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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Topic: 유종의 미 유감
moonbyun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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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유종의 미 유감
on: November 18, 2013,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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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의 미 유감

신문마다 채동욱과 청와대, 그리고 대 검찰청에 관한 기사를 거의 매일 쏟아내던 6년 전 저는 난생 처음 겪었던 대검찰청 중앙 수사 부(대검 중수부)에서의 가슴 옥죄던 기억이 지금도 되살아 나곤 합니다.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는 정부기관의 수장들이 새 대통령 맞을 때 편치 않을 것은 짐작이 가지만 이번 채동욱 전 검찰청장의 경우는 혼외 아들까지 등장하여 꽤 떠들썩 하였습니다. 공직의 전리품화 시비가 5년마다 벌어지는 세태를 보면서 순간적으로나마 옛날 일을 떠올리는 것은 제가 겪은 기막힌 경험이 간접적이나마 ‘대통령의 우리사람 챙기기’에 연관되기도 한 것이었으며, 그로 인해 저에게는 못 다한 석유 프로젝트에의 한이 있기에 그 사연을 옮겨 봅니다.

강남 중수부의 여닫이 유리창들은 한결같이 사람 몸이 빠져 날 수 없는 작은 창들로 되어 있었습니다. 설마 그렇기야 하겠습니까마는 그곳에서 수 차례 진술서를 작성하면서 입술이 바싹 마르기도 하고 등에 식은땀도 흘리고 보니, 그 작은 창틀들은 마치 피소 인들이 진술서 쓰다가 감정을 삭이지 못해 몸을 던질까 봐 그토록 작게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죄 없는 사람도 이곳에서 장시간, 하루에 열 시간 넘게 연속 이 삼 일을 검사와 그 밑의 계장들을 맞대고 ‘진술서’ 작성에 실랑이를 하다 보면 ‘없던 죄’도 만들어 질 수 있겠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생각 해 보면 그렇게 약 8차에 걸친 중수부 출두 명령을 끝까지 치러야 했던 저나, 같이 긴장하며 준비에 여념이 없었을 중수부 담당 직원들이나 한결같이 끈기와 인내심의 대결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어찌 보면 잡아 먹히느냐 먹느냐는 식의 야수들의 싸움 같았습니다만 없는 죄를 덮어 쓸 수 없다는 저나 내 임무에 충실해야 되겠다는 저들의 업무태도는 둘 다 포기 할 수 없는 대결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미국 의 메이저 석유회사에 근무하다가 한국의 두 대기업 자원 개발부서 책임자를 거쳐 인도네시아 마두라 유전 개발에 참여하고 미국 가주지역에 돌아 와 살던 제가 국내 골판지 제조업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세하㈜에 영입되어 회사의 카지흐스탄 석유탐사 및 개발 사업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2006년 여름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은 세하가 해외 석유개발에 뛰어들어 카자흐스탄 프로젝트를 시작한지 일년여가 지난 때였는데, 카자흐스탄 광권 소유주와 연계 된 카자흐스탄 현지 운영권자의 이례적인 운영방식으로 인해 세하 자원개발 기술진과 첨예한 불협화가 야기되어 드디어는 운영권자인 카자흐스탄인 미하일이 세하 기술진 해체를 세하에 주문하고 서울 기술진들의 현장 접근을 ‘불허’하고 있었던, 개발 투자자와 광구 운영자와의 관계 치고는 석유 개발 프로젝트 사례상 보기 드문 난센스 상황 이었습니다.

세하 자원사업부서의 대표로 취임 한 후에도 광구의 열쇠를 쥐고 있는 카자흐스탄 광구 운영회사의 행태는 여전 하였으며 그것을 극복할 만큼 세하 최고 경연진의 정책적 대비가 미흡한 가운데 저는 나름대로 40년 가까운 석유인생의 마무리를 하는 심정으로 열심을 내던 2008년 6월 후반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신사동 사무실에 중수부 사람들이 들이닥쳐 모든 서류들을 압류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제 사무실 말고도 회장실, 기획임원 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들이 건네 준 기소 이유 서에 저는 공문서 위조, 이동윤 회장은 사기융자신청 및 허위공시의 혐의로 대한민국 검찰에서 기소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생전 처음 받아보는 기소장에 저는 어안이 벙벙하였으며 업무상 공문서를 위조할 직책도 아니었던 터라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회장은 자택까지 압수 수색을 당했다 하는 소리도 들리는 가운데 며칠 후 회장이 구속 되었습니다.

저는 언제 구속 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무실에서도, 거처하는 아파트에서도 낯 선 사람이 문을 두드릴까 마음 졸이는 날이 시작되면서 유치장하고는 인연이 없던 저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90년대 중반에 러시아 속국에서 벗어나 아직 산유국으로서의 체계가 잡히지 않은 카자흐스탄의 미 분양 석유 광구들은 주로 정부 고위층들이 이권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외국 석유회사나 기업들은 이들과 동업형태로 광구 개발권을 획득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습니다.

