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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92년(1959년) 7. 28. 화요일 고2
오늘부터 가 여행하기로 결정한 날이다. 주_과 오제리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12시 반 버스에 올랐다. 집을 떠난다는 마음에서 몸은 한없이 홀가분했다. 가뜬한 마음으로 책한 권과 파자마와 수영복을 옆에 끼고 천안을 떠났다. 여차장도 기분 좋게 대해 주며 차 삯도 반으로 콱 줄여 주는데 여간 즐겁지 않았다. 고사포 쏘는 보트처럼 마구 몸부림치는 버스속에서 한 고개 한 고개 버스가 달려 넘을 때마다 시원한 기분이 더하여 갔다. 달려라 달려라 끝까지 달려라 바람 싣고 희망 싣고 버스야 달려라 맘껏 달려라. 비록 제한된 여행이긴 하나 어쩐지 한정 없이 가는 것만 같아 즐겁기만 했다.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미처 마음이 느긋하지는 못하나 오히려 아스팔트라면 더욱 불안할 것만 같았다. 왜 나고? 변화 없이 평탄한 건 생을 모르는 인간의 낙이기 때문이다. 요동하는 차체에서 시골의 진미는 풍기는 것이며 너풀대는 벼줄기에서 농촌의 구수함과 노력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온천의 국제 호텔은 참으로 훌륭하게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도 저만한 기술이 있는가 다시 알아 보고싶다. 그러나 그보다도 비방하는 생각부터 솟구치는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니고 또 같이 탄 동행자들에 국한된 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고? 우리 생활과는 너무 거리가 멀고 너무 지나치리만큼 화려하기 때문이다. 하여튼 그 곳을 지났다. 달리는 버스는 그런 풍경이 눈에 차지 않는다는 듯이 휙 지나치고 있었다. 지금부터는 눈에 익지 않은 길이다. 보이는 게 새로웠다. 예산에 왔다. 홍성가는 길과 갈라져서 합덕으로 들어 갔다. 합덕에서 한 20리쯤가서 상오리에 버스가 멎자 나는 거기서 홀로 기다리고 있는 주_을 발견, 기쁨의 환성과 함께 뛰어내렸다.
3시 반이었다. 약속시간이 한시간이나 지났는데도 기다려 준 그가 몹시 고마웠다. 뜨거운 태양을 등지고 우리는 길에 들어섰다. 염 천지였다. 들을 가로질러 고개를 몇 개 넘어 겨우 한정리에 도착, 주_이네 집에 다다르니 식구들이 모두 반겨 주었다. 가까이 개펄이 보이는 게 몹시도 기분이 설레었다. 동심이었다. 보리밥에 구미에 당기지 않는 반찬을 먹고 고단하여 일찍 잤다.
4992년(1959년) 7. 29. 수요일 고2
일찍 일어나 맑은 공기 맑은 물속에서 먼지 낀 얼굴을 씻었다.
시원하였다. 오늘은 주_이 친척집이 과수원인데 그 곳에 가기로 했다. 아침에 그 곳에 주_이와 나와 주_이 누나와 함께 가서 사과를 많이 먹었다. 그리고 그곳 수성 국민학교에 가서 탁구를 하며 재미있게 놀았다. 그러나 촌 아이들이 자꾸 이상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는데 딱 질색이었다. 더욱이 어른들도 그러하니 말이다. 어느 때는 꼭 창경원 동물속의 원숭이로 화한 나로 착각이 들 때도 있었다. 나는 이곳에 와서 나도 모르게 시계를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찰 수가 없다. 황토 흙 위에, 벼논 옆에, 보리밥 곁에, 모시 적삼 옆에 있는 지금의 나에게 이 시계는 어울리지 않는다. 시계가 필요 없는 세상, 이곳이 곧 시골인 듯싶다. 해가 뜨면 낮이요. 해가 지면 저녁인 줄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 그거면 그만이다. 뭐 스위스 제니 어쩌니 하여 만든 정밀한 과학 기계가 필요 없는 곳이다. 또한, 내가 시계를 참으로 해서 뭇 꼬마들로부터 쓸데없는 경이의 시선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 고마운(?) 눈초리는 오히려 지금의 나를 괴롭히고 있으니 말이다. 서울서는 얼마든지 모양내고 싶어 하던 내가 시골 와서는 교복 입고 온 것조차 후회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할 노릇이다. 이런 걸 보면 역시 나도 극히 평범한 인간의 테두리에서 벗어 날수는 없는 것이다.
4992년(1959년) 7. 30. 목요일 맑음 고2
뜨겁고 쨍쨍한 날씨만 계속된다.
오늘은 주_ 형님과 주_, 그리고 나와 논에 있는 툼벙을 뿜어 내어 고기를 잡았다. 손이 아프고 팔이 쑤셨다. 그러나 고기는 많이 잡았다. 오늘은 고기잡기 전에 주_과 해변 가에 나갔다. 수박 한 통 사 들고 부둣가에 나서니 시원한 바람이 포근히 반겨준다. 어찌 생각하면 바닷바람이 짠것도 같다. 바닷물 짠것도 전설이 있다. 옛날 어느 욕심쟁이가 소원성취하는 맷돌을 훔쳐 가지고 배에 싣고 오며 소원 한마디 한다는 것 즉 소금을 주슈 했는데 그걸 중지시키는 방법을 몰라서 그만 바닷속에 맷돌과 함께 가라 앉아 지금도 거기서 자꾸 소금이 나오기 때문에 짜단다. 이건 확실히 전설이며 과학적 근거도 없으나 나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거기서 수영도 잠간 하였다. 물이 퍽 흐렸다. 망망대해는 아닐지라도 상당히 넓은 바다였다. 바다 저편에 다시 땅이 보이는데 그게 까마득하게 보인다. 그리고 주_이가 가리키는 쪽에 눈을 돌리니 저쪽에 “가친의 섬”이라는, 심훈씨가 살아 계셨든 섬이 보였다. 퍽 외딴섬이었다. 한참을 시간을 보내며 이 얘기 저 얘기하는 중에 우리는 서로의 사정을 털어 놓았다. 주_은 학비조달을 위해 양말 버선을 꼬맨다는 소리를 나에게 말해 주었고 나는 빗에 쪼들려 집을 팔았다는 이야기를 주_한테 해 주었다.
서로가 같은 처지라면 같은 처지인 것이다.
4992년(1959년) 7. 31. 금요일 고2
이상 무
4992년(1959년) 8. 1. 토요일 고2
오늘도 상당히 더웁겠다.
여기 온 지가 퍽 오래 된 것 같다. 낮에 보리를 두들겼다. 닭 모이 주느라고 봄의 것을 다시 내놓고 털었는데 꽤 많이 나왔다. 오랜만에 도리깨질을 하니 팔이 쑤셨다. 따갑고 하여 그 곳 민물에 가서 목욕했다.
날씨가 무더운 관계로 물마저 미지근하였다. 오늘은 한일이 별로 없다. 다만 낮잠만 늘어지게 잤을 뿐이다. 저녁에 나, 주_이, 누나, 누나친구하고 참외 막에 가서 선 차미라도 맛있게 먹었다. 누나의 친구라는 그 처녀는 참으로 내가 누나 삼고 싶었다. 얼굴도 퍽 예쁘장하고 얌전했다. 캄캄해서 야 집에 돌아왔다.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아침 차로 떠날 예정을 해 가면서...
4992년(1959년) 8. 2. 일요일 고 2
오늘도 날씨는 무덥기만 하다. 아침에 차마 떠나기가 섭섭했다.
