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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Topic: 통역 장교 후보생으로 훈련받다 본의 아니게 100일만에 제대한 사연
teddy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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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통역 장교 후보생으로 훈련받다 본의 아니게 100일만에 제대한 사연
on: September 12, 2018,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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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 장교 후보생으로 훈련받다 본의 아니게 100일만에 제대한 사연

저는 1963년 여름 신문에 나온 통역장교 후부보생 모집공고를 보고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듯한 감격을 느끼며 지원하기로 작정했다.
언뜻 보기에 3년간 복무만 하면 전역이 된다고 해서 그 당시 제가 병역 필을 달성하기에 제일 좋은 방도라 생각했다.

그런데, 선발 방법은 첫째로 신체 검사에 합격해야 필기와 면접을 본다고하여서 제게 큰 진입 장벽이 되었다.
뭐, 신체야 건장하지만, 딱 한 가지가 문제였다. 즉 근시라 안경을써야하는데, 안경 없이 1.0 을 넘어야 한다니,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새로 더불어 민주당 대표가 되신 이해찬 (우리 후배로 문리대 사회학과 출신이다) 의원의 대담 /강연을 많이 들었는데, 그분은 자신이 7선을 한 것이 자동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항상 상황에 맞춰서 준비를 하고 임해서 이룬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는데, 저도 나중에 설명 드리겠지만 시험은 모두 합격했는데, 항상 뭐라도 조금 준비 행동을 취하는데,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도가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하다가, 아하! 눈검사를 하는 시력표를 깡그리 외우자고 안경점 몇군대 가서 시력표 다섯개를 외어서 신검 장에 갔다.

그런데 어랍쇼, 검사장의 시력표가 민간에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온통 E 자만 크고작게 나열되어 있었는데, 그 E 자의 가운데 금이 아래 윗금보다 짧아서 들어가 있었고, 시력표 속에 어느 글자를 지적하면 어느쪽으로 짧은지를 말해야 했다. 즉 그 글자가 정자로 보이면 가운데가 바른쪽으로 들어가 있다고 손으로 방향을 표시해야 했다. 그래서 죽 살펴보니 그 E 자가 바로 있는 것도 있고, 뒤집어진 것도 있고 위로 보이는 것 그리고 아래로 보이는 것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실컷, 애써서 외운 시력표가 아무 소용이 없게 되어 한동안 막막했었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는 말이 생각나서, 그자리에서 E 자 범벅으로된 시력표를 외우기로 했다. 그 시험장에는 저와 고등학교 때부터 가까운 정치과의 M 군도 같이 갔었는데, 저는 열심히 새로운 시력표를 그 자리에서 외운 덕에 통과했고, 그친구는 시력 때문에 걸려서 미끌어졌다.
(외운 비결은 여러분들께 흥미가 없을 것 같아서 생략합니다.)

그 때가 대학 3학년 여름이었는데, 통역 장교 후보생으로 일단 논산 훈련소에 가서 전후반기를 마치고 (경북) 영천 부관학교에 가서 후보생 과정을 마치고 임관하는 순서라 하였다.
그런데, 논산 수용 연대에서, 서울 공대 에서 학보병으로 근무하는 기간병과 어떻게 얘기를 하게 되었는데, 제게 왜 군대에 들어왔느냐고 물으셨다. 그래서 통역 장교 3년 복무라고해서 좋아 보여서 지원했다고 말씀드렸드니 그분 말씀이 군대에서는 약속을 안지키기로 유명한데, 전쟁이 새로 발발한다든지, 생각 못한 사건이 생기면, 근무기간이 연장 될 수 있다고 하여 저는 그말에 겁을 먹었읍니다. 공연히 3년 약속만 믿고 입대했는데 잘못 들어온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요.

