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염색을 안 한지 일년이 가까워 온다.
거의 반평생 가까이 하던 염색을 중단 하고 나니 그 동안 늘 헤어 나지 못했던 ‘색칠한 젊음’의 짐을 벗은 것 같은 홀가분한 기분이다.
새치가 유난히 많았던 나는 나이가 40후반이 되니 머리가 희끗 희끗 해져 아직 이건 아니다 하는 느낌이 생기면서 염색 약을 찾기 시작했다. 나이 많아 보이는 게 도움이 안 되는 미국 직장의 분위기이기도 했지만 퇴직 할 때까지는 늙어 보이지 않겠다는 나름의 고집도 있었다.
그러나 결코 즐거울 수 없는 머리 염색 작업은 늘 시간과 마음의 짐이었다. 거울을 보며 혼자 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대충 뒤 머리를 칫솔로 문지르다 보면 번번이 거울에 속아 손동작이 엉뚱한 방향으로 움직이는가 하면 듬성듬성 염색 안된 머리카락 덕분에 때아닌 홰숀을 만들곤 했다. 이발소에 가면 염색 약을 머리 속 살까지 처 발르는게 싫고 머리를 말끔히 감아 주는 것도 아니며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아 집에서 해결 할 때가 많았다.
염색 후 머리를 설 감고 땀이라도 흘리는 날엔 하얀 와이셔쓰 목 주위가 새까매지기도 하고, 염색 약이 눈에 좋지 안다는 말을 많이 들어 은근히 찜찜하기도 했지만 나는 마치 총을 메지 않으면 전투에 나갈 수 없는 군인이 된 듯 염색에 열심이었다. 이마에서 굳어버린 염색 흔적 지우느라 살 벗겨져라 비벼대다 보면 피부 학대에 열 올리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도 했다.
때때로 지겨운 염색을 않겠다 버티다 하얀 생머리가 밀고 올라오면 에둘러 이발소를 찾거나 염색 약을 타놓고 아내에게 도움을 청 하곤 했다.
50대 중반이 되면서 염색의 질곡에서 벗어날 기회가 있기는 했다. 서울에 나가 일했을 때와는 달리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혼자 근무하며 남의 시선을 덜 타던 좋은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남편과 아빠를 방문한 식구들이 갑자기 하얘진 머리에 놀란 것만 빼놓고는 그런대로 염색에서 해방 되는가 하였다.
그러나 어느날 자카르타에서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아파트 빌딩 엘리베이터를 탓다가 젊은 엄마가‘얘들아 할아버지께 인사 해야지?’ 하는데 속으로 육십 전에 할아버지 소리 듣는 건 나의 흰머리 탓이라 생각되어 염색을 지속하게 되었다..
50줄에 한참 들어서 서울 나가 일 했을 때도 웬만한 구둣가게의 점원이 '아버님'이라고 호칭하며 너스레 떠는 것도 마음에 썩 들지 않았을 만큼 나는 늙은이 대접 받는 것이 싫었다.
이렇게 질기게 하던 나의 머리카락 위장 작업을 올 해 들어‘이제는 늙어 보여 당연하다’고 자위하며 염색을 중단하기까지 십오 년 넘는 세월이 흐른 셈이다. 내 주위에는 선천적으로 나이 들어도 머리가 검은 친구들이 있다. 그러나 나의 머리는 사십삼 년 전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라던 주례사의‘파뿌리’가 너무 일찍 시작되고 있었다.
염색을 중단하고 나니 머리는 그야말로 백발로 변해 버렸다. 칠십에 백발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 염색으로 학습된 마음은 적응이 필요했다.
그러나 서울 나가 시장터에 가면 가게 주인이 아내에게 ‘아버님께 이걸 사 드리세요’ 하거나 나한테‘따님에게는 이게 어울린 텐데요’하는 주모들이 있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속으로 씁쓸할 때도 있었다. 그런후엔 집사람에게 ‘당신도 염색 끝 하지그래’ 하고 싶지만 속내는 정 반대다. 열살 터거리며 오히려 열심히 염색하고 있는 아내가 다행 아닌가.
머리 물들이지 않고서부터 참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거리에 나서면 푼수에 맞게 살라는 글자를 머리에 얹고 다니는 느낌이다.
해를 건너 한국에 나가 지하철 경로석에 앉아도 어울리는 머리이며 나보다 더 늙어 보이는 노인에게는 자리를 양보하는 여유도 생기는 머리색이다. 젊은이가 앉아 있는 앞에 가 손잡이에 매달려 서는 것은 기필코 피한다. 허연 머리를 하고 서있는 나와 애써 딴청 하는 젊은이 사이에는 동 극의 자력이 되어 서로 마음의 배척이 따르는 불편이 따른다. 젊은이가 자리를 내 주더라도, 고맙기는 하지만 늙음을 담보로 누리는 육신의 편함이 오히려 짐이 되기도 한다. 빈자리가 없으면 바로 반대편 문 쪽으로 붙어 손잡이에 몸을 매달고 쏜살같이 스쳐 지나는 지하철 벽을 응시한 채 서 간다.
그래저래 나에게는 차창을 스치는 풍경도 있고 앉을 자리도 있는 버스가 편하다.
어찌 되었건 나의 머리카락과 뇌는 서로 일센 치도 안되는 거리에 있으면서 서로 코드가 안맞곤 한다. 아무래도 나에게 70 전후는 몸과 마음이 조율을 못하는 혼돈의 나이인 듯싶다. 때론 몸이 앞서 가고 때론 마음이 앞선다. 마음과 몸의 나이가 서로 안 맞아 조화를 못 이루니 아직 철이 안 들었다 함이 옳다. 언제 이 괴리가 줄어 참 나를 찾는단 말인가? 80?, 아니, 90이 되면? 꿈 같지만 버려서는 안될 꿈 같다. 그렇게 되면 참 평온이 오겠지. 아이러니 하게도 참 나를 발견할 것 같아 50때는 60을, 60때는 70을 기대하기도 했다.
지기로부터 하얗게 변해버린 나의 머리가 온화하고 여유 있어 보인다 하며 위로 아닌 위로를 가끔 듣는다. 듣기 좋은 말이겠지만 그리 듣기 싫은 말도 아니다. 아마도 애써 검은 머리 만들기 열심 내던 내가 염색을 포기한 만큼은 느긋해 졌으니 그만큼의 여유는 생겼는지 모르겠다. 안간힘의 포기는 늘 그만큼의 평온을 가져다 주게 마련인 모양이다.
나이 들어 몸은 무디어져도 마음만은 늙어 안 된다고 늘 다짐한다.점점 그 '괴리'가 필요해질 것 같다. 머리는 하얘도 아직 할 일이 많이 있다고 자신을 다독거린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모두 문을 걸어 잠그기 전 까지 나는 지레 포기 하지 않기로 한다. 그동안 열심히 일을 했지만 아직도 맘속의 일 감은 많다.
쫓기며 허둥대고 살 필요는 없지만 멈추는 삶은 의미가 없다. 굴러야 제 모습을 찾는 두 바퀴 자전거처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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