식구들이 모두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누나” (나는 이제 그를 누나로 정했다)는 또 오라고 부탁을 했다. 고마웠다. 누나, 나는 그를 존경하고 싶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직업전선에 나가야 하는 누나, 시골에서 배운 티를 한 번도 안내는 누나, 나는 이런 누나를 존경하고 싶다. 무척 존경하고 싶다. 주_은 고맙게 상오리까지 바라다 주었다. 이 폭염 밑에 혼자 돌아가게 하는 내가 너무 했지만 조금이라도 일찍 주_과 헤어지기는 싫었다. 그와 같이 지내는 동안 나는 어느 정도 그의 인품을 깨 달았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나는 작은 놈이지만, 그러나 주_ 같은 인간도 드무리라. 이제 친구 하나 얻을려는가 보다. 그럭저럭 상오리에 닿아서 쉬고 있는데 서산 행 버스가 왔다. 주_과 섭섭히 작별하고 버스에 올랐다. 이제는 생전 처음 가는 길이다. 가는 도중에 좁은 길 가운데 짐차 하나가 고장이 나서 한 시간가량 지체했다. 여기서도 느낀바 많았다. 좀더 도로가 넓었으면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난다. 그 동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낚시질하는 것을 구경했다. 잘 잡히는 낚시도 있고 도무지 물지 않는 낚시도 있었다. 각양각색이었다. 버스는 달렸다. 서산에 닿으니 2시 45분이었다. 거기서 홍성 가는 3시차가 있어 얼른 바꿔 타고는 수성리에 서 하차, 영대 조카네로 걸어 들어갔다. 한번 와 보았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단지 어린 애들만 옹기종기 앉아 놀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오빠(영대)는 시장에 참외 팔러 나갔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참외 장사를 하는지는 모르나 그 소리 들으니 어쩐지 서글퍼 지기도 했다. 서너 시간 앉아 있자니 모두들 왔다. 어쩐지 공연히 왔다 싶게 쓸쓸하고 불안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4992년(1959년) 8. 3. 월요일 고2
날씨는 여전히 더워만 간다. 비좀 한번 좍좍 뿌렸으면 오죽이나 좋으련만. 영대네도 그 넓은 밭이 바싹바싹 말라 가고 있었다. 풀이 마르는 게 아니라 사람의 피가 말라 들어가는 것이다.
오늘 가려 했으나 영대가 붙드는 통에 내일 가기로 했다. 쌍금다리 밑 개울에서 목욕했다. 저녁에 동네 청년들과 얼려서 한바탕 놀았다. 새로 한시까지 모닥불 피우고, 그래도 달려드는 모기를 결사적으로 방어했지만 결국은 끽소리 못하고 모기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서산이 모기 많기로 유명하다지만 이렇게까지 심한 줄은 몰랐다. 밤이 깊어서야 집안에 들어와 잤다.
- 8. 4. 화요일
아침에 작별인사 하고 수성리 재골고개로 나와 조금 후 나타난 버스에 올랐다. 고북까지 30리 길을 버스로 달렸다. 괘속으로 달리는데 오물을 벗어 던지며 앞으로 전진하는 기분이었다.
고북서 하차. 장요리 고요골을 찾아가다 고모님 큰아들인 지원형님을 만났다. 형님께서는 반가이 맞아 주셨다. 고모님은 사기리에 모래 찜질 가시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한다. 큰 사촌형님댁 애기는 수술한 자리에 숭터가 남아 있어 께름직하다. 퍽 낯을 가려 내가 가까이 가기만 해도 울었다. 기가 막힌다. 불과 몇 달 만에 저렇게 변하다니.
큰아들 춘기 동생인데 12살이라 했다. 퍽 예뻤다. 한가지 이상한 건 나를 자꾸 피했다. 수집음뿐이 아닌 무슨 다른 마음이 있는가 보다. 여자는 14살이면, 남자보다 성숙하기 때문에 모든 이성관계를 육감적으로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열 두 살 먹은 애송이가 자꾸 나를 피하고 먼 발 치기서 본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공연히 그 애한테 신경이 쓰여진다.
귀여워 해줄래야 할 수가 없다. 오후에 형님과 함께 고기를 잡았다. 재미있었다. 형님네 논은 항상 물이 차 있어 가물어도 상관없게 되었다. 다행한 일이다. 다른 논들은 가물어서 야단들인데...
저녁밥은 꽃게와 이름 모를 고기로 맛있게 먹었다. 호롱불 밑에서 먹는 보리밥도 제 맛이었다. 또한 모든 게 구수한 것 같았다. 사실 그러했다. 여기서는 버스속에서 먼저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박한 서울 풍경이 없다. “소박” 이란 말은 이런 곳을 위한 말인 듯싶다. 비록 벽은 검으틱틱한 마분지 한 장으로 흙을 가리고 바닥은 돗자리로 깔았을 망정 이런 곳엔 그것이 어울리지 않는가? 흙벽에 비닐 꽃 장판이라면 양복에 삿갓이 아니고 그 무엇이랴? 서울 사람들이 농촌문화 계몽이니 어쩌니 하지만 그게 다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고 무엇이냐?
크롤칼키로 소독한 물은 아니지만 병은 않냐며, 흙 길을 맨발로 걸어도 앓지는 않는 시골의 관습과 풍경을 20세기의 안경으로 보며 시답지 않은 소리 짓거리는 소위 문화인, 서울 놈들아, 너희들도 신발 벗고 한시간만 걸어 보아라. 어찌 되겠나? 입만 살아있는 허수아비들아.
4992년(1959년). 8. 5. 수요일
하 - 참. 바람이 몹시도 분다. 그러나 해가 뜨니까 식전에 그렇게 불어 제키든 바람은 간곳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시원할 정도로 살랑 살랑 불어 주었다. 아침은 윗집 게골 형님 댁에서 머물고 춘기와 사기리로 떠났다. 시오리 길을 걷자니 다리가 아팠다. 옆에 가는 춘기는 다리가 하나도 안 아프다 한다. 내가 부끄러울 지경이다. 다다르니 누님은 해변가로 게 잡으러 가셨고 매형과 시어머님만 계셨다. 후에 안일이나 매형은 상당히 성질이 괴팍하다는 것이다. 첫인상은 무척 좋았다. 마음도 좋아 보였으나 그것도 아니라 했다. 바다를 보니 물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두 시경, 물이 완전히 들어왔을 때 수영복이 없어 삼각 팬티를 걸치고 수영을 했다. 고기잡이 배를 웬 여학생들과 함께 타고 놀았다. 그 여학생들 하곤 인연이 있는가 보다. 올 때도 우연히 같이 왔는데, 오다가 수건도 주워 주고, 또 이렇게 배도 같이 타게 되었으니 말이다. 홍성여중 3학년 애들이라 했다. 그러나 그런 걸 생각할 바가 아니다. 나는 나대로 놀려 왔고 그들은 그들 대로 놀려 왔기 때문이다. 바다물결 넘실대는 새파란 해변 가. 그리곤 그 위에 수없이 뿌려진 모래알, 알, 알! 총총이 멀어진 어린아이 발자국. 이것들을 한 폭의 그림인 양 내 망막 위에 아로새겼다.
한 발 한 발 물속으로 걸어 간다. 배꼽에 차든 게 어느덧 젓 가슴에 차고 뒤이어 목에 찬다. 수평선 저쪽의 섬을 처다 보며 심호흡을 한다.
들어가며 생각한다. 내가 만일 이대로 들어가 저 바닷속, 태고적의 온갖 비밀을 간직한 수궁 속으로 들어가면 용왕은 반겨 맞이할 것인가? 일제 고사 때 커닝했다고, 감옥에 가두지나 않을까? 12살 때 작은 아버님 댁에서 과자를 훔쳐 먹었다고 감옥에 가두지나 않을까? 가만있어라. 내가 남한 테 칭찬받을 만한 일. 해 놓은 게 무엇 있나?
아니면 미움 받을 일은? 많지. 많---아! 우선? 아니 여기에 쓸 수 없어. 생각나지 않는걸. 싸움? 나는 싸움할 용기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아. 하여튼 시기한건 사실이야. 가만있자. 십계명에 비춰 보자.
