이승만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당시개표에서 노골적인 득표조작이 없었다면 조봉암이 당선됐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승만정권은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낸 조봉암을 1958년 1월 간첩혐의로 몰아체포했다. 1심은 징역5년을 선고했지만 고법과 대법원이 국가보안법 파동 끝에 소급입법을 통해, 사형선고를 내렸고 대법원 재심청구가 기각된 바로 다음날 교수형이 집행됐다.
김태환회장은 "조봉암의 체포와 사형까지 모든게 조작이었다. 1심에서 5년형이 나오자 입법부에서는 '국가보안법개정'이라는 소급입법을 제정하고 행정부는 정치 깡패를 동원, 협박해 합법을 가장한정치적 암살을 자행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승만은 최대의 정적을 제거했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그것이 하야를 부채질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몇달 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비밀 특사를 보내서 퇴진을 권고했고 4.19 혁명이 일어나자 하야를 강권, CIA 비행기를 태워 하와이로 보내는 축출작전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비밀해제된 미 국무부 자료에 따르면 미국 정부와 다울링 대사는 이승만정권이 올가미를 씌운 조봉암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울링 대사는 조봉암의 체포와 진보당 간부의 검거를 본국에 보고하면서 "이 것은 그 해 5월 2일에있을 민의원 선거에 앞선 야당탄압의 일환으로 보인다.. 한국정부가 발표한 혐의내용은 '설득력이 약하다(flimsy)'..자체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한국민들은 혐의 사실을 신뢰하지 않는다..진보당 사건은 지난 1949년(국회 프락치 사건)과 1952년(부산정치파동)의 회귀로 판단되며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위해 종전 수법을 다시 써먹으려는 전조"라고 분석했다.
미 국무부는 그해 6월 20일 서울대사관에 발송한 전문 제799호에서 "만일 (한국 정부가) 조봉암에대한 사형을 집행하게 된다면 공산주의자들에게 정말 재수좋은 선전거리를 제공해주는 셈이다. 그것(조의 사형)은 비동맹국들뿐만 아니라, 자유세계의 눈으로 봤을 때도 우리(미국 정부)가 한국에서이뤄놓은 정치적 발전과 성숙함을 완전히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했다.
국무부는 다울링 대사에게 "즉시 영향력있는 한국 정부 요인을 비공식적으로 만나서 미국 정부가 심각히 우려한다(serious concern)는 점을 전달해서 조봉암이 사형 판결 또는 처형을 피하도록 강구하라"는 훈령을 보냈다.
다울링 대사는 6월23일 당시 자유당 2인자인 이기붕 국회의장을 만나 미 정부의 우려의 뜻을 전달했고 이기붕은 사형 판결은 피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7월2일 서울지법에서 5년형을 받은 조봉암이 10월25일 고등법원에서 사형 언도를 받자, 국무부는다울링 대사에게 한국 정부 요로와 접촉하여 조봉암 처형을 경고하라는 훈령을 다시 내렸다. 다울링대사가 이기붕의장을 만나서 본국 정부의 우려를 다시 한번 전하자, 이의장은 대법원에서 고법의 선고가 번복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1959년 2월 27일 고등법원 판결을 추인해서 사형 판결을 내렸고 재심 청구가 기각된 다음날인(1959년) 7월31일 처형됐다.
미국정부는 전격적인 사형 집행을 예상치 못한 것으로 보인다. 국무부 본부의 지시에 따라 다울링대사는 8월3일 조정환 외무부 장관을 만나 "조봉암을 처형하는 갑작스럽고도 대단히 의심스러운 결정을 한데 대해 미국 정부가 당혹스럽고 크게 실망했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김태환 회장은 "미 국무부 발간 '미국 대외관계, 1958- 1960'에 실린 조봉암 검거에서 처형까지 미국정부의 입장과 구명운동의 단면을 볼 때 일부에서 제기하는 미국의 음모설이나 구명운동에 소극적이었다는 비난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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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4.19 이후에 미군 정보기관 출신 고정훈씨는 김창룡 특무대장으로부터 이승만이 조봉암을 제거할 것을 재가하는 문서를 자신에게 보여주었다고 증언했고, 1958년 1월초 미국 정보기관이 '통상적으로 신뢰할 만한 정보원의 진실(probably true)'로 분류한 보고서에 '1월초 이승만대통령이 조봉암과 4, 5명의 동료들을 체포하고 진보당을 해산하는 내용의 계획을 승인했다'고 언급된 1958년 1월13일자 국무부 수신 전문 520호 내용을 고려할 때 이박사가 이 모든 움직임의 출발점일 확률이 높다"고 주장했다.
김태환회장은 "정치적 사법살인을 당한지 무려 52년이 지난 2011년 1월20일 대법원이 재심을 통해서 무죄 판결을 내림으로써 조봉암선생의 억울한 죽음의 원은 풀렸지만 선생의 무죄와 복권이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모두 몸을 도사리고 혹시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라고 비판했다.
robin@newsroh.com
필자주--- 미국은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박정희 정권이 야당측 후보자인 김 대중측에 선거 자금을 원천적 봉쇄했는데, 그래도 김 대중 측이 효과적으로 선거 운동을 진행하는 것을 보고 그 자금 출처가 미국측인 것으로 확인됐다. 미 대사관은 미국의 PL 480호로 한국에 제공하는 식량 판매대금 소위 대충자금을 원화로 받아서 자유로히 사용할 수 있는데, 이 자금의 일부를 김대중 선거 자금으로 제공한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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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 중앙일보 전재 기사URL: news.joins.com/article/18735330
필자주: 이 글은 필자와 인터뷰한 당시 뉴시스 통신사 미주 특파원으로 활동하든 노창현씨가 기사를 작성해서 뉴시스 기사로 나왔고 본국 중앙일보에서 전재했고, 노창현 씨가 뉴스로에도 올렸기 때문에 이 글을 필자가 사용하도록 허용해서 동문들과 Share 하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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