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5.20
며칠 만에 펜을 들었다. 그간 퍽 바빴다. 축사 포 사격 때문에 전차 사격 연습장인 지포리 TCPC에 가 삼 일간 야영하고 곧이어 주번사관. 주번사관 근무가 끝나자 담력 훈련 때문에 밤 열 두 시까지 산에서 떨고.. 이렇게 해서 오랜만에 숙소에 일찍 들어온 것이다. 규X한테서 며칠 전에 편지가 왔다. 나에겐 그로부터 처음 편지인듯하다. 고시 공부랍시고 시달리는 그가 새삼스럽게 측은하게 까지 느껴진다. 고시 합격도 돈과 타협 할 수 있다면야 벌써 판사가 되었으리라. 전화를 놓았다 한다. 어쩐지 안쓰러워지는 것은 나에게 남아있는 꾀죄죄한 옹졸함 탓인가. 서울 나가면 한번 찾아가 보련다. 얼마나 사람 됐는가 보자. 옛날의 그의 찔깃찔깃한 타산적 성격이 아직도 존재하는지. 명X한테서도 편지가 온 것이 있다. 재대 후 무엇을 할 계획인가고 당돌하게 물어왔다. 아찔한 질문이다. 늘 가슴을 누르는 초조함을 명X이 제대로 찔렀다. 13일에 아버님께 송금해 드렸다. 송금액은 이천오백 원. 벌 받을 송금액이다. 내게 몇 천 원 남아있다. 사진기 하날 사련다. 사진기는 오래 전부터의 사고 싶었다. 영X한테서 예의 편지가 또 왔다. 반가워 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나도 문제지만 내용이 없고 무미건조한 영X의 편지는 나를 피곤하게 한다.
어쩐지 요사이는 생활에 염증이 물씬물씬 솟구친다. 군 생활이 이토록 실증 나는 건 전에 없던 일인 것 같아. 한가해서 그러는가 아니면 태만해서 그러는가. 여가에 내 할 일인 공부를 한다면 아마도 염증을 느끼진 않으리라. 허나 이젠 ‘공부’라면 학생이나 할 일 이라는 듯 나에겐 열외가 되고 말았다. 세월이 빨리 지났으면 싶다. 일년이 어서 지나가 버렸으면 싶다. 모든 게 싫다.
박XX로부터 편지가 왔다. 누나 벌 실히 되니 누나라 해 주는 게 내 취할 바 이겠으나 내게 마구 이래라 저래라 하는 데는.. 오히려 그의 소박하고 타협을 모르는 순수성을 보는 것 같아 개운하기도 하다. 다 다음주에 여기 오라고 답 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많은 사람에게 부대에 찾아 오기를 바라고 있다. 마치 보채는 애기처럼 말이다. 그들이 생각 끝에 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애써 와 주기를 애걸하는 것이니 떳떳하지 못하다.
김치가 먹고 싶다. 인색한 집에 세든 터라 그런 것도 없다. 중 3 때였나. 주X과 상도동에서 자취할 때 옆 집 김칫독을 뒤진 적은 있었지만 그 때는 들켰어도 학생이라 봐줬지.. 지금은 점잖은 소대장님 체면에 그럴 수도 없다. 오늘은 김치를 담갔다. 배추 15원짜리 한 다발 사서 주인아주머니 코치에 따라 진섭이와 함께 김치를 담갔다. 배추를 씻어서 자른 다음 파를 썰어 넣고 소금과 고추 가루로 적당히 얼버무려두었다. 아주 쉽다. 쑥스럽지도 않았다. 이곳의 모든 사람들은 일년 후 헤어질 사람들이다. 어쩐지 쓸쓸하다. 호X이가 옆에 있으면 하고 생각해 본다. 내일 서울 좀 나갈까? 어떻게 할까. 자야겠다. 퍽 고단하다.
1966.5.27
요사이의 내 몸 컨디션이 말이 아니다. 계속되는 감기에 소화 불량까지 겹쳐 며칠 쉬었으면 싶다. 사병이라면 이럴 때 며칠 의무실에 입실 했으리라. 장교라는 허울 좋은 명분은 나로 하여금 필요이상의 자학을 강요한다. 집이랍시고 돌아와야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맛있는 밥도 없다. 밥을 한다는 것이 지긋지긋하다. 누구였더라.. 그, 왜, 포천에서 와 나를 면회 했던 그 여자. 내 저금통장 갖고 영영 사라진 그녀라도 있었으면.. 아쉽도록 생각을 해본다. 공연히 짜증이 난다. 일상 생활의 기본이 불안정할 때 따르는 피곤과 역겨움인가..
어머님께서 오셨으면 싶다. 이럴 때 어머님께서라도 와 주셔서 뒤를 보살펴 주신다면 한결 덜 울적하겠다. 큰형은 여전히 하숙생활인지 궁금하다. 생각해 보면 둘째 형은 지금 그 어느 때 보다 큰 마음 고생을 하고 있을 것이다.
1966.6.9
오랜만에 펜을 든다. 지난 일요일에 시골 다녀왔다. 산은 역시 조용하나 선산에 딸린 집터에 초라하게 지은 집들이 을씨년스럽다. 기르는 양으로부터 젖이 나오고 놓아 기르는 닭들이 알을 낳아 주는 게 대견스럽다. 아버님은 과수원 만드신다, 개간하신다 하시면서 너무 과로 하신다.
고향 남산근처 온양 길목의 외조부님 댁을 들렸다. 외조부님, 며칠 못 사실 것 같았다. 뭔가 말씀하시고자 하나 말은 못하시고 쓰시려 하나 손이 떨려 쓰지는 못하신다. 옆에서 답답하고 괴로웠다. 좋아하시는 돼지고기를 사 들고 갔으나 그곳 아주머니의 마음 씀씀이는 지금까지도 날 분노의 불구덩이로 몰아 넣는다. 빨리 돌아가시게 하기 위하여 고기를 못 드리겠다는 것이다. 아아.. 할아버님이 가엾다. 어찌 이렇게 말년에 소박 받고 버림받으신단 말이냐? 외조부께선 날 무척이나 귀여워해 주셨다. 내가 가면 없는 돈 추려 내시어 고기라도 한 점 구워 날 먹여 주시려고 했다. 끔찍이도 날 사랑해 주셨다. 그토록 활동적이고 활달하셨는데 노환 끝에 몸도 가누지 못하신 채 불효와 고의적인 무관심 속에 내 팽개쳐 저 마지막 사투를 하고 계신다. 가까스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데 귀를 가까이 대고 열심히 들으니 날 보고 돈을 놓고 가라 하셨다. 아마도 그것으로 카스텔라를 사 잡수시려고 했던 것에 틀림없다. 나는 많이 드리지 못하고 왔다. 그것이 나는 내가 죽도록 밉고 가슴이 찔린다. 왜, 그것만 드리고 왔느냐, 명분은 많이 드려봤자 아주머니가 사 드릴까? 인색하고 악독한 나!
아아. 할아버지. 가슴이 미어집니다. 세상은 빨리 돌아가시는 게 당신께도 행복이라고 말 하는 것 같군요. 그러나 할아버지. 한 시간이라도 더 이 대지의 공기를 마시셔야 됩니다. 팔십사 년 간 보고 듣고 마시고 한 이 대지의 내음을 한 모금이라도 더 맡으셔야 합니다. 외 할아버님.
1966.6.15
외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 며칠이 지나서야 혜자로부터 듣고 알았다. 전보를 치지 안으신 부모님을 나는 원망하진 않겠다. 그러나 누구엔가 꼭 소리쳐 원망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아.
할아버님, 고생고생 하시다 재미난 세상 구경 못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님, 할아버님께선 저를 많이 길러주셨습니다. 커가는 저에게 할아버님은 누구보다고 많은 성원을 보내주셨고 누구보다도 많은 기대를 걸어 주셨습니다. 할아버님께선 절 밥 상 언저리에 앉혀 놓으시곤 고기 한 점이라도 더 주시려고 정분을 주셨습니다. 팔 십 사 년을 간 뛰어온 할아버님의 맥박은 이제 운명하심과 함께 영원히 정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하나의 맥박이 되어 제 가슴속에 뛸 것 입니다. 저는 저의 후손에게 외 할아버님 얘기를 종종 해 주겠습니다. 옛날에 나에겐 잊지 못할 외조부님이 계셨다고.. 성품이 곧고 급하지만 무척이나 풍치를 아시는 분이셨다고.. 외할아버지는 소박하지만 아둔한 아주머니와 덜 깬 손자들의 무정한 시선 속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러나 할아버님, 너무 서운해 마소서. 여기 병X이가 할아버님을 이토록 애절하게 생각하고 기도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5년 전 외 할머님 돌아 가셨을 때 저는 가슴이 미어졌었습니다. 할아버님 마저 운명을 달리하신 이제 저는 할아버지라고 부를 대상이 없어졌습니다. 할아버님, 할아버님은 저의 외 할아버님이 아닙니다. 저의 친 할아버님 이상이셨습니다. 지금 어디 계시는지요. 바로 저의 머리 위에서 저의 이 글을 보고 계신지요. 할아버님. 저는 야미리라는 마을에 위치한 제 3 전차대대에서 이 글 쓰고 있습니다. 얼른 내려가 할아버님 빈소에라도 가 뵈어야 될 터인데. 할아버님유언에 복 입을 사람은 다 입으라 하셨죠. 그러나 저는 못 입었습니다. 어쩝니까? 할아버님. 할아버님께서 띄엄띄엄 말씀 하실 때 해 놓은 녹음은 소중히 보관하고 하겠습니다. 이건 영영 보관할 터입니다. 제 자손 대대에 유물로 남겨 놓을 터입니다. 할아버님, 부디 평안히 잠드소서. 할아버지 영령이 항상 나와 함께 해 주소서. 예전처럼 저에게 과분한 기대를 가지셔서 저로 하여금 난처하고 초조하게 만들어 주셔도 좋습니다.저 어렸을 적 ‘너는 대통령 감이야’라고 늘 말씀 하셨지요. 할아버님. 부디, 부디, 평안히 잠드소서.