저는 가까운데를 볼 때는 안경을 안 써도 보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안경을 쓰지 않고 벗어 두는데, 야외교장 사격 실사하러 나가는 날 일이 벌어졌읍니다. 막사 안의 평상 같이 잠도자고 총의 분해 결합도하는 마루바닥에 제가 안경을 벗어 나뒀는데, 저도 모르게 제발로 그 안경을 밟아서 안경 알이 깨져버렸읍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야외교장 사격하러 나가는데 안경을 제발로 깨버렸으니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소대장에게 머리가 아프다고 하니, 당장 연대 의무실로 보내줬읍니다. 그런데, 의무실 군의관은 체온도 재고, 혈압을 재보드니 그 역시 저를 당장에, 수용 연대 의무중대로 후송시켰읍니다.
의무중대에서 일 주일을 머물고 나서 바로 논산의 제116 육군 병원으로 후송되었읍니다. 나중에 들었는데, 의무 중대에서 상태가 좋아지면 원대로 돌려보내서 훈련을 계속하게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육군 병원으로 보내서 본격적 치료를 받게 한다는군요.

의무 중대에 있을 때 제 침대에 달린 꼬리표에 “본태성 고혈압 (Essential Hypertension)” 이라고 적혀 있었읍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으로 그 당시 제가 고혈압으로 입원된 사실를 알게 되었읍니다. 육군 병원의 입원 수속을 밟는 과정에서 입퇴원과의 군의관 Y대위가 “환자 어떻게 여기 왔지?” 하고 문의해서 꼬리표에 달린 것이 생각나서, “본태성 고혈압입니다”라고 답을 하자, 그 군의관은 즉석에서 “환자가 병명을 알고 있어?” 라고 말하면서 혈압을 재는 간호 장교에게, “저 녀석 팔에 힘을 주는지, 또 숨을 안쉬는지 잘 봐요”하고주의를 주는 것이었읍니다.

저는 이 군의관이 왜 제게 과잉 반응을 하는지 의아했읍니다. 수속을 마치고 저는 내과 10호 병동으로 보내졌읍니다. 이 병실에 들어 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실장이라는 감투 아닌 감투를 쓰게되었읍니다. 물론, 병실에는 군의관, 간호 장교, 의무병들이 있지만 병실내의 간단한 행정을 보조하는 것이 주 임무였읍니다.시간이 지날 수록 같이 훈련받든 통역 장교 후보생들은 이제 논산 에서의 훈련을 마치고 영천으로 통역 장교 후보생 교육울 받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나중에 나혼자만 따로 교육을 시키지는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막막한 심정이되었읍니다.

그런데, 제가 서울대 영문과 재학중에 입대한 사실이 기간병을 통해 알게된 간호장교 두분이 영어를 좀 가르쳐 달라고 해서 서로 편리한 시간에 영어 공부를 도왔읍니다. 그들 둘은 모두 충남 회덕 (담배공장이 있는 곳) 출신으로 같이 간호대학을 나와 간호 장교로 임관했고 전역하면 미국으로 가서 취업할 계획이라고 했읍니다.

병실에는 네모퉁이 근처에 지붕으로 통하는 공기 구멍이 있고 그것을 막는 판자가 있는데 그 네모난 판자에 장기판을 그려서 환자들이 장기를 두곤 했읍니다.
하루는 그 장기판을 침대에 두고 다른 환자와 장기를 두고 있는데, 밖에서 경계태세를 알리는 신호가 들렸읍니다. 저는 후다닥 그 장기판을 공기 구멍에 올려 막아 놓고, 침대 속으로 들어가 누워 있었읍니다.
병원장 O 대령이 내과 부장 J 소령을 대동하고 우리 병동을 습격해 들어 왔든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병실 담당 군의관 K 대위에게 가서 “김태환이 불러와” 하고 소리쳤읍니다. 담당 군의관이 저를 불러 내세우니까, “혈압 재봐”하고 병원장이 다시 명령했읍니다.

