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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1959년. 단기 4292년 6. 29. 고2
무한이 빨리 달리고 싶어하는 펜이건만 꼬리를 무는 추억이 너무 무거워 끼우뚱거린다. 그간 일기에 손을 대지 않은 것은 며칠간 뿐이었으나 마치 몇 달이 지난 것 같다.
생활 한 모퉁이에 금이 가 있는 탓이리라. 그렇지 않으면 일기장이 꽉 차서 그랬나? 며칠간의 기억을 더듬자니 아연할 뿐이다.
6월 10일부터 오늘, 6월 29일까지 보름 조금 넘은 시간이었지만 그 동안 일들을 묶으면 한편의 소설이 될 수도 있겠고, 또는 그저 간단한 한 줄의 글이 될 수도 있겠다.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단 사일동안 일어난 것들을 쓴 소설이지만, 나에겐 그런 문장력이 없으니 우선 일어난 일을 그대로 쓰자.
그 동안 누님도 여기 두세 번 다녀가고 작은형, 병직형도 몇 번 다녀갔다. 그 외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는 친구를 불러들이고 싶지가 않다. 방이 좁아서일까? 아니다. 나는 원래 친구가 없으니까. 종_이도 끊어졌고 무_이도 끊어지다시피 했다. 영은 너무 어리게 놀고, 철_이는 어쩐지 가식이 많아 터놓을 아이가 아닌것 같다. 그렇다고 나의 인간 됨이 월등해서 그들을 비방하는 건 아니다.
내 마음 씀씀이가 너무나 협소한 걸 나는 안다. 성격을 고친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임을 철칙으로 믿고 있는 나는 친구를 사귀는데 유별난 의욕이 없다.
그러나 한 사람만, 내가 믿고 터 놓을 수 있는 친구를 사귀고 싶다. 형한테 소개받을 수 없는가? 하여튼 과거의 나를 완전히 잊어주고 내 인생 안에 뿌리박고 들어올 진실한 친구 하나만을 원한다.
형님은 매일 늦게 들어온다. 그것도 매일. 이해가 잘 안 간다. 한번 염탐을 해 보아야겠다. 11시 반 까진 들어왔다면, 그건 기적이다.
하여튼 형은 고단하다. 좀더 편하게 돌보아 드릴 의무가 나에게 있다.
6월 21일, 일요일, 철_의 재촉에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수영복을 옆에 끼고 난지도를 향해 떠났다. 서울역에 가 수색 행 버스에 올라 한참 시달리고 나니 생전 처음 와 보는 수색이다. 여기서 길을 물어 가며 배를 타고 건너가 섬에 올라섰다.
섬 저쪽에 텐트를 발견했을 때 우선 기뻤다. 흡족했다. 4시간을 노는 동안 살은 새까맣게 타고 얼굴은 뻣뻣해졌다. 물살만 세지 않고 맑다면 이곳은 틀림없이 좋은 수영장이 될 것이다.
우리가 수영하던 곳 맞은편에서 노인이 하나 빠져 죽었다는 소리에 욱기로 허겁지겁 저어 나가 건너 갔을 때 물위에 매꼬모자만이 둥둥 떠 있었다. 일행이 열명쯤 있었는데 모두가 수영에는 자신이 없었던지 혹은 일어서고, 혹은 질퍼덕이 앉아서 입만 벌리고들 있었다. 적어도 이때만은 썩어빠진 허수아비로 보였다. 떠 있는 매꼬모자가 무서웠으나 결국 성일_이 그것을 붙잡고 펄쩍 들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김상_은 멀찌감치 떠가는 쥐를 보고 마구 헤엄쳐 갔었다. 30분가량을 찾아 헤맸으나 헛수고였다. 물살도 세거니와 바닥이 미끈미끈한 게 미끄러지기 쉬웠다.
