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unity
미주 한인들, 특히 이민 1세대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는 미주 중앙일보가 올해로 창간 50주년을 맞는다. 지난 1974년 창간 당시 걸음마를 단계였던 미주 한인사회에 올바른 정론을 세워 한인이민사에 한 획을 긋게 한 주인공 중 한 사람이 김건진(영문 62) 동문이다. 부인 김순옥 여사와 함께 남가주 토렌스에 거주하는 김 동문을 전화로 인터뷰했다.
1974년 서울 중앙일보에서 국회 출입기자였던 김건진 동문은 10월의 어느 날 부장(데스크 기자)의 호출을 받았다. 야당 담당으로 정신없이 뛰어 다녔고 그날 마침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인터뷰하고 들어온 직후에 뜻밖에 인사 발령을 받았다. 데스크는 “미국 특파원 발령이 났으니 준비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10월31일 미국행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김 특파원은 1965년에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대략 9년차 기자였지만 비행기 안에서 내내 새로운 환경에서 어떻게 헤쳐 나갈까 골똘히 생각했다.
막상 미국에 도착하니 중앙일보 미주판 창간 작업에 투입됐다. 중앙일보의 첫 LA특파원 겸 미주판 창간 요원이었다. 중앙일보 입장에서도 미주 서부를 맡은 LA상주 특파원은 처음이었다. 당시 워싱턴 DC에는 김영희 특파원이 있었다.
당시 LA에는 이미 한국일보와 동아일보가 신문을 발행하고 있었고 중앙일보는 한국판과 미주판을 합쳐서 총 8면을 발행했다. 중앙일보는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서울 본사 출신 중견 기자가 파견와 미국에서 처음으로 기자 생활을 시작한 후배들을 훈련시키고 이끌던 전통이 있었는데 김건진 동문이 그런 역할을 처음으로 했던 것이다.
김 특파원은 3년 후 워싱턴DC 특파원으로 부임했다. 당시 중앙일보는 TBC 동양방송도 함께 운영했기에 김 특파원은 TBC특파원도 겸했다. 워싱턴 DC에서 6년을 더 근무했다. 카터 행정부때여서 워싱턴 특파원의 역할이 컸다. 당시 주한미군 철수와 한국내 인권문제, 또 박동선 사건으로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갔고 한미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을 때다. 그는 빠른 정보와 올바른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 백악관과 국회의사당,국방성 등을 오가며 현장 취재에 진력했다.
본사 귀임 후 김건진 동문은 불과 5년만에 다시 LA행 여객기를 타야 했다. 이번에는 LA지사장이 됐다. 미국은 한국에게 있어서 중요한 동맹인데 특히 남가주와 LA는 한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해 그 중요성이 남달랐다. 김 동문은 “11년만에 와보니 한인사회가 예전에 비해서 쑥쑥 크는 것이 보였다.인구가 느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면서 “특히 이민 오는 가정이 영어신문을 볼 정도는 아니어서 이민자로서 성공하기 위해서 한글로 신문을 내는 것이 무척 중요했다”고 회상했다. 지금과 달리 한인 사회나 한인 경제력이 튼튼하지 않았고 한인 사회 구심점으로도 한인 언론사는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영향력에 비해서 신문 제작부터 경영까지 매우 어려웠고 한국 본사에서는 안정된 중앙일보 LA지사를 위해서 ‘구원 투수’격으로 사내에서 미국 경험이 가장 많고 능력 있는 김 동문을 또 다시 파견했던 것이다.
당시 서울 본사 이종기 사장의 주문은 ‘확 뒤집어 놓으라’는 큰 주문을 했다. ‘본사에서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것’을 다짐 받았다. 당시 LA중앙일보는 올림픽 사옥시절이어서 사세가 경쟁사에 비해서 밀리는 상황이었다. 사무실이 얼마나 낡았는지 때 아닌 비가 왔는데 천정에서 비가 줄줄 새서 기자들이 양동이를 사무실 여기저기에 놓고 일을 하고 있었다.
당시 이종기 사장이 LA를 방문했을때 김 지사장이 그를 적극 설득해 사옥을 옮기기로 합의했고 지금의 윌셔플레이스 건물을 사서 이전했다. 당시 김건진 LA지사장은 1966년 건축해 IBM이 쓰던 3층짜리 건물이어서 ‘앞으로 20년은 튼튼하게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90년 김 동문은 서울로 다시 귀임했다. 그 사이 외신부장, 국제국장을 역임했고 1993년~94년에는 한국신문 편집인협회 국제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아울러 중앙일보에서도 논설위원(1990년), 심의실장 등 주요 보직을, 1994년에는 뉴스위크 편집국장, 95년에는 시사지 담당국장으로 활약했다. 특히 1994년 12월에는 한국 언론인들의 선망의 대상이며 언론계는 물론 정치계 사회계에서 권위있는 중견기자 모임인 관훈클럽 총무로 선출됐다.
1997년 또 운명처럼 LA로 돌아오게 됐다. 지난번에는 LA지사장이었는데 이번에는 LA지사장 겸 미주본사 사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서울 중앙일보에 새로 부임한 홍석현 사장이 남가주에서 경쟁사를 압도할 인물로 김 동문을 선택한 것이다. 덕분에 김건진 사장은 1998년에 취임해 3년 임기를 마치고 2001년부터는 부회장으로 2년, 이후 고문으로 1년간 재임하며 한인사회의 비약적인 성장에 힘을 보탤 수 있었다.
퇴임 후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는데 남가주에 남았다. 1남(수혁)1녀(경림)가 대학부터 미국에 살면서 정착했기 때문이다. 또한 서울 본사 정년이 55세여서 이미 미주 본사 사장으로 발령할 때 임원인 본사 이사로도 발령을 받아 퇴임 후 미국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2003년 라디오코리아를 바로 인수한 김영옥 변호사와 손태수 회장 부부가 그를 찾아왔다. 인수한 지 얼마 안된 라디오코리아의 기초를 쌓아달라는 간절한 요청이 있었다. 그래서 2004년부터 1년 넘게 라디오코리아 사장을 맡아 기틀을 잡아줬다.
김건진 동문은 “몇 년전 타계한 이건희 회장이 원래 중앙일보 이사였다. 미주 한인사회에 대한 비전이 있었다”면서 “그가 이병철 선대 회장의 후계자인 것을 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이사는 LA직원들과 일대일 개별 면담할 정도로 LA에 애정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김 동문은 “많은 한인 사업가들이 있었지만 한인 특유의 부지런함과 성실로 부를 일군 수많은 한인 사업가들의 성공 신화에 함께 할 수 있어 뿌듯하다”며 “특히 중앙일보가 이들을 앞에서 끌고 뒤에서 미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매우 보람됐다”고 밝혔다.
김건진 동문은 1943년 충남 청양에서 김기돈씨와 황갑수 여사의 3남 3녀중 2남으로 태어났다. 청양국교(44회)와 청양중학교(12회)를 졸업한 그는 학창시절부터 우수한 학업 성적과 뛰어난 리더십으로 학생회장을 역임하는 등 촉망 받으며 성장했다. 특히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려워진 가정 형편임에도 불굴의 의지와 부지런함으로 배움의 길을 개척, 서울로 올라와 고교부터 아르바이트 등 고학으로 휘문고를 다녔고 서울대 문리대 영문과에 장학생으로 입학,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한 인간승리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미주 동창회보 2024년 2월호 - 장병희(서문 86)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