K 대위가 “230에 150 (230/150)입니다.” 라고 부들부들 떨면서 말하자, 못믿겠다는 듯, “J 부장이 다시 한번 재봐” 하고 재촉했읍니다. J 부장 역시 같이 답하자, O 원장은 “이 환자 매일 하루에 4번씩 혈압을 재서 그라프를 만들어 잘 관리하라”고 당부하고 떠났읍니다.
원장이 나가고 나서 생각하니 정말 아찔한 순간을 모면했다는 기분이 들었읍니다. 고혈압은 중환자로 쳐서 평소에 안정을 취하고 있어야 하는데 소위 침대에 누워서 안정을 취하는자세 즉 “Bed Rest” 를 하고 있어야 하며, 만일 제가 장기를 두고 있는 상황이 발각 되었다면, 영창감이었읍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에 논산 훈련병 담당 병원에서 생각지도 못한 반가운 사람을 만났읍니다. 저와 초등학교 (부산 사범 부속), 그리고 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닌  S 군이 었읍니다.
그에게 여긴 왠 일이냐고 물었드니, 병원장이 이모부이고, TB (결핵) 케이스로 들어 왔다고 했읍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입원 사실을 유추해서 왜 입원 때 부터 시작해서 병원장의 제 병동 급습적 방문까지 일어났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읍니다.

즉, 고혈압이나, 결핵은 밖으로 보기에는 멀쩡하므로 나이롱 환자로 들어 올 수가 있기 때문에 저도 도매금으로 나이롱으로 찍힌듯 했나 봅니다.
제가 있은 병동에는 유독 신장병 환자가 많이 들어 왔읍니다. 아마 그곳 식수 때문이 아니었는지 생각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환자들은 식이 요법과 약물 치료로 열흫 정도가 지나면 차도가 있어서 퇴원해서 원대로 돌아가 훈련을 받게됩니다. 그런데, 한 농촌 출신 환자는 뭔가 좀 모라자는 병사여서 퇴원과 입원을 반복하다가 결국 요독증으로 병실에서 영원히 퇴원하게 되는 것도 목도했읍니다. 논산에서의 훈련이 그리 심하지도 않은데, 그 훈련이 싫어서 나름대로의 요령을 부리다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는 것을 바라보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얼마 후에 제대 심사에서 의병 제대 판정을 받아서 제대복을 입고 집으로 돌아 왔읍니다. 통역장교 후보생으로 자원 입대했으나, 기간병의 얘기에 겁을먹고, 제 안경을 야외 사격나가는 날 제발로 밟아서 깨버리는 해프닝이 생겨서 초고속으로 116 육군 병원에 입원하고 병원장도 직접 확인한 “고혈압” 환자여서 입대한지 꼭 100 여일되어 제대했읍니다.

나중에 기획해서 의병 제대한 인사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시간적으로는 적어도 약 일년은 걸렸다는 말을 들었는데, 생각만해도 제가 초고속으로 의병 제대 하게 된 것은 믿어지질 않았읍니다.

저는 집에 돌아와 얼마 동안은 마치 올림픽에서 금 메달을 딴 선수처럼 영광의 제대복을 입고 학교에 나갔읍니다. 왜냐하면, 얼마 전까지 같이 수업을 받았는데 어떻게 벌써 군대를 마치고 왔느냐고 별로 믿어주는 학우들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제가 지금 되돌아 볼 때, 자신의 조카는 분명히 제3자의 X-Ray 사진으로 제대시킬 병원장이 혹시 제가 나이롱으로 입원했는지 직접 현장에서 찾아내겠다는 그 병원장의 직무 수행 의욕에 찬사를 보내고 싶을 따름입니다.

이왕 얘기가 여기까지 나왔기 때문에 저의 한국에서의 얘기를 사족으로 덧 붙이려 합니다.