세하㈜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2005년도에 카자흐스탄에 아크리트 현지 회사를 설립하고 카작 서부지역 악토베와 카스피 해 사이에 있는 여의도의 스무 배 가까운 면적의 사크라마바스, 보조바 두 개의 광구 탐사와 개발을 세하가 초기 탐사/개발비 6000만 불을 전액 출자하는 조건으로 광권을 소지한 카자흐스탄의 스터기스 회사와 동업 형태의 유전개발을 시작 하였습니다.

스터기스사는 광구 운영권을 가지는 조건이었으며 알마티에 MGK라는 광구 운영 회사를 설립, 러시아와 한국계 혈통인 미하일 리 를 대표로 하고 카자흐스탄 동부 악토베에 현지인 기술자 지부를 설립, 세하와 MGK사가 주축이 된 대망의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입니다.

당시 한국의 제지회사들은 많은 부분을 차지하던 대 중국 수출량이 중국 정부의 자국 내 제지 생산 정책으로 인해 급감하자 자구책으로 전자, 펄프 등 사업 다각화를 시도하고 있었는데 세하㈜는 석유개발 사업을 택했던 것입니다. 비록 세하㈜는 제지회사로서 석유관련 사업 경영에는 익숙하지 안았지만 새로운 사업에 도전 의식을 갖고 회장과 임직원이 정력을 쏟고 있었습니다.

알마티 MGK사의 석유 전문가들에 의해 시추가 진행 되는 가운데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속에서 사크라마바스 광구의 첫 탐사정은 2006년 12월 말, 삼십 미터를 내 뿜는 석유/개스 분출의 굉음과 함께 탐사 성공의 희열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호사다마랄까 당시 한국의 대통령 취임 시 으레 벌어지는 되풀이 중의 하나는 전임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한국석유공사, 한국가스공사 등 공기관장들을 물갈이 하여 대통령 당선 공신들이나 자기 사람들에게 ‘논공행상’식 감투를 안배하는 행태가 있었습니다. 2008년 초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노무현 전임 대통령이 앉혀놓은 사장들을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 대기 시작한 것은 반복되는 수순이었습니다. 청와대의 영향력 하에 좌지우지 되기 십상인 대검찰청은 이 때 예외 없이 그 임무를 띠게 되어 전임자 흠집을 뒤지게 되며 그 선두에는 항상 중수부가 있었습니다.

한국석유공사 황두열 사장도 그 대상 중의 하나로 검찰로부터 조사를 받던 중에 공사의 소관이었던 ‘성공 불 융자’건이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성공불 융자 기금은 국가가 공사 및 민간기업의 해외 자원 개발을 돕고자 조성되는 기금으로 주유소 등지에서 소비자에게 일정 세금을 징수해 조성하는 자금인데, 대기업을 포함한 많은 민간기업들은 해외 석유자원 개발 시 이 기금의 융자를 받았습니다. 탐사 사업에 성공하여 추후 수익이 생기면 회사는 이자까지 쳐 정부에 상환해야 하지만 실패하면 상환의무를 면제 받기 때문에 이 성공 불 융자는 큰 투자를 요하는 해외 자원개발에 공사와 민간기업이 많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기금을 관리하는 석유공사가 가장 큰 수혜자라는 아이러니가 있기는 하지만 위험부담이 큰 석유 개발 사업에 민간 기업이 전액 투자하기란 그리 용이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황두열 사장의 비리를 캐는 과정에서 중수부는 이 기금의 운영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기금 혜택을 받은 민간기업은 물론 융자심의 위원회(융심)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석유개발공사 사장 밑에 있는 융심은 정부 기관의 고위직들과 각 기술 공사 간부 및 대학교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2007년 말까지 서울공대 에너지 시스템 공학부 강주명교수가 위원장으로 있었습니다.

방대한 기금 운영상태를 중수부가 조사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수순이기도 하였습니다.

여타 기업들처럼 2006년에 수 십 억 원의 기금을 쓴 세하도 감사 대상이었으나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만 중수부의 총체적 성공 불 조사 과정에서 융심 위원장의 자택 압수 수색도 있었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습니다.

당시 세하에서는 카자흐스탄 광구 개발비 조달을 위해 한국 산업은행과 300억원의 투자계약을 2007년에 맺은 바 있었으며 120억 원은 이미 대출 받았고 나머지 대출을 받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검찰은 세하㈜에서 압수 해 간 서류와 콤퓨터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카자흐스탄 파트너와 교신한 메일 중 산업은행 대출에 관계된 메일들을 문제 삼기 시작 했습니다. 특히 대출에 필요한 광구 평가서에 관한 메일들의 내용이 검찰의 눈에 건 수가 된 것이었습니다. 석유개발공사의 황두열 사장은 우선 무사하였으나 검찰은 치켜 든 칼로 누군가는 내리 쳐야 하는 상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누군가가 세하㈜의 산업은행 대출에 의문을 제기했고 검찰은 그 빌미를 찾아야 되는 필연의 위치에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해외 평가 업체로부터의 광구 평가서는 기술진인 제가 접수하여 회장에게 보고하고 국내 유관기관에 배포 하는 것이 저의 임무이기도 했습니다. .

