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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Topic: 이박사 하필 휴전 조인 1주년 기념일에 조그만 전쟁 하자고 애걸
teddy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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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이박사 하필 휴전 조인 1주년 기념일에 조그만 전쟁 하자고 애걸
on: October 12, 2018,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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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부처가 이박사 부처를 백악관에서 맞이하고 있다

이박사 하필 휴전 조인 1주년 기념일에 조그만 전쟁 하자고 애걸

얼마나 힘들게 얻은 휴전을 깨고 당사자인 아이크에게

말도 안되는 전쟁을 다시 시작하자는

이승만이 외교의 천재(?) 웃기는 소리

아이크: 조그만 전쟁이 핵전쟁으로 비화되면

인류의 문명이 파괴된다고 이 박사 훈계

반공은 좋지만 새로운 전쟁은 불가라고 선 그어

아이크 이박사의 “북진통일” 잠꼬대에 시달려

치매가 심하다는 보고 받고 비밀 특사보내 하야 권고

4-19 학생 봉기가 일어나자

마샬 그린이 상부의 뜻을 받들어 실각시키고

그가 다시 권토중래하려 꼼틀거리자

아예 CIA 비행기태워 하와이로 납치해버려

마르코스 실각시켜 하와이 보낸 것 다 알지만

이박사도 같은 꼴 당했으나

아무도 모르거나 말 안해

요즈음에 북한과 미국의 제2차 정상회담이 조만간 예정되어 종전선언이나 궁극적으로 평화 협정 체결이 될 것으로 예견되는 이 시점에 지금부터 64년 전인 1954년 7월 27일 이 승만 박사는 미국을 방문하여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제1차 한미 정상회담에 참석했다.

이 박사는 항상 “북진통일”에 광적으로 집착하여서, 휴전을 달성하는데 이박사의 여러가지 반대로 특히 반공 포로 석방으로 휴전 협상자체가 중단 될뻔한 위기도 거쳐서 이박사라면 밥맛없게 하는 인사라고 지극지긋 싫어하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회담 당일 아침부터 이박사가 또다시 “북진 토일” 문제를 끄내들 것으로 예상하였다.

한미 정상 회담이 시작하는 1954 년 7 월 27 일 새벽 7 시 15 분에 아이크는 자신의 대변인인 헤거티를 자신의 침실로 불러서 7 시 30 분에 당도하자 아이크는 그에게 “노인장 (이 박사) 을 다루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 분은 조국 통일을 열망하지만, 그렇다고 그 분이 전쟁을 새로 시작하도록 허용할 수는 없어. 그 결과는 너무 끔직할터이니까 말이지. 그러나 그는 아주 고집스런 영감일세. 우리가 그를 무한정 억제해 갈 수 있을지 잘 모르겠네” 라고 설명하면서 오늘 회의록을 작성해주도록 당부하였다.

제 1 차 한미 정상회담은 백악관 국무회의실에서 1954 년 7 월 27 일 상오 10 시에 시작했는데,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덜레스 국무 장관에게 양국 관계 현안을 설명하게 한다음 이 박사가 이어서 자신의 입장을 천명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발언을 하여서 거의 알아 들을 수 없을 정도였고, 좋은 영어를 구사했으나 액센트가 강했다고 기록자 (헤거티 대변인) 가 토를 달았다.

이 박사는 외교에는 자신만만한 듯 외무 장관도 대동하지 않고 정상회담에 임했는데 그의 발언 요지는 공산권의 종주국인 쏘련이 세계를 장악하려는데 그대로 두면 미국까지 포위하려드는데 도 그만 둘 수 있느냐고 따졌는데,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철의 장막 건너 편 (공산권) 국가와 의도적으로 싸우려는 어떠한 행위에도 미국이 가담할 수없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 또한 만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끔직한 결과가 초래되며, 미쏘 대결의 핵전쟁은 문명을 파괴하고, 우리 (미국) 도시가 파괴되어서 수백만명의 인명이 살상하게된다고 핵 전쟁의 가공함을 인식시켰다.

아이크는 현재 우리가 가진 무기 (핵무기)로 전쟁을 치룬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태이며, 만일 크레믈린과 워싱턴이 전쟁을 치룬다면 그 결과는 너무 끔직스러워 상상 조차하기 싫으며, 내가 지금 얘기하는 전쟁이 수행된다면 민주국가라도 살아남지 못한다고 경고하면서, 문명도 완전히 파멸되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에 반대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The President said: ---

let me tell you that if war comes, it will be horrible. Atomic war will destroy civilization. It will destroy our cities. There will be millions of people dead. War today is unthinkable with the weapons which we have at our command. If the Kremlin and Washington ever lock up in a war, the results are too horrible to contemplate. ---

(원문 일부: 여기 President 는 President Eisenhower를 지칭한다.)