결국 나중에 신문에서 안 거지만 49세의 남자가 낚시질하다 실수하고는 즉시 익사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눈물을 흘리거나 애수에 젖어 감상되기는 싫었다. 그럭저럭 짐을 꾸려서는 그 자리를 떴다. 떠나며 노인이 빠진곳을 다시 돌아다보았다. 이제는 아무도 없다 흐르는 틱틱한 물만이 언제 누가 나한 테 희생당했 느냐는 듯이, 가당 치도 않은 소리라는 듯이 흐르고 있었다. 나면 죽는 게 인생이라고 하나 너무나도 허무한 듯했다. 아침에 웃고 나온 노인 하나가 여기서 고이 잠자고 있으니 말이다. 생을 위해 꿈에서 깨어 난지 24시간도 되기 전이다. 나도 이제 배 타고 가다가, 혹은 버스 타고 가다가, 혹은 걷다가, 혹은 자다가, 내일 혹은 모레, 70년 뒤 또는 77년 뒤, 저 흐르는 물속의 영혼처럼 슬쩍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즐거운 게 인생이라면 무서운 것도 인생이다. 두 가지를 절충해 논 인생이 즉 생존 경쟁이고 골육상쟁인 것이다. 삶 하나를 위한 모든 잡다한 다툼이 삶 저쪽의 죽음을 망각하는 데서 낙은 존재하는 것이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시간을 메우며 집에 돌아온 때는 지칠 대로 지친 후였다.
집에서 학교까지 걷자면 30분가량 걸린다. 그것도 철_이가 걷자고 할 땐 걷는 것이다. 가는 도중에 마주 걸어오는 학생은 상당히 많았다. 여학생은 더욱 그러했다. 돈화문에서 원남동까지 고개 하나 넘자면 여간한 노력이 들어야 했다. 고개가 있어 그런 게 아니다. 얼굴 근육이 뻣뻣해지도록 표정에 신경줄이 댕겨지는 것이다. 이거 뭐 내가 지금 몇 살인데 이런 현상을 일으키나 하고 자신을 꾸짖어 보나 할 수 없다. 혹시 개나 돼지는 암수가 만날 때 서로 킁킁거리는 반응 쫌은 있는 것이거늘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 일컫는 인간들끼리 반응이 없다는 건 안될 말이다. 저쪽에서 보면 이쪽에서도 보고 저쪽에서 대담하게 표정을 지으면 이쪽에서도 윙크 한번 할 정도의 인심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덮어놓고 무표정한 얼굴로 이성 앞에(생면부지의) 나타나는 게 참다운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건 15세기 구습의 깝대기 속에 구속되었다. 인간의 얼굴을 그러한 무용지물로써 신이 만들어낸 건 결코 아니라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6월 27일에 시골 내려갔다. 내려간 이유인 즉 첫째는 내일 동창회 총회가 있다 해서이고, 또 하나는 시골집이 이사 간다는 소리를 듣고 너무나 충격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사한다? 전부터 바라 온 일이긴 하지만 그러나 막상 집이 팔렸다고 생각하니 이 생각 저 생각에 공부가 되질 않았다. 숫한 사람들이 고향! 고향하며 울부 짖으나 이제 와서 새삼스레 고향이라는 게 머리 속을 진하게 물들인다.