1966.6.19
고향에 가 할아버님 산소에 가 성묘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사람의 삶은 언젠가 끝나게 마련이라지만 외조부님은 너무나 눈에 선하다.
정X에게 부탁했다. 변송X에게 전화 걸으라고. 헌데 영 걸어주려 해야 할말이지. 그것도 일종의 질투인가? 결국 변송X와 만나 연극 감상을 했는데 연극이 꽤 재미있더군. 헌데 말이야, 변송X.. 마음에 들어. 우선 송자는 시원시원해서 좋아. 헌데 원남동까지 같이 걸어오면서 송자 약간 스타일 구겼지. 나보고 ‘소위님은 건강한 여자하고 결혼하세요’ 라고 말 하질 않나. 제길! 여자들은 이래서 탈이야. 자기 깐엔 어떤 선을 긋자는 말이겠는데 난 이게 딱 질색이란 말이야. 내가 부담스런 행동이나 포로포즈 할 단계에서 이런 말 한다면 또 몰라. 이건 처음부터 이러는데 오히려 김 빠질 수 밖에. 제발 여자들이 이런 묘책을 안 썼으면 좋겠어. 하여튼 변송X. 처음부터 좋아졌어. 얼굴은 약간 불안하지만.
1966.6.22
중대 근무 중 부대 정문 위병소에서 전화가 왔다. 누가 나를 면회 왔단다. 터덜터덜 내려가 보니 웬 아가씨가 머뭇거리며 나를 아는 체 한다.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술 집 외상값 받으러 온 주모인가? 그러나 여자가 몇 마디 말을 하는 동안 나는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지난달 어느 주말 이었던가. 소대장들 몇이 소주병 사 들고 이곳에서 시오리 가량 떨어진 삼부연 폭포로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우리는 폭포수 아래쪽에서 자리를 펴고 한나절을 얘기 꽃 피우며 주거니 받거니 했는데 까맣게 위로 보이는 폭포수 바위 위에 한 여자가 오랜 시간 혼자 있어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드물지만 그 바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목숨을 끊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터였다. 그날따라 삼부연 폭포수 관광지에는 사람들이 뜸한 편이었다. 우리 넷은 호기심도 발동한데다 만일 그렇다면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는가 하는 의협심도 발동했다. 넷이서 폭포수 위 바위까지 올라 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여자는 신발을 벗어 유서를 쓴 듯한 종이 위에 가지런히 놓고 개울물이 폭포로 변하는 벼랑 끝에 서 있는 거였다. 함부로 접근 할 수도, 섣불리 말을 걸 수도 없는 처지였다. 우리 네 명은 둘씩 양쪽으로 갈라져 한 쪽에서 말을 거는 동안 다른 쪽에서 접근하여 붙잡기로 했다.
작전은 성공 해 우리는 그녀를 폭포 밑으로 데리고 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놔두고 떠나기에는 마음이 안 놓여 폭포 근처의 절 주지스님께 데려 가니 나이 많은 주지 스님은 마음을 안정시켜 보살피겠으니 걱정 말고 돌아들 가라 했다.
그 후 모두들 그것을 잊고 있었는데, 바로 그 여자가 대대 위병소에 와 있는 것이었다.
내 이름을 어찌 알았는가 물으니 그 때 우리가 전부 군복을 입고 있어 얼핏 내 이름을 읽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 전차대대 마크가 선명하니 제 3 전차대대를 찾자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자 옆에는 커다란 여행용 백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고맙다는 인사 하자고 온 것이 아닌 것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집을 나와 오갈 데가 없다며 그 때 자기를 절에 데리고 갔던 소위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거였다. 청천벽력 같은 부탁이었는데 호기심이 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우선 부대에서 제일 가까이에 세 들어 사는 김재X 소위 숙소에 안내 한 후 부대에 들어 가 상의 하마 하고 중대로 돌아 와 김소위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였다. 사실 어머님이 와 계셔서 나의 숙소에 데려 갈 수도 없었다.
1966.6.25
며칠 전에 부대를 찾은 그 여자는 김재X 소위와 그 길로 살림을 하고 있었다. 믿기지 않았지만 평소 활달하고 껄렁껄렁한 김소위 성격으로 보아서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보다 나이도 두어 살 위인데다 경상도 칠곡에는 부인까지 두고 있는 유부남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에 이거는 아니다 싶었다. 간부후보생 출신의 김소위는 경상도 특유의 후련하고 엉뚱한 사람이었다.
들리는 얘기로는 그 여자는 부대에서 멀지 않은 마을의 이장 딸이라 하는데 모 부대 하사와 눈이 맞아 같이 살다 하사가 딴 여자에 눈을 파는 바람에 비관하여 자살하려 했던 터고 절에서 잘 타일러 집에는 들어 갔으나 집안 망신이라고 내쳐버려 보따리 싸 들고 우리 부대를 찾은 거라 하였다.
1966.7.3
오늘 일요일. 아침에 김재X 소위와 낚시질 가려고 그물까지 빌려 놓았다. 그러나 구공탄 때문에 가지 못하게 되었다. 우울해진 기분을 낚시로 나마 풀어볼까 했으나 그것도 틀렸다. 어제저녁 생각하면 도무지 기분 나빠 못 살 것만 같다. 군 생활도 엄연히 내 청춘의 중요한 일부분 일진대 그 따위 하찮은 중사 때문에 달갑지 않은 추억이 된다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여러 가지로 나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었다. 나의 대인 관계가 원만치 못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내가 싫은 사람에겐 요만큼의 정도 주고 싶지 않다. 나는 그의 냉소적이고 예의 없는 태도가 싫었다. 타협 할 마음이 없다. 내 소대의 선임하사가 된 신준X. 일 푼의 가치도 없는 인간에게 내가 잠시나마 희롱 당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우울해진다. 당장 내일부터 그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가 문제다. 그는 나를 상관으로 모실 수 없다고 했다. 군 조직인데 말이다. 무시 해 버리면 그만인 말이지만 그의 거만은 극에 달한다. 소위 어린 소대장을 가지고 논다는 고참 하사들의 작태를 내가 당하고 있는 것인데 그건 그것대로 나에게 또 하나의 교훈이 되어 준다. 나는 어떤 류의 상관인가. 육사출신 장교처럼 빡빡하지 말고 간부 후보생 장교처럼 빌빌거리지 말아야 하되 ROTC 출신답게 포용성 있게? 장교에게 늘 삐딱한 한 선임하사로부터 술 냄새 풍기면서 뱉는 비아냥을 포용 했어야 했는가. 공자는 하찮은 벌레로부터도 배우는 것이 있었다 했다. 술 취한 놈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 들인다면 나 역시 술 취한 놈이 된다. 그러나 군 이라는 계급조직이기에 갈등이 된다. 내가 직업 군인이 아닌 게 다행인가?
이제 독신장교 막사로 들어 가 산다. BOQ에 들어가면 여러 소대장과 같이 생활하게 된다. 거기서 나는 나의 대인관계를 다시 한번 TEST해 보자. 군 생활도 이제 열 달 남았다. 눈 딱 감고 열 달 지내보자. 열 달.. 열 달.. 눈 딱 감고 열 달 지내보자. 나는 원래 나다. 군복은 내 옆에 있을 뿐이다. 내 속엔 없다. 물론 전쟁이 터지면 군복은 내 안에 있게 되지만!
저녁에 이영에게 다녀왔다. 죽마고우가 부대 가까이 있음은 행운이다. 큼직큼직한 기계 속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그가 어쩐지 부러워지는 기분을 감출 길 없다. 역시 그는 생산의 역군이고 나는 비생산적이고 고리타분한 분필소비자가 될 것 인가. 내가 격에는 안 맞지만 의젓함을 과시하는 그의 근무태도를 웃으며 볼 수 있을 것인가? 즐거운 마음으로 말이다. 그에겐 그래도 생활의 의미가 완연하다. 자기 일은 일 같지도 않다고 투덜대지만 ’자기 의지’가 확실하고 ‘자기 뜻’이 실현되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나는? 엊저녁부터 내 둥 기분이 나빠 있다. 그 놈의 버릇없는 내 소대 육군 중사 때문에 말이다.