아이크는 이 박사의 통일 염원에는 이해하지만 분단 국가가 어디 한국뿐인가 라고 되물어면서 독일 오스트리아 등도 분단국가라는 점을 지적하고 그들의 통일을 위해 전쟁을 할 수는 없고 오직 대화와 협상을 계속할 수 밖에 없다고 무력 통일 요구를 일축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 설립 초기에 휴전을 반대했든 반공주의자 덜레스 국무 장관이 자신의 견해에 동정표라도 던질까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그 역시 반공은 좋으나 새로운 전쟁은 찬성할 수 없다는 점을 기조 연설에서 확실히 하였다.

그리고 나서, 경제 문제와 방위 문제는 양국의 전문가 사이에 논의하도록하고 일차회담을 마쳤다.

이 박사는 혹을 때려 갔다가 혹을 하나 더 덧븥인 꼴이 되었다. 어렵사리 휴전을 얻어내서 미국의 자제들이 더 이상 죽지 않게 했는데 또 새로 전쟁을 시작을 하자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맥아더 장군이 휴전을 반대하고 확전을 획책하다가 파면당한 이후 아이젠하워 행정부내에 이박사에게 후원 또는 동조하는 인사가 한명도 없다는 것이 확연히 들어났다.

“외교의 천재” 라는 분이 왜 이렇게 상대국의 입장도 못알아 차리지 못하고 익지를 부리는지 이해하기 곤란한데 문득 노태우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 나오는 이 박사에 대한 몇 마디가 이를 잘 설명해주는 듯하다. 회고록에 따르면 이 박사가 정상 회담을 한지 채 두달도 안되는 그해 9 월달에 육사를 방문하고 사열을 하는데 자신이 어디에 온지도 몰라서 주위에 묻자 당시 배석한 국방 장관이 “여기가 육사입니다” 라고 답하니까 “그럼 육사가 뭐하는 곳이냐” 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 날 분명히 국방 장관이 이 박사에게 육군 사관학교에 사열하러 간다고 먼저 설명을 드리고 그곳까지 대동하고 갔으나, 자신이 어디에 와 있고 육사가 어떤 곳인지도 생각나지 안았다면 이는 분명 노망이든 것이 틀림 없다. 그당시 육사 생도 노태우한테 들킨 것은 천만 다행이라 하겠다.

그후 1959 년 이 박사의 건강상태를 CIA 가 보고하면서 그 해 5월 하순부터 이박사가 정무를 파악하는 능력이 현저히 저하됐다. 그리고, 7 월 13 일 이박사를 면담한 다우링 대사도 이 박사가 대화중인 문제점에 초점을 맞추는데 어려움을 내비쳤다고 말했다. 또한 다울링 대사는 본국 훈령에 답변하는 다른 별도 보고서에서 이 박사가 한 번 설명으로 바로 알아차리지 못해서 여러번 거듭 설명해야 겨우 알아듣는다고 하였다.

그 이틋날 (1954년 7월 28일) 이 박사는 의회 연설에서 많은 박수를 받았으나 그는 제네바 회의가 실패했으므로 휴전을 종결하고, 한국군 대만의 국부군, 그리고 미해공군이 중공을 패배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고 이에따라 한국 통일도 가능하다는 충격적 연설은 오히려 미국의 여론을 악화 시켰다.

***아직까지 한국 언론에 이박사의 조그만 전쟁 애걸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핵전쟁의 위험성 설파 기록이 한편도 없다.***

그런데, 그 다음날 제 2차 정상회담은 완전히 난장판이되었다. 문제는 공동 성명 초안에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호적이고---“ 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발견한 이 박사가 양유찬 한표욱 등을 따로 부러 이 친구들 (미국측) 이 나를 불러 놓고 올가미를씌우려는 작전을 쓰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다시 아이크를 만날 필요 조차 없다며 몹시 불쾌히 생각하고 회담을 보이콧하려 해서 회담 시작 시간인 10 시가 넘도록 미동도 하지 않았으며 주빈이 시간이 지나도록 참석하지 않자 백악관에서 무슨 사고라도 난 줄 알고 전화 문의까지 여러번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손원일 백두진 두 수행원이 참석하셔야 된다고 강권하여 백악관 회의장에 갔으나 사과의 말도 없자 아이크는 그 나름으로 화가나 있었고 한일 국교 재개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다 이 박사가 자신이 권좌에 있는 동안 일본과 상종도 하지 않겠다고 단호한 입장을 표하자 아이크가 화가나 일어나서 옆방으로 갈 정도로 살벌한 회담장 분위기였고, 이박사는 방을 나서는 아이크 등뒤로 “저런 고얀놈 있나, 저런” 하면서 분노를 노출했다고 한다. 아이크가 잠시후 분을 삭이고 돌아와서 의견 차이가 멀리 벌어진 한일 국교 정상화 문제는 토의를 일단 뒤로 미루고 다른 문제를 다루려 하자 이번엔 이 박사가 일어나 버렸다 한다. 다시 말해서 정상회담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우선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원인을 살펴보면, 이 박사가 소위 “외교의 천재 (?)”라고 그의 추종자들이 내세우지만, 그는 외교 관행과 의전 규범을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우선 회담의 과제별로 양국간에 사전 조율을 하여 공공 성명도 거의 양국이 이미 합의해둔 사항을 열거해서 회담이 끝날 때 양측이 합의 사항을 확인하고 서명하여 발표할 수준에 이르러야 하는데, 전쟁중에 억지를 부려서 하는 식을 미국에 와서 되풀이 하려는듯했다.

