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중반, 유럽 취재여행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한국은 오늘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계에 덜 알려진 나라였다.
오스트리아 빈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만난 한 여학생과의 대화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는 역사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는데도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홍콩 옆에 있는 나라냐고 묻더니, 아니라고 하자 이번에는 동남아시아 어디쯤 아니냐고 되물었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아시아에 대한 그의 인식도 그 정도였던 것 같다.
그 순간의 씁쓸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마치 무시당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전은 며칠뒤 이탈리아에서 일어났다. 로마행 열차에서 옆자리에 앉은 중년 남성이 “야폰(일본)에서 왔느냐"고 물어 “코리아에서 왔다"고 무심히 답해줬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환한 표정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코리아 넘버 원!"
놀란 내가 “코리아를 아느냐"고 묻자 그는 축구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은 세계적인 축구 강국이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 축구의 국제적 위상이 지금과는 달랐기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곧 이유를 알게 됐다. 그가 말한 코리아는 사실 대한민국이 아니라 북한이었다. 1966년 영국 월드컵에서 북한은 강호 이탈리아를 1대0으로 꺾는 세계 축구사의 대이변을 연출했다. 이탈리아 대표팀은 귀국 후 거센 비난과 살해협박에 시달렸고, 그 충격은 오랫동안 국민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당시 이탈리아인들에게 ‘코리아’는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다만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까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반세기가 지났다.
이번 북중미 월드컵을 보며 문득 그 시절 열차 안의 풍경이 떠올랐다. 예전의 축구 강국 이탈리아는 유럽지역 예선 탈락으로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고, 미국은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며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특히 미국 축구의 발전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1994년 미국 첫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 많은 미국인들은 축구를 "여성들이 하는 스포츠" 정도로 인식했다. 남성은 풋볼, 여성은 사커라는 고정관념이 강했다. 당시 미국 여자 축구는 세계를 제패해 월드컵을 여성들만의 잔치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축구의 신’ 리오넬 메시가 출전하는 경기장 주변은 경기 시작 몇 시간 전부터 인파로 넘쳐난다. 도시 전체가 축제의 장으로 변한다. 축구는 이제 미국에서도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스포츠가 되었다.
메시를 보면 단순히 뛰어난 축구선수를 넘어 현대인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방식을 발견하게 된다.
젊은 선수들은 경기 내내 쉼 없이 뛰어다닌다. 반면 메시는 종종 걷는다. 카메라는 그가 천천히 경기장을 배회하는 모습을 자주 비춘다. 마치 경기에 집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게으름이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공간을 읽고, 상대 수비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결정적 순간을 기다린다. 불필요한 전력질주를 줄이고 체력을 아껴 가장 필요한 순간에 폭발적인 스피드와 창의적인 패스, 치명적인 슈팅을 만들어낸다.
메시의 축구는 한마디로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의 결과를 얻는다. 적게 움직이지만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많은 것을 하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해낸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늘 바쁘다. 하루 종일 휴대폰 알림에 반응하고, 끝없는 뉴스와 영상에 시간을 빼앗기고, 불필요한 인간관계와 모임에 에너지를 소모한다.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중요한 일에는 충분한 힘을 남겨두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렇다. 젊을 때는 체력으로 버틸 수 있지만 인생의 후반전에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모든 일에 관여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도 없다.
불필요한 걱정을 줄이고, 의미 없는 경쟁에서 한 걸음 물러서고, 정말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 해야 할 일보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구분하는 지혜를 갖는 것. 그것이 인생의 효율을 높이는 길이 아닌가 싶다.
메시가 경기장 위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던진다.
인생은 누가 더 많이 뛰느냐의 경쟁이 아니다. 누가 더 오래 바쁘게 사느냐를 겨루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해내는 사람이 결국 승자가 된다.
반세기 전 유럽의 열차에서 만난 이탈리아 남성이 지금도 살아 있다면, 아마 TV 앞에서 "쏘니! 쏘니!"를 외치며 손흥민의 한국을 응원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상상하며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다.
인생도 축구와 같다. 끝없이 뛰기보다 방향을 읽어야 하고, 많이 갖기보다 중요한 것을 남겨야 한다. 결국 행복은 더 많은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에 집중할 때 찾아온다.
그것이 메시가 이번 월드컵에서 보여주는 미니멀리즘이며, 우리 모두가 인생에서 배워야 할 가장 아름다운 기술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