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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3(1960). . 1. 12 고2
무의미한 24시간은 또 덧없이 흘렀다.
김경한 선생님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편지 받아 기쁘다. 그 희망을, 그 태도를, 그 정력을 버리지 말고 그대로 이어 나가거라.... 고 말씀하셨다. 읽고 나서 선생님의 말씀에 뼈저리게 감동했지만 그 만큼 어깨가 몇 근 더 무거워진 것 같다. 하여튼 해야 된다. 공부를.
요사이 내가 왜 이렇게 감상적으로 흐르는지 모르겠다. 참 더럽게 센티 해지고 있다. 잉크 병 하날 봐도 센티 해질 정도니까. 뭔지 몹시 그립다. 당장 편지라도 하고 싶어 종이위에 펜대를 붙잡았으나 보낼 곳이 없다. 하늘로나 보낼까? 책상위에 있는 아무것이나 잡히는 대로 콱 던지고 싶다. 문_ 생각을 하면서다. 어쩐지 얼굴이 화끈하여 그저 잉크병을 번쩍 든다, 그러나 금방 던질 것 같았던 나의 기세는 사라지고 만다. 잉크병을 제자리에 놓으면서 나는 혼자 실소하고 만다. 흥! 제기랄, 이게 뭐냐? 미친 지랄이다.
콱! 라디오 스위치를 튼다. 아까부터 은_이가 쨍알쨍알 울더니 이제는 막 악을 쓰며 운다. 신경질이 콸콸 솟는다. 아… 라디오에선 지금 재즈가 찢어져라 울려 나온다. 귀를 막는다. 받친 팔꿈치로 책상이 떠는 것을 느낀다. 하여튼 은_이가 우는 소리, 그, 골을 박박 긁는 울음소리 보다는 차라리 이 요란한 재즈가 좋다. 이렇게 한차례 하고 나면 나 자신이 부끄럽다. 참을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뭐, 할 수 없다. 이게 하루 이틀이 아니니까.
4293(1960). 1. 15 금요일 청 고2
저녁에 공부하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우리 방에 놀러 오셨다. 처음으로 아주머니 입에서 나는 경이 할만한 말을 들었다. 전에 형과 진_이 누나가 이 방에서 하루 밤을 같이 잤다는 것이다. 집에 아무도 없었을 때니까 추석 때 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병관 형 결혼 당시 임에 틀림없다. 그 날 서울 집엔 형 밖에 없었다. 그 때 진_ 누나가 왔었는가 보다. 이제야 그 무엇을 깨달은 것 같다. “책임 추궁은 하지 않겠어요. 둘 다 저지른 죄이니까요…” 하며 눈물 자국이 번진 편지를 보낸 진_ 누나의 편지를 보고 품었던 나의 의아심이 이제야 풀렸다. 확실히 형은 진_ 누나와 육체관계를 맺었다고 나는 이제 믿는다. 마지막 편지라 하면서 섧게 써 내려간 진_ 누나의 편지! 아니 형이! 형이! 형은 절대로 그런 인간이 아니다. 허나 누가 보증하느냐? 남녀가 한방에서 잤다는 엄연한 사실이 있는데.
큰형이 만일 깨끗한(아직) 인간이라면, 비록 깨끗하다 할지라도 옆방 아줌마는 한방에서 잔 남녀를 어떻게 생각할까? 옆방 아줌마는 “어째서 속히 결혼하지 않는가?” 고 묻는다.
언제 조용한 기회를 틈타서 형 한 테 모든 걸 말해 봐야겠다. 철부지는 입 다물고 있으라고 소리 치겠지. 그러나 철부지? 그런 일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철부지는 아니다. 이제 나도 열 아홉이다. 형제의 사이를 분리시킨다면 나도 능히 한 인간으로 형하고 마주 설 자신이 있다. 형이 만일 그런 더러운 인간이라는 게 들어 난다면 나는 단호히 인식을 달리 헤야겠다. 책임 회피하기 위해, 자기에게 몸을 더럽혀진 여성에게 냉혹하게 거절했다 함이 만일 사실이라면 이 이상 더 어떻게 형을 형으로 모실 수 있을까? 절대로 내 형이 아니다. 단지 저 만_ 형이나 학_ 형 만도 못한 존재의 형일 뿐.
하여튼 따져 볼 일이다. 형이 날 무시하고 말하길 거절한다면 진_이 누나에게 편지나 찾아 가 진상을 알아 내고 말 테다. 나는 정녕 슲다.
