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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Topic: 창운(蒼暈) 이열모(李烈模) 화백
moonbyun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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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창운(蒼暈) 이열모(李烈模) 화백
on: October 19, 2013,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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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LA의 한 호텔에서 함석헌 선생 추모 정기 모임이 있었습니다.

학생 때 함석헌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감동과 희열, 후련함과 깨달음을

체험하며 잠까지 설쳤던 저는 달력에 굵게 표시 해 놓고 기다리다 모임에

참석 하였습니다.

거기서 옆에 앉아 계시던 이열모 선생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포용의 인상, 많은 것을 담고 계시나 표출하지

않으시는 겸손에 매료되어 저는 이분을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이 물씬 났습니다.

그분은 동양화가이신 창운 이열모 화백이었습니다.

그 후 틈틈이 만나 뵙고, 우연히 서울서도 만나 이열모 선생님의 개인전도

관람하며, 시골에 있는 제자 화가들의 화실도 들르곤 했습니다.

늦으막히나마 만나 즐겁고 말 나누어 얻음이 있으며 형처럼 친구처럼 편하게

대하면서 인생을 배울 수 있는 선배를 저에게 가져다 준 함석헌 선생께 감사 드립니다.

문병길

P.S. 이코노믹지에 이열모 화백의 2012년 개인전에 관한 기사가 있기에 아래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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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 이열모ㅣ자연에는 오묘한 진선미 이치가 있다
기사입력 2012.10.16 16:23
최종수정 2012.10.16 16:23

서울 종로구 팔판동 한벽원미술관에서 만난 팔순의 창운(蒼暈) 이열모(李烈模) 화백은 회색정장에 밝은 그레이 스트라이프 넥타이가 차분하면서도 지적 이미지를 물씬 풍겼다.

“야단스럽게 예술을 내세우는 편이 못되는 나는 소박한 자연주의자”라는 그는 화업 60여년 감회를 “자연의 한 모퉁이를 그리고 있지만 그 세계서 오묘한 진선미를 느낀다”라고 말했다.

1950년대 초반 대학시절 월전 장우성(張遇聖)으로부터 그림을 배우고 인물화가로 화단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60년대에 스승 심산 노수현(盧壽鉉)의 관념적인 표현방식을 거쳐 70년대 초까지 사생현장에서 바로 그림을 완성하는 방식을 도입해 사찰이나 전통 목조건축 표현에 주력했다가 차츰 한국의 산수쪽으로 시야를 확장해 나갔다.

80년대 운율 넘치는 묵선의 시골경관과 90년대에 서정적 감수성이 짙은 작품들을 선보이다 2007년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다. 한국 산천과 다른 LA에서 검은 묵선과 담청색 위주의 추상적 산수화를 최근에 보여주고 있다.

그는 후학들에게 “내 것을 한답시고 하는 것이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눈요기로 가는 경향이 짙다”며“정신세계에 터 잡고 있는 순수 우리 것에 눈 돌리고 ‘나’에게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작품을 해 주었으면 한다”라고 당부했다. 화백에게 ‘그림은 무엇인가’라고 묻자 “나의 인생을 그리는 것이니 인생노트”라고 요약했다.

한편 한국화가 이열모 작가는 서울대 미대 회화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와 하워드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성균관대 사범대학장 겸 교육대학원장을 역임했다.

이코노믹 리뷰 권동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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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열모 화백의 쾌차를 빌면서..

연락이 되지 않아 백방으로 알아 본 결과 드디어 이열모 선생님이 LA 어느 양로원에서

바싹 마른 채 쓸쓸히 초최해 가고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작년(2014) 7월 경 여름에 감기가 폐렴으로 도지고 식도가 완전히 망가져 입으로는 물도 못 마시고

기계가 배에 낸 구멍을 통해 고무 호스로 영양을 공급하는 상황에서 양로원 생활을 하고 계셨습니다.

전화는 아예 옆에 가지고 계시지도 않아 내가 그 동안 수십 차례 전화 해도 연락이 안되었던

것입니다.