부대장이 내 숙소까지 들어왔다. 옆 방에 내내 있었나 보다. 나야 잠들어 있었으니 알았을 턱이 없었다. 여하튼 이렇게 높은 분이 내 숙소에 오기는 처음인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조중위와 운천에 가 ‘만져만 보세요’ 영화를 보았다. 한국영화 볼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역시 씁쓸하다 못해 울분이 솟구칠 뿐이다. 수준 미달이다. 극장구경 온 몇몇 미군병사들에게 낯이 뜨거웠다.
1966.7.11
독신장교 숙소에서 처음 자본다. 애써 꾸민 보람이 있는지 그런대로 쓸만하다. 창이 하나 있어 여간 좋질 않다. 소위만 열 두 명이 득실거리게 된다. 재미난 일이 많이 벌어질 것이다. 혹은 어떤 불협화음이 조성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종X 소위가 옆에서 모기 잡느라고 분주해 하고 있다.
오늘 둘째 형이 나를 찾아 와 운천에서 점심을 같이 했다. 시골이 궁금했다. 부모님 생각이 물씬 난다. 갑자기.. 형을 형을 배웅하며 정녕 고독하고 쓸쓸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내 자신이 못 나 보였다.
저녁에 이영과 만나 BOQ까지 왔다가 늦게 부대 찦차로 보냈다.
덕X가 18일에 독일 간단다. 독일 가면서도 나한테는 왜 소식이 없었는가 궁금했었으나 그 궁금증은 곧 풀렸다. 영X이 덕X를 찾아가 한바탕 해 댔다는 것이다. 피가 곤두섰다. 영X. 너는 나를 끝내 괴롭히는구나. 졸업식에도 예고 없이 찾아와 정숙이를 나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해 놓았다. 영X. 너는 센스가 없다. 그것도 미운 오리새끼처럼 말이다. 너 때문에 내가 겪은 마음고생은 너무 많아. 네가 조금이라도 현명했더라면, 네가 조금이라고 자존심이 있었더라면, 네가 조금이라도 처세술이 있었더라면, 네가 좀더 여자다웠더라면.. 우리는 숙명적으로 맞지를 않는다. 어려서부터 이웃에 살았고 사춘기를 지나며 서로 친구가 되어 주었으며 상상력이 무궁무진한 사내아이의 궁금증을 많이 풀어는 주었지만 내 인생의 반려자는 아니라는 생각을 굳히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 나이 들수록 나의 인생 반려자로서의 너는 아니었다.
영X이. 너무 쉽게 다룬 나를 늘 죄의식 속으로 몰아 넣었지. 그런 내가 더욱 싫었어. 용암처럼 분출하는 나의 호기심도 너의 확실한 선 앞에는 굴복 했어야 했다. 나는 그게 오히려 고마워. 너에게 자책 할 게 없다고 느끼며 지내 왔지만, 이 바보야, 줄 것을 확 주어 버렸으면 차라리 내 운명을 맡겼지. 나는 책임을 지는 사람이니까. 너는 끝까지 순수했지만 이기적인 나는 그러지 못했어. 그리고 나는 너의 처녀성을 지켜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 해 왔지만 이 바보야, 그게 오히려 너의 약점이었어. 몸을 던져버리는 승부수를 던질 만큼 너는 나를 믿지 못한 거야. 그리고는 덕X를 찾아 가? 무슨 권리로?
1966.7.15
며칠째 계속 비가 쏟아지고 있다. 대대 정문의 다리가 떠내려갔다. 억세게도 줄기찬 비다. 나에겐 괴상한 버릇이 있다. 비가 이처럼 억수같이 와 세상이 요란할 땐 오히려 기분이 착 가라 앉으며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러다가 무언가 굉장한 소릴 내면서 부서져 나가는 장면을 상상한다. 나의 괴벽인지도 모른다. 장대 비가 쏟아지면 나는 속이 후련해진다.
천정에 세 군데나 구멍이 뚫려 비가 샌다. BOQ생활도 이제 일주일에 접어든다. 이종X 소위와 나는 과연 한방에서 지낼 수 있을 만큼 성격이 맞는가? 내 성질은 퍽 깐깐하다. 타협을 잘 모르는 꽉 막힌 성질이다. 그러면 이 소위는? 불행히도 그도 그렇다. 속이 좁다. 무언지 모르게 답답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외면으로야 서글서글하지. 헌데 그실 내가 못났다. 이 나이에 사람 관계 하나 원만히 만들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 어제 일만 해도 그렇다. 그는 담배를 몇 갑씩 사 놓고도 나보고 담배를 달라는 거다. 그것을 곱게 주지 못한 내 옹졸도 일품이지만 그의 그 괴벽과 뻔뻔함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버릇 아닌가? 여하튼 살아보자. 길고 굵게 살도록 노력해 보자꾸나. 제길! 이 생활도 아홉 달 밖에 남지 않았는데 뭘 그러냐!
변송X. 인의동 28-9, 변용X씨의 장녀, 도수 높은 안경 낀 여대생, 서로 좋게 될까? 꼭 부칠 생각이 없으면서도 편지를 써 본다.
‘밖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방학 첫 주를! 이렇게 어두침침한 가운데 하늘이 내려 앉는 듯 요란스레 빗방울이 때릴 때는 오히려 기분이 차분히 가라앉는 버릇이 있어요. 고무신을 신고 있으니까 벼락이 떨어져도 괜찮겠지. 고향에 내려가면 수박을 실컷 먹을 터인데. 어어. 천정에서 물이 떨어지는데? 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빗줄기에 값 싼 철학을 붙여 놓곤 좋아합니다. 독신장교숙소 생활도 일주일로 접어듭니다. 생각한 것보다 조용한 편인데 재미있는 것은 제방에 전기풍로가 있기 때문에 심심치 않은 거지요. 굽거나 삶거나 지지는 음식물에 대해서는 영락없이 저의 방에 와서 해야 되고 그 때마다 1/3을 헌납하도록 못을 박아 놓았으니까요. 그런데 어떤 동료는 달걀 하나를 삶아가면서 삼분의 일 준다고 껍질을 싹 벗겨주곤 달아납니다. 가끔은 우 몰려 나가 운천 영화관을 갑니다. 어저껜 ‘만져만 봅시다’를 봤는데 웃으라는 것 같아서 웃었어요. 앞 뒤 없이 웃어대는 데는 군복이 가장 편리한 물건입니다. 재미난 일이 가끔 있습니다. 군인들의 ‘충!성!’ 고함을 정문에 깔아 놓을 테니 ‘사뿐히 즈려 밟고’ 오시옵소서.
여학생 기숙사처럼 금남의 고약한 규칙은 없습니다. 독신자 숙소의 첫 손님이 되어 달라는 성급한 바램도 아울러 가져 보겠습니다. 아! 그 유치원 동창을 소대장처럼 모시고 오면 덜 무서울 것입니다. 신설동에서 특급으로 한 시간 반 달리면 운천, 운천에서 내려 야미리 탱크부대 찾으면 됩니다. 재미있는 방학기간이 되기를 빌면서 이만.’
시골엔 수박이 덩이덩이 익고 있을 것이다. 송금 수표를 받으신 어머님께선 퍽 흐뭇해 하시겠지. 큰형은 웬 문제가 그리 많은가. 나는 싫다. 모든 게 싫다. 내가 왜 존재 하며 내가 어떻게 될 것인지, 그 윤곽조차 잡을 수 없다. 나는 고민한다. 비! 억수같이 쏟아지거라. 나와 나의 모든 생각과 나의 모든 환경을 싹 쓸어 다오. 아! 비! 더 좀 거세게 오라.
1966.7.19
계속 비가 내리고 있다. 부모님께 편지해야 될 것 같다. 어제와 오늘을 쉬지 않고 ‘Fanny Hill’이라는 소설을 탐독했다. 성의 묘사가 이토록 부드럽고 수긍이 가게 쓴 책은 처음 읽는 것 같다. ‘남자의 그것이 꿰뚫는 순간 나는 소리치며 고통을 씹은 채 기절하고 말았다’. 이 한 구절이 마음 설레는 앞뒤 문장 속에 끼어 아름답고 거침없이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장면을 묘사하고 있었다.
오늘은 위병장교 근무다. 비가 촉촉히 내리는데 이건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비록 군복은 입고 있으나 나는 내가 현재 처하고 있는 군 생활에 요만큼의 애착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군대란 무엇이며 오늘날의 한국 군대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기본은 무엇인가? 무질서와 하극상 그것밖에 없다. 사병을 인간답게 다루라 하면서 그들에게 월급이랍시고 400원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질서는 불합리하며 군기는 ‘개판’이 되어 가고 있다. 장교가 사병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 가든지 아니면 근무태만하든지 이 양자 중 택일하지 않고서는 장교로서의 품위를 지키기가 힘든 게 요즘의 한국 군대다. 과연 전쟁이 나면 우리중대에서 몇 대의 전차가 살아 남을 것인가?
송X에게서 편지가 없다. 내가 너무 지나친 것 같다. 그 누구처럼 속단하지 말자 하면서도 나의 고질화된 초조감과 조금함, 그리고 자만심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이곳에 와 달라 한 나의 희망사항은 너무 경솔한 소망이 아닐 수 없다. 그와 내가 만난 건 그간 통틀어 세 번밖에 없다. 헌데 나는 그녀에게 생소한 이곳 부대까지 와 주길 부탁 한 것이다. 결국 나의 조급한 바램은 신중하지 못한 인상을 남겨 인간관계에 상처를 주지 않았나? 송X! 그녀는 번개처럼 다가오다 안개처럼 내 곁을 지나간 환상에 지나지 않는지.