고향, 천안 역전이 나의 고향이다. 인생의 첫 테이프를 끊은 곳도 천안이고 18년간 뼈를 굳게 해 주고 살을 붙여 준 곳이 천안이었다. 그뿐이랴. 무지에서 지금의 이성 있는 학생으로 길러 준 곳도 천안이었다. 그러한 나의 흙을 이제 떠나게 되다니! 고향이라고 하여 그렇게 기쁜 추억만 남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의 감정은 이루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다. 이광수 씨라도 계시면 내 심정을 원고와 함께 부탁도 해 보련만, 녹음기라도 있으면 지금 이 내 심정을 마구 짓거려 보아 두겠 건만 그런 것이 나에겐 없다…
고향 집에 오니 보를 싸 놓았고 세간들이 모두 자리를 옮겼다. 어째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슬퍼졌다. 돌아다니며 인사했다. 상점의 손님 없는 약장은 쓸쓸하게 놓여 있었고 기다리다 지친 할아버지는 나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영숙 조카와 사진을 찍는데 춘자가 왔다. 춘자와 함께 찍었다. 춘자도 이제 얼마 안 있어 자기 집에 가려는가 보다. 나도 이제 이사 가고…그러니 사진 찍길 잘했다고 생각되나 그러나 찍고 나니 어쩐지 후회되었다. 이 사진이 만일 공개되었을 때의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어떠할까? 친구들의 시선들은 영하 몇 도가 될까? 에잇! 남자답지 못한 생각이다. 대장부답지 못한 옹졸한 생각이다. 필름에 이미 들어 앉아 있는 우리 셋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다음날, 그러니까28일에 동창회 총회가 있었으나 어쩐지 가고 싶은 마음이 나질 않아 그만 두었다. 규_이네 집에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영근이한테 놀러 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규철이 어머님께 놀러 가겠다는 허락을 받고 뒷집을 찾아 갔다. 좀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떨렸다. 문을 똑! 하고 두드렸으나 반응이 없다. 문을 열어 보았다. 영근이는 공부하고 있었고 옆에 영근이 친구인 듯한 학생이 기분 좋게 자고 있었다. 앗 차 하고 뒷걸음질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벌어진 스커트 사이로 여지없이 흰 넙적 다리가 뻗어 나 있었다. 그러나 영근은 반갑게 맞아 주며 들어오라고 한다. 나는 앞뒤 생각 없이 쑥 들어갔다. 이 얘기 저 얘기하는 도중에 영근한테 이사 간다는 소리를 했더니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놀래나 주니 고맙다. 가만히 이야기하며 생각하니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영근이 친구가 있는데 내가 이러면 어찌한단 말인가? 벌떡 일어났다. 그 집을 나오면서 어쩐지 서운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영근의 친구에게 더욱 미안했다. 대~단 히 미안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나의 성미가 그만큼 대담해졌다는데 찬사를 아끼고 싶지 않다. 아니, 그만큼 허물없이 된 영근과의 사이가 나에겐 귀중한 것이다. 비록 이 순간만은 형의 공부하라는 말은 멀리 사라질 수가 있다.
아버님께서는 가정부 식모한테(인순) 500환 꾼 것하고 아줌마한테 500환 꾼 것 갚을 돈 만을 주셨다. 나는 이것도 고맙게 받았다.
2시 45분 차에 규_과 함께 올랐다. 어쩐지 시골을 아주 떠나는 심정이었다. 허전하고 씁쓸한 그런 심정이었다. 참으로 생각할수록 취미 없는 하루였다. 서울 가는 게 그렇게 지긋지긋하지도 않고 또 그렇다고 천안에 있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서울역에서 지루하게 돌던 기차 바퀴가 멈췄을 때, 이제 또 서울에 왔구나 하는 생각으로 나도 모르게 이마에 가는 주름이 하나 잡혔다. 그동안 무수히 차창을 통해 지나간 경치가 아직도 망막 속에서 마구 도는 것 같았다. 어느 보리밭은 마치 리부로 깎은 양 수확을 했고 어떤 밭은 아직 덜 익었 음인지 손이 모자라는지 그냥 서 있기도 하고 누워 자고 있기도 했다. 논에는 파릇파릇한 모포기들이 청초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는 열차에 탄 인간들을 향해 ‘너희들 인간들아, 지금도 너희들의 뱃속엔 내 동지들이 들어있어 너희들이 소위 갈망하는 생(삶)을 발동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이 혹시 나를 거만하다고 욕할지 모르나 욕하는 그 입속으로 내가 들어갈 때 에야 너희들은 욕 할 힘이 생기는 것이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저녁은 규_이네 서 하고 집에 들어오니 뱃속이 좀 불편했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오늘 어제 해 왔든 일이 주마등처럼 머리 속을 헤집어 껌껌한 허공을 바라보며 빨리 잠이 오길 청했다. 이럴 때는 의식이라는 어느 열쇠를 잠가 버려 멀리 저쪽 세계로 날라가 버리고 싶다.