형이 담배 피는 걸 처음 봤을 때 나는 퍽 분개를 느꼈다. 어머니 앞에서 형 한 테 따진다고 내가 말 했을 때 어머님께서는 피식 웃으시면서 얘 너나 다음에 피지 마 하셨다. 허나 형의 이런 비굴한 짓을 내가 확신하게 되면 나는 형에게 대들겠다. 진_ 누나가 불쌍하지 아니 한가? 동생이 부끄럽지 아니 한가? 몇백의 눈동자들이 부끄럽지 아니 한가? 형님, 어쩐지 울고 싶소.
작은형이 가면서 나 한 테 하는 말!
“시골 가야 할 텐데 좀… 좀…”
좀, 뭐냔 말이다. 뭐 속절 없이 시계하고 가죽장갑 빌려 달라 하는 것 이겠지. 어쩐지 이런 작은형으로부터 나는 비감해지기도 한다. 시계와 장갑을 떼 주면서도 나는 자꾸만 꺼꾸로 되는 감정을 일으켰다. “야! 병길아 나 시골 가야겠으니 장갑하고 시계 좀 내 놓으라”. 이 정도의 호령이 떨어져야 형 답지! 내가 반대라도 할라치면, “야 이놈. 감히 누구의 말인데 거역이야? 잔말 말고 빨리 내 놓지 못해?”.
이 정도의 위엄은 있어야 어떻게 형 한 테 복종할 맘이 울어 나오는 거지. 하여튼 시골엔 또 돈 가지러 간다는 거다. 까딱하면 전속 명령을 받을 것 같아 상관들 입을 돈으로 막아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 놈의 육군본부는 없는 놈 돈 먹자고 달려드는 곳인가? 실직할까 겁내는 사무원 보다 전속을 무서워하니 그 놈의 육군 본부라는 곳은 천당이란 말이냐? 군기가 엄하고…. 어쩌고 하면서 불평을 늘어 놓을 땐 언제고 외부로 전속이 내려 질 까봐 떠는 땐 또 언제냐?
다… 모순이다.
우리집 식구는 모두가 위선이다. 가면을 쓴 사람들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다. 지식인인 체, 선량한 체, 이치에 바른 체하는 큰 형님도 지금 본능의 지배를 받는 저속한 인으로 타락되었고, 작은형마저 동생 앞에서 쩔쩔매는 맹추가 되어 버렸고, 동생 역시 뭐 좀 안다고 뻐기고 형을 형 같이 여기 질 않고, 4등 한 걸로 큰 위안을 삼는 졸렬한 놈이면서도 외면은 아주 뭐나 하는 것처럼 떠들어댄다.
형님, 어째서 형님은 이렇게 동생 가슴을 메어 줍니까? 형님의 행동이 진실 입니까? 정말 그랬습니까? 제가 사실을 아는 날 저는 형님을 형님을 형님을 형님을 …… 하여튼 저는 그걸 교훈 삼아 저도 꼭 해 보겠어요. 고귀한 시인은 무슨 감정으로 본능을 이기지 못하는가? 나, 경험으로 그걸 알아 내겠어요. 형님!
깨끗한 화신. 더러운 구두 밑 바닥. 흥! 선생님. 흥! 모순이다. 탈을 쓴 짐승… 흥! 이래서 인간은 전부 모순투성이. 저주하는 나도 모순 덩어리! 수없이 00을 함으로써 이미 성스러운 맛은 다 없어진 나! 내가 아닌가? 모순 덩어리다.
4293(1960). 1. 16 고2
눈이 올 거라고 하늘이 경고했다.
아! 초조해 죽겠다. 시간은 왜이다지도 빠르냐 말이냐. 저 무작정 돌아 가는 초침은 정말 인정머리 없는 완고 덩어리구나. 그저 제 명 끝까지 똑 같은 속도로 돌기만 하는 게 제 의문줄 아나 보지? 탈선을 모르는 놈! 몇 천년이 흘러도 저 놈은 내내 거기서 더 발전하질 못한다. 일보라도 탈선하면 자기는 죽는 날이니까......
오늘 낮에 무_이 찾아왔다. 극장엘 가자 한다. 마침 오늘 편지로 시골서 돈이 올라왔다. -- 일금 일천 오백환 --- 거액의 돈이다. 무_과 명동 극장에 가서 레미제라블을 감상했다. 투성이, 사람투성이었다. 시간에 쫓겨 허덕이는 군상들, 시간이 남기고 간 오물을 씹어 넘기기에 분주한 군상들, 또 그 중에 하나인 나!