귀중한 인연이 쓸모 없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키도 작고 남자답게 생기지도 못한 나! 나는 단순히 나의 머리와 나의 지식만 자부하고 아무에게나 자신만만히 대하려 하지만 그 높지도 않은 코가 더 납작하게 뭉개질 것이다.
1966.7.21
지루한 하루가 또 지나가는가 보다. 독신장교 숙소인 BOQ에 들어온 후론 여러 가지 편한 게 생겼다. 근무시간에도 약간의 요령을 부려 BOQ 로 슬쩍 와 한잠 잘 수 있다. 오늘 낮에 침대에 누워 있다가 중대장님한테 직통으로 들켰지만 말이다. 이젠 중대장은 내가 자리에 없기만 하면 BOQ에 가 있으려니 헤 버릴 터여서 곤란해졌다.
요사이 생활은 꼭 다람쥐 채 바퀴 도는 것 같다. 아침 여섯 시 반쯤 날이 환해지면 고단한 잠에서 깬다. 그러면 벌써 당번병인 희성이가 딸그락 거리며 밥을 짓고 있다. 김희X은 나보다 머리 하나 더 얹어도 남을 만큼 장신이다. 희성이의 헌신적인 봉사에 나는 진심으로 감사한다. 이울러 그 감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나의 인색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아무리 군대라는 특수 무리이긴 하지만 말이다. 일곱 시 사십 분에 BOQ 를 나선다. 오후 다섯 시가 넘으면 중대장이 있건 없건 슬금슬금 BOQ로 향한다. 급히 집합이 있으면 아무래도 연락해 주겠지 생각하면서.
부대에서 이십여리 거리의 지포리 전차 사격장 채점관으로 근무 했을 때 보다 출퇴근이 훨씬 수월해졌다. 편지를 열 통 써서 부쳤다. 군 우편은 우표를 별도로 안 붙여도 좋으나 행여 편지가 가볍게 취급되지나 않을지.. 어머님께, 성기에게, 연우에게, 종록에게, 박XX에게, 혜X에게, 시X에게, 웅X에게, 그리고 약수동 누님한테 부쳤다. 양X이 놈 요사이는 나에게 소식이 통 없다.
오랫동안 아무에게서 편지가 없을 때 서운하고 허전함을 금치 못하는 나는 마음이 굳지 못한 허약 체질임에 틀림없다. 군복을 입어서가 아니라 예전에도 늘 그랬다. 호균이 말마따나 나는 편지를 좋아하는 인간인가. 아니면 늘 마음 조리며 여유 없는 조바심 꾼인가.
운천에 나가 비닐을 사다가 천정을 덮었다. 제발 비가 그만 샜으면. 비가 새는 통에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덜 좋아하게 되었지 않은가. 비닐을 사 들고 오다 아주 예쁜 여자 하나와 마주 쳤는데 너무 예뻐 잠시 멍해졌다. 그러나 아무래도 초라한 군복에 흙투성이 군화를 신고 있는 볼품없는 행색으론 말 붙일 용기도 나질 않아 속만 상해가지고 돌아왔다. 갑자기 송X 생각이 난다. 왜 그녀에게선 소식이 없는가?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방어자세를 취하게 하였을까? 나의 조급한 접근이? 나의 너무나 틈 없는 인상이? 나의 터무니없는 호들갑이?
공부 한답시고 작심은 단단히 해 놓고 나는 완전히 마음의 공백상태에서 오락가락 하고 있다. 침대 앞에 놓인 전공 서적들, 남의 눈에 띄는 게 오히려 부끄럽다.
1966.7.26
침묵이 금이라는 평범한 진리가 강력하게 나를 친다. 변송X 얘기를 대수롭지 않게 이종광소위에게 한 것이 놀림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변송X는 지금의 나에겐 지나치는 버스에서 엇갈리며 잠시 시선이 마주친 여자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나를 이토록 집착시키는가. 나는 감성에 젖어 이종X 소위에게 오버 한 것이다. 허나 하소연 할 상대를 잘못 골랐다. 그는 짓꿎게 나를 놀리면서 내 기분을 망치고 있다. 나는 심각했는데. 역시 나는 입이 물러 손해다. 변송X.. 그녀로부턴 편지도 없다. 역시 내 잘못이다. 지금의 나에겐 잠깐 스쳐 지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뇌리에서 지우는 것 만이 중요한 일이다.
1966.8.5
며칠 지났다. 나는 그간 보병지원을 다녀왔다. 비바람 때문에 야영하는데 무척 고생 했다. 고지에서 비바람을 안고 야영하기란 쉬운 게 아니었다. 천막 속에서 야전침대에 배 깔고 엎드려 덕X의 편지를 무려 열 번도 더 읽었다.
‘소위님.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 가볍게 넘기세요. 덕X는 두 토끼를 잡으려는 지조 없는 사람은 정말로 싫습니다. 제 마음으론 사물을 똑똑히 판단할 수 있기를 원하는데 뭐 잘 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소위님! 무엇이든지 첫 번에 갖는 물건이 제일 좋다고 하더군요. 지금도 전 이 머나먼 땅에 와서 까지도 생각합니다. 덕X는 가장 어리석고 우둔한 계집애라고. 그리고 글도 말도 가끔은 하기 싫음을 느낍니다. 소위님, 당신은 얼마만큼 무엇이 딴 사람보다 훌륭하기에 한 불쌍한 여인을 울릴 수 있을까요?’
읽으면 읽을수록 비수처럼 가슴을 후비는, 먼 이국으로부터의 편지다. 답장을 해줄까 곰곰이 생각해 보고 몇 줄 써 보지만 결국은 답을 않는 게 좋을 듯싶다. 영X이나 덕X나 결코 내가 쫓은 두 마리의 토끼는 아니었다. 덕X를 나의 아내로 할 수 없는 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유치하다면 아주 유치한 이유. 키 콤플렉스의 나에게 두드러지게 작은 키의 여자는 또 하나의 콤플렉스를 생산하리라는 우둔한 멘델의 신봉자. 나.
그러나 덕X는 귀엽고 윗트가 있으며 빤짝이는 예지를 갖추고 있다. 그녀와 사귀는 건 마치 고귀한 보물을 만지는 듯 즐겁고 유쾌한 일이었다. 덕X의 비록 가시 있는 편지나마 독일 가자 즉시 편지한 저의는 무엇인가? 아마도 아주 잊기엔 미련이 있었겠지 나 또한 너를 아주 잊기엔 미련이 있어.
호X이가 어저께 찾아 와 오늘 보냈다. 훈련 갔다 오는 날, 녹초가 되었을 때 찾아 와 제대로 얘기도 못했다. BOQ에서 같이 잤다. 다행이 이종광소위가 TCPC에 가 있는 중이라 잠자리는 충분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가 훈련에서 돌아 오자마자 주번 사관의 완장을 차게 되었던 것이다. 아쉽고 미안했다. 자식.. 하필이면 이토록 고달플 때 올게 뭐람.
호X은 순X와 목하 연애 중이라고 고백했다. 뜻밖이다. 그러지 말아야 끝이 좋은 건데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마저 든다. 순애는 내가 호X에게 소개 해 준 아르바이트 과외 클럽 멤버 중의 학생이었다. 허나 호X이 고 보니 아쉬워만 할 수는 없다. 호X이는 내가 철저히 믿는 놈이니 매사 실수가 없을 터이고 그가 좋아하는 여자는 틀림없는 여자일 것이다.
내 소대의 전차가 훈련 중 어떤 농부의 리어카를 밟아서 말썽이 많다. 비가 올 것 같은 무더운 날씨다.
1966.8.7
내일 전차 사격 훈련장인 TCPC나가는 관계로 해서 어제 오늘 정상근무다. 아침 출근에 지각을 해서 중대장으로부터 질책을 당했다. 무척 더운 날씨다. 대대장이 옆방에 들어와 지낸단다. 도무지 좋은 기분이 될 수가 없다. 허나 여하튼 낼 TCPC 가면 한 열흘 쉴 수 있으니까.. 성시X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허나 변송X로부터는 여전히 소식이 없다.!
1966.8.23
덕X로부터 두 번이나 편지가 왔다. 그녀에게 답을 몇 장이나 쓰고 없애고 했던고. 허나 아직 보내질 못하고 있다. 무어라 써야 할지 생각이 정리 안 된다. 덕X의 편지에 전에는 두 토끼가 등장하드니 이제는 두 우물 파는 사람으로 표현하며 나를 원망하고 있다.
아마 답장이 없으니 받지 못한 줄 알고 또 편지 했으리라. 일요일. 엊그제 부대 앞 야미리 마을에 나갔다가 전에 살던 농가에 들려 받아 본 것이다. 강렬하게 끌어주지 못하는 내가 미웠다는 그녀의 솔직한 표현 앞에서 나는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덕X는 편지에 그저 친구로 지내 잔다. 친구, 친구, 가장 편한 게 친구지.. 허나 과연 친구로써 가능할까? 나는 욕심의 화신이며 우유부단의 극치. 너는 어디까지나 귀엽고 깜짝한 여자. 그러나 평생의 반려자로서 확신이 서지 않는 한 확 끌어 당기지도, 뚝 끊어 내지도 못하는 이 못난이의 희생자다 덕X 너는.