산업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기 위해서는 광구의 평가서를 제출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세하는 이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GC&E(Gaffney & Cline) 콘설팅 회사에 광구평가를 위촉하고 있었으며, 이 작업에는 현장 자료가 필수인 관계로 운영회사인 MGK사가 주로 관계하며 일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평가서는 1차가 2007년 2월에, 2차가 4월에 나왔습니다만 그 당시 세하는 하루라도 빨리 최종본인 2차 평가서가 나와 산업은행의 대출심사에 대비해야 되는 처지였는데 당시 MGK 사의 시추 공정이 날씨와 자재문제로 지연되고 있는 중에 평가회사에게 제공되는 자료 역시 지연되고 있어 산업은행 대출에 큰 차질을 빚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세하㈜와 MGK사 간에는 독촉과 신경질적인 답변의 e-mail이 오가게 되었으며 이것을 포착한 중수부에게 오해의 소재를 제공한 셈이 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세하와 MGK 사이에서는 1차 보고서의 기술적 내용 중 석연치 않은 내용에 관한 질의도 오가게 되었는데, 이는 기술자들 간에 으레 있을 수 있는 의견교환이었으나 검찰의 눈에 잡힌 이러한 e-mail왕래 내용들이 그들에게는 세하가 무리한 산업은행 대출을 위해 평가서 작성에 압력을 행사하였으며 2차GC&A평가사의 보고서를 기다리다 못한 세하㈜ 기술진이 서울에서 내용을 변경 조작하고 회장은 그것을 산업은행에 제출 하여 사기대출을 받았다는 혐의로 기소를 하게 된 것입니다. 졸지에 회장은 왕 사기범으로, 기술진을 총괄하고 있던 저는 주 사기범으로 기소를 당한 것입니다. 평가서를 조작한적도 없고, 평가서를 작성한 GC&A가 근거 없이 남의 말에 휘둘릴 회사도 아닌 터에 저에게는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기술적인 내용을 부연하자면 석유 집적 구조에서 그 하부는 석유와 지하수가 접해 있는, 소위 전이대라 부르는 지층이 있어 이 층에서는 상대적으로 생산성이 낮은데 세하는 이 부분을 고의로 축소 조작하여 은폐하였으며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예상 매장량을 확정된 매장량인양 조작하고 아직 개발 단계인 광구를 개발 완료 된 것처럼 공시하여 투자자를 기만 하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한 편 세계적으로 공신력을 가진GC&A 광구 평가 콘설팅 회사는 그들의 평가서에서 세하㈜의 카작 광구를 유망광구로 평가하고 최소 3천만 바렐에서 최대 6억 바렐의 원시매장량을 산출 했으며 당시까지 시추된 결과를 토대로 예상 가채 매장량을 8천만 배럴로 추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검찰 측 오류는 세하㈜의 카자흐스탄 광구들이 탐사를 이제 끝냈거나 아직도 탐사가 완성되지 못한 광구이며 개발 완료 되기까지는 아직도 먼 광구인데 그것을 마치 평가정과 개발정, 생산정 시추가 다 끝난 광구처럼 착각하고 생산성 위주의 예단을 하고 있었던 점이었습니다. 어느 광구든지 탐사/개발된 정도에 따라 광구 가치에 포함된 리스크의 정도가 다를 뿐 광구 가치는 ‘예상’ 과 ‘확정’에 따른 기술적 평가 결과의 수치로 나오게 되나 이러한 탐사/개발 광구에 익숙하지 않고 오로지 생산중인 광구가 전공인 강교수가 갑자기 중수부 대변 공학자로 변신한 마당에 이러한 탐사/개발 분야의 역학을 수용하기는 힘든 일이었으며, 그의 말만 믿고 모든 것을 세하 기술진이 위조 했다는 가정하에 GC&A 평가서를 부인한 검찰은 시작부터 무리수를 자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008년 8월 20일자 일요신문에는 ‘세하㈜ 오일게이트’라는 기사까지 실리며 마치 검찰이 대어나 낚은 양 호들갑을 떨고 있었습니다.

2008년 7월 초 회장이 구속되고 얼마 안 있어 제에게 중수부 출두 통지가 오기 시작 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중수부에 발을 들여 놓는 저에게 담당인 박찬호 검사나 그 밑에서 증언록 작성 실무를 담당했던 이계장과 박계장은 제가 염려했던 그런 ‘괴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가끔 언성을 높이고 꾸미던 진술서를 험하게 테이블에 내던지긴 했지만 저속한 언어를 쓰거나 인격을 무시하는 막말은 없었습니다. 그 옛날 남영동의 한국 지질 연구원 에 근무하면서 박종철 고문 치사를 소문으로 들으며 질시 했던 맞은 편 중앙정보부의 상상과는 거리가 먼 말쑥하고 세련 된 공무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결코 편한 자리가 아니라는 태생적 구조로부터 오는 중압감과 긴장은 질문을 하는 자나 받는 자를 공히 긴장시키고 예리한 칼날로 가슴을 후벼 파는 전쟁터였습니다. 아마 이것은 근본적으로 죄가 없는 사람에게 더욱 모진 순간들의 연속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침 여덟 시 반부터 저녁 열 시까지 앉혀놓고 똑같은 식의 조서를 꾸미고 또 꾸미고, 바로 다음날 아침에 다시 시작하는 스케줄을 중수부는 당연하다는 듯 강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폭력 이었으며 그 폭력에 굴복하면서 내 인생의 존엄을 팔 수는 없었습니다.