주인공은 짱카방과… 여자 이름은 뭐더라? 하여튼 쨩카방이라는 것을 외운 것만 해도 나로서는 신기한 일이다. 영화를 보고 나니 날씨가 그새 두어 배로 더 차가워진 것 같다. 하필 또 스웨터 하날 벗고 오질 않았는가? 떨면서 집에 와 보니 순이누나가 나갔다 들어와 있다.
4293(1960). 1. 17 일요일 고2
나의 글씨체가 형편없이 줄어 간다.
내 생활이 불규칙한 이유인가? 아니면 초조감에서 일어나는 본능인가?
한 자를 쓰면 다음 잘 생각 할 여유도 없이 펜대가 이미 움직인다.
침착성이 부족함인가?
지금은 밤 한시가 좀 넘었다.
이제 방학도 꼭 닷새 남았다. 아… 이런 생각은 아예 하질 말아야 하겠다. 이런 것 저런 것 생각해서 뭣하느냔 말이다.
이미 세월은 흘렀는데!
형님. 형님은 지금 무얼 하고 계시는지요? 지금쯤 절간에서 꿈속을 방황하시는 지요. 아니면 지금까지도 촛불 밑에서 몇 자의 말을 뽑아내느라 온갖 잡념을 몰살하고 그야 말로 정화된 환경속에서 침잠 하고 계신지요?
요원한 무지갤 타고 지금 천국에라도 여행하시는지요?
어제까지 형을 멸시했던 저는 저의 그릇됨을 찼었습니다.
아…. 지난 날을 용서해 주세요.
비록 형님이 그랬던들 그게 죄가 될까요?
허나 형님이 한 여성을 짓 밟아 놓은 게 사실이라면…
응당 기꺼이 그 여성을 일생의 반려로 - 좋든 싫든 간에- 삼아야 함이 지식인으로서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지금도 쓰린 맘으로 눈물 지을 지 모를 진_이 누나가 눈에 선해 마치 제가 일을 저지른 것 같습니다.
형님. 그러나 저는 형님을 끝까지 믿습니다. 끝까지 믿습니다. 설사 형님이 일시적인 과오를 범 하였다 할지라도 저는…저는…형님을 용서하겠어요……. 형님께서 그 여성을 받아들인다면 말이예요.
……………………
[生… 時間… 行動….寬行….돈….死. … 復活
앞으로 일년간이 훗……딱! 1961(4294)년 3월18일, 時 오늘 나는 내 인생 최대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서울대학 문리대 교문을 들어섰다. 들어서자 부모가 찔끔 찔끔 눈물 흘리는 뒤를 고개가 땅에 떨어져라 힘 없이 늘어뜨리고 나오는 자가 있는가 하면 다 큰 놈이 어린애처럼 좋아서 싱글 벙글, 껑충 껑충 뛰는 놈이 있다. 어쩐지 그런 몰골들을 보니 나는 벼란 간 웃음이 터졌다. 저 배우들, 저 배우들, 저…게 다 뭐냐? 너무나 악착같은 연극, 차이가 너무 진 연극! 웃는 놈은 누구고 우는 놈은 누구냐? 누구는 신경조직이 복잡해서 이 순간 웃을 수 있고 누구는 세포가 허술해서 운다는 거냐? 몇 년간 배운 걸 종이 몇 장에 옮긴다…. 이건 아주 재수다. 재수. 아니 떨어진 놈은 공불 못해 떨어졌나? 아니다. …확신한다. 나는 거침없이 들어가 죽 훑어본다. 다시 본다. 또 다시 본다. 또 또 또… 허나 내 번호는 없다. 하여튼 없는 건 사실이다. 앞이 콱! 뺑그르르 돌며…. 허연 백지 같은 게 머리 속을 채운다. 그래도 남아 있는 건 자존심이어서 나는 태연하게 교문을 나선다. 자살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하는 걸 깨 닫는다. 앗! 있다. 내 번호가! 나는 그저 뛰어서 집에 와 실컷 울었다. 0 0 0 0 ]
4293(1960). 1. 18 고2
24시간이 또 무참하게 지나 갔다.