저는 고등학교에서 원래 이과반에서 수업을 하고, 공대를 목표로 했는데 집안 형편상 공대는 통학 거리가 멀어서 영문과로 막판에 변경했읍니다. 저는 무슨 영문학이 좋아서가 아니라 영어를 좀더 배워 두자는 심산이었고, 원래 국제 관계에 관심이 많았읍니다.
초등학교 때 전쟁이 났고 저희집에서 약 5분 거리에 미국 공보관이 (부산) 대청동에 있었는데, 그앞 벽에 매주 전세계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사진들을 전시해둬서 빠지지 않고 가서 봤읍니다. 그리고 그해 (1950년) 에 한국 동란 (?) 이라는책이 발간되었는데, 이 책에 38선의 연유를 설명하며, 임진왜란 때, 일본이 조선 남도 4도를 달라고 했든 일, 청일 전쟁, 노일 전쟁을 설명하며, 일본과 러시아가 39도선으로 조선을 분할하자는 협의까지 있었다는 글을 읽고 매료되었읍니다.

그래서 저는 외교를 통해 항구적 평화와 통일을 달성할 수 있을까 하는 바램으로 외교학을 부전공으로 잡아서 그쪽 과목들을 많이 들었고 따라서 외교과의 박양종 사장과는 재학시절부터 가깝게 지냈읍니다.
그들 과목을 들은 것 가운데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국제법 특강을 하신 김정균 교수께서 소련방 헌법을 설명하시면서, 법에 따라 가맹 공화국이 연방국에서 탈퇴할 수도 있다”고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하겠느냐고 그냥 넘어 갔지만, 열친이 고바쵸프와 대결시 이 조항을 원용해서 소련방을 해체시켰읍니다.

1964년 여름에 도쿄에서 올림픽이 열리는데, 공보부는 일본에 올림픽을 구경오는 관광객의 십분의 일 (1/10)만 유치해도 대성공이라고 내다보고 관광객들이 들이 닥칠 행복한 상황을 내다보고 그들을 맞을 안내원들을 뽑아 워커 힐에서 교육/훈련을 시킨다고 해서 저는 그기 응모해서 뽑혀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나 그 뒤 아무 소식이 없었읍니다. 대한민국 관료들의 주먹구구식 계획이 엉망인 것이 여실히 들어 났지요. 대한민국 정부의 `계획은 뜬구름 같이 날라갔지만, 이 일을 통해 만난 같은 교습생과의 인연으로 제 일생에 가장 중요한 이벤트가 생겨났기 때문에 제가 여기서 그 행사를 설명드린 것입니다.

그 해 (1964) 가을이 졸업전 취직 시험 시즌인데, 지금은 양상이 많이 다르겠지만, 그 당시만해도 인문과 출신에게 취직 시험의 문을 열어주는 곳은 언론계 뿐이었읍니다. 마침 앞에 소개한 정치과의 M 군이 취업을 못해 고민하는 것을 보고 한국일보 고위층에 저의 집안 형님이계셔서 제가 원서는 제출해주겠다고해서 그의 원서를 받아 서류를 내면서 저도 취직 시험 연습도 할 겸 제 서류도 같이 제출했읍니다.

시험은 잘 치뤘읍니다. 그런데 발표 전날 한국일보에 가서 지방판을 보니 제 이름이 빠져 있었읍니다. 그래서 저의 경기 선배이신 Y 모 기자님께 좀 알아 봐달라고 부탁을 드렸드니 알아보시고 제게 와서 제가 일등을 했다고 알려 주셨읍니다.
그런데 왜 제 이름이 빠졌는지 알아 보니까, 제 점수가 컷트 라인보다 100 여점이 더 높아서 오히려 그것을 놓쳤다는 희극적인 실수라고해서 웃어 넘겼읍니다. 그당시 한국일보가 취직 시즌의 테입을 제일 먼저 소위 기리 (끊어) 해서 1,500 명이 넘는지원자가 응시했는데 제가, 이 김태환이 일등을 한 것입니다.

중학교 후반부터, 동기생들 집에 가서 학업을 도와 주며 기숙도하고 지내고 대학 생활내내 가정교사 생활로 근근히 대학을 마칠 무렵에 이러한 대경사가 일어나 지금까지 밖으로 내보이지도 못했든 자긍심이 되살아났읍니다.