서기1959년. 단기 4292년 7월3일 고2
또 며칠 만에 펜을 든다. 며칠간 형님이 들어오지 않더니 오늘에야 들어왔다. 김선생님 댁에서 밤을 지냈다고 했다. 형 없이 자는 날은 네활개 뻗고 자서 기분은 놓으나 어느 한구석이 허전함을 면치 못하겠다. 형님한테 방학 때 캠핑 갈 것을 허락받았다. 물론 거기에 필요한 돈도 준다고 했다. 한결 가뜬해진다.
하여튼 그것을 위해서라도 지금 공부해 둬 방학 때 편히 쉬어야 한 터인데….
오늘은 과히 기분이 좋지 못했다. 특활시간에 선생님을 간접적으로 비방하여 눈총을 사게 되었고, 집에 와서도 바로 아래 천막 집에 돌을 던졌다고 야단맞았다. 실수인 것이다. 저 건너 내려다 보이는 초가집의 처녀(?)들은 도대체 나를 어찌 볼까? 창문을 열고 내다보면 그것들부터 보이고 그러자면 여기 올 때 철_과 함께 장난하던 생각이 나서 얼굴이 빨개지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창문만 내다보면 자기들을 보는 것으로 오해하고 뒷소리 하는 게 여간 불쾌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비원의 우아한 풍경이 그 사이에 주저 앉아 있는 초가집의 그 방, 그 방 속의 그 작자들 때문에 별로 다른 기분을 풍겨 주지 못했다. 그날 내가 장난한 건 물론 큰 잘못이다. 그러나 그랬다 해서 영원히 나를 불량아로 취급하려는 그들의 태도에 반발이 지나쳐 저주하고 싶다. 이 동네에서도 결국 우리는 망난이로 인정받은 것이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잠겨 있 노라면 그저 모든 게 귀찮다. 좁아 빠진 방에서 더욱 답답하다. 뒷동산이나 있으면 심회나 풀어 보련만 뒷동산은 고사하고 뒷 변소만이 반겨주니 말이다. 담담하다면 담담하고 지긋지긋하다면 지긋지긋한 생활의 연장이 아니고 무엇이냐?
남들은 눈이 뻘개서 공부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꼴이냐? 남들은 눈이 벌개서 공부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꼴이냐? 정말이지 혼자 생각해도 부끄러운 노릇이다. 남이 한다 해서 나도 한다는 그런 관념은 없어져야 했다. 그러나 나는 거기까지 숙달하질 못했다. 남이 놀면 안심되고, 노력하는 것을 보면 걱정되고.... 이것이 비록 동심이 긴하나, 이제 자신의 앞길을 자신의 손으로 가려 나가야 할 내가 이러한 상태속에서 나날을 보내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르겠다.
그러나 물리 같은 과목은 정말 곤란하다. 이건 뭐 처음부터 듣지 않았기 때문에 참고서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허사였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독일어도 마찬가지다. 이러고 보면 장차 어느 대학에 갈까?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프다. 독일어, 물리 빼 놓고는 무엇이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천재가 망한다는데 비록 나는 천재는 아닐 망정 팔방미인 정도는 되겠지(너 자신 최대의 자만심을 가지고 최대의 평가를 문병길에게 가해준 표현). 그렇다면 나는 박명일 것이니 결국 오래 사는 게 낙이라면 뭐 천재고 뭐고 다 필요 없다. 뭐 애당초 귀에 담아지지 않는 언어다.