가끔 ‘설득’에 지친 계장이 자리를 뜨면 뒤이어 박찬호 검사가 들어 와 ‘대표님, 미국도 이제는 한국과 범죄인 양도 조약을 맺어 아무리 미국 시민이지만 한국 감옥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하면서 으름장을 되풀이 하는 숨막히는 나날이었습니다. 계장과 신경전을 벌이며 ‘죽었다 깨도 나는 그 조서에 동의 못합니다! 하지 않은 짓을 어찌 자인 하라 하는 것이오!’를 외칠라 치면 옆방의 웬 젊은 검사가 달려 와 삿대질을 해가며 이거 한 번 맛 좀 봐야 알겠어? 여기가 어딘데 소리를 높여? 하며 깡패 같은 제스처를 하고는 했지만 담당 박검사나 그 밑의 계장들은 시종일관 점잖았습니다.

속으로는 ‘지은 죄가 없으니 감옥이 나의 주소는 아니다’ 고 자위 하면서도 때때로 등에 땀을 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였습니다. 중수부 직원들은 조서를 다룸에 감탄할 정도로 준비가 철저 해 방심하다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말의 함정에 빠지게 되어 있어 시종 긴장해야 되는 고된 시간들이었습니다. 태연한 척 하면서도 속이 타 들어가고, 입술이 마르며 심장이 뛰는 순간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느 날 박검사가 조서 작성하던 저를 어느 방으로 안내 하는데 이 방 역시 진술서 작성 하는 방인 것 같았으나 딱딱한 책걸상의 여느 조서실과는 달리 소파와 꽃병까지 놓여 있는 ‘분위기’있는 방이었습니다. 아마도 재벌이나 고위급들 진술서를 받아내는 방인 듯싶었습니다. 그런데 소파 맞은편에는 강X명교수가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검사가 나간 후 강교수는 표정을 잡아가며 저에게 말했습니다.

'나, 선배님 특별히 생각 해 말 하는 건데 솔직히 잘못을 인정하고 빌어 보이소. 검찰에서 정상을 참작 안 하겠습니까?’

기가 찰 노릇이었습니다. 물론 강교수와 저는 안면만 있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석유 계통이라는 좁은 바닥에서 일 하다 보면 웬만하면 서로 알게 되고 더구나 그와는 공대 자원공학과 선후배 관계이며, 제가 미국 테네코 석유회사 오클라호마 지사에 근무 시 강교수는 얼마 안 떨어진 털사 대학에 강사로 있어 익히 알고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갑자기 중수부를 대변하는 기술전문가로 둔갑하여 저를 마주 하니 저에게는 놀라움과 기막힘뿐이었습니다. 같은 처지가 될 번 했을 그가 하루아침에 검찰 쪽에 앉아 ‘군림’하고, 저는 공문서 위조 사기로 기소를 당한 초라한 처지가 되어 만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인연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초라한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던 것이 도대체 교수가 대 검찰청 조서실 에서 저와 마주 앉아 검사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게 상상을 초월하는 희극 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에게 ‘안지은 죄를 무슨 수로 자백하라는 것이며 빌기는 누구에게 빌라는 말인가?’라고 말하고는 방을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로도 한번을 더 검찰청 복도에서 마주친 나에게 같은 말을 또 하기에 ‘이런 말 하려면 나에게 말도 걸지 말라’고 하고 헤어졌지만 남는 것은 씁쓸함뿐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언가에 몹시 쫓기는 듯 하였으며 마치 제가 비참한 사기꾼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만이 오직 자기의 살길인양 허둥대는 초조가 얼굴에 쓰여 있었습니다.

한 달 넘게 여덟 차례나 이런 식으로 검찰 출두를 하면서 저의 몸과 마음은 기진 해 졌지만 저를 더욱 괴롭히는 것은 처음에 회사에서 기용한 태평양 법률 변호인단 이었습니다. 팀 리더인 문변호사는 제가 중수부를 다녀와도 다음 출두를 위한 상담이나 차후 대책에 관한 준비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저에게 대놓고 너도 구속 될지 모르니 준비 하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오로지 회장을 구속에서 풀려 나오게 하는 것만이 지상 목표이며 그를 위해 제가 희생 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는 태도였습니다.

검찰청 중수부에 계속 불려 다니며 조서를 작성하면서도 저는 늘 저 자신과 회장이 틀린 일을 한 게 없다는 믿음으로 일관 하였습니다.

그러나 태평양 문 변호사의 태도는 ‘회장은 아무것도 모른다. 단지 기술자의 말을 들어 공시 했을 뿐이다. 기술자가 아닌 회장이 (밑에서 평가서를 허위 조작 한들) 그 진위를 어찌 알았겠는가?’ 식이었으며 자기의 임무는 오로지 회장을 구해내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서는 어느 누구도 희생 시킬 수 있다는 의도가 확실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변론 계획을 세우고 있는 태평양 로펌에 저는 몹시 당황하고 분개하고 있었습니다.

