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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 선생 탄신 100주년, 다시 켜진 등불
고원(高原) 선생 탄신 100주년을 맞아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선생이 1970년 아이오와대학교에서 펴낸 《Contemporary Korean Poetry》(현대한국시선)가 올해 University of Iowa Press에서 다시 출간된 것이다. 재출간 소식을 듣고 책을 구하기 위해 수소문하던 중 사모님과 통화가 닿았다. 사모님은 흔쾌히 1970년 초판과 2026년 재판본을 함께 전해주셨다.
초판이 나온 지 반세기가 훌쩍 지나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하지만, 나에게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고원 선생은 부족한 나에게 글쓰기를 가르쳐주신 스승이기 때문이다. 스승의 탄신 100주년을 맞아 시대를 앞서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그 고결한 노력이 다시 조명을 받게 되니, 제자로서 벅찬 감격과 자부심을 감출 길이 없다.
《Contemporary Korean Poetry》는 선생 개인의 시집이 아니다. 선생이 직접 엄선하고 번역한 한국 현대시의 대규모 영어 시선집으로, 당시 한국 시인 140명(김소월, 한용운부터 김수영, 김춘수까지)의 작품 181편을 영어로 옮겨 미국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오늘날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한 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1970년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한국문학을 영어로 읽는 일 자체가 드물었고, 한국 현대시의 역사와 성취를 미국 독자들에게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일은 누구도 쉽게 시도하기 어려웠다.
고원 선생은 그 험난한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미 1964년 아이오와에서 출간된 《Poems from XV Languages》에는 선생의 시 〈Facing Midnight〉가 실려 있었다. 작품 아래에는 ‘저자가 한국어 원문을 직접 번역했다’는 뜻의 표시가 붙어 있었다. 선생은 1960년대부터 자신의 시를 영어로 옮기며 두 언어와 두 문학 세계를 잇는 다리를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는 훗날 《Contemporary Korean Poetry》에도 수록되었다. 놀랍게도 1970년 초판과 2026년 재판본 모두 153쪽에 있었다. 56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Facing Midnight〉는 같은 페이지에서 여전히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Facing Midnight〉를 다시 읽다 보니 오래전 스승의 음성이 떠올랐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난다. “the lamplight grows under my skin / still facing midnight.”(내 피부 아래에서 등불은 자라난다 / 나는 여전히 한밤을 마주하고 있다.)
나는 이 두 행이 고원 선생의 문학적 삶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한밤은 어둠이고 불확실성이며, 때로는 외로움이고 죽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선생은 그 어둠을 피해 달아나지 않았다. ‘Facing midnight’, 한밤을 마주하며 자신의 피부 아래에서 스스로 등불을 키워냈다.
1970년의 《Contemporary Korean Poetry》 역시 그렇게 피어난 등불 가운데 하나였다. 그 안에는 식민지의 기억,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의 비극, 상실과 죽음, 전후의 삶, 그리고 급격한 근대화 속에서 흔들리던 한국인의 정신과 역사가 담겨 있었다. 선생은 한국 현대시를 영어권 독자에게 소개함으로써 한국을 ‘전쟁과 가난’이라는 단편적인 이미지 너머에서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창을 열었다.
2026년, 그 지도가 다시 세상에 나왔다. 우리는 한강 작가의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을 기뻐하고 한국문학이 세계 여러 언어로 번역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화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시절, 고국을 떠나 이국땅에서 외롭게 한국문학의 길을 닦았던 선구자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가능했다. 고원 선생도 그 길을 닦은 선구자 가운데 한 분이었다.
선생은 동국대학교 영문과를 거쳐 옥스퍼드에서 수학한 뒤, 아이오와대학교와 라번대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셨다. 특히 아이오와대학교에서는 문학 공동체와 깊이 교류했고, 은퇴 후에는 LA에서 한인들에게 글쓰기를 지도하셨다. 2007년 12월 초였다. 강의를 마칠 무렵 선생님은 “좀 더 규모 있는 아카데미를 만들자”면서 몇 사람에게는 준비위원을, 내게는 총무를 맡아달라고 하셨다. 그날이 선생님의 마지막 강의였다. 그리고 그 몇 사람과 함께 입원해 계시던 병원에서 선생님을 뵌 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때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이 이제 LA, OC, 애틀랜타를 비롯해 미주 각지에서 글쓰기를 지도하고 있다.
고원 선생은 글을 쓴다는 것이 단순히 문장을 조합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시대와 세계를 온몸으로 견디며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건네는 일임을 삶으로 보여주셨다. 한국어와 영어 사이에서, 고국과 타국 사이에서,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선생은 끊임없이 길을 내셨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오늘의 한국문학이 세계로 뻗어가고 있다.
반세기 전 선생이 세상에 내놓았던 책이 다시 출간됐다. 한 시대를 앞서 밝혔던 등불 하나가 우리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둠은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선생은 한밤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그리고 자신의 피부 아래에 등불을 키웠다. 그 등불은 이제 우리의 것이 되었다. 타운뉴스 발행인이기에 앞서 한 사람의 제자로서 스승이 남긴 빛을 다시 바라본다. 그리고 그 빛이 다음 세대의 길을 밝혀주기를 바란다.
타운뉴스 2026.8 발행인 안창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