아무튼 나라가 세워진지 일찬하여 전문가가 전무하고 이 박사 앞에서는 모두 “Yes” 로만 일관한 머슴형 참모들이라 아무도 감히 이 박사의 어긋난 행동이나 언행에 제동을 걸 수 없었다.

반공 포로 석방에 이은 정상 회담에서 보인 이 박사의 무례한 언행은 그의 귀양 길로 가는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이 박사는몇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고, 뉴욕에서 티커 퍼레이드 환대를 받았으며, 월도프 아스토리아에 칩거중인 그의 최대의 후견인이었든 이빨 빠진 호랑이인 맥어더 장군과 해후하고 한 시간 가량 얘기를 나눴다고 하는데 아마 맥아더의 전성시대를 화제로 했을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문제 (휴전을 종료하고 새로 전쟁을 시작하자는 문제) 토의에서는 그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으나 군사 원조등 국방 문제에는 큰 도움을 받았다 한다. 후대에 노무현 대통령에게 부시 대통령이 면전에서 “이 사람 (This man)” 이라는 하대를 받은데 비하면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뒤에서는 “옹고집 노인장 (Stubborn old fellow)” 이라고 불렀으나 면전에서 하대하는 법은 없어서 다행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박사의 무례는 아이크가 결코 잊지 않고 이 박사가 노망 들렸다는 보고를 듣고 이 박사 제거 작업에 시동을 걸었고, 4.19 학생으거로 한국민의 지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마샬 그린은 아이크가 월터져드하원의원을 이박사에게 비밀 특사로보내 하야를 설득한것이 미국의 이박사에 대한 신임 철회로 인식하여 매카나기 대사를 움직여 그를 현직에서 물러나게 실각시키고 (자진 하야가 아님) , 그가 다시 이화장에 있으면서 재빕권 (권토중래)를 꾀하자 하눅 땅에서 영원히 추방시켜 사실상 CIA 비행기에 태워 하와이로 납치해갔다. (자진 망명이 아님) (주 2).

운명의 7 월 29 일에 알어난 또 하나의 사건은 1905 년 일어난 소위 “태프트 카츠라 밀약 (Taft-Katsura Agreement)” 이 동경에서 미국 전쟁 장관 윌리암 태프트와 일본 총리 카츠라 타로 사이에 체결된 문서로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고, 또한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것이 동아시아의 안정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점을 동의했다. 이는 한국에서는 감히 말도 못하지만, 미국이 정식으로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는 것에 OK 한 것이다.

미국은 이것이 조약이 아니고 메모에 불과하다고 격하하지만, 1924 년 역사학자 타일러 데넛이 발굴한 문서에 따르면 태-카 밀약이 성사되고 바로 당시 대통령 테드 로즈벨트가 카츠라 총리에게 전보를 보내면서(1905 년 7 월 31 일) 그 서명 내용을 대통령인 자신이 동의한다고 해서 법적 효과를 가지는 문서임이 판명 되었으며, 왜 그 문서가 발굴될 때까지 비밀로 붙였다는 것 자체가 그 문서의 중요성을 입증한다고 보겠다. 또한 뒤이어 일어난 일들을 보면 미일 간의 흥정임을 알 수 있다.

즉 일본은 조인 후에 그해 (1905) 11 월 27 일 을사 보호 조약을 체결하자 보란듯이 제일착으로 미국이 조선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주재하든 외교관을 철수시켰다. 일본은 우선 외교권을 탈취하여 조선이 다른 나라와 협약을 맺지 못하게한 다음에 1910년 조선을 완전히 병탄하였다.

이는 외교가에서 통용되는 ”국제 관계에서 영원한 우방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으며 오직 국가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말을 실감케한다.

필자 주

주 1: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2?1954, KOREA, VOLUME XV, PART 2
Hagerty Diary, July 27, 1954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2-54v15p2/d923

주2: 이박사는 내가 하와이로 축출했다 그린 증언

http://blog.koreadaily.com/teddykim/1059910

과거를 되돌아보면 미래를 알 수 있다(관왕지래: 觀往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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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 부처가 이박사 부처를 백악관에서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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