회장은 구속 중인데, 잘못된 설정으로 난항을 겪는 변호인단의 법정 준비 과정을 지켜보면서 답답해진 회사에서는 변호인단을 태평양 에서 김&장 로펌으로 바꾸었습니다. 그것은 사기 죄가 없는 회장을 위해서 다행이었던 것이, 그렇지 않았으면 저는 회장의 누명을 벗기겠다는 대의 명분 보다 저 자신의 결백 주장에 급급하다 초라 해 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평가서를 조작했다는 것은 자기가 살아야 되겠다는 강교수의 척박한 억지였지만, 저로서는 회장이 GC&A의 최대 예상 매장량을 공시할 때 이는 예상 매장량과 가채 매장량(실제로 추출 할 수 있는 매장량)을 혼동할 소지가 있는 일반인들에게 오해를 줄 수 있으므로 전문가적 견해로는 예상 매장량 공시대신 가채 매장량을 공시 하도록 천거 해 온 터였습니다.

그리고 외부 평가 기관이 매장량 산출 시 보수적인 수치와 낙관적인 수치를 산출하게 되는데 기술자인 저로서는 보수적인 수치를 공시토록 천거 하는 중 결국 회장이 낙관적인 예상 매장량을 공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GC&A의 예상 매장량’으로 명시하며 공시 한 것이므로 사기는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어찌 보면 이 수치는 기업인이 인용할 수 있는 수치 이기도 한 중에, 단지 매장량 용어에 익숙지 않은 일반 투자자들에게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아쉬움은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하의 매장량 공시 후 과장 된 것 아니냐는 몇몇 석유 관계 기관에서의 항의가 있어 GC&A 평가서를 인용한 것임을 인지시키고, 그러나 전문가 입장에서 그들의 항의를 부정 할 수 없음을 표명하는 저의 대 석유 관계 기관 편지 발송요청을 회장이 저지 시킨 바 있는데, 이러한 일련의사내 결재 라인 서류가 검찰의 사무실 기습 압류 시 쓸려 들어 가 박찬호 검사는 진술서 작성시 그것을 가지고 저의 '양심 선언서' 채택 운운 한 바 있었습니다. 그에 저는 제가 기업 주 라면 저도 아마 그 숫자를 인용 했을지도 모르며, 이런 일련의 에피소드를 '양심 선언' 이라고 과대 포장 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진술 하였고, 박검사도 그것을 더 이상 이슈로 삼지 않았습니다.

김&장의 세하㈜ 변호인단 리더로 일하게 된 정진영 변호사를 첫 대면 하면서 김&장 변호인단이 나도 보호 해 줄 것인가를 묻는 저에게 ‘당연히 한다. 그러나 보고서 조작 건에 당신이 양심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변론 못한다. 이점을 확실히 해 주면 김&장은 대표도 지키도록 노력한다’는 약속을 해 주어 저는 한시름 놓았습니다.

중수부에서는 여전히 밀고 당기는 진술서 작성의 연속이었으나 간간이 식사 때가 되면 계장과 마주 앉아 배달된 자장면을 먹기도 했습니다. 평소에는 그리 잘도 넘어가던 자장면발이 목이 메도록 껄끄러워 물과 함께 삼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혀에 칼날을 세우고 진술서 전쟁을 치르던 두 사람이 언제 그랬냐는 듯 면발을 입에 넣기에 바쁜 모습은 스스로 생각해도 중수부가 많이 바뀌었다 싶었습니다.

저는 검찰의기소장 발부와 함께 출국 정지가 된 상태였는데 미국 시민은 30일 이상 출국금지를 시키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다 하면서 8월 중순에 박검사는 무비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방에서 저와 마주 앉아 비디오 제작을 하는 거였습니다. 박검사의 '대표님이 미국으로 가 버렸을 때를 대비 해 그간의 모든 진술을 기록으로 남겨 두는 것입니다’라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미국에서 살고 있는 저의 친구는 ‘와 버려! 왜 거기서 뭉기고 있어! 한국 재판에서 돈 많은 사람 하나 살리기 위해 너 하나 희생 시키는 건 별 거 아니야.’ 하는 거였지만 지은 죄도 없는 제가 미국으로 잠적 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중수부에서 저에게 다그치는 모든 기술적인 서류는 강교수가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계장들은 매일 새로운 질문들을 들이 대었고 나름대로 기술적인 문구들을 구사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뒤에서 챙겨주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도 저처럼 옆방에서 진술서 내용과 법정 공방 준비를 위해 검사, 계장들과 씨름 하고 있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단지 등에 땀 흘리는 처지만 저와 다를 뿐이었겠지요.