한국일보 견습기자 17기생에는 저명 인사가 좀 있읍니다. 나중에 편집국장까지 올라 갔고, 김영삼 대통령의 공보 장관을 5년간 장기 근무한 오인환씨와 김영삼 대통령 외교안보 특보와 주중 대사를 역임한 외교과 출신 정종욱 ( ‘59학번) 교수도 있었읍니다.

내친 김에 Korea Herald 에도 응시하여 합격했읍니다. 그래서 처음 약 한달 여간은 두 회사를 다녔읍니다. 그것이 가능했는 이유는 제가 한국일보에서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자매지인 Korea Times 로 보직을 원해서 그곳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그곳에서는 교정 (Proofreading) 부터 일을 배우기 때문에 저녁에 근무가 시작 되어서 낮에 Korea Herald (전 국회의사당 앞/ 사청 뒤)에서 일 하고나서 저녁 때 중학동 (안국동 못미쳐에 있었음) 으로 가서 교정일 을 봤읍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래하다가 알려질까 걱정이되어 어느 회사에 정착할지 가늠질을 했읍니다. 저는 기자생활을 오래 할 생각이 없어서 제게 편집국장*께서 중책을 맡기셔서Korea Herald 에서 일하기로 하고Korea Times에는 사표를 냈읍니다. (주 1)

저는 지금 생각해봐도 Korea Herald를 택한 것이 잘한 선택이라고 자신합니다. 먼저 김 편집국장님께서 “해설판” 을 맡아서 하도록 시켜서 그것 을 만드는 일을 했읍니다. 이 해설판이라는 것은 신문에 끼워 넣어 주는 것으로 주요 기사 번역과 각종 영어 입문 요령을 가르치는 것인데, 신문 본판을 읽는 사람보다 해설판 독자가 더 많다고 하였읍니다.
해설판 작성에 약 두달을 보내고, 정치부로 가서 중앙청과 외무부 담당을 했으며, 다음에, 사희부로 가서 법원과 검찰 기사를 담당했읍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문화부로 가서 문화공보부 담당을 맡았읍니다.

다른 신문사같으면 몇년씩 견습으로 뛰어야 하지만 우리 신문사의 경우는 모두 유학가기전에 잠간 몸을 담겨두는 곳 정도로 생각해서 자리가 빨리 비기 때문에 입사하고 얼마되지 않아서 정부 부처 출입이 가능한 것이었읍니다.

그 사이 저와 친한 고교 동기생이고 문리대 출신 학우의 여동생 약혼식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옆의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누었지요. ”저는 영문과 나온 김태환” 이라고 소개 하자 그분이 “아, 그럼 영어 잘 한다는 김태환이시군요” 하며 반갑게 맞이 해주셨읍니다. 좀 말씀드리기 쑥스럽지만, 제가 한국일보와Korea Herald 에 합격한 사실이 좍 퍼져서 그 당시 유명세를 좀 탄 것 같습니다.

그러든 가운데 벌써 일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 새로 취직 시즌이 시작되었는대, 아주 눈에 띄는 자리의 취직 공고가 나왔읍니다. 삼성에서의 정기 공채였는데, 영문과 출신도 뽑는다는 것입니다.