윗 집 여고 이학년 계집애가 나 한 테 수학 문제를 보냈다. 우편 배달부를 통해 보내왔다. ‘X의 3승 = 1 을 풀어라’ 이것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단순하게 x = 1 이라고 써 보냈다. 그랬더니
‘x3-1=0
(x-1)(x2+x+1)=0
그러므로 답은 x=1 또는 x=(-1+_스퀘어루트3 i)/2 ‘ 아닙니까? 이렇게 반문해 왔다. 나는 그만 얼굴이 확근거렸다. 이게…. 무슨 창피냐?
그래도 넉살 좋게 ‘하여튼 반은 맞았으니 낙제점수는 아니잖아요? 귀하께서 푸신 것이 맞습니다.’ 라고 써 보냈다. 후에 보니 내가 가지고 있는 참고서에 나와 있는 문제다. 창피하고 분한 마음……. 아이고!
4293(1960). 1. 21
내일부터 개학이라… 뭘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다가 만족하기도 전에 빼앗긴 것 같은 마음이다. 그리고 뒤통수를 몇 천근 무게로 내리 누르는 그 무엇이 있다. 우선 나는 내일부터 내 시간을 박탈당한다. 스물 네 시간을 내 맘껏 요리하지 못한단 말이다. 순이 누나하고 한 방에서 자야 한다. 은_이가 우는 소리를 더 크게 들어야 한다. ……하는 이 두 가지 만으로도 나는 맥이 풀리고 침울해지기에 충분하다.
징그럽도록 싫은 순이하고 한 이불 속에서 자는 것이다. 보기만 해도 역정부터 나는 순이하고 한 방에서 자게 되는 것이다. 밥하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늘어지게 자는 순이하고 한 방에서 지내야만 한다는 게 나를 무엇보다도 불쾌하게 한다. 인간이란 할 일이 없으면 잠이나 자라고 태어 났단 말인가? 이건 뭐 대낮이고 초 저녁이고 늦은 아침이고…. 시간만 있으면 자는 거다.
나는 이번 한달 동안을 이 좁은 방에서 혼자 지내며 확실히 고독을 좋아하는 내 성질을 깨달았다. 혼자 독점한다는 것…. 이것처럼 나에게 안도감을 가져다 주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이제는 그 보기 싫은 자하고 침식을 같이 해야 한다.
옆에선 늘어져 자고 있고…공부할 조건이 안 된다. 언젠가 나는 순이의 자는 얼굴을 유심히 본적이 있다. 빈대떡! 빈대떡 같은 상판에 살이 쪄 눈은 움푹 들어 갔고 입은 염치없이 옆으로 째져있다. 콧구멍은 뭐가 그리 반가운지 위를 향해 뻥! 뚫렸다. 엿치기 할 때 잘라 놓은, 엿가락 토막 같은…. 더럽게 맵시 없는 몸뚱어리가 이불 속에서 잠자고 있다. 별안간 보기도 싫고 징그러운 걸 보는 것 같아 침이라도 탁 뱉아주고 싶었다
설에 기철네서 잤다고 꾸중하시며 아버님께서는 아무리 사촌 지간인 순이라 해도 한 이불 속에서 자는 건 못쓴다고 말씀 하신적이 있다. 나는 순이의 그 과히 침 뱉아 주기에 인색하지 않을만한 상판을 바라보며 아버님의 그 말씀이 생각나 피식 웃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나는 내가 하숙을 하며 혼자 잘 때는 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 “아무리 누이라도 한 방에서 자면 좀 기분이 이상해질 거라” 하는. 그러나 실지 당해보니 오히려 그런 생각을 했던 나 자신이 얄미워진다.
우선 보기 싫어지고 다음은 목구멍에서 뭐가 넘어오는 것처럼 징그럽게 보이니 말이다. 언젠가 나는 누이에게 이렇게 말 한적이 있었다. ‘누나 난 이담에 결혼하지 못할 것 같아! 그거 원 생면부지의 두 사람이 어떻게 징그럽게 한 방에서 자우? 구역질이 날 것 같아. 징그럽게 어떻게 한 이불 속에서 잘 수 있을까?’ 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 끝엔 ‘사실은 누나 자는 걸 볼 때마다 일어나는 생각이야!” 라는 말을 하려다 그만 두었다. 누이의 자존심을 생각해서였다. 허나 누나의 대답은 이외에도 걸작이다.