첫째 예수 외에 다른 우상을 섬겼는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섬기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철저한 무신론자였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급한 경우엔 꼭 하느님을 찾지, 절대로 점쟁이나 무당을 부르지는 아니했다.
둘째 다른 신을 두었나? 글쎄. 안 두었다.
셋째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컬었을까? 그건 반드시 그래. 언젠가 나는 아이들 앞에서 예수님을 중상모략 했으니까 말야. 앞에 있기라도 하면 침을 뱉을 태세를 취하였었으니까 말이야. 그러나 앞으로는 그렇게 안할테야.
넷째 안식일을 지켰나? 그건 못 지켰어. 교회를 믿지도 않았는 걸 뭐.
다섯째 부모를 공경했나? 글쎄. 나는 부모 속을 퍽 썩였어. 돈 때문
이기도 하지만 나의 원래 성질이 괴팍스러워서.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 하지만 성적이 떨어졌으니 그것도 막심한 불효지 뭐야. 하여튼 효자라는 말, 못 듣는 것만은 확실해!
여섯째 살인하지 않았나? 살인은 하지 않았고 할 생각 조차도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몇 십년 더 살다 보면, 하나 아니 그 몇을 죽이게 될지. 또한 죽여서 벌을 받을지, 죽여서 상을 받을지 그 누가 아는가? 그 누가 예측하랴?
일곱번째 간음하지 말라 하셨다. 간음? 나는 한적이 없었다. 마음만은 숫하게 먹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한낱 공상이 되고 말았다. 결코 그렇겐 못 할 것이다.
여덟 번째 도적질하지 말라 하셨다. 많이 했다. 그렇다고 남에 집 밤손님이 된 건 아니나 자지잔 것쯤 훔칠 아량(?)은 있었다. 그러나 “훔쳤다”는 것은 그 어떠한 이유이고 간에 인생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더러운 것이다.
아홉 번째 이웃을 해 하였나? 않았다.
열번째로 이웃을 탐냈나? 많이 했다. 백부 댁의 생활에 골수에 사무치는 시기를 했고 탐을 내었다. 내 자신 잘은 탓도 있지만 우리집이 못사는 탓도 있다. 아니 못산다니 말이 되나? 논 스무 마지기 있고 전세 집 칠천만 환짜리 구해 놓고 아버님께서는 아산에 큰 금광을 하고 있는데, 하하하. 하여튼 많이 탐 했다.
이거 뭐 물속에 들어가며 별난 생각 많이 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십계명중에 제대로 지킨 것은 다섯 가지이니, 반반이다. 역시 평범한 인간이다. 그러니 용궁에서는 다시 인간으로 재생시켜 줄 것이다.
하여튼 내가 이대로 걸어 들어가면? 그래서 이 물위에 나의 영혼을 둥둥 띄우면? 신문지 구석엔 자살이라는 열한 획으로 내 이름이 나올 것이며 심장마비나 적당한 구실이 쓰여질 것이다. 왜냐면 내가 자살할 이유도 없으려니와 유서도 한 장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집안은 벌컥 뒤집힐 것이다. 나를 어떻게 들 평가하실 것인가.
이만 적고 그만 두겠다. 적다 보니 나 자신 정말 자살할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이 한낱 망상이라면 나는 어리석은 공상으로 시간을 채우고 있었구나.
재미있게 놀다가 저녁에 다시 장요리로 왔는데 밤길에 더구나 산길을 걷느라고 등이 오싹했다. 나 혼자 왔으면 아마 무서워서 더욱 식은땀이 흘렀을 것이다. 다행히 춘기가 옆에 있어 주었다. 저녁밥은 먹고 왔기에 그대로 잤다.
4992년(1959년) 8. 6. 목요일 고2
오늘도 바람은 여전히 불어 제쳤다. 모두와 작별하고 형님(지원)과 함께 버스로 천안에 돌아오니 2시 30분이었다. 한 열흘간 논 셈이다. 집에 오니 우선 안심이 되었고 반가웠다. 아버님은 안계셨다. 그동안 형님이 가르치는 애들 몇이 와서 자고 갔다는 것이다. 더러운 옷을 모두 갈아 입고 임_을 만나 동창회 사진을 찾고 저녁에 잤다.
- 8. 7. 금요일
이곳 천안은 바람이 불지 않아 좋았다. 아침에 병철형님 한테서 사진기 빌려 가지고 식구들 사진을 찍었다. 영근이와 둘이도 찍었다. 춘_와 찍은 것은 찢어 내버리고 영근이와 찍었다고 어머님께서 꾸중하였다. 나는 참으로 비열한 놈이다. 춘_와 찍은 것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찢어 없애고 영근이와는 턱턱 찍었으니 말이다. 인간차별이 무어냐고 혼자 떠들어 대다 그게 다 내가 위선자임을 고즈넉이 증명해 주는 게 아니고 무엇이냐?
저녁에 사진을 맡겼다. 그러나 영근한테 미안한 짓을 해서 기분이 몹시 나빴다.
- 8. 8. 토요일 청 고2
형님이 계신 송암사를 찾아 가기로 했다. 큰어머님과 친척 되는 어른을 따라 송암사에 다다르니 비교적 작은 집이 한가하게 놓여 있었다. 형이 가르치는 애들 둘이 와 있었다. 집 뒷곁은 대나무로 온통 둘러 싸였고 앞산 미루나무에선 매미소리 요란했다.
매미 우는 것도 장단이 있었다. 오래 듣고 있자니 그것도 무슨 룰이 있는 가 보다. 먼저 오양매미가 오양 오양...하고 울고 나면 말매미가 한바탕 울어 제치고 쓰름 매미가 또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울어 댔다. 무슨 일에 열중할 때는 느끼지 못하나 유심히 듣기로 하면 재미는 있는데 귀막이 따갑다. 좀더 부드럽게 울었으면 매미가 음악의 천재 베토벤을 능가했을지도 모른다. 저녁에 냇가로 가서 개구리를 잡아 뒷다리를 구어 먹었다. 다리가 잘린 몸뚱이만 버둥대는 개구리를 보며 나는 무언가 울컥 치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개구리는 고추 밭을 망친다 하는 생각으로 나에게 치미는 무엇은 곧 사라지고 말았다. 동무들은 질겁을 하며 얼굴을 찡그리나 나는 그런데 아랑곳없다. 나 자신 깨끗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으로 만족한 것이다. 나를 잔인하다고? 그건 천부당 만부당한 소리다. 약육강식이란 사회의 철칙이고 넓게는 개구리도 지구의 한 사회 존재인 것이다.
개구리는 그렇다고 무슨 식육을 하는 것인가? 물론 누구나 이렇게 말 할 거다. 나는 이성이 있지 않느냐고? 그러나 내 말은 극단의 경우이다. 먹는 데는 이성이고 뭐 고 필요 없다. 다만 씹을만한 기구와 새길만한 통이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에이, 무슨 잡소리냐? 개구리를 잡았으면 살생한 것이니, 호평하면 사내답고 악평하면 지저분하다. 불교에서는 살생을 질색으로 여기고 하니 역시 죄를 짓는 것이지만,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지…
게도 잡고 하여 구어 먹으니 메뚜기 먹는 기분. 고소하고 맛이 있었다.
저녁에 마루에서 자다(자기 전에 그 냇가에서 목욕함).
4992년(1959년). 8. 9. 일요일 고2
두시 차로 가이겠는데 주인 할머니는 내가 머무는 것을 싫어하는 눈치다. 불교를 믿으며 불상 밑에서 합장하는 노파, 그가 내 한끼 먹는 게 아까워 떠는 것이다. 세상인심이 이런가? 불상이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어서인지 그것을 참 똑같게도 닮아 놓았다. 거기서 2시반 버스로 온양 도착. 곧 서울행을 갈아타고 천안 하차, 집에 오니 다섯 시.
