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 올립니다.
3년 전에 중국의 황산 관광을 한적이 있었습니다. 서울 가는 길에 적은 돈 들여 동남아 패키지 여행을 곁들일 수 있어 해 본거지요.
여행사에서 arrange 해 준 대로 황산 근처의 상해 공항 터미널에서 가이드와 만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드디어 여행사 직원이 피켓을 들고 다녀 우리 일행이 모아지고 우선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관람 후 식당 테이블에 둘러 앉게 되었습니다.
일행은 다섯 부부로 된 열사람이었는데 일행 중 앞머리가 훤 해 나이 들어 보이는 한 멤버가 ‘자 우리 모두 초면인데 며칠 같이 보낼 터이니 서로 인사나 합시다' 하는 거였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동부 어디서 온 사람이며 이름이 아무개라 하면서 소개 하였습니다만 저는 그의 이름을 새겨 듣지 않은 채 그저 속으로 '사람 참 괜찮아 보이네' 하면서 저의 순서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들 미국에서 출발한 사람들이었는데 LA 의 아주관광에서 어렌지가 되어 이곳에서 집합을 한것입니다.
제 차례가 와 이름을 대고 LA에서 왔노라 하니 아까 처음 자기 소개를 한 친구가 눈을 크게 뜨며 ‘야 너 병길이 아니니.. ‘하고 정색을 하는 거였습니다. 그제서야 저도 그를 알아보고 ‘아 너 연우구나!’ 하면서 50여 년 만의 해후를 하였습니다. 문리대의 같은 과를 졸업하고 몇 십 년 만에 만나니 세월이 형상들을 바꾸어 놓아 못 알아 본 것이지요. 그 동안 한 번 서울 동창 모임에서 잠깐 얼굴을 본 적은 있었지만 세월은 둘의 모습을 너무 바꾸어 놓아 공항 대합실에서 아주 여행사 피켓을 졸졸 따라 다니면서도 서로 몰라 보았던 것입니다. 모두들 '세상 참 좁다’ 하였습니다.
그가 동부 어느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는 소식은 들어 알고 있었으며, 대체적으로 혼자 사색을 즐기는 타입으로, 겸허하며 진솔하게 대학 사년을 채운 그는 전공분야에서 뛰어나게 앞서고 수학 학문에 관한 확신을 가진 실력파였습니다. 내심 제가 무척 좋아 하던 동기였는데 몇 십년의 세월은 젊던 얼굴을 변모시켜 서로를 몰라보게 되었으니, 길에서건 전철 안에서건 서로 모른채 스쳐가는 옛 인연이 많겠다 싶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여행의 즐거움에 친구 만난 즐거움을 더하게 되었는데, 황산의 수려한 산세와 오직 사람들이 지게를 져 날라 지었다는 곳곳의 사찰 규모는 가히 중국인들의 끈기와 웅장함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황산에는 8천개 가량의 계단이 있다는데 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걸어야 하니 지칠만도 하였습니다. 재미있는 일은 일행 중 비교적 젊은 사람 하나가, 젊다 해야 50은 넘었겠지만, 피곤 해 더 이상 계단을 오르내리지 못하겠노라고 ‘가마’를 타게 되었습니다. 황산의 가파른 계단 길들을 두 사람의 본토인들이 사람을 가마에 지고 가뿐이(?) 훨훨 나는데 일당 20여불 받고 있었습니다. 뺏짝 마른 두 사람이 미국에서 고기만 먹어 무게 꽤나 나가는 사람을 넉근히(?) 메고 산 길 누비는 것을 유심히 보니 나름대로 출렁이는 두 장대의 율동과 발 걸음을 기술적으로 조율하여 가마위의 무게를 분산시키는 거였습니다. 그러나 땀을 계속 훔치는것을 보니 안쓰럽기도 하였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이 일거리이니 그저 생각의 차이다 싶었습니다. 그저 황산 가마꾼으로 태어나지 않은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수 밖에 없다 하겠습니다. 그들이 받는 수고비의 절반이 가마꾼 조합에 간다는 말을 들으니 좀 심하다 싶었습니다. 계단을 오르는 이곳의 모든 보급품과 일용품은 전부 이와 같은 인부들의 지게 운반으로 이루어 지고 있다 합니다. 크레인이나 케이블 등 기계화된 장비를 마다하는 이유는 이러한 인부들의 생계 수단을 차단 할 수가 없어서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친구는 옛날 학교 시절에도 그랬드시 여행 내내 일행의 후미에서 지쳐 낙오되는 멤버가 없는지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는 베테랑급 산악 대원이었는데 지금도 산을 탄다 하였습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