“얘얘! 철없는 소린 작작해…. 다 크면 달라지는 거야. 크면 다 달라져!” 이런 소리 들으니 어쩐지 더 밉게 보이고 징그럽게 보인다. 도대체가 징그럽게 어떻게 한방에서 서로 허덕대고 신음하고 애무하고 그런 걸 할 수 있단 말인가? 여자들이 남자의 그 코 같은 액체를 얻어먹으려고 몇 분간을 신음하고 황홀경에 빠지고 하는 건 무슨 까닭인가? 이것도 연극이냐? 큰 형님도 이 징그러운 것을 한 여성, 그것도 몸이 약해 항상 비관하고 있는 … 에게 베풀고는 좋아라고 희희덕 거렸을테지? 그리고선 아주 점잖게 발길로 뻥 찼단 말이지? … 흥! 이것도 연극이다. 언젠가 나는 이런 “징그러운 짓을 보고 싶은 심정이 강렬히 일어나 안방의 은_이 아빠 엄마를 염탐하려고 시도한 적까지 있었다. 그러나 몇 시간 안 가 나는 나를 심하게 비웃었다. 참 병신 같은 놈이다. 그것을 구태여 봐서 어찌 하겠다는 거냐? 물론 내가 그런것쯤 볼 기술이 없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나는 벼란 간 나 자신을 조소하기 시작했다. …..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연극이다……. 라고.
하여튼 순이 누나하고 한방에서 잔다는 것은 확실히 고역이다. 공상하고 망상하고 가책을 느끼고 환멸을 느끼는 것…. 이것조차 나는 연극이라고 보고 싶은 거다.
그렇지 않은들 감히 그런 생각을 품을 법 할손가? 하여튼 매일의 24시간이 제약 당하고, 또 독방을 빼앗기는 생활이 내일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니 모든 게 귀찮아진다.
요사이 나는 은_이 엄마와 이야기할 시간이 많아졌다. 그녀는 자기의 과거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그리 잘 생기진 못한 얼굴에나마 홍조를 띄우곤 했다. 그런데 참! 항상 못 생긴 건 아니다. 화장이 잘 먹혔을 때는 그 얼굴이 참 아름답다고 느껴진 때가 많았으므로! 과거 동생을 맺었었다는 어느 남학생 얘기하며, 결혼 초 은_ 아버지가 밥하고 김장했다는 애기하며… 나에겐 재미 있었다. 나는 이 아주머니한테도 물어본 적이 있다. 생명부지의 두 인간이 어떻게 100년간을 한 방에서 지내느냐고? 그녀는 웃으면서 아직은 어리니까 그런 생각을 한다고 했다. 확실히 나는 어려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 철부지의 쓸데없는 걱정 생각이란 말인가? 어떻든 “도대체 은_이는 왜 낳아 울리고, 당신네들은 부부싸움만 하고, 날 공부 못하게 성가시게 구는 거요?” 하고 묻고 싶은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은_이 놈! 하면 온통 미운 환상만 떠 오르지 귀여운 맛이란 하나도 없다. 3살짜리 귀염둥이? 흥! 그건 온통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저 하루종일 그 조그만 아가리로 온 집안이 들먹 거리게 울어 제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신경질을 부리다간 종국에는 노이로제에 걸리고 말 것 같다. 도대체 왜 저렇게 귀찮은 걸 나아 놓고 자기도 그토록 속 썩이는가 생각하니 은_엄마가 밉기도 하다. 반면 나는 때때로 비장한 각오를 하게 된다…. 나는 결혼해서 결코 생산하지 않을 것을! 생산 하드라도 탁아소에 맡기거나 벽장 속에 넣어 두고 기르거나 할것을!.
하여튼 이 집을 떠나야만 한다. 이 집을! 저녁에 종만형에게 가 머릴 깍고 자유극장에 갔다. 초대권이 있어 간 것이다. 허나 영화가 이미 반쯤 진행되어 흥미가 없었고, 우울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4293(1960). 2. 22 고2
올해 들어 처음으로 스케이트장엘 갔다. 미아리에 있는 스케이트장엔 학생들이 별로 많질 않았다. 동성 학생들이 퍽 많았다. 년 만에 타 보는 스케트 인지라 염치없이 넘어지기만 했다. 좀 창피 하기도 했다.
여학생들이 90도로 허리를 꺾어 가지고는 방둥이를 내두르며 달리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도대체 저런 따위의 계집애가 다음에 시집 가면 어느 짝에 써 먹힐 것인가 하고 장탄식 했다. 허나 이것은 못 타는 놈의 망상이겠지……. 넘어지기만 하고 춥기도 하고 해서 나만 곧 돌아와 버렸다.