오늘 저녁 영근 모친이 위독, 깜짝 놀랐다. 혈압이 높으신 데다가 머리를 감다가 나쁜 병에 사로 잡혔다는 것이다. 영근은 뜬눈으로 밤을 새워서 인지 충혈되어 있다. 가엾기도 했다. 매일 힘 없이 걷든 영근 모친의 영상이 떠오른다. 그 인자하신 분이 지금 중풍으로 인사불성이 되어 생에서 이별하려 하시는 것이다. ‘병길아, 퍽도 컸다’ 이것이 나에게 인상깊은 말씀이었고, ‘예수님 믿어야 영생한다. 죽어서 구원을 얻어.’ 하시며 교회에 나가기를 부탁하던 때가 인상 깊었다.
버스 안에서 길에서 차 안에서 “주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영생하느니라” 하는 전도관들의 목쉰 소리보다는 훨씬 맛이 달랐다. 한쪽은 광적이요. 한쪽은 진심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껏 그 기철 어머님의 진심을 나의 무식과 그들의 도취, 그리고 지나친 법열로만 여겨 왔었다. 그렇게 말씀하신 그가 지금 반신불수로 영혼과 마지막 투쟁을 할 때 나는 뉘우침이 너무나 많다. 나는 그분을 위해 기도할만한 가치도 없는 인간이고 나의 기도쯤 아랑곳할 예수님도 아닐지 모른다. 기도하기에 필요한 모든 선은, 자신이 저지른 많은 죄가 그분에 의해 용서받았기 때문이다. 단지 어머님이 살아나시기만 염원할 뿐이다.
그렇다. 지금 기철 어머님은 분명히 호흡하고 계시다. 지금 시각은 11시 41분, 호흡하고 계시다. 그에게 죽음이란 말은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아까 영숙이 나에게 만일 영근 모친이 돌아 가신다면? 하고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영근이 제일 불쌍하고 그 다음이 기철이라고. 왜? 기철 큰 누님은 대학교 졸업하고 곧 취직될 것이요. 영애는 재산을 유산으로 받을 것이요. 기철은 남아로서 투쟁할 것이다. 그러나 영근만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내가 영근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인 것이다. 하여튼 어떻고 간에 영근 모친은 돌아가시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가 돌아가신다 해도 그는 영생하실 것이다. 항상 말씀하신 대로 천국에 돌아 가실 것이다.
병이 낳는다손 치더라도 병신이 되는 것이니 이 아니 불쌍하랴?
영근이 너무 고심 말아. 인생이란 파란곡절이 많은 거야. “평탄”은 참된 생을 모르는 사람의 쾌락이야. 어머님께서는 아직도 맥박이 뛰고 심장이 움직이고 계셔!
4992년(1959년). 8. 17. 일요일
오늘은 나 혼자라도 서울 가려 했다. 어쩐지 천안에 머물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뭐 서울에서 날 반겨 맞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여튼 천안을 뜨고 싶은 심정만이 가슴에 꽉 차 있다.
지난 한달을 조용히 되돌아보았다. 재미있게 보냈다면 퍽 재미있게 보낸 셈이다. 여행도 가장 많이 한 셈이고, 버스로 주_이네 가서 놀던 일 서산에서 마음 내키지 않는 잠을 자든 일, 고북 형님 댁에 가서 놀던 일. 사기리에 가서 여학생과 놀던 일, 또 솔암사에 가서 잠시나마라도 자연을 즐기던 일 마치 주마등처럼 꼬리를 물고 스쳐간다. 영_와 사진 찍은 일은 아마 나의 일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로 해서 또 기분 나쁜 일도 벌어졌든 것이니 나에겐 오히려 찍지 않았던 것이 더 좋았을지도. 이생 각 저 생각하며 국정이와 얘기하고 있는데 철호이모(이름은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으나 연자라는 것 같았다) 가 역전에 나가고 있었다. 5시 차에 서울 가려는 모양이다. 나는 무작정 그 차가 타고 싶어졌다. 그가 타고 있는 차에 나도 타 의젓하게 만나보고 싶었다. 표를 얼른 샀다. 급한 대로 성환까지 사서 플랫 홈을 나서서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출발하여 쾌속으로 질주하며 따그락 따그락 반주하건만 바라든 그자는 영보이지를 않아 그만 성환에서 내리고 말았다. 실망이 대단히 컸다. 또한 허둥지둥한 나의 행동을 가만히 생각할 때 우스꽝스럽기 한량없다. 도대체 그와 만난 시간은 극히 짧고 또 횟수도 적다. 규_이네서 한 번, 서울서 두 번, 철호네 서 한 번 이렇게 도합 네 번밖에 만나보지 못했으나 나는 몇 달 사귄 것처럼 그를 대하고 싶었고 또 사실상 태도가 그러했다.
성환서 내려 무_을 찾으니 동창회에 갔다 한다. 무_의 아줌마는 어쩐지 식장에서 보다 좀 못생긴 편이었으나 퍽 친절한 사람같이 보였다. 무_이 와서 저녁 먹고 여덟시 통근차에 몸을 실었다. 어쩐지 섭섭했다. 집에 오니 아버님은 약주 잡수시고 계셨다. 손님들(손님이래야 외삼촌하고 정출이 남편)이 간 후 아버님께서 야단을 치셨다. 가지 마라 했는데 어른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취중이시나 정말 필요 적절한 말씀만 하셨다. 아버님께서는 취중 이실수록 말씀이 조리가 닿는데 이상할 정도다. 저녁에 관이, 세윤이, 나 셋이서 늦게까지 섰다 뽕을 해가며 재미있게 놀았다. 영숙이는 춘_하고 찍은 사진 내 놓으라고 독촉하나 찢어 없앤 나는 대답이 궁할 뿐이다. 자꾸 미루는 수밖에 없다.
4992년(1959년). 8. 18. 고2
아침 여덟 시 27분. 집을 떠나며 영근과 작별인사 나누고(내 생각엔 영근이 약간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머님 모시고 기차에 올라 부지런히 자리를 골랐다. 한자리 격하여 앉게 되었다. 차
안은 비교적 사람이 적은 셈이었다. 세시간 동안 차 안에서 시달리며 서울에 닿았다. 어머님은 솟을 들고 나는 가방과 바께스를 들고 친구의 도움으로 이불짐을 화물계에서 찾아 택시에 실었다. 혜화동까지 칠 백환 달래므로 주고 들어왔다. 선생님께선 책을 보고 계셨다. 우선 방을 보니 책상하나 동그라니 남아 있는데 먼지 투성이다. 깨끗이 소제하고 짐을 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가지 기분 잡치는 것은 순간 방이 아직 나있지 않는 것이다. 선생이 그냥 들어 앉아 있으니 언제 방을 내준단 말이냐? 또 부엌이라고 광을 개조했는데 그나마 납작한 마루 쪽과 선반만 매여 있었다. 어머님께선 대단히 실망하신 모양이다. 나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방을 다 치우고 누님 있는 곳을 가서 누님과 함께 집으로 왔다.
어머님과 나와 누님과 셋이서 명륜시장에 가서 그릇과 풍로 그리고 숯 등을 사 들고 집에까지 오는데 힘들어 땀을 뺏다. 구공탄 때자 하니 어머님께서 반대하셨다. 집에 와선 부랴부랴 밥을 지어먹고 누님과 함께 혜화동에 나가 누님은 종로4가에서 내리시고 나는 을지로 사가에서 내려 버스로 문화동까지 달려갔다. 문화동 만_ 형님 댁엔 아무도 없었다. 퍽 낙망 되었다. 문_는 형과 극장 갔다 하고 누나는 미장원에 갔다 했다. 나는 그냥 돌아서 나오려 하는데 들어오는 누나와 만나 내일 만날 것을 약속하고 집에 돌아왔다.