사모님은 딴 요양원(치매 환자 요양원)에 계시다는데 당신도 못 알아 보니 만나 무엇 하느냐

했습니다. 선생님의 외아들이 사모님을 모시고 왔으나 당신을 못 일아 보시더라는 말에 서글픈

마음이 솟구쳤습니다. 50년 넘게 지켜온 부부의 인연이 깡그리 잊혀지는 치매라는 병은 정말

무섭습니다. 그 동안 수차례 선생님 내외분을 저의 주말 산장에 모시고 가 머물기도 했지만 공항

근처에서 프릿츠 빵집을 운영하고 있다는 아들은 전화 통화조차 못 했는데 언제 만날 기회가 있으면

아버님이 왜 이지경이 되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폐렴 후 의식을 잃고 병원에 3주

입원하고 깨어나 보니 이런 상태가 되어 있었고, 의사들은 더 이상의 치료를 포기한 채 당신은

이곳 양로원에 보내졌다는 것입니다.

이열모 선생님과 사모님은 불과 육 칠 개월 사이에 너무 골 깊은 나락으로 내려 앉으신 것입니다.

저는 그만 할 말을 잃었습니다. 연세가 80이 넘으셨지만 작품 활동도 하시고, LA의 화랑에는

꼬박꼬박 나가 그림을 그리시던 이열모 선생님..

평소 건강을 지키기 위해 십 오 년 가까이 현미 밥만 드시고, 부인을 끔찍이도 돌보셨던 이열모

선생님이 기적 같은 의술로 식도도 고쳐지고, 살도 붙고, 웃음을 되 찾는 날이 오기를 간구 합니다.

2015년 2월 10일

문병길

moonbyun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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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Re: 창운(蒼暈) 이열모(李烈模) 화백
on: June 12, 2015,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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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참 기분 좋은 날입니다. 이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 동안 이열모 선생님을 찾아 뵐 때마다 입으로 침조차 못 삼키고 복부를 뚫어 꽂은 호스로 영양을 공급받는 이 화백님의 말라가시는 모습이 그저 안타까움 뿐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제 마음속에는 선생님이 이 양로병원으로 옮겨지기까지 헐리웃 장로병원과 LA 굳사마리탄 병원의 의사들이 최선을 다 했는가 하는 의구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현대 의술로 식도를 만들지 못하는가 하는 의구심과 함께, 80이 넘으신 선생님이 의사들로부터 '쉬운 결정'의 희생양이 된 것이나 아닌지, 혹은 당신 스스로가 쉽게 포기한 것이나 아닌지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된 것입니다.

선생님 부부를 가끔 산에 있는 저의 작은 집에 모시기도 했지만 선생님의 외아들은 아직 일면식 없었는데, 이런 저런 생각끝에 당신 아드님에게 두 병원의 병상기록을 구해 오도록 부탁드리기에 이르렀습니다. 바이올로지를 전공한 저의 며느리와 둘째가 뉴저지주에서 가깝게 지내는 의사들이 있어 제가 작년에 수술 받았을 때도 여러모로 도움을 받은바 있었는데, 마침 그들에게 이열모 화백의 얘기를 하니 기록을 얻을 수 있게 되면 그곳 친구 의사들과 상의 해 보겠다 했던 것입니다. 감기가 폐염으로 번져 작년 가을 두 병원에 입원하신 후 이곳 Virgil 양로병원으로 이송된 것인데 당신은 자세한 내막을 모르겠다 하시니 답답하기 짝이 없는거였습니다. 딴 의사 opinion을 듣지 않고 그저 속수 무책으로 기계주입의 영양공급에 의존하면서 체력이 소진되어가는 선생님을 불때마다 이건 아니다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몇 주가 지나도 기록을 얻지 못하고 그저 '아들이 바쁜 모양' 이라는 말씀에 제가 나서기로 하였습니다. 헐리웃장로병원에서는 제가 그냥 가도 기록을 주겠다 하는 반면 굳사마리탄 병원에서는 환자로부터 '병원 기록 release' 위임장을 받아와야 된다 하여 그 양식을 메일로 받았습니다.