- 2. 23
올 들어 첫 공부 시작했다. 마음과 몸을 가다듬고….. 어쩌구. 소용없다. 오늘 하루도 흥청망청 시간을 보냈다. 재_이 누나한테 편지했다. 놀러 오라고 편지했는데 놀러 오진 않을 거다. 그런 촌뜨기가 설마 놀러 오기나 할까! 하! 기철이 아버님은 편지를 받으면 또 “이거 또 병길이 놈이 편지했구나! 하시겠지. 참 그분은 어쩐지 보기 만해도 몸이 옴치러 들고 기분이 나쁜 분 이시다. 백부님하고 인상이 꼭 같다.
자! 잡념은 버리자. 그리고 신성한 목표대로 매진하자.
영_, 입시를 치르려 해도 서울서 지낼 곳이 없다 한다. 우리집에 와 있으면 나도 반갑겠다. 허나 병_사촌형도 또 우리집에서 지내자고 할 테지?. 대학 다니게 되면 우리집에서 같이 있자고 할 것이다.
4293(1960) 1. 25
준식이, 정_, 구현이 나 이렇게 넷이서 학교에서 돌아와 화투 했다.
우리 편이 져서 짜장면을 사 먹이는데 눈이 상당히 온다. 그 놈들을 돌려보내고 와서 나는 어쩐지 눈길이 자꾸 걷고 싶어 집 주위를 빙빙 돌았다. 뽀드득 뽀드득 발에 밟히는 눈 소리가 정말 듣기 좋았다. 가슴 속에서 나는 듯, 그 소리는 관절을 통해 폐부를 울려 준다. ……. 할 말이 없다.
4293(1960). 1. 26 火 晴 고2
오후 여섯시 반에 배화여고 강당에서 연극 발표회를 한다고 한다.
옆집 배화여고 2학년 여학생(박_자)이 표 두 장을 가져왔다. 덕택에 나는 은_이 엄마와 함께 그곳엘 갔다. 5막극 “별”을 보면서 나는 감탄했다. 정말! 정말 남자보다 여자가 월등 낫다는 것을 나는 이제서야 똑똑히 깨달은 것 같다. 더구나, 배화엔 문학소녀가 많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나는 인정 안 할래야 안 할 도리가 없다. 예술적인 면에서 사냥개의 코 같은 예민한 감각 처리 능력이 여자들에겐 일찍 부여되는가 보다.
그 속에서 나온 후 아주머니와 나는 효자동을 지나 중앙청 앞까지 왔다. 허나 아주머니는 버스를 타지 말자 한다. 눈은 조금씩 오고…. 나도 어쩐지 마냥 걷고 싶었다. 고개를 넘어 안국동을 지나쳤다. 재동을 지나고 돈화문까지 걸어왔다. 이젠 따갑던 귀가 신경이 마비되어 버렸는지 아무런 감각도 없다.
고개를 넘어 원남동을 돌아 명륜동을 지나 쳤다. 이러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의 요사이 자꾸만 치미는 열등의식이랑 또 어쩐지 참다운 이성교제를 딱 한 번 해보고싶다는 열망이랑... 등을 말할땐 그는 자기의 과거를 비춰가며 그에 적절한 말을 해 주었다. 예컨대 나는 이 회화에서 나 역시 in general 한 평상적인 모든 젊은이들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나 자신 확실히 남과는 구별된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가여워 지기도 했다. 허나 나는 자위해 본다. 이 부인은 보잘것 없는 여자이고 그녀의 과거는 이미 “옛 의 것” 이었다는 것으로써.
아주머니는 또 자기의 결혼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중매결혼이었던 그에게 신혼의 몇 개월 간은 도무지 서로 말도 잘 않고 눈치만 보며 살았다는 것이다.
나에게 결혼 상대의 용모 등을 묻길래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즉 내가 월급봉투를 가져오면 하나도 남기지 않고 우선 다 빼앗아 가는 타입의 여성, 허리는 가늘되 궁둥이가 너무 크지 말 것. 얼굴은 진_이 누나처럼 만 하지 않은여성은 다 좋고, 학력은 고졸. 대학졸업은 절대로 싫다. 키는 절대로 나보다 작아야 한다... 등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아줌마 한 테 한가지 속인 게 있는데 생각이 잘 안난다. 혜화동 아카데미 다과점에 들려 빵 몇 개 먹고 집에 오니 귀, 손, 발이 꽁꽁 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