덕X의 손목 한번 잡아보지 않고 몇 년을 지낸 건 확실히 내 이기심의 소치다. 그것을 애써 미화하자면 그래도 나의 밑바닥엔 조금이나마 양심이 있다는 것으로 자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마음속에 결혼 상대로서의 덕X가 아니었기에 나는 늘 스스로를 견제 해 왔던 것인데 그게 바로 물에 술을 탄 건지 술에 물을 탄 건지 구별 안 되는 나의 미지근한 근성 탓 아니었겠는가? 덕X는 먼 이국에서 몹시도 고독 할 것이다. 나의 편지를 무척 기다리고 있겠지. 편지를 부쳤다. 확실히 썼다. ‘너의 말대로 우리는 친구라고’ 그러나 나는 낯간지러움에서 벗어 날 수가 없었다. 아쉬웠지만 이것이 내가 덕X에게 할 수 있는 용기 있는 표현이었다.
지난주 금요일엔 세X이가 왔다. TCPC가 있는 지포리에서 대대가 위치한 야미리까지 전차의 전방 사수 석에 앉혀 ‘드라이브’ 시켜 주었다. 아마 그의 일생 또는 나의 일생을 통해 잊지 못할 경험일거다. 전차를 타고 드라이브 하다니! 세X이는 방문기간 내내 어쩐지 기가 죽어있는 거 같아 영 보기 안됐다. 보기 안된 건 고사 하고 내가 역정이 낼 때도 있었다. 내 수양이 부족한 탓이다. 세월이 그의 의기소침을 치유하겠지. 그리고 나의 옹졸함도!
아 참. 며칠 전에 혜X가 자기의 친구와 함께 여길 찾아와 삼부연 폭포수에 갔었지. 미쓰박. 국민학교 선생님. 나이 들어 보였었지. 별로 감동을 못했다. 그리고 키가 작다. 나는 키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놈이다. 덕X를 그토록 귀엽다 생각 하면서도 ‘결혼 상대자’로 생각 못할 만큼 나의 키 콤플렉스는 깊다.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한 나의 인격은 키와 비례 해 짧아질것이다.
1966.8.27
서울 나갔다. 변송X한테 전화를 걸었다. 조마조마했다. 두어 달의 격조가 그로 하여금 찬바람을 나에게 안겨준다면? 떨렸다. 만일의 경우 내가 직면할 실망과 자존심의 상처를 겁내며 가슴이 짐짓 조여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허나 수화기를 통해 내게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도 맑고 투명했다. 아니 오히려 포근히 정답고 부드러웠다. 만나줄 수 없느냐는 나의 말에 만날 수 있다는 그녀의 담백한 대답은 나를 부르르 떨리게 하는 기쁨을 안겨 주었다. 수화기를 놓았다.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그 많은 나의 우려가 지나친 자학이었다고.
만났다. 얼굴이 좀 빠진 것 같다. 그간 앓았다 했다. 어디가 아팠었냐는 물음엔 단지 좋지 못한 곳이에요 하는 대답뿐이었다.
거닐었다. 창경원 담을 따라 걷다가 의대 안에 들어가 한적한 정원을 걸었다. 손목 한번 잡지 못하고, 늘 조금 떨어져서 걷는 그녀가 나로썬 몹시 어색하고 오히려 불안했으나 처음이니 그러는 게 아니겠는가 생각 하였다. 왜 내 편지에 답장이 없었느냐는 나의 물음에 펜팔 같은 서신 교환에 답장이 일일이 필요 한가요 하는 그녀의 대답은 나를 멍 하게 만들었다, 변송X는 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사람과 결혼하세요 하던 일전의 말과 우리는 펜팔 사이예요 하는 오늘의 말. 두 번 듣는 그녀의 서운한 ‘선’이다. 나와의 사이에!
허나 어쨌던 좋다. 그 정도의 가느다란 선이야 얼마든지 허용 할 수 있다. 그만큼 나 자신 지금 변송X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다. 다음 주말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 했다. 마치 꿈같다. 너무나 쉽게 다가와 주어 오히려 겁이 날 지경이다. 저러다가 훌쩍 내 곁에서 날아가 버리지나 않을지.. 여자 친구들이 있었어도 이토록 깨끗하고 애틋하며 즐겁고 티없고 벅찬 감정은 처음이다. 정말 처음이다. 송X와 헤어지니 밤 9시가 되었다.
육 개월여 소식 없던 서대문 원X네 가고픈 생각이 불쑥 생겼다. 대학 다니며 꽤 오랜 기간 아르바이트 했던 가정. 아버지는 종로에서 고급 식당을 운영한다. 나는 세X이 말마따나 계획 없이 일을 벌이는 무조건 다발적 성격이다.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대문 40-1번지 대문을 밀고 들어섰다. 명X이 정X이 원X 어머니가 있었다. 원X 어머니가 뜻밖에도 친절하게 대해준다. 명X이는 여전히 차고 정X이는 여전히 새침데기다. 그들이 나를 맞는 태도는 여러 가지로 날 실망시킨다. 허나 예상했던 것이니 그리 놀랄 것도 없다. 들르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머리보다 발이 먼저 들어 선 곳이니 발을 탓하자. 정X이는 여전히 복스럽다. 그녀도 덕X처럼 좀더 강렬히 끌어주지 못하는 나에게 불만이 있는 것인가? 아닐 것이다. 숙대 초년생 정X이는 좀 건방지지만 귀엽고 티가 없어 나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고집이 좀 있지만 의외로 생각이 깊고 관대한 면도 있다. 빨리 잡지 못하면 훌쩍 날아 가 버릴 것 같으나 덥석 잡기에는 너무 어리고 갖추어 지지 않았다. 그저 은근한 미련뿐이다. 그리고 잡힐 것 같지도 않았다. 자격지심 이랄까. 그러나 이제 나는 정X에게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이다.
밤 열한 시에 서대문 집을 나와 수색엘 갔다. 형님과 형수와 조카딸이 있는 곳.
1966.8.28
엊저녁에 얘기 꽃 피우느라 늦게 잔 탓인지 피곤이 겹쳐 몸이 몹시 무겁다. 어제 약속한대로 오후 세시쯤 서대문을 들렸다. 명X이 정X이 원X 모친과 함께 영화 ‘마담 X’를 구경했다. 원X 엄마는 몸 컨디션이 좋질 못했으나 내가 가자 하니 무리해서 따라 나오셨다. 표를 내가 사기로 했으나 굳이 원X 모친께서 사셨다. 끝까지 우기며 내가 표를 샀어야 했다. 날 소극적이라고 할지도 모를 명X이나 정X에게 멀쑥한 심정이었다. 영화가 끝나니 밤이 늦다고 원X 모친이 호의를 베풀어 원X네 집에서 잤다. 생각할수록 내 행동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 몇 달간 발을 끊었다가 불쑥 찾아 간 집이다. 그리고선 잠까지 잔 것이다. 과거 오랫동안 기거한 집이고 오늘은 원X 엄마도 계셔 앞 뒤 생각 없이 자긴 한 것이었지만.
1966.9.4
운천의 다방으로 부지런히 시간에 대어 나갔다. 송X와 지난 번 만났을 때 운천서 만나자 했는데 조금 망설이는 기색이긴 했지만 그럴게요 했던 것이다. 변송X를 부대로 데려 와 전차대대를 구경시키고, 독신자 숙소도 안내하고.. 하면서 나는 며칠간 꿈에 부풀어 있었던 터였다.
전자 손목시계에서 정오 12시를 알리는 가느다란 신호음은 오히려 날 으스스 춥게 한다. 가슴이 옥죄어 오는 것 같다. 변송X는 나타나질 않았다. 나는 또 자면서 남의 다리를 긁은 것 아닌가? 입이 모나게 일그러진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아니면 교통사고라도? 아니겠지.. 혹은 무슨 병이라도? 그도 아니겠지.. 혹은 예까지 와서 못 찾는 거나 아닌지.. 아니야.. 그럴 리도 없어. 그러면.. 날 가볍게 봐서? 혹은 자기자신이 너무 헤프다는 인상을 주지나 않을까 하는 얄팍한 자존심에서? 아! 아니길 빈다. 지금이라도 제발 나타났으면.. 제발 나타났으면.. 제발.. 나타나 주기를 마음과 체면을 온 몸에 쏟아 부으며 기원했다.. 제발 와 다오. 시간은 흐른다. 시간은 사정이 없다. 마치 시시한 너. 찬물 먹고 속 차려라 하는 식으로 째깍째깍 초침을 밀어 내고 있다. 에잇! 모든 것이 싫다. 주번사관도, 일직 장교도, BOQ청소도..
혼자 돌아 오는 나의 발길은 허탈과 실망에 힘이 빠졌다.