세하㈜의 법정 변론을 맡은 김&장 변호인단은 전직 판사가 낀 네 명의 변호인들 이었는데 리더인 정 변호사는 예일대 출신이고 기술적인 사항을 담당한 박준기 검사는 하버드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저와 몇 주의 석유 탐사/개발 분야 ‘학습’끝에 변호에 필요한 석유공학 기초를 두루 섭렵하는 열성과 두뇌가 있었습니다. 중수부 진술이 끝날 때마다 변호인단과 회사 간부들이 광화문 앞 김&장 회의실과 신사동 회사 사무실에 모여 논의하고 다음 진술을 대비하는 작업의 연속이었으며 이러한 회의는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저와 회장, 기타 몇몇 회사 간부들의 중수부 진술서 작성이 끝난 2008년8월 후반부터 서울 지방 법원에서 공판이 시작 되었습니다. 저는 구속되지 않았지만 법정에 갈 때마다 구치인 복에 굵은 번호를 달고 일반 출입구가 아닌 왼쪽 문에서 구치소 직원의 호위를 받으며 법정에 출두하는 회장을 볼 때마다 우격다짐으로 사건을 만드는 검찰의 부조리와 교수의 양심을 흥정한 것 같은 한 인간의 변모가 역겨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저런 차림으로 저런 자리에 설 이유가 없는 회장이나 방청석에서 심란해 있는 세하 사람들에게 한가지 공통된 것은 모두가 연못가에서 누군가가 우연히 던진 돌에 맞은 연못의 개구리들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김&장 변호인단은 감탄할 정도의 열의와 침착하고 체계적인 대응으로 재판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증인을 법정 후미 중앙에 앉혀놓고 박검사의 주도 면밀한 기소 내용 확인 질문, 정변호사의 감정이 전혀 섞이지 않는 예리한 반대 질문, 판사의 공정을 잃지 않는 진행 발언이 몇 시간씩 진행되며 팽팽한 긴장감속에서 되풀이 되고 있었습니다.

검찰은 산업은행에 제출된 진본 GC&A사의 보고서를 위조된 보고서로 몰고 가는 것이었고, 그것이 위조이기 위해서는 이론적으로 보고서가 엉터리라는 것을 ‘증명’ 해야 했는데 이 임무를 강교수가 맡고 몇몇 학계와 공사의 전문가들을 증인으로 내 세웠지만 학계와 산업계에서 수 십 년 자리매김한 GC&A 기술진의 보고 내용을 그르다고 강변 하다 보니 검찰 측 '전문가'들은 편견과 억지에 사로잡혀 석유 탐사/생산과정에서 상식수준인 의 판단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부 검찰 측 증인은 오히려 세하㈜쪽에 유리한 증언을 하는 해프닝을 연출하여 검찰 박검사를 당황하게도 하는 가운데 강교수의 증언 중 그가 표출하는 지질 기초지식의 결여는 아무리 그가 시추공학 전공이라 하지만 대학교 교수의 기본 자질을 무색하게 하는 이변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일반적인 지질 사항에 관해서도 ‘나는 지질학자가 아닌데 왜 자꾸 그걸 캐는가?’식으로 오히려 변호인을 힐난 하면서 적반하장의 만용도 보이곤 하였습니다.

강교수가 근본적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던 것은 아직 탐사/개발 단계의 자료만 존재하는 세하㈜의 카자흐스탄 광구를 생산 준비가 다 된 광구로 착각, 자기 식의 모델로 설정하고, 오로지 하나밖에 없는 검층 자료(시추공에 기기를 내려 보내면서 각종 지질 데이터를 기록한 그래프)를 가지고, 그것도 GC&A가 평가자의 의례적 표현으로 ‘석유 집적 구조의 하부는 전이대 (석유 층과 지하수 층이 접촉되는 지역) 일 가능성이 있어 생산이 저조 할 수도 있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부연설명을 가지고 이 광구는 총체적 불실 광구라는 주장과 함께 석유 공학 계에서 탐사/개발 광구에 으레 사용하는 ‘예상 매장량’이라는 용어를 ‘의미가 없는 개념’ 이라고 궤변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탄성파 자료로 작성된 집적 배사구조 하부에 전이대가 형성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해서 전체 구조에 석유가 없다는 강교수의 주장은 지질적 상식을 벗어나 있었으며 GC&A에서 사용한 가채 30% 회수율을 터무니 없는 과장이라고 법정에서 매도한 것은 카자흐스탄 유전지대의 회수율 통상 수치에 관한 무지 아니면 억지를 그대로 들어낸 수치스런 일이었습니다.

석유광구의 개발과정에서 탐사가 끝났거나 심지어는 탐사중인 광구라도 지질자료와 삼차원 탄성파 탐사 자료(지상에서 바둑판 같은 측선을 조성하여 탄성파를 발생시킴으로 입체적인 지하 구조를 그려내는 기술) 등으로 평가가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인데 오직 생산과 연계된 환경에만 익숙해온 그의 제한된 안목에는 세하의 탐사광구 이해가 불가능 했던 것입니다. 그는 심지어 자기의 전공분야인 생산 시추와 매장량 계산 분야에서도 무지를 보였던 바, 탐사 광구에서 시추한 후 잠가놓은 발부를 일정시간 열어 놓고 시험하는 석유 분출 량 테스트는 추후 생산에 관계되는 테스트로서 ‘매장량 계산’과는 무관한 것인데 강교수는 이것을 혼동하여 분출 량 테스트 일 600배럴 이라는 보고서를 매일 지속적으로 6백 배럴 나오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여 GC&A의 매장량 계산을 시비 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위조 현장에라도 있었듯 ‘세하㈜ 기술진이 조직적으로 개입하여 조작 했음이 틀림없다’고 법정에서 선언하다시피 하는 그의 발언은 아무리 검찰을 뒤에 업고는 있지만 교수로서의 합리성이나 윤리성은 포기한 매우 무책임하고 후안 무치한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의 오만은 극에 달해 예일, 하버드 출신의 변호사들에게 ‘내가 미국서 교육을 받았는데 당신들 영어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 하고 말하는가 하면 자신을 한국 최고의 석유공학계 지성으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법정 방청석에서만 보이는 것이었지만 책상 밑에 다리를 꼬고 증언하는 그의 자세는 법정질서 요원이 방청석을 살피다 다리 꼬고 있는 방청객을 보면 가차없이 지적하여 무안을 주곤 하는 법정분위기와 매우 대조적이었습니다.