- 8. 19.
아침에 규_이네를 들렸다. 광_가 와 있었다. 그 애 얼굴에 여드름 난걸 보니 함부로 다룰 아이는 아니다. 4시 반에 버스로 서울역에 닿았다. 서울역에서 누나와 문_를 만났다. 문_는 예상보다 키가 작아 퍽 안심되었다. 수줍어했으나 그것은 여자들이 속치마 입듯 언제나 보유하고 다니는 것이라 생각하고 말았다. 물론 그렇지 않은 여자도 있기는 하나……….
그들이 개찰구를 들어갈 때까지 나는 뒤에 서서 지켜보았다. 달려가서 문_한테 인사하고 싶었으나 그만 두었다. 지금 일기를 쓰며 퍽 후회된다. 너무도 대범한 체 한것 같아 낯이 간지럽다.
거기서 명_ 누나와 다시 순화동으로 가 저녁을 먹고 누나와 집에 왔다. 한참 얘기로 시간을 메우다가 명_누나를 전송하고 나는 이 일기를 쓴다. 나의 요사이 생활을 돌이켜 본다. 나의 생활은 문자 그대로 방탕일 뿐이다. 보라. 너는 자나깨나 여자 생각이다. 지금 이 순간을 따져 보라. 영근 생각 안하나? 순자생각 안하나? 철호이모 생각 하지 않는가? 우라질 놈아 너의 집에서는 너 하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는 줄 아니? 집 판 돈에서 곳 감 빼먹듯 생활하며 부모들이 바라는 건 바로 돈이 아닌 너다. 이놈 불효 막심한 놈아. 그리고 너는 이제 대학문을 건너다보는 18세의 고교 2년생이다. 네가 지금 한가하게 버스나 타고 돌아다니며 여자들과 사귀려 애쓰고, 세계문학 전집이나 들쳐볼 시간이 있는 줄 아느냐? 보아라. 너의 친구는 공부하겠다고 절에까지 들어가지 않았냐? 너는 그래, 그런 것 보고 낯이 부끄럽지 않니? 이번 방학은 마지막 놀 기회라고? 야 이놈아! 그런 엉뚱한 수작 말아라. 뭐 다음 겨울방학은 안 그럴 줄 아니? 그런가 하면 다음 여름방학은 안 그럴 거고? 뭐 이번만은… 운운하는 것 자체가 너의 약점이야. 결심은 쇠이고 실행은 금이야. 네가 제법 잘난 체하고 똑똑한 체해도 소용없어. 너보다 더 잘난 사람이 한둘인 줄 아는가?
세상은 무한으로 넓은 곳이야. 뭐? 제 잘난 맛에 산다고.
하 병길아. 그래 그것도 변명이라고 지껄이니? 내가 언제 자격지심에 빠져 초죽엄이 되어서 살라고 했니? 무슨일에든지 한도가 있는것이야. 무한에서 유한이 나온다 해도 그것고 한도가 있으니까 역사는 흐르고 있는것이야. 나는 이만하면 보통이다 하는 것 이상의 자만심, 이것을 보고 나는 허영이라고 너한테 알리고 있는 거야, 알겠어?
네가 뭐 머리가 좋다고? 아니 네가 뭬 그리 머리가 좋아? 영화 보면 제목부터 깡그리 잊고, 단어를 찾을 땐 중복되어 찾는 수가 한두 번이 아니잖어? 또 기억력도 별로 없는 편야, 이 바보야. 그렇다고 또 노력이나 하면 모르지. 너는 노력도 없는 편이잖아?
오오 신이여. 너무 가혹하게 책벌하지 마소서.
회개할 줄 모르는, 아니 회개를 너무 잘하는 문병길은 소리쳐 울고 싶습니다.
4992년(1959년). 8. 20. 목요일
내일은 개학 날이라고 생각하니 방학 마지막 날을 맘껏 즐기고 싶다.
그러나 나에겐 놀 아무런 의욕이 없다. 무료한 하루로 시간만을 채울 뿐이다.
4992년(1959년) 8. 21. 금요일 고2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역시 반가웠다. 담임선생님은 치질로 입원하고 계시다 한다. 퍽도 고생 하시겠다. 앞으로 한 보름간 나오지 못하신다는 소식에 조용히 질러지는 급우들의 환성. 기쁘다는 것이다. 선생님이야 어찌 되었던 간에 15일간의 자유(?)가 체면 불구하고 박수를 나오게 한 것이다.
나 자신도 뼈저리게 슬픈 것은 아니다. 그저, 그 가엾은 선생님이 병상에서 누워 계실 것을 생각하면 불쌍했다. 병문안을 가려 했으나 임시로 담임을 맞게 된 물리선생님이, 우선 학급 위원들만 가보라 하므로 나는 단념하고 말았다. 병문안도 지배층의 권한이 앞장서나? 병문안 갈 마음이 싹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오는 길에 이영을 데리고 왔다. 사랑하는 친구, 영원한 친구.
4992년(1959년). 8. 22. 토요일
하루 수업이 멋없이 흘러갔다. 아무 의욕이 없다. 방학 기분이 그대로 연장되고 있다. 나도 모르게 어쩐지 방임 상태에 있는 나의 마음을 바로잡을 수가 없다. 오늘은 통 털어 한시간 수업밖에 못했다. 선생님들이 빠진 것이다. 다른 학교는 개학하는 날부터 7교시 수업을 했다 한다. 이런 것 저런 것 생각하며 우리 학교를 비방해 봐야 결국 누워서 침 뱉는 격이다. 우리들의 태도는 또 어떠한가? 한시간만 빠지면 좋아라고 박수 친다. 이러고도 고교 2년생이라는 뺏지를 달 수 있는가?
이런 분위기와 이런 자세 속에서 “진리 탐구”라는 것은 “동성학교”의 간판에 차라리 먹을 칠하는 위선이다. 종_이와 악수하고 영_과 악수했다. 영_은 놀랬을 것이다. 이제껏 서로 모른 척했건, 서로 의가 갈렸든, 내가 먼저 손을 내민다 함은 항복을 뜻함도 나는 안다. 그러나 나의 성질은 참 이상하다. 가령 내가 A와 감정대립으로 천하에 원수가 되어버렸다 하자.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고 욕설이 나올 사이라 하자. 이런 경우 딱 마주쳤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는 것이다. 아마 독을 가득 품은 웃음일지 모른다. 이때 상대방이 웃음으로 대하면 나의 과거 감정은 확 풀어져 결국 그 쪽이 저지른 잘못이 있더라도 내가 먼저 사과하고 마는 것이다. 이런 때는 굴욕이라든지 분하다든지 하는 생각이 싹 없어진다. 그런 후 가끔 내가 왜 악수를 청했나 하고 후회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고, 또 좀 후회된다 해서 다시 또 갈라지고자 하는 성질도 아니다.
또 싸움을 해도 그렇다. 내가 잘했건 잘 못했건 화해를 해야지 그렇지 않고는 또 배기지 못하는 성미다. 꼭 재미있는 소설을 읽다가 중단한 것처럼 항상 가슴속에 미진한 걸림돌이 되곤 하는 것이다.
그것 역시 꼬장꼬장 하고 자디잔 나의 성격 탓이다. A와 싸웠다고 하자. 그 런 후엔 으레 나는 A의 일거일동에 신경을 써야만 하는 것이다. 저 놈이 혹시 언제 어디서 보복을 하여 오지 않을까? 뒤에서 나의 험이나 뜯지 않을까? A가 나를 자연스럽게 대할수록 나는 그를 위선자로 생각 하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른 친구들의 자연스런 태도와는 달리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여튼 귀찮고 신경이 가는 짓이다.