기대에 찬 나는 아침부터 독신장교 숙소 미화 작업에 소대원까지 동원시켰었다. 여군 참모총장이 전차 대대와 중대 시설을 방문한다고 농담 하며 부탁했더니 소대원 몇이 쓰레기를 말끔히 치워 주기까지 했다. 우리가 자는 BOQ에 아직 한 번도 여자가 방문한적이 없었다. BOQ 소대장 모두는 여자 손님을 은근이 기다리고 있는 터였다. 그리고 내가 바야흐로 그 테이프를 끊으려 했던 건인데.. 다 쓸데 없는 짓이 되어 버렸다. 모두가 나의 허황되고 가치 없는 계산 착오였다.
1966.9.6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이 여름이 마지막으로 뿌리고 가는 이별의 표시인가. 쌀쌀한 날씨가 눈앞에 다가오는 것 같아 벌써부터 몸이 움츠러든다.
어제와 같은 주말은 다시 없기를 빈다. 분노와 아쉬움과, 어쩔 수 없는 자학과 자괴감에 얽혀 온종일 몸과 마음 둘 곳 몰라 했다. 송X.. 나의 마음속에 그녀가 자리를 잡고 들어 앉을 만큼 오랜 세월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녀야 말로 나의 이상형인지 심각하게 생각 해 볼 여유를 가지고 있었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저 그녀 아니면 나에겐 여자가 없을 것 같은 심정이었던 것 같다. 다 부질없다. 과연, 한 여자로 인해 마음이 번거로워지고 줏대 없는 인간이 되기엔 내가 아까워야 한다. 내가 중심에 서 있고 여자가 있어야지, 지금의 나는 한 여자 생각에 온통 나의 전부를 빼앗기고 있다. 나를 찾아야겠다.
1966.9.8
오늘은 악몽의 비운의 날이다. 내 일생 처음 당해보는, 앞으론 다시 치러선 안될 악몽이었다. 우선 나는 서종X 소위의 영전에서 그의 명복을 빈다. 애써 친하기에 인색했던 나의 좁은 마음을 자책하며 그에게 다시 한번 용서를 빈다.
오늘 16시 50분 그는 인근 채석장에 돌을 운반하러 갔다. 명목은 중대 미화 작업. 군단장이 대대를 방문한다 해서 며칠 전부터 온 대대가 미화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는 터다.
그 채석장은 나도 두어 번 가본적이 있는 곳이다. 높은 산에 위치한 그곳은 4톤짜리 육중한 군 트럭을 마치 외줄타기 하듯 곡예를 부려야 하는 깎아지른 절벽위로 위험천만한 도로가 곳곳에 있는 길이다. 까맣게 보이는 낭떠러지가 험하게 입을 벌리고 있어 평소에도 운전병한테 벼랑 쪽이 아니고 절벽 쪽으로 차를 가까이 가도록 지시하는 곳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심한 비가 내렸던 터다.
오늘 나는 심한 설사로 속이 몹시 안 좋아 중대장에게 보고 하고 독신장교 막사에서 쉬고 있었다. 군단장 부대 시찰 준비 일환으로 실시하는 대대 규모의 미화 작업에서 채석장 돌을 실어 나르기 위해 트럭들을 인솔하는 임무는 거의 내 몫이었다. 채석장에서 가져온 돌은 하얀 색의 차돌들로 막사 주변 처마 밑 화단을 둘러 쌓고 흰 페인트를 칠하면 아주 정결 해 보여 벌써 몇 번 째 운반 해 오는 중이었다.
으레 나에게 떨어질 명이었으나 오늘따라 내가 그 자리에 없으니 중대장은 서소위에게 채석장 작업 차량을 호송 해 가도록 지시 하였다. 소대장들이 연일 계속되는 환경 미화작업에 넌더리가 나 있는 터였지만 서소위는 평소에도 불평이 많은 편이었는데 더구나 자기 소관이 아닌 것을, 그것도 밤 늦게 귀대하게 되는 작업을 맞게 되어 속이 상한 채 부대를 나섰다 한다. 더구나 일과가 끝나가는 시각에 차량을 끌고 가게 된 서소위는 부대 정문에서 작업차량 등기를 요구하는 위병에게 네가 나를 한 두 번 본 것도 아닌데 새삼 무슨 기록이냐며 불 같이 화를 내고 떠났다 했다.
독신자 숙소에서 누워 있는데 저녁 여덟 시경 김송웅 소위가 헐레벌떡 뛰어 들었다. 작업 나간 차가 산 길에서 전복 되었다는 것이다. 작업 나간 병사 중에 하나가 그 먼 거리를 달려 와 보고 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뛰어와 보고까지 할 정도니까 그리 큰 사고는 아니기를 바라면서도 그 산 길을 가 본적이 있는 나는 겁이 덜컥 났다. 중대 짚을 급히 불러 내 앞 동네 중대장 숙소에 들렸다가 곧장 산으로 향해 달렸다. 사고는 생각했던 대로 크게 나 있었다. 까맣게 내려다 보이는 급경사 아래 개울에 처 박힌 트럭은 아직도 라이트가 켜진 채 여기 저기 흩어진 부상병들을 의무대에서 실어 나르고 있었다.
서소위! 길옆에 눕혀 놓았던 서소위의 시신이 차에 실렸다. 믿어지질 않았다. 서소위가 죽다니! 사람이 이렇게 허무하게 가다니! 그 옆엔 운전병이 역시 차디찬 시체가 되어 왼쪽 팔이 잘려 나간 채 실리고 있었다. 나는 트럭 뒤에 타고 서소위를 바닥에 누인 채 부대까지 호송하는데 트럭이 요동 칠 때마다 서소위의 입과 코에선 피가 철철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차디차게 가버린 사람이었다.
중상자들이 속속 실려왔다. 서소위를 싣고 대대로 들어가면서 나는 난생 처음 느껴보는 걷잡을 수 없는 비통과 절망감속에서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설마.. 살아나겠지.. 하던 거의 발악에 가까운 희망도 대대 정문을 들어서면서 사라지고 오로지 전율과 허무만이 내 가슴을 쥐어 뜯었다. 이 길은 불과 두 시간 전에 서소위가 간 길이다 두 시간 전, 그가 이곳을 지날 때 그의 육체는 말짱하였으며 심장이 뛰면서 추석에 집에 가면.. 하고 여러 가지 무지개 같은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허나 지금 그는 흔들리는 트럭 위에 몸을 맡긴 채 사고의 문도, 숨결도 닫혀 있다.
전 날 쏟아진 폭우가 산 길 밑을 파먹어 지반이 약해진 것이었다. 돌을 실은 트럭을 버티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트럭이 구르면서 그 위에 앉아있던 사병들은 첫 굴림에 이리 저리 나뒹굴어 죽지는 않았으나 인솔장교인 서소위와 운전병은 차와 함께 끝까지 굴러 참변을 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부대에 도착 후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운전병의 팔이 하나 없다고 난리가 나 나는 다시 부대원 몇을 인솔하고 팔 찾기에 나섰다. 다 들 횃불을 들고 근처를 뒤지면서 조마조마 하던 터에 부대에서 차가 달려 와 끊어지다시피 한 팔이 사체 밑에 깔려 있는 것을 의무실에서 못 보고 팔이 현장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고 했던 것이니 즉시 귀대 하라는 보고를 하기에 모두는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깜깜한 밤에 횃불을 들고 팔을 찾는 것은 오히려 섬뜩한 경험이었던 것이다.
서소위는 안치소에 누였다. 서소위의 시신 앞에 앉아 나는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서종문 소위. 너는 내대신 갔다. 스물 다섯 해를 살다 허무하게 가 버렸구나. 나 대신!
눈물이 솟구쳤다. 소주 두 병을 다 마시고 나는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 울고 또 울었다.
1966.9.10
서소위의 영결식을 했다. 조사를 쓰고 읽은 나는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나는 서 소위를 아는가? 아픔과 슬픔을 진솔하게 겪고 있는가? 나는 한 때 그를 미워한 적이 있었다. 대체로 장교는 병을 때리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으며 만일 그런 장교가 있다면 그건 장교에게 문제가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서소위는 유일하게 병들에게 손찌검을 해 정도가 너무 심해 소대장들이 짐짓 중대장 명이라며 서소위를 거짓 불러 화를 삭이게 한 적도 있었다. 나는 장교 체면 깎는 그가 밉기도 했다. 지금 나는 그를 미워 했던 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시신과 몇몇 병들을 인솔하고 의정부 군 화장터로 가 화장을 했다. 생전 처음 큰 체구의 서소위가 화덕으로 들어 가 한줌의 재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삶과 주검, 움직임과 정지, 시작과 끝, 있음과 사라짐의 변화를 며칠 사이에 보았다.
서소위는 한줌의 뼈와 재로 가볍게 변해 유골 함에 담겨지고, 나의 마음은 더 무거워진 채 서소위를 앞에 안고 다시 퇴계원 군 영현 안치소로 이동했다. 험하고 먼 길이었다. 안치 한 후 우리 모두는 밤 늦게 야미리 부대로 귀대 했다. 이것으로 끝났다. 모든 것은 끝났다. 불과 삼일 전에 BOQ에서 잡담하던 서 소위는 이제 없다. 서소위. 저 위에서 부디 평안히 쉬기를! 미안하다!