십 년 넘게 현미만 드시던 인내와, 80이 넘으셨어도 1마일 가까이 되는 댁과 화실을 매일 걸어 출퇴근 하면서 건강관리를 잘 하시던 분이라 달리 무슨 방도가 있을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였습니다. 그러나 한 편 생각하면, '높은 연세에 수술하다 더 나쁜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여 주위에서 그리 결정한것을 엉뚱하게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 아닌가 하는 망설임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여하튼 오늘 큰 맘먹고 선생님의 authorization 싸인 받으려고 양로원을 들린 것입니다.

그런데 양로원 308번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계신 선생님을 뵙고 의뢰서 서명을 부탁하며 얼굴을 보니 전보다 화색이 돌고 몸이 많이 호전된듯한 모습에 놀라고 있는중, '며칠 전에 목구멍이 트이면서 물을 마셔도 허파로 들어가지 않고 이제는 점심에 미음을 먹기 시작했다'고 말씀 하시는 거였습니다. 할렐루야!

일년 가까이 침만 삼키려 해도 허파로 들어 가 고통 받으며 헛기침으로 뱉어 내야 했던 식도가 아무 치료 없이 트이기 시작 했다는 것은 정말 믿기 힘든 낭보였습니다. 반갑고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래도 한 번 쯤 의사의 진단을 받아 보고 어떤 주의를 해야 이제 기적 같이 소생하고 있는 식도를 온전히 복구 할 수 있는지 다짐 해 보시라는 부탁을 하면서 양로원을 나서는 저의 발걸음은 훨훨 날것 같이 가벼웠습니다.

2015년 6월 10일

jobogy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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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Re: 창운(蒼暈) 이열모(李烈模) 화백
on: June 15, 2015,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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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인정이 넘치는 글을 읽은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정을 나누는 그런 사회였는데 요즘은 메말라 가고 각박한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문 선배님의 그 따뜻한 마음에 감동을 느낍니다. 이 열모 화백님의 회복을 기원합니다.

moonbyun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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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Re: 창운(蒼暈) 이열모(李烈模) 화백
on: October 9, 2015,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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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열모 화백의 '미음 넘기기'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살 붙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으며 '밥기운'이 다르긴 다르다고 하셨는데 말입니다.

어쩌다 미음이 기관지로 넘어 들어가는 바람에 폐렴기가 도져 중지하게 되는

안타까운 상황을 맞았지요.

다시 기계로 영양을 공급받는 생활이시지만 희망을 잃지는 않고 계십니다.

너무 아쉬운 마음에 헐리웃 장로병원과 굳 사마리탄 병원의 진료 기록서를 떼어

2nd 오피니언을 주선할까 시도 했지만 환자 본인이 모든 기록에 관여를 안하신데다

당신께서는 오히려 아둥바둥 안간힘 쓰기보다는 순리대로 그저 지내시겠다는

의지어서 저도 일단은 접어 두기로 하였지요.

제가 살붙이라면 악착을 내겠습니다만 한계를 느끼는 절제도 필요 한 것 같았습니다.

날로 발전하는 의술과 의료 기계들로 언젠가는 이열모 선생님이 휠췌어를 벗어나

다시 캔버스 앞에 서시는 날이 올것을 기원 할 뿐입니다.

문병길

다음 기사에 두번 클릭하면 글씨가 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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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byun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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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Re: 창운(蒼暈) 이열모(李烈模) 화백
on: February 25, 2016,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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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운 이열모 화백께서는 2016년 2월 24일 새벽 세시에 돌아가셨습니다.
오늘이 25일 아침이니 하루 전에 돌아가신것을 전혀 모르고 산에 어떻게
모실까 궁리 중이었던 저 였습니다.