저쪽에서 먼저 화해를 청해 오면 나는 하는 수 없이 응하기는 하나 내가 질질 끌려 가는 것 같은 불쾌 함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고 사과를 청하고, 저쪽에서 웃음으로 그것을 보답할 때 나는 기쁨으로 몸이 홀가분해지는 것이다. 영_에게 불현듯 손을 내민 것도 나의 이런 성질 때문인 것이다. 몇 분 전 까지만 해도 내가 “영_을 만나서 악수해야지.”하는 마음을 품은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단지 그를 본 순간 단10초도 못되어 나는 손을 내민 것이다. 나와 그는 근 1년을 넘어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서로 뒤에서 흠만 뜯고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이 어찌 보면 무슨 꿍꿍이 속이라도 있는 것 같으나 사실 그런 마음은 털끝만치도 없다. 기왕에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나는 그에게 가까워지고 또 서로 합심해야 하겠다. 나의 이러한 성질, 이것만은 나도 은연중 자랑하고 싶다. 아무리 나에게 해를 가한 자 일지라도 보는 그 순간만은, 웃음이 나오는데야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며칠 전 천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백부님 상점에서 점원 노릇을 하는 재_이, 그는 너무나 자존심이 컸다. 내가 아무리 못났어도 재_이보다 더 못날 수가 없을 정도다. 그자는 가장 일에 충실한 체하면서도 돈을 훔쳐 내는 것이다. 병_형과 내가 훔쳐 내는 것을 직접 목도했다. 병_형은 지금 그것 때문에 고심하고 있다. 백부님은 재_을 전적으로 믿고 계시기 때문에 형의 상점에 대한 건의는 여지없이 묵살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재_이기에 내 맘속엔 항상 그에 대한 증오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저 놈, 언제 한번 때려 줘야지.... 하고. 물론 나의 졸렬한 생각이다. 그러나 보기만해도 미운 그임에랴…
마침 무슨 일로 나는 격분하게 되었다. 상점에서 나오는 그를 불러 세웠다. 몇 대 칠 목적으로. 이런 기회를 위해 병_형에게서 싸우는 자세 몇 개를 배워 뒀었다. 그러나 사세가 불리했다. 기철네가 거기있고 승호네가 그곳에 있고 백부댁이 그곳, 말하자면 세집에서 모두 내다볼 수 있는 공동장소이다. 더구나 재_이 놈이 소리를 빽빽 지르는데야 기가 죽어 버렸다. 하여튼 나는 불끈 쥐었다가 그만 후일을 선언하고 물러 나고야 말았다! 이 얼마나 못난 인간의 행동이냐? 나중 보자는 놈치고 무서운 놈 없다는 격으로 아닌 게 아니라 나에겐 남이 무서워할 그 아무것도 없다. 운동하는 것도 없으려니와 싸움할만한 용기도 없는 졸장부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재_의 인격을 무참이 깔아 뭉갠 것은 사실이다. 재_은 나보다 한 살 위고 몸집도 컸다. 그러나 나에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한 사람(그것도 남에 집에서 일해 주고 있는 나 또래, 학교를 포기하고 벌써 돈을 벌어야 하는) 에게 너무나 큰 타격을 주었다는 것뿐이다.
그것도 혹시 내 친구면 몰라도 처지가 그러한 그가 얼마나 분하고 설어웠겠는가? 물론 그는 나에게 한 대 얻어 맞으면 두대 때릴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나도 그렇게 믿고 덤볐든 것이다. 내가 때릴 때 아무 저항 못할 상대라면 무슨 기분으로 때리겠는가? 하여튼 나는 그 후 몇 시간(아니 따져 보니 40분간이었다)이 퍽 고민되었다. 사과하느냐? 사과하여 내 자존심을 꺾느냐? 버티느냐? 버티자면 언제 한방 때려줘야 될 것이니 한집에서 그게 가당한 일이냐? 사과하느냐? 그냥 있느냐? 안식일 교회 생각이 나고 십계명 생각이 났다. 나는 앞 뒤 안 가리고 상점으로 들어 가 재_에게 사과했다. 그도 한참 듣더니 쾌히 고개를 끄떡이며 화해에 응해 주었다.
그 후부터 나는 개운해졌던 것이다.
나의 이러한 성질은 살릴 것이다
4992년(1959년). 8. 23. 일요일 고2
아침에 어머님 모시고 누님한테 갔다. 누님과 함께 동대문 시장 5가쯤에서 동례를 만났다. 나는 잘 모르는 분이나 먼 친척이 되신다.
누님과 헤어져 동대문 조부님 댁에 갔다. 거기서 다시 돈암 시장으로 가 상과 기타 도구를 사 들고 집까지 걸어왔다. 나는 걸상 살 돈을 받아 들고 밖으로 나와 청파동을 갔다.
가는 도중 비를 만나 승호네를 찾아 들어갔다. 그 곳엔 “그”가 있었다. 별로 반갑지 않았다. 그러나 나올 때 당한 창피는 내가 앞으로 몇 십년 더 살게 될지 모르나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다시 오지 말라고? 그렇다.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왜냐? 그가 여자고 집이 누추하니까? 아니다. 나는 그녀를 몇 번 만났던가? 종로2가에서 두 번 집에서 세 번 도합 다섯번이다. 길에서 함부로 말을 걸었다고 식구에게 말 했을지도 모른다. 하루 시간 같이 보냈다고 창피하게 길에서 말을 건 것을 욕했을지도 모른다. 그 모친은 아 그래?! 그런 놈이 있느냐고, 어떤 놈이냐고 얼렁뚱땅 욕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찾아간 그날은 ‘아하, 이놈이구나. 어디 보자’ 하고 나의 일거일동을 주시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 뿐만이 아니다. 그런데 아무리 뭐 하기로 서니 그렇게까지 심하게 말할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내가 그녀에게 특별한 마음이 있는 건 아니다. 까놓고 말하자면 뭐 그리 잘생긴 얼굴도 아니다. 승호네 앞에선 언제 서울 올라가느냐고 질문까지 하던 그가! 길에선 선선히 대답하던 그가! 그런 말이 감히 나올 수 있었느냐? 그러나 이제 나는 모든 것을 선의적으로 해석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나의 생활을 돌이켜 본다.
여러 사람으로부터 얼굴이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다. 인사치레 이긴 하겠지만 그때마다 나는 사내놈이 들어서 과히 좋지 않은 말로 반, 또 즐거운 바음으로 반, 이렇게 그 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는 되도록 여자들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 쪽의 마음은 삭 무시하고 나 자신만의 생각으로 휘두르려 했고 또 휘둘려 지려니 했다. 그러나 나는 이번 이런 충격에 가만이 자아비판을 안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나 자신이 뭐 잘났다고 그리 떠들고 다니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이제부터는 나의 그 잘난 자존심과 자만을 꺾어야 할 때가 왔나 보다.
보라. 똑똑한 체하며 실상은 아무것도 아닌 병길, 너는 이미 나이 18세의 약관에 몇 개의 위선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지 않은가?
하여튼 이제부터는 정신차려라… 이렇게 가슴속의 고동은 외친다.
하여튼 그는 잊어야 한다. 그날의 그 창피는 일소에 부쳐야 한다.
청파동의 그 집과 혜화동의 내 집과 청파동 그와 혜화동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단지, 서울에 같이 존재한다는 그것 하나만이 공통점이 될 것이다. 자 이제 공부할 수 있는 조건은 갖추어졌다. 정신차려라---- 나는 이제 정신 좀 차려야 겠다. 보잘 것 없는 나의 지식을 넓혀야 하겠다. 체험을 마음속에 용해하여 다음 무슨 기회에 사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지식이 많도록 노력하겠다!
떠오르는 생각에 붓대 잡아 본다. 제목은 “나”
나
여기에 한 인생이 있으니 그 이름을 병길이라 한다.
그리고 그는 남의 고통 속에서 눈을 떴다.