시험만 보면 합격되었기 때문에 별로 신경을 쓰지는 않았지만, 한국에서 제일 힘든다는 면접시험에 예의 이병철 회장님이 면접에 참석하셨읍니다. 영문과 응시자들은 이미 간부들과 1차 면접을하고, 다시 중역들과의 면접도 그치고 마지막으로 삼성 직계사 (당시 삼성물산, 제일 제당, 제일 모직등) 사장님들이 자리하시고 상석에 이회장이 앉으셔서 사장진들의 질문과 응시자들의 답변을 듣고만 계셨읍니다.
여러 가지 질의응답이 있었지만, 이회장님의 질의 응답은 지금도 제 귀에 생생합니다. 이에 앞서, 영어 이외에 다른 외국어는 뭘 하는냐는 질문에 독일어라고 답했읍니다. 면접관들은 모두 저의 대학 성적표를 가지고 계신데 저는 일학년 독일어에 A 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있게 답할 수 있었읍니다. 그러다, 어느 분이 수학은 어떠냐고 물어셔서, 제가 수학도 잘 했읍니다. 대학 입시 때, 아주 어려운 문제가 나왔는데 제가 있든 수험장에서 저만 그 문제를 풀어서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씀 드렸읍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났을 즈음에 이 회장님이 느닷 없이 “니 지금 얼마 받노?” 하고 저의 당시 봉급을 물어보셔서 쥐꼬리만한 신문사 봉급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약간 당황해서 머뭇 거리니까, 한 사장님이 “자네가 지금 받는 월급보다 우리가 줄 월급이 적다면 우리한테 안 올 것 아닌가? 그래서 물으신 것이다” 하고 보충 설명을 해주셨읍니다. 그 말을 들으니 저를 뽑기로 작성하신듯한 생각이 들어 “ 지난번 승급시에 입사 동기 열명 가운데 월급이 가장 많이 오른 그룹에 속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라는 말이 끝나자 마자, 이 회장님이 “자네는 자랑꺼리 가 참 많네” 라고 하셔서 다 합격해 놓은 것을 자랑하느라 놓쳤구나하고 걱정을 했으나, 합격이 되었읍니다.

이렇게 장황히 끌고 온 것은 다음 얘기를 하고져해서입니다.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인근까지 쳐들어 와서 “향토예비군”이 편성되어 군에서 제대한 사람들이 모두 에비군 훈련을 받으러 가면서 모두 투덜대었지요.
그런데 직장 동료들은 향토 예비군 훈련을 받지 않는 제가 무슨 빽으로 나가지 않나 몹시들 궁금해 하였읍니다. 저는 1963년 100일만에 의도하지 않게 의병 제대된 덕분에 “ 무기여 안녕 (Farwell to Arms)” 을 영원히 외칠 수 있게 되었읍니다.
“김형은 어째서 예비군 훈련을 안 봤소?” 하고동료들이 가끔 제게 묻는데, 저는 “군대 한번 나가면 그것으로 끝내야지 어찌 밤낮 훈련하러만 다닌단 말입니까? “ 하고 핀잔을 주었지요.

그러다, 저는 방향을 바꾸어 늦깎기로 대학원 외교학과에 입학을 했읍니다. 입학 동기로 정세현 (외교학과 67) 전 통일부 장관, 그리고 송종환 전대사 (외교학과 64) 등이 있었읍니다.
그 무렵 어느날 수업을 마치고 집 (명륜동) 에서 쉬고 있는데 이 부식 (외교학과 62) 군이 전화 하면서 삼청동의 남북 회담 사무국의 대변인이시고 경기 선배 (경기 52회) 이신 정주년 씨를 찾아 가보라고 일러 주었읍니다. 이 친구가 앞에서 언급한 새로운 전기를 열어준 인사이지요. 저의 경기 2년 후배인데, 워커힐에서 공보부 주관 관광 안내원 교육을 같이 받을 때 교분이 두터워 졌지요.

이 부식씨는 소위 마당발로 선후배간에 교류가 넓고, 그 당시 그는 청와대 행정관으로 감사원에 업무 관계로 가는 길에 바로 옆에 있는 남북 회담 사무국에 들러서 정 선배께 인사를 드렸는데, 혹시 영어 잘 하는 사람을 알면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저를 추천 했다고 합니다.

주1: 편집국장 김준길씨는 신문과 김 창신 동문 (’75) 의 부친이셨읍니다. 세상은 참 좁은 곳입니다. 제가 LA에 처음으로 왔을 때 김 동문이 저를 반갑게 맞아 주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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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시력 검사를 받은 시력표는 E 자의 가운데 금이 조금 들어가 있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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