며칠전 전화 통화에서 건강하신 목소리에 저는 다시 한 번 선생님께 의사의
정밀 검진을 받아 식도 치료의 가능성을 타진 해 보시는 게 어떠냐 하니
선생님께서는 그저 이렇게 살다가 천명으로 살다 가시겠노라 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틈틈이 양로병원 뒷뜰에 휠체어로 나가신다 해서 그러면 날씨
풀릴 때 전에 가끔 가셨던 나의 주말 산 집에 나들이를 하시겠느냐 물었더니
반가운 목소리로 거처하시는 양로병원에서 허락 해 주면 해 보고 싶다
하셨습니다.

마침 날씨도 따듯해져 휠체어니 영양 공급기기니 등등을 어떻게 갖추며 산에
모실까 곰곰히 궁리 중이었는데 어제 새벽에 돌아 가셨다는 소식을 접한 것
입니다.

그 동안 건강이 호전되는 와중에 갑자기 응급 상황이 벌어져 이곳 헐리웃
장로병원에 옮겨지셨는데 이번에는 당신께서 이겨내지 못 하신 것입니다.

애석한 마음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그저 거짓말처럼 가 버리신 고인의
명복을 빌 뿐입니다.

문병길

moonbyun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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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Re: 창운(蒼暈) 이열모(李烈模) 화백
on: February 26, 2016,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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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운 이열모 선생님을 추모하며.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은 불과 7년 전 이곳 LA의 함석헌 선생님 추모 회에서 만나 뵌 것이 처음 이었습니다만 충북 보은이 고향이신 선생님의 온후하고 포용하며 격의 없이 이웃을 당기시는 창운의 품격에 저는 어려서부터 익힌 형처럼 마음을 주고 지내 온 터였습니다.

한참 젊으셨을 때는 역학에도 심취하여 독학으로 경지에 달해 주위에서 입 소문을 타기도 하였으나 화가로서의 외도가 될까 취미생활을 접은 바 있지만 그렇지 않아도 고고한 화백의 차분하고 맑은 표정에 상대방을 통찰하는 매력까지 갖춘 80대 신사이셨던 창운께서 갑자기 떠나셨다는 비보에 가슴이 멥니다.

감기가 폐렴을 부르고, 식도가 망가져 정상 식사가 안돼 요양병원에 들어가시어 배와 연결된 기계로 영양을 공급 받기 두어 해 전까지 선생님은 늘 부인과 함께 LA 거처에서 30여분 거리의 당신 화랑을 걸어 다니시며 작품활동을 해 오셨습니다.

삼 년 전 서울에 나간 적이 있어 팔판동 한벽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계시던 선생님을 뵙고, 전시장 벽 하나를 온통 채우다시피 한 선생님의 거작 앞에서 한 동안 넋을 잃은 듯 움직일 수 없었던 기억이 새로우며 서울 미대와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신 반석 위에 선생님의 전문적인 인품이 어우러져 빚은 작품이 미술 문외한인 저마저도 꼼짝 못하게 했던 게 아니었나 합니다.

두 내외분을 가끔 산에 모시면 부인은 식사 때마다 남의 젓가락 가까이에 찬을 밀어 넣느라 바쁘셨는데 재 작년부터 당신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말씀 하시던 창운 선생님의 눈가에서 짙은 외로움을 읽으며 가슴이 저리기도 하였습니다. 입으로 식사를 못하시는 괴롭기 짝 없는 처지에서도 한마디 좌절의 꺾임 없이 세상을 관조 하셨으며 과묵하나 강하고 깊은 눈빛으로 찾아가는 이에게 많은 말씀을 하신 셈입니다. 말 없으신 가운데 많은 의미를 전달하는 인품이 있으셨습니다.

워낙 자기 자랑에는 인색 하셨던 분이라 저는 알고 지내면서도 밖에서 주워 듣는 이야기로 창운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던 터이며 이런 분을 가까이에서 마음에 둠이 저의 은근한 자랑이었는데 이제는 기억 속에 묻을 수 밖에 없어져 허망합니다.

부디 홀연히 떠나신 그곳에서는 기계대신 입으로 식사하시고, 선생님 말씀처럼 ‘밥 살’ 오르셔서,매일매일 놓치어 그렇게도 허전 해 하시던 화폭을 가까이 하시기를 빕니다.

2016년 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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