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글은 대단히 흥미로운 글입니다.
그러나 다음글을 여기 옮겨 봅니다.
보는이의 관점에 따라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사람들의 평가가 다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잊을 수 없는 七名의 美國人들
6月을 맞으면서 韓國人들이 永遠히 記憶해야 할 7名의 美國人들이 있다.
트루먼, 맥아더, 밴 플리트, 무초, 릿지웨이애치슨, 워커.
제일 먼저는 해리 트루먼 大統領이다.
6.25 南侵 消息을 들은 그는 卽刻的으로 美軍을 보내기로 決心했다.
이 決斷으로 大韓民國이 生存하고 있다.
韓民族 歷史上 이렇게 많은 韓國人들이 단 한 사람의 決心에 依하여,
當時 美國은 韓國을 戰略的 價値가 弱한 곳으로 分類한 뒤였다.
南侵 當한 韓國을 美國이 지켜야 할 約束도 協定도 없었다.
美軍 首腦部는 오래 前에 아시아 防禦線은 알류샨 列島-日本-필리핀으로
足하다는 判斷을 내려놓고 있었다. 南侵 한 해 前 駐韓美軍을 撤收시킨 것도
그런 判斷에 따른 것이었다.
트루먼 大統領의 參戰 決斷은 奇蹟이다.
그 奇蹟의 相當 部分은 이 미주리 시골 出身 大統領의 醇朴하고 愚直한 性格과 關聯이 있다.
트루먼 大統領은 中共軍의 侵略으로 유엔軍이 서울을 내어주고
總退却할 때도 韓國 便을 들었다.
當時 英國과 美國 內 相當한 與論은 韓國에서 유엔軍이 撤收하는 것을 支持했다.
트루먼 大統領은 "우리를 믿고 함께 싸운 韓國人을 버릴 수 없다"는
姿勢를 堅持하고 버티었다.
두 번째 恩人은 더글러스 맥아더 將軍이다.
그는 거의 모든 關係者가 反對하는 仁川上陸을 成功시켰다.
洛東江 前線까지 밀렸던 유엔군과 國軍은 戰勢를 逆轉시켜 北進을 開始했다.
맥아더 將軍은 勿論 中共軍의 介入 可能性을 無視하는 失手를 저질렀다.
이로 因해 北進統一 直前에 유엔軍은 退却하고 한때 美國은 韓國 抛棄를
深刻하게 苦悶해야 했다.
맥아더 將軍은 韓國戰 遂行 方法에 對한 異見을 露出시켰다가
트루먼 大統領에 依해 解任되었다.
맥아더, 트루먼 두 분은 6.25 戰爭으로 많은 困辱을 치렀다.
세 번째 恩人은 매튜 릿지웨이 將軍이다.
中共軍의 侵略으로 서울을 내어주고 退却한 유엔軍은 美8軍 司令官 워커 中將이
自動車 事故로 숨지는 惡運을 만났다.
後任으로 赴任한 사람이 陸軍參謀次長이던 매튜 릿지웨이 中將이었다.
그는 2次 世界大戰 때 空輸師團長이었다.
노르망디 上陸戰 때 部下들과 함께 落下傘으로 뛰어내렸던 猛將이다.
그는 유엔군의 後退를 水原線에서 멈추게 하고 反擊作戰을 通해서
休戰線까지 敵軍을 밀어 올렸다.
韓國 抛棄論을 잠재운 快擧였다.
릿지웨이가 反擊에 失敗했더라면 水原線에서 休戰이 되었던지
美國은 韓國을 抛棄하고 撤收했을 것이다.
네 번째 恩人은 8軍 司令官 워커 中將이다.
6.25 南侵이 일어나자 日本에 있던 8軍 兵力을 이끌고 와
洛東江 戰線에서 最後의 防禦에 成功했다.
이는 仁川上陸作戰의 機會를 만들어준 셈이다.
그는 北進 中 中共軍의 侵略을 맞아 잘 싸웠다.
1950年12月 말 議政府에서 그를 태운 지프차가 韓國軍 트럭과 衝突하여 死亡했다.
다섯 번째는 딘 애치슨 國務長官이다.
그는 트루먼 大統領과 呼吸을 함께 하면서 美軍의 參戰과 유엔군 派遣을 成事시켰다.
그는 1950年 1月 내셔널 프레스 클럽 演說에서 韓國이 美國의 太平洋 防禦線에
包含되지 않는다고 示唆함으로써 金日成의 誤判을 불렀다.
이 演說에서 애치슨 國務長官은 "太平洋 防禦線은 알류샨 列島
-日本-오키나와-필리핀으로 連結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이 防禦線 以外의 地域에서 攻擊을 받을 境遇 于先 攻擊받은
사람들이 싸워야 하고 모든 文明國家들이 유엔의 旗幟下에서 支援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6.25 南侵이 일어나자 애치슨은 이 유엔 參戰의 約束을 지킨 셈이다.
애치슨은 英國의 勞動黨 政府가 美國에 壓力을 넣어 韓國戰에서
손을 떼도록 만들려 할 때 이를 沮止했다.
여섯 번째는 밴 플리트 美8軍 司令官이다.
유엔군 司令官으로 榮轉한 릿지웨이 將軍 後任으로 8軍 司令官이 된
밴 플리트 中將은 李承晩 大統領의 뜻을 잘 받들어 韓國軍의 立場을 고맙게 配慮했다.
그의 아들은 空軍 操縱士로 參戰하여 平壤 爆擊 中 失踪했다.
韓國軍을 强兵으로 키운 데는 밴 플리트의 支援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戰爭이 끝난 以後에도 美國에서 親韓 人士로서 活躍했다.
일곱 번째는 무초 駐韓美國 大使이다.
그는 6.25 南侵 卽時 迅速하게 워싱턴으로 狀況을 正確하게 報告하고
美軍의 參戰 必要性을 提起했다.韓國人의 立場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는 李承晩 大統領과는 緊張關係를 維持하기도 했으나
워싱턴의 政策樹立 部署와 相對할 때는
韓國의 立場을 많이 代辯했다.
6.25 南侵을 當한 李承晩 大統領이 서울을 떠나 大田으로 避하려고 할 때도
무초 大使는 "그렇게 하면 戰線에서 싸우는 國軍의 士氣가 떨어진다.
閣下가 떠나도 나는 남겠다."고 말했다.
實際로 무초 大使는 李 大統領이 서울을 떠난 뒤에도 勤務하다가 撤收했다.
6.25 戰爭으로 約5萬名의 美軍이 韓國에서 죽었다.
이들이 다 고마운 분들이다.
위에 든 일곱 名의 恩人은 그 代表的 人物일 뿐이다.
獨裁者의 侵略을 받은 남의 나라의 自由를 지키기 위해서 自國 젊은이들을
戰線으로 보내는 決定은 大統領 等 國家指導部가 참으로 하기 어려운 일이다.
트루먼 大統領과 그 側近들은 이 일을 해낸 이들이다.
더 고마운 것은 이들 中 어느 누구도 自身들이 韓國을 救했다고
자랑하지도 않았고 알아달라고 韓國人들에게 要求하지도 않았다.
이들 美國人이야말로 아낌없이 준 나무들이었다.
출처 : nero production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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