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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8일, 제60회 슈퍼볼이 열렸다. 나는 경기 결과보다 늘 하프타임에 펼쳐지는 퍼포먼스에 더 눈이 간다. 하프타임 쇼는 단순한 음악 공연이 아니다. 그 시대가 무엇을 중심에 두고 무엇을 주변으로 밀어내는지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문화 행사이다. 올해 역시 그 무대는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올해 하프타임 쇼에서 강한 인상을 남긴 퍼포먼스 중심에는 푸에르토리코 출신 가수, 배드 버니(Bad Bunny)가 있었다. 레이디 가가와 릭키 마틴이 함께 출연했지만 그들의 존재감은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배드 버니는 노래를 부르는 팝스타라기보다, 라틴 아메리카 문명권을 상징적으로 호출하는 화자처럼 보였다. 카리브와 라틴 아메리카를 연상시키는 색채와 자연풍광이 무대를 채웠고, 그는 그 공간을 동서남북으로 위아래 구분하지 않고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노래했다. 국기도, 자막도, 해설도 없었다. 그러나 메시지는 분명했다. 라틴 아메리카는 더 이상 세계 문화의 주변부가 아니며, 이제 스스로의 언어와 미학으로 중심에 서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번 퍼포먼스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국가’의 부재였다. 특정 국가를 직접 지목하지 않았다. 대신 각 나라를 연상시키는 색감과 기후, 풍경이 연속적으로 등장했다. 이는 라틴 아메리카를 행정적 경계로 나뉜 국가들의 집합이 아니라, 공통의 역사와 기억을 공유하는 하나의 문화권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이었다. 특정 국가는 사라지고, 땅과 사람의 감각만 남았다. 이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정체성을 이미지로 환원해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자연 풍광의 선택 또한 의미심장했다. 도시와 마천루 대신 숲과 산, 사막과 바다가 무대의 배경이 되었다. 이는 관광 영상이 아니라 기억의 지도였다. 푸에르토리코를 중심으로 한 카리브와 라틴 아메리카가 공유해온 상처와 생존의 역사, 그리고 반복되어온 착취와 이주의 흔적이 자연의 이미지로 호출되었다. 특히 바다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이주와 디아스포라의 통로로 읽혔다. 서로 다른 공간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질 때, 관객은 라틴 아메리카가 공유해온 상처와 생존의 서사를 직관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배드 버니의 동선 역시 중요하다. 그는 무대 중앙에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했다. 이는 라틴 디아스포라의 몸짓을 연상시킨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했지만, 어디에서든 문화를 만들어온 사람들. 그의 이동은 국경을 지우는 행위였고, 그 자체로 정체성의 선언이었다. 이 무대에서 그는 한 나라의 대표가 아니라, 경계 위에 서 있는 공동체의 목소리였다.
이 모든 장면이 슈퍼볼이라는 무대에서 펼쳐졌다는 사실은 이 퍼포먼스를 더욱 정치적으로 만든다. 슈퍼볼 하프타임 쇼는 미국 대중문화의 상징적 중심이다. 그 중심에서 스페인어 노래와 비미국적 미장센이 전면에 배치된 것은 ‘포용’의 제스처라기보다 문화 혁명에 가깝다. 이는 미국이 다른 문화를 받아들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가 더 이상 하나의 중심만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미국 내 반응이 엇갈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라틴 커뮤니티에게 이 무대는 대표성의 회복이었다. 설명되지 않아도 이해받을 수 있다는 감각, 번역되지 않아도 중심에 설 수 있다는 경험이었다. 반면 일부 보수층의 불편함은 이 퍼포먼스가 정확히 무엇을 건드렸는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왜 영어가 아니냐?”는 물음은, 이제 그 질문 자체가 유효하지 않다는 시대적 변화를 증명한다.
이번 무대는 과거 하프타임 쇼의 연장선이면서도 분명한 분기점으로 기억될 것이다. 비욘세가 미국 내부의 흑인 역사와 억압을 전면에 내세웠고, 샤키라와 제니퍼 로페즈가 라틴 문화를 미국식 엔터테인먼트 문법으로 번역해 보여주었다면, 배드 버니는 번역을 거부했다. 그는 타협하지 않았고, 그 거부 자체가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표현과 인정의 단계를 넘어, 이제 기준을 재설정하는 단계로 진입했음을 알린 것이다.
이 퍼포먼스가 남긴 의미는 분명하다. 라틴계 아티스트가 더 이상 ‘특별 편성’이나 ‘다양성 코너’의 일부로 소비되지 않는다. 자기 언어와 자기 미학 그대로, 세계 최고 무대의 중심에 설 수 있다는 가능성이 현실로 다가왔다. 이는 음악 산업의 변화이자, 문화 권력의 이동을 상징한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 장면을 상상하게 된다. 언젠가 슈퍼볼 하프타임 무대에 대한민국 출신 가수가 오른다. 그는 영어로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다. 하와이 파인애플 농장과 사탕수수밭, 한국전쟁, 세탁소와 편의점의 불빛과 함께 아시안 이민자들의 삶이 녹아 침묵 속에서 축적된 세대의 기억을 노래한다. 배경에는 태평양을 건너온 이민자들이 처음 발을 디뎠던 항구의 풍경이 흐른다. 그 노래는 동정이나 설명을 구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는 여기까지 이렇게 살아왔다”고 말할 뿐이다.
그 공연은 특정 집단이 마침내 중심에 ‘초대’받았다는 신호가 아니라, 중심 자체가 더 이상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징표가 될 것이다. 올해 라틴 아메리카가 자신을 말했듯, 언젠가 한국과 아시안의 이민 역사 또한 그렇게 말해질 것이다. 설명 없이, 번역 없이, 그러나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언어와 율동으로!
타운 뉴스 2016.2. 안창해 칼럼
2/16/26 자 타운뉴스 안창해 칼럼의 ‘슈퍼볼 하프타임의 문화 혁명‘ 은 배드 버니의 노래와 퍼포먼스를 통해 역사의 질곡에서 강대국 그늘에 숨어 있었고, 지금도 숨죽여 온 라틴 문화의 강렬한 자아의식을 그려낸 표현이었음을 설파 합니다. 그리고 이런 돌풍이 한국의 K-문화도 언젠가 미국의 중심가에서 포효할것을 조심스럽게 희망 합니다.
한편, 미국에서 영어 아닌 자국어로 크게 내 건 간판을 볼때마다 어쩐지 ‘모르면 말고‘ 식의 옹고집을 배드버니의 halftime 노래에서 받은 아쉬움은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