물론 자기의 고통 속에 닥쳐올 죽음은 생각치 않고---
의지? 이성? 자유? 양심? 이 모든 것이 없어서 그는 단지 하나의 동물로만 몇 년인가 살아왔다. 만물의 영장이 되는 순서이다.
젖에 매달려 3년간 컷 다. 그리고 기어 다니며 신발 밑을 핥았다.
영양이 부족한 탓이라고?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신의 계시다.
흙을 사랑할 줄 알고 천한 것과 가까이하여 그것과 함께 호흡하고 또 생식하라. 그러면 너는 성자가 될 수 있다라는 신의 계시다.
그리고 그는 이제 ㄱ, ㄴ, ㄷ,을 배우고 욕도 배우게 되었다.
여기서 비로써 그의 학업은 스타트했다.
그리곤 그는 열심히 공부했다. 국민학교 6년간 우등을 했다.
하나의 즐거움으로써 기꺼이 반장 짓을 했고 또 책임을 지곤 했다. 자만심은 없었고 그는 아직도 눈에 어두웠다.
그가 서울에 오던 날-- 기막힌 희열과 불안으로 통근차 속에서 3시간 반을
오들오들 떨었다.
시험에 떨어진 그는 난생 첨으로 인생의 쓰라림을 맛보았다.
그리곤 주위의 경멸도 느끼었고 좁은 가슴에 비관까지 해 보았다.
결국 그는 이제 18세의 장년이 되었다.
하나 4275년도에 지구 위에서 존재하기 시작한 인간이 이제는 아베체데 와 궤적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객지 생활 5년 만에 얻은 게 무엇일까?
아마, 좋은 점 - 나쁜 점 = 0 그러니 좋은 점 = 나쁜 점일 것이다.
단지 서울인들의 각박한 인심과 돈의 악착같은 유통과 객지의 서러움은 그를 졸렬하게 만들었다!
그리곤 제법 앞날을 장담하는 그, 병길 이기도 하다.
- 8. 27. 목요일
학교에서 파해 오자 융_ 과 -기 놀러 왔다.
3시쯤 해서 육본 작은형을 찾아가서 짐을 꾸렸다. 식사하고 가라는 것을 싫다 했다. 후문께서 가만히 서서 보니 대개 보초병은 상관이 나가면 경례하고 안녕히 다녀오시라는 말을 녹음기처럼 되풀이한다.
어떤 때는 보초병보다도 나이가 적어 뵈는 듯한 군인이 나가며 거들 먹 거리기도 한다. 한데 여기서 보초의 인사에 대답하는 모양이 다르다. 같은 계급의 중위라도 어떤 중위는 “네, 수고하십쇼”하며 말 공대를 해준다. 그러나 어떤 중위는 “야, 수고해라 응”하며 마치 어린애 다루듯 한다. 그래도 보초는 불만이 없다.
물론 철저한 계급사회라 하지만 그 말씨만 보아도 전자와 후자는 얼마나 다른가? 후자의 인간들이 사회에 나오면 어찌 될 것인가?
생각하다 보니 비가 주룩 주룩 와서 얼른 버스를 잡아타고 서울역에 도착, 거기서 다시 소화동 버스 타고 을지로5가에서 하차, 다시 약수동행 버스 타고 문화동 하차, 명_누님 집에 갔다. 만_형님과 학표형님만 계셨다. 거기서 저녁을 먹고 합승으로 학표형과 함께 대한극장 앞에서 나만 하차하여 중앙청 삼선교 버스에 탑승, 중앙청에서 하차하여 규_이네 집에 도착, 소슬 대문 밀치고 들어 가다가 규_이 둘째 누이와 춘_를 만났다. 한문책을 보니 안 해 놓았다. 한편 안심도 되었지만 역시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후딱 나와서 다시 삼선교 버스 타고 삼선교에서 하차 천홍이와 함께 관이네 집으로 향했다. 관이와 이야기하다가 집에 오니 11시! 집에서 걱정하고 계셨다 한다.
누님과 조카가 와서 잤다. 한문 숙제를 고속으로 해 치웠다.
4992년(1959년). 8. 28. 금요일 고2
학교 파하고 인_이와 함께 서울운동장엘 갔다. 수영 좀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영장에는 서울 시내 각 학교 대항 시합이 전개되고 있어 수영은 하지 못하고 구경만 했다. 모두들 체격이 좋았다. 다이빙대 그 높은 곳에서 연약한(이것은 일반적 용어다) 여자의 몸으로 수백의 시선을 몸둥이(여자들에겐 별문제나 남자들에겐 그 도드라진 젓 가슴과 미끈한 허리, 그리고 아직 영글진 않았으나 날씬하게 자리 잡힌 허리에 특히)에 받으면서 아래로 떨어질 때는 가슴 저린 스릴을 느꼈다. 생각하여 본다. 저렇게 운동하는 여자들을 속된말로 “__빠” 라고 한다. 그런 것을 어리석게 믿는 것은 아니나 하여튼 그들 대부분이 너무 지나치게 명랑하고 방만한 것만은 공통된 점이라 믿는다. 누구한텐가 운동을 너무 심하게 하면 처녀막이라는 것이 터진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다면 저네들이 혹시 훗날 비극의 주인공들이나 아닌가? 쓸데없는 공상으로 시간을 메 꾸었다. 서너 시간 앉아있자니 궁둥이에 못이 배겨 그만 집에 돌아오고 말았다.
4992년(1959년). 8. 29. 토요일
3시 30분 차로 천안을 향했다. 퍽 오랜만에 가보는 느낌이 난다. 또한 이제는 내 고향이 아닌데 하는 마음이 들어, 어느 아는 집에 놀러가는 것 같다. 자기집을 찾아가는 심정이라면 이럴 수가 있을까? 슬픈 일이다. 천안에 닿았다. 뒷문을 통해 우리집 문을 가 보았다. 열쇠는 잠겨져 녹이 슬어 있었다. 안심되는 한편으로 뒤통수를 치는 무엇이 있었다. 어쩌면 슬퍼질 것만 같은 심정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백부님께 인사드리고 외할아버지네 가서 저녁을 먹었다. 할아버님도 퍽이나 고생하신다. 떨어진 낙엽의 바삭대는 소리와, 대롱대롱 겨우 붙어 있는 마지막 잎새처럼의 지금의 할아버님, 느지막해 고생하신다 생각하니 슬퍼졌다. 기철엄마는 지금도 기동을 못하신다니 그것도 슬프다. 영식이 누나는 아직 올라가지 않았고 영근은 여전히 물먹은 수련 꽃처럼 웃고 서 있고.... 저녁에 만_형님네 가서 진_누님께 책을 전했다. 진_누님은 뭘 한참 생각하는 듯했다. 어찌 보면 “생각하는 사람” 이라는 조각과 같다. 파리한 그의 몸집은 하나서 부 터 열까지 가냘프다. 혹 불면 탈싹 넘어질 것 같은 연약한 촛불 같다. 저 사람이 형과 연애 한단다. 형님과 결혼을 원 한단다. 아버지는 폐가 나쁜 애가 어떻게 결혼하느냐 하시고, 어머니는 형도 가뜩이나 몸이 약한데 진_이처럼 약한 며느리는 둘 수 없다 하신단다. 어쩌면 나의 형수가 될지도 모르는, 앞에 앉은 이 누나가 지금 괴로운 명상에 잠기어 있으니 내 가슴이 또 한 번 슬퍼진다. 이야기하다가 자리를 떴다.
문_가 방에 들어 박혀 있어 병길은 또 슬프다. 잘 가란 소리 변변히 하지 못하는 문_. 잘 있어 하고 인사할 배짱도 없는 병길.
영근과 이야기했다. 영근은 이화여대 시험 본단다. 그리고 붙으면 서울서 자취 한단다. 영근이 붙을 것을 생각하면 공연히 기쁘나 떨어질 것 생각하면 또 슬퍼진다. 나도? 떨어져? 붙어? 나는 어찌 될까? 집에 와서 그대로 자다.