검사 쪽에서는 강교수를 필두로 증인석에 서 줄 ‘교수나 기술자’가 많은 가운데 세하㈜는 그럴 ‘인사’가 없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검찰에 대항 하는 증언을 해 득 볼 것도 없거니와 석유공학 교수들간에 ‘정치 공학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강교수와 맞붙을 학계나 연구기관의 석유 기술자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일하게 증언대에 서 준 전문가는 춘천 강원대학에서 퇴직한 박창고 교수와 석유공사 카자흐스탄 지부장이었던 곽정일 소장이었는데 박교수는 전공분야가 자력탐사분야였지만 학구적인 열성과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곧은 성격으로 끝까지 최선을 다 해 주었습니다.

평가서의 내용을 가지고 많은 공방을 벌인 법정 싸움에서 세하는 그저 고독한 싸움을 펼 수밖에 없었으며, 정변호사와 박변호사의 포기하지 않는 집념과 함께 저로서는 최선을 다하여 GC&A 보고서를 입증 할 기술적인 준비를 하였습니다. 해외에서 외국인 전문인들을 오게 해서 GC&A보고서의 객관성과 타당성을 증언하도록 시도도 하였으며, 영국으로부터는 GC&A사의 평가서를 작성한 기술진들이 기꺼이 서울에 와 산업 은행에 제출된 1,2차 평가서가 자기들이 작성한 진본임을 증언 하겠다고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검찰은 그들 모두가 한결같이 요구하고 있는 단 하나의 조건을 일언지하에 거절 하였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한국 법정을 믿을 수 없으니 내한하여 증언을 마친 후 한국 검찰이 출국금지를 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해 달라는 것이었으며 검찰의 답변은 보장 불가로 일관 하는 거였습니다. 결정적인 증언을 차단하고자 하는 검찰의 의도가 깔려 있었습니다.

검사 측 석유 전문가들이 나오는 공판에는 그들에게 할 질문 초안을 제가 작성하고 박준기 변호사가 법적 문구로 작성 후 정변호사가 최종 정리 하여 증인석을 향해 질문하는 형식이었는데 공판 때 마다 저는 방청석 맨 앞자리에 앉아 재판도중 일어나는 보완적 기술 문답을 즉시즉시 메모 해 공판장 관리원을 통해 변호인단에 전해 주는 숨가쁜 릴레이의 연속이었으며, 이런 식으로 세하 측 증인과 검찰 측 증인이 교대로 출두하는 재판 과정이 격주로 8월부터 11월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회장이 구속 기소 된지도 3개월이 다 되어 변호인단은 이 회장의 구속 재판을 불구속 재판으로 진행 할 것을 요구한 바 판사 진은 2008년 11월 강교수와 저의 최종 증언을 듣고 구속 재판 해제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통고 하였습니다.

아침부터 저녁 여덟 시까지 계속된 저의 법정 증언을 끝으로 모든 증언절차가 종료되고 며칠 후 회장은 삼 개월여의 구속 기소에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해가 바뀐 2009년 1월에 서울 지방법원은 최종 판결로세하㈜의 허위 공문서 작성 및 사기 대출은 무죄, 허위 공시는 칠백만 원의 벌금 언도를 하였습니다. 벌금형으로 유죄가 된 부분은 유감이었지만 회사는 GC&A보고서 매장량 중 낙관적인 숫자를 인용한 소치로 치고 억울하지만 감수하기로 했습니다. 법정 공방의 핵심인 부정대출이나 허위문서작성이 무죄가 되었으니 회사로서는 소송에서 이긴 것이나 진배 없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검찰은 이런 경우 반드시 ‘항소’해야 하는 고질적인 관례가 있습니다. 검사 측에서 패소하는 경우 그대로 승복하면 담당 검사는 ‘이기지도 못 할 것을 기소했다’하여 여러 가지 불이익과 안 좋은 평가를 받게 된다 합니다. 그래서 검찰은 패소된 판례를 반드시 항소 하게 되어 있다는데 세하 건도 예외 없이 검찰에 의해 고등 법원에 상고 되었습니다.