1966.9.19
어제의 일이 너무도 생생하게 날 괴롭힌다. 엊그제 서울 나갔었다. 송X한테 전화했다. 없단다. 어저께 오후 다섯 시에 원남동에서 만났다. 얘기를 많이 나눴다. 아주 서글프고 몹시 비위가 뒤틀리는 여러 가지 얘기를.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나와 자기는 정말 급속도로 친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서로가 몰랐었고 단지 꾸밈없는 경쾌함이 둘 사이를 부담 없이 좁혀준 것이라고. 허나 자기에겐 집안에서 내정한 사내가 있단다. 그래서 나에게 더 큰 괴로움을 주기 전에 서로 헤어지는 게 좋겠다고. 내가 너무 강하게 나와 자기로서는 무서워졌노라고. 옳은 말이다. 단지 다섯 번째 만나는 그녀에게 나는 마치 애인 다루듯 해 버렸으니 말이다. 여자로써의 그 태도하며 그 말투는 오히려 비싸게 사주고 싶을 정도로 인정 있고 조리 정연한 것이었다. 그실 나는 그녀에게 너무 빨리 다가갔다. 너무 조급하게 대든 것이었다. 나는 단지 내가 좋아해도 후회 안 할 여자라고 단정 해 놓고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그녀를 대했던 것이었다. 그녀는 수동적일 수 밖에 없는 ‘여자’인 것을.
서운하고 분했다. 모처럼 내 마음에 든 여자를 허무하게 놓쳐버린 나의 씁쓸한 심정을 그 무엇으로 위로 할 수 있단 말인가. 설사 딴 여성이 나에게 나타난다 해도 내 마음속에 번개처럼 찍은 송X의 기억은 쉬 사라질 것 같지가 않다. 결국 나는 또 한번 실패하고 만 것이다. 나는 또 한번 바보가 돼 버리고 만 것이다.
나 자신 아주 역겨운 바보, 미운 오리새끼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패배를 합리화 하기 위해 아무리 그녀의 험을 들추어 내려 해도 들춰낼 건더기가 없다. 그도 그럴밖에. 단지 다섯 번 만났을 뿐이며, 만날 때마다 그녀는 나에게 즐거움과 성숙함을 주었을 뿐이고 짧은 만남이었지만 많은 것을 주고 받은 셈이었다.
그녀의 안경 알이 엄청 두꺼웠다던지 얼굴이 썩 예쁘지 못한 것 등이 합리화 될 수는 없다. 쪼잔하고 덜렁거리며 생각이 깊지 못한 몽당연필 같은 나, 육군 소위.
자..그만두자. 이러다간 더 쓰린 패배의 잔을 마시게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자. 버스를 타고 가다
마주 오는 버스와 한 정거장에 서게 되어 그쪽 사람과 몇 마디 얘기를 주고 받았다고 치자. 목적지가 처음부터 달랐다고. 그러나 여운은 길 것 같다. 내 뇌리에서 변송X를 밀어내려면.
1966.10.25
오랜만에 들쳐본 일기다. 남자 넷이서 한방을 쓰게 되었다. 웃으며 살아야지.
아버님으로부터 소식이 왔다. 큰형이 다시 형수와 살기로 했단다. 며칠 전에 다방에서 분을 못 삭이며 열을 내던 형 생각이 되살아나 씁쓸한 웃음이 난다. 결혼 식 후 한 달도 못 가 삐꺽 거리기 시작 한 형의 결혼생활이었지만 어쩐지 불안하기 짝 없다. 잘 해 보아요. 제발.
소대장 생활이 고되다. 부대가 갑자기 들끓는 것처럼 이것저것 제재가 심하다. 참아야지. 다섯 달 남았으니까. 송X에겐 9월 19일 이후로 통 소식을 하지 않았다. 물론 만나지도 않았다. 그실 바쁜 탓도 있었지만 마음 줄 놓고 나니 그녀가 나에게 더 이상 전부가 될 수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나에게 필연적이 아니기도 했기 때문이다.
서울 나가면 형한테 들려볼까?. 나에게 앞으로 외국 유학 갈 준비 하라고 이르던 형이 며칠 전엔 제대해서 취직할 자리를 마련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허긴 아름같이 크게 벌였던 내 이상도 시간의 흐름 속에 세월에 씻기고 현실에 조여 손바닥만하게 작아졌지만 막상 형한테서 취직 얘기 듣고 보니 새삼 서글퍼진다. 넌 공부를 더 해라. 이런 말을 바랬나?
여하튼 나는 내 삶의 중요한 결정을 나 혼자 해 왔다. 대학 선택도 그러했고 ROTC 지망도 그랬다. 이제 군복을 벗은 후의 거취도 그래야 할 것 같다. 나는 언제나 나 혼자였다.
덕X에게 편지했다. 놓치기는 아깝고 거머쥘 순 없지만 문기적 문기적 줄을 잡고 있자는 나의 충청도식 근성이 또 꿈틀거린다.
1966.11.1
오늘 부대에서는 웃지 못할 희극이 벌어졌다.
웬 한복 두루마기를 걸친 할아버지가 막대기를 들고 중대 막사에서 김재X 소위를 쫓고 있고 김소위는 동네를 향해 도망가는 촌극이 벌어진 것이다. 칠곡에 조강지처가 있는 김 소위가 딴 여자와 살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그의 부친이 헐레벌떡 부대를 들이 닥쳐 몽둥이를 들고 아들을 좆으시는 거였다. 부대 안에서 그런 촌극을 벌이시니 부자가 닮았다고나 할까? 나는 불현듯 김소위가 살림 차리던 그 여자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1966.11.13
11월 2일부터 12일까지 열흘간 휴가를 다녀왔다. 떳떳하지 못하고, 불안하고 우울했으며 고독했던 열흘이었다.
1967.1.7
오래 만에 펼쳐 든 일기장이다. 일기장은 나의 정신상태를 말 해 주는 듯 하다. 일기는 하루를 보내고 마음을 정리하는 삶의 한 요소라고 생각 하면서도 이렇게 띄엄띄엄 거르는 것은 그만큼 나의 생활이 어수선하다는 징조다.
몇 주 전이었던가? 이덕x 소위, 황만x 소위와 운천 시내 단골집에서 술을 퍼먹다 밤이 늦어지니 주모가 소개 해 주는 여관에 가 자게 되었고 친절한 주모의 배려(?)는 그것으로 끝나지를 않았다.
12월 30일에는 송려X를 만났었다. 그녀는 이미 딴 남자와 약혼한 처지라 했다. 그녀와 사귄 것은 아니나 나의 친척인 혜X가 소개 해 주어 몇 번 만나 식사를 하긴 했지만 그녀에게 마음 심지 않은 게 퍽 잘했다 싶다. 그녀의 말 들은 의미 심장하여 듣기 좋았으나 끌리는 매력은 없었다. 그녀의 크리스마스 카드를 BOQ 베개맡에 얌전히 모셔 놓고 환상의 나래를 폈지만 그것은 그저 환상으로 끝났다.
정X이와 명X이. 나는 원X를 보러 간답시고 서대문 40-1번지를 드나든다. 가서는 거만하고 활달하며 없는 것 없는 집안에서 자라 때로는 덜 돼먹은, 그러나 마음을 붙잡는 그들과 서로 말장난 하며 짐짓 마음씨 좋은 아저씨가 된다. 헌데 그실 나는 무엇을 바라고 그 집을 드나드는가. 위선자였다 나는.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또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나는 그 위선의 탈을 40-1번지에서 가장 집요하게 뒤집어 쓴다. 그실 나는 방황하고 있다. 모든 것은 잡히지 않는 것 뿐인데.. 그리고 내가 정작 잡아야 할 것은 따로 있는데 하필 잡히지 않는 것을 잡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 나는 서울 거리를 활보하는 아베크 족에게 신경질적이고 질투 섞인 시선을 던질 만큼 옹졸하고 속 좁으며 아둔한 인간임에 틀림없다. 나는 나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나 자신을 직시하려면 나는 나로부터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야 한다. 그래야 올바로 나를 쳐다 볼 수 있다.
12월 18일엔 덕X로부터 편지가 왔었다. 내가 크리스마스 카드를 부친 다음날이었다. 덕X의 편지는 역시 꽉 차고 짜임새가 있었다. 영특하고 알찬 여자. 나는 너를 무척 사랑하고 있었어. 그러나 끝내 사랑한다는 말이나 사랑하는 감정은 나타내지 못하고 말 거야. 아니 못해야 된다고 나는 마음속에 짓고 있지. 네 편지엔 월급봉투와 너를 견주었다고 나를 공박했다만 나는 그런 기억이 없는데.. 넌 가끔 엉뚱한 사연을 적어 보내더라. 그게 실은 깨물어 먹도록 귀여운 너의 일면이기도 하지만.
예비역 편입도 4개월! 4개월 후면 어쨌든 나는 군복을 벗는다.