- 8. 30. 일요일
8시 27분 차 노치다. 백부댁에서 오만환 타 가자고 조부님 4000환 드리고 나머지 가지고 오는 도중 내 옆의 중년신사 쓰리 맞다. 3시간 15분간 나의 신경은 웃주머니 16000환에 쏠리다. 복잡한 틈에서도 이에만 쏠리고 이러한 우리 한국의 가련한 상태를 혼자 가슴 태우면서 서울에 도착 집으로 오다. 내일은 기하 시험. 프린트를 잊다. 저녁에 무돈을 기다리다 못해 인_네 가서 베껴 와서 해 보다.
4992년(1959년). 8. 31. 월요일 고2
기하시험 연기한다 한다. 기쁘다.
쌀 팔아 오래서 여학생들, 국민학생들, 식모들, 쏟아져 나오는데 나는 떨어진 자루에 쌀 한말 팔아 넣고 비닐 우산으로 앞을 가리며 걸어야 한다. 그러나 결국 집에까지 와서 신경질 부리다가 어머님께 꾸중 듣다. “너는 얼마나 잘 사느냐고?” 이 말씀 나의 폐부를 찌르다.
4992년(1959년). 9. 1. 화요일 고2
오늘 한 일은 도무지 없노라.
4992년(1959년). 9. 2. 수요일
나는 키가 작은 것을 한탄한다.
비겁하게, 졸렬하게도 키가 작은 것을 한탄한다. 이뤄질 수 없는 일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조금이나마 희망을 가져 보며 그래도 짓쳐오는 고민에 빠져 나는 한탄한다. 왜 남들처럼 버젓이 키가 커서 남의 조롱감을 면할 것인가? 나의 모든 일은 누구의 눈에 게나 우선 귀엽게 보이고 그 다음은 가치 없게 보일 것이니 나도 모르는 새 벌써 사회속의 나의 존재는 무너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보다 작은 자를 생각해 본다. 그리곤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어 보려 하나 금방 사라지곤 의젓이 서 있는 장승들만 눈앞에 아롱거린다. 만일 내가 키가 좀 컸더라면 나는 얼마나 행복할 것이냐? 내가 키가 못 크는 건 선천적인 이유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너의 과거 2-3년간 생활을! 어느 무슨 짓을 하여 왔느냐? 지금도 너는 그런 짓을 하고는 양심의 가책으로, 또는 키가 못 큰다는 것을 아는 너로서 깊이 후회하는 것이 아니냐? 35초간의 순간이 몇 시간의 고민과 후회, 그 다음은 몇 십 년 간의 뿌리 퍼지는 고민을 낳는다는 것 쯤은 나도 알고 있기에. 이렇게도 후회가 크구나 아. 내가 유혹당했다. 규_이한테! 규_이 그놈. 그런 짓 하면 키가 커진다고 어째서 나에게 말했는가? 좀 키가 작아진다. 왜 진작 말하지 않는가? 알리고 싶다. 나의 후배들에게 그런 짓을 금지하도록 그러고 나 자신 이제 끊기로.
키가 작음으로 해서 야기되는 고민. 비록 어리석은 짓인지는 모르나 나로서는 필연의 결과이다. 절실한 요구이다. 아아. 언제나 키가 크려나? 멸시받는 이 키가! 전봇대처럼 커 봤으면......
아아. 언제나 키가 훤칠하게 크려나? 그 누구와 같이 아아. 아아. 아아. 괴롭다. 붓대 끝 펜촉마저 짧은 듯 느껴지고 유달리 펜대만은 무척 길게 느껴지누나. 아아.
- 9. 3. 목요일
날씨는 무덥다. 병_형한테서 편지오다. 답장 써서 붙이다. 삼육신학원의 이영숙 선생님, 영숙이. 병_형한테 하다. 선생님 병문안 가러 안국동까지 갔으나 병원을 찾지 못해 되돌아오다. 간 김에 행_ 만나고 오다.
대체적으로 오늘 별로 유쾌하지 않다. 이제 9시니까 앞으로 3시간 동안 독일어나 공부하자.
4992년(1959년) 9. 4. 금요일 고2
인생이란 무어일까? 생각하면 생각 할 수록 오묘하다. 한 세계 안에서 뱅뱅 돌면서도 자연을 맘껏 요리하는 동물?
하여튼 나는 인생이나 인간의 정의를 내리라 하면 이렇게 하겠다.
- 자연을 요리할 줄 아는 요리사.
- 기계의 제조자.
- 예술의 -----
아 더 이상 생각이 안난다.
사람이 60이나 70을 살아나가는데 그 중 20년은 공부. 20년은 공부한 것을 써먹는 시기. 나머지 20년은 쉬는 기간. 이렇게 잡아 본 생 생 생! 호흡하면 대수냐? 골이 호흡해야지.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쏘크라테스는 공원에 앉아서 “인생은 무어냐? 어디서 왔느냐? 무엇 하러 왔느냐? 어디로 가느냐” 하는 문제에 고민하다가 공원직이가 거지인 줄 알고 “이거 누구냐? 시간 다 됐다. 나가라. 어디서 온놈이야? “ 할 때 쏘크라테스는 “어디서 왔느냐고? 내가 그것을 몰라서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 라고 말했다 한다.
일본의 제일고등교 후지무라 군은 “인생불가해”라는 한마디를 나무에 써 놓고 화엄폭포에 떨어져 죽었다 한다.
내가 만일 그 화엄폭포 앞에 서 있다면 솟구치고 치닫고 내리 찌르고 괴성을 지르고 날뛰는 폭포를 눈앞에 두고 무엇을 생각했을까? 만일 그때 어디서인지 모르게 떠 내려온 나뭇잎 하나가 이리저리 몰리며 짓 까불고 있을 때 나는 이렇게 느낄 것인가? 아 가련한 잎아(병길아) 너는 세파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구나. 네가 거기서 빠져나가려면 침착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빠져나갈 길을 찾아라. 결코 실망하지 말라 이렇게 위로 하겠다. 그걸 보고 나선 우선 나는 친구들과 얼려 다니며 악착같이 재물을 모을 것이다. 마치 하나의 잎이 물을 헤어나려 애쓰는 것 같이…
그렇다면 후지무라는 그걸 보고 어떻게 생각했기에 자살을 했을까? 그는 그 잎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 저 잎을 보라 저 잎은 지금 제 주위의 환경에만 당황하고 헤어나려 할 뿐이지 그 후를 모르는구나. 저 아래 내려가면 아이들이 돌 가지고 장난하는 데서 형체도 없이 흙에 파묻힐지도 모르는 저의 운명은 생각치 못하는구나 가련한 자여 너는 그럴 필요가 없다. 차라리 거기서 자맥질하여 꺼꾸러 지려므나. 물밑 1미터는 고요 하단다. 다만 눈 큰 고기들이나 지낼 뿐......! 그러나 잎아. 너는 생을 포기하고 자맥질하여 물속에 들어 가거라. 그렇다면 비록 너의 시신은 썩을 망정 너의 영혼은 조용한 넋 속에서 춤출 수 있쟎니? 하는 심정으로 자살했을 것이다. 이것이 전연 나의 억측이라면 나는 실망한다.
사람이 나서 죽는 다른 것은 피치 못할 철칙인데 그 나서 죽는 사이 이것이 역사를 이루며 온갖 창조자 다음의 기술을 발휘하는 게 아닌가? 허기야 인간이 만지는 모든 것은 다 우선 신이 만들어 놓은 것이니까 인간을 절대적인 창조자라곤 말할 수 없다.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예술이 될 수 있는 소재는 우선 자연 즉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걸 논하는 것은 막스나 싸르트르의 실존 철학을 읽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정말 보잘것 없는 나의 머리를 짜내서 하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