서울 고등법원에서는 서류와 변호인단만 참석하여 몇 차례의 법정 절차를 밟아 공판을 진행 하였으며 2009년 7월에 역시 동일한 내용으로 무죄가 언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검찰은 다시 대법원에 상고하였고 대법원에서는 서류로만 공판을 진행 해 2010년 6월에 지방법원과 마찬가지의 언도가 내려졌습니다. 시작부터 무리수를 둔 세하 기소 건은 이렇게 국고를 낭비하고 있었으며 광구 현장은 진척이 없이 녹슬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 난센스 같은 법정 공방에 그 많은 시간과 돈이 소진되는데 꼬박 2년이 걸린 셈이며 이 기간 투자자 유치가 필수였던 세하는 광구 개발을 멈출 정도의 치명적인 손실을 감수 해야 했습니다. 해외 유전개발에는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개발부담을 덜기 위해 개발 도중에도 국내 회사들의 콘소시움(공동 투자 집단 형성)이 결성되어 투자 자원이 확보 되는데, 탐사과정에서 석유가 분출되어 석유 부존이 확실시 된 탐사성공의 경우 콘소시움 형성이 수월해 지나, 세하 광구처럼 법원에 연루된 프로젝트에 발을 들여놓을 국내 회사는 없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2005년도 세하와 공동으로 두 광구의 탐사 개발 계약을 합작 시도했다가 카자흐스탄 소유주들 회사인 스터기스사의 내분(추 후 해결 되었음)이 께름칙하여 도중 하차한 한국 석유공사 조차도 탐사 성공한 세하 광구의 잠재성을 인지는 하고 있었으나 '법정 공방'에 휘말린 프로젝트에 국가 기관인 공사가 합자 할 수는 없다는 애로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해외 투자자 유치에도 간접 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 해외에 나가 메이저들을 상대로 발표회를 갖게 되면 석유 회사들은 주 투자자인 세하의 상황을 검토하게 되어 있고 이 과정에서 위와 같은 소송 진행은 결코 도움이 않 되는 요소이었으며, 게다가 그들이 두 광구의 '현장 조사'를 원 할 때마다 세하는 현지 미하일 리의 협조를 어렵사리 얻어야 했으므로 세하는 이중 삼중의 험난한 팜아웃(광권 분양)과 씨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쯤 활기찬 생산 속에서 대한민국 해외 자원 확보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을 카자흐스탄 프로젝트는 아직까지도 정체된 상태며 이는 진실이 왜곡되고 소모전을 치른 2년여의 법정 소용돌이가 원인제공의 하나였음을 부정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2010년 말까지 엑손모빌, BP, 토탈 등 메이저들을 상대로 팜아웃을 추진하다가 세하㈜를 떠났습니다만 카자흐스탄 광구는 석유 인생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자 했던 저에게 미완성의 한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일생 경험 못한 진한 획을 긋는 보탬은 있었다 생각 되며 비록 프로젝트의 대미를 보지 못하고 세하를 떠나기는 했지만 끝없이 펼쳐진 카자흐스탄 대륙에서 불기둥을 뿜는 탐사정의 열기에 영하 30도의 추위를 녹이던 황홀한 추억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카자흐스탄 현지의 세하 동업자 격인 미하일이 운영권을 쥐고 석유 프로젝트에서는 도저히 용납 안 되는 횡포를 자행하는 중에 2005년에 작성된 동업 사 간 부실한 초기 계약서와 함께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세하와 MGK간 악연 속에서 세하 광구의 석유자원은 한국으로 실려 오지 못한 채 사장되다시피 했습니다만 석유기술자로 다시 한 번 정열을 태웠던 카자흐스탄 사막의 인연은 저에게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광구 개발이 정상적으로 흘러 가도 어려운 일은 산적 해 있는 터에 광구 개발 도중에 생기는 소송이나 피소 사태는 그 진위에 아랑곳 없이 모든 과정을 마비시키기 십상이며, 최고 경영진만이 유일한 대 카자흐스탄 창구로 되어 있는 비 석유 전문 회사의 분위기 속에서 석유 전문인인 저의 한계를 안고 지냈지만, 주총에 참석할 때 마다 물질적 정신적 손해가 막심한 주식 투자자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구 소련의 석유 기술 경험으로 무장된 현장의 우수한 전문가들과 쌓은 좋은 관계가 광구 개발의 답보와 함께 끝나버린 아쉬움과 함께 저의 한 맺친 추억이 되었습니다.

위험부담이 큰 자원 개발에는 희비의 엇갈림이 유별나며, 그래서 석유 전문 회사들은 수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 하며 인색한 확률로 성공 되는 프로젝트에서 모든 손실을 만회 하고도 남는 수익을 남겨 크게 마련인데 세하는 탐사 성공으로 첫 확률의 고비는 넘긴 셈이고, 아직도 평가정 몇 개를 더 뚫어야 하고 이어서 개발정과 생산정을 뚫어야 하는 고비가 있기는 하지만 위와 같은 돌발 사항이 겹쳐 유망광구를 놓치면서 여러 사람이 다친 경우라 하겠습니다.

끝으로, 좁다면 좁은 한국의 석유관계 업계에서 법정 사례를 겪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있을 업계 분들께 진실을 알리고 싶었으며, ‘세하가 변호사를 잘 써서 이긴 거지 달래 이긴 거냐!’ 하고 말하고 있다는 강주명교수에게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만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2013년 10월

문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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