1967.3.5
무척 바쁘고 자질구레한 사연들이 후딱 지나갔다. 2월 6일 중대 전술 훈련을 나가서 그것이 끝나자 마자 곧 영화 촬영으로 들어간 것이 아직도 끝을 맺지 못하고 있다. 영화제목은 신영균 주연에 김동학 감독인 ‘황색 마후라’다. 탱크 부대를 배경으로 한 전쟁 영화인데 나의 소대가 지원차출을 당해 30명의 소대원과 다섯 대의 전차를 끌고 20여리 떨어진 촬영장에서 야영하며 스태프들과 한 달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소대원들은 나름대로 색다른 경험 이어 좋아했고 나 또한 임기 말년 뜻밖의 임무여서 의미 있다 싶었다. 뚱뚱이 양훈과 깡마른 트위스트 킴이 엑스트라로 나오고, 난데없이 문주란이 달밤에 전차 옆에서 구슬프게 노래 부르는 영화였다. 김동학 감독의 첫 데뷰 작품이고 또 전차를 주제로 한 작품은 한국에서 처음이라기에 우리는 성심껏 출동 해 주었다.
전차가 낭떠러지 위 도로를 달리는 장면이면 과감하게 몰아 탱크의 위용을 돋보이도록 최선을 다 했다. 그러나 때로 그리 쉽지는 않았다. 민간인, 더구나 예술인들이 전차나 병력을 움직여 달라는 것이 전술적 원칙을 벗어나는 장면이 종종 있어 설명을 해 주어야 했고 그것이 잘 수용되어 촬영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 되었다. 소대원들은 전차를 몰아야 하니 엑스트라로 많이 출연 하였으나 나는 처음부터 카메라에 잡히지 않도록 감독에게 부탁 한 터였다.
결국 군 생활 중 기억에 남을 일이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영화제작이 이토록 영세한 예산으로 진행 되는 것도 한심하다 생각 되었다. 장면 하나하나에 전부 돈과 타협해보고 촬영기를 돌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감독이 신인이어서인지 제작자인 사장이나 톱스타인 신영균에게 질질 끌려 다니는듯한 인상을 풍겼다. 촬영장 설치들이 너무 초라해 어처구니 없을 때도 있었다. 토치카에 설치한 대전차 포를 구공탄 난로의 양철 통으로 박아 놓은 것 까지는 봐 준다 해도 포연을 하얀 연기가 풀썩 풍기는 장면으로 처리 해 꼭 애들 장난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예산 타령하는 감독은 최선을 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예비역 편입도 며칠 남지 않았다.
1967.3.30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내가 시간을 좆는 건지 시간에 좆기는 것인지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3월 8일 나는 짐을 꾸려 2년 채우기를 한 달 남기고 부대를 나섰다. 우리 ROTC 동기들은 월급을 포기하기로 하고 보따리를 일찍 싼 것이다. 마음이 착잡하기도 했다. 근 일년을 나의 연락병으로 수고해준 김희X 일병이 보따리를 들고 버스 정거장까지 따라 배웅 해 주었다. 정을 표시하는 그가 고마웠다. 우리는 어디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서울에 도착한 나의 마음은 오히려 황량하기 짝 없었다. 그 누가 나의 예비역 편입을 축하 해줄 것인가. 새삼 나는 나 혼자 뿐이라는 것을 느꼈다. 응암동 집에 닿았다. 방은 차다. 아무도 없었다. 또 한번 쓸쓸한 심정이 되었다. 왠지 모른다. 나만 혼자 취해 있었다. 다 들 멀쩡하고 바쁜데..
3월9일 호X과 함께 동숭동의 문리대를 찾았다. 취직얘기가 선뜻 나오질 않는다. 그렇게 보아서인지 모두가 나와 인연이 없던 사람들 같다. 몇 년 전만해도 나는 저 교수님들 밑에서 강의 듣기에 열심이었는데. 학교를 나서며 나는, 말주변도 융통성도 활기도 없는 나 자신이 싫었다.
큰형을 찾아갔다. 짐작대로 썰렁했다. 의미 없는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3월 10일 시골로 내려갔다. 어머님께선 퍽도 반가워하신다. 그래도 별 사고 없이 군 복무기간을 마치고 나온 나를 대견 해 하셨다. 역시 어머니셨다. 그제서야 나는 무엇엔가 포근한 마음에 푹 안긴 기분이 되었다. 아버님의 초췌하신 모습이 나의 가슴을 억눌렀다. 여러 얘길 했다. 결국 가정얘기에 가선 역시 쳇바퀴 돌 듯 할 뿐. 답답함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3월 11일 고향엘 내려갔다. 어쩐지 모두가 낯설다. 3월 12일 할머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고모님이 고북 장요리에서 오셨다. 반가웠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고모님. 나는 학생 때 여름방학이면 고모님 댁에 가 며칠씩 묵으며 서해안 개펄에 나가 먹거리를 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노령이신 고모님께선 이제 마지막으로 오신 거나 진배없다. 인자하고 유하신 분. 남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안 하시고 사신 분. 고모님은 한 줌의 조약돌 마냥 체구가 작으시다. 내가 여름방학 때마다 놀러 가면 힘 드실 텐데도 나를 끌고 30리 길도 걸어 다니시며 고북 지방의 먼 일가 친척들에게 나를 인사 시키시곤 했다.
덕X 생각이 난다. 갑자기..
3월 13일 서울 올라왔다. 역시 취직을 해야겠다. 대학원 과정에 들어가지 못 할 바엔 취직을 빨리 해야 할게 아닌가. 고등학교 교사로 취직 하는 것은 나의 유일한 수순이다. 시기가 늦어 지금은 어느 학교나 신규채용이 마감 되었다 했다. 까딱하면 6개월이나 1년을 기다려야 한다.
부대에서 나온 지 일주일.. 퍽 오래 된 것 같다. 나는 아직도 군복을 입고 있다. 3월 14일 형의 소개로 덕X여고에 갔으나 덕X의 성명X 선배가 나를 딴 사람으로 착각하여 자리가 찾다 했다. 그러면서 숭X고교의 정찬X선생을 소개해 준다. 숭X? 생소한 이름이다. 허나 역사가 퍽 깊은 학교란다. 숭X 중고등학교는 이화여대 맞은 편에 있었다. 정선생은 나를 퍽 반겼다. 대학선배다. 자리가 있단다. 우리 대학 졸업생을 기다렸단다. 여기 안되면 상X여고에도 자리가 있으니 안심하란다. 교장 선생님과 면담을 했다. 여러 가지를 묻는다. 내일 학생을 상대로 연구수업을 할 수 있는가고 물으신다. 암 하고말고. 내 그걸 마다 할까. 고 3반에서 연구수업 하기로 했다.
3월 15일 연구수업을 했다. 다섯 째 시간에 3학년 3반에서. 교실엔 교장과 교감 이하 여러 선생들이 들어왔다. 일 테면 취직 시험이다. 역시 장교 생활한 보람인가. 여러 학생들과 선생들 앞에서도 별로 떨리질 않았다. 수업 후 교장선생님은 나를 여러 가지로 칭찬하였다. 마치 2-3년 경험 가진 선생 같다는 거다. 나의 모교 황인X 교감 선생님에게 나에 대해 알아봤던바 착실하고 근면하고 침착하다 했는데 과연 그렇다는 것이다. 내일부터 나와 달랜다. 날아 갈 듯 기분이 좋다. 이제 취직은 되었다. 이제 선생님이 된 것이다. 집에 오니 여러 가지로 착잡한 게 많다. 사람의 욕심이란 한정 없는 것인가? 아니 내 욕심이 너무 크고 내가 속물인 탓인가? 일단 결정되고 나니 새삼스런 초조와 함께 자포자기되는 쓸쓸한 심정이 된다. 대학원이고 공대고 이젠 먼 남의 일이 되어버렸다는 자괴감이 엄습한다.
3월 16일 학교에 출근했다. 어쩐지 피로가 겹친다. 중3, 고2, 중2를 맡았다. 학생들의 수준은 높지 못한 편이나 다소곳하고 명랑하며 되바라지지 않았다. 인격이 있으신 교장 선생님 때문인가? 여학교가 아닌 게 한편 생각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 남학생들 가르치는 게 더 굵고 보람 있을 것 같다. 17일 전교생 앞에서 취임인사를 했다. 대대장학생의 거수경례에 내 손도 절반쯤 올라가다 말았다. 아직도 ‘군인’인 나의 기계적 반응이었는지 모른다. 2500명 까만 제복의 학생들이 정렬해 있는 운동장에서 나는 떨지 않고 짧지만 뚜렷한 취임인사를 스스로 생각해도 멋지게 해 냈다.
응암동에서 숭X까지의 교통편이 쉽지 않다. 좌석 버스를 타고 다니자니 교통비가 한 달에 2500원 들어간다. 그렇다고 집을 따로 나가 지낼 도리도 없다. 그럴 돈도 없거니와 방을 구한다 해도 밥은 누가 해 준단 말인가?
내가 소대를 이끌고 촬영 지원했던 영화 ‘황색마후라’ 개봉 시사회 초대장 20여 매가 왔기에 몇몇 사람들에게 돌리고 광화문 네거리의 국제 극장에 갔다. 그러나 영화는 그리 감동적이지 못했다. 상연 중 많이들 졸고 있었다.
1967년 6월 2일
오전에 전화가 왔다. 작은어머님께서 어젯밤에 작고하셨다는 전화였다. 믿어지질 않는다 며칠 전 시골에서 뵈었을 때는 정정하셨는데.. 고혈압, 고혈압의 저승사자가 우리집안에도 찾아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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