4992년(1959년) 7월 4일 토 맑음 고2
작은형이 왔다. 반가우나 한편 귀찮기도 했다. 반가움-싫음>0. 그러니까 반가움>싫음. 즉 반갑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세탁물을 가지고 온데 대해선 질색이다. 너무나 식모에게 수고가 많기 때문이다. 내가 빨려고 했으나 식모가 빨아 주었다. (어? 내 필적이 왜 이렇게 줄어들었다는 말인가?!). 아주머니가 형 중매해 준다는 색시는 그리 예쁘지 않았다. 형과 함께 문화극장에 가서 ‘날이 새면 언제나’와 ‘해저 2만리’는 보았는데 ‘날이 새면 언제나’는 끝에 조금 보았다. ‘해저 2만리’는 너무나 감격되어 여기 쓸 수가 없다. 다만 몇 가지 적어 둘 건 ‘네모’ 선장이 죽은 게 너무나 쓸쓸했고 또 ‘넷트’, ‘박사’, 그리고 ‘조수’가 살았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고…
4292년(1959년). 7. 13. 월요일. 고2
일기에 손을 대지 않은지도 퍽 오래된 것 같다. 쓸쓸하고 갑갑한 심정을 풀을 길 없어 펜대를 잡았다. 그 동안에 일어났던 모든 일은 다 그만두고 라도 오늘 일만은 써 놓아야 되겠다.
5째 시간 나의 수업 받는 태도는 너무나 방심했다. 나 자신 생각하고 생각해도 나의 수업 받는 태도가 여간 나쁘지 않았나 보다. 하여튼 장난이라고 한 것이 하필 김영두 선생님한테 걸렸다. 나는 평소 그 선생을 눈곱 만치도 존경하지 않았다. 어쩐 이유인지는 모르나 거의 매일 갈아입고 오는 그의 양복이나 구두도 눈에 거슬리거나 와 거기다 가르치는 건. 뭐 말이 아니다. 물론, 공부는 되도록이면 자치적으로 하는 게 상책이나 이 선생은 너무나 방임하는 태도다. 시간에 한 번도 책을 보지 않고 학생한테 ---- 에잇, 내가 이거 뭐 이런 걸 쓰고 있나? 하여튼 나는 그 선생을 퍽 나쁘게 보아 보아왔고 또 특별한 일 없는 이상 그럴 것이다, 나는 오늘 교무실에 끌려가 몹시 꾸중을 들은 것이다. 그런데 교무실에 가니 참 기가 막혔다. 선생들은 어찌 그리 기억력이 좋은가? 모두 다 말참견하며 나의 과거를 들추어 낸다. 낯이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일이었다. 그저 성질 같아서야. 말참견하는 선생들 입을 틀어 막아 주고 싶었다. 더구나 우리 고문 가르치는 선생이 형님과 잘 아는 사이라는 걸 하필 이런데 이런 장소에서 알게 되다니 참 형님에겐 미안한 일이었다. ‘에이 이놈, 형만 같았어도…’. 라고 하시며 힐책하는 고문선생님의 말을 들을 때 골이 꼬챙이로 쑤셔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김영두선생이나 신용태선생을 보면 울컥 반발심이 솟구치는 것이다. 김영두선생의 뱀 같은 실눈이나 신용태선생의 신경질적인 면상은 나를 금방 우울하게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교무실에서 선생들은 나를 무슨 장난감으로 알고 마구 지껄이는 것 같았다, 반항. 행동 아닌 반항이 용솟음 치고 있지 아니한가? 내가 이렇게도 가시 같은 존재가 되어 있는 것일까? 뭣 좀 해 보겠다고 결심에 결심한 내가 겨우 ‘까불이’로 낙착되다니 너무나 억울한 말이다. 더구나 김영두선생은 나한테 ‘왜 형이 중앙에 있으면 그리로 가지 않느냐’고 한다. 그 소리를 들으니 어쩐지 슬퍼졌다. 객지에 나와 고생하며 이런 억울한 소리를 들어야만 한다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내가 방탕해진 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무정하고 매몰찬 소리를 들어야만 되는가? 나는 그여히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바보같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나중에 신용태선생이 좋은 말 해 주었다. 질문을 하드라도 학생 답게 하라는 것, 좀더 순종하는 태도를 지으라는 것 등을 말해 주었다. 애써 들어 새기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오늘 교무실에서 당한 굴욕은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12일 일요일에는 종만형과 함께 문화 극장의 ‘우주 정복’을 감상하고 돌아와서 만복 형님 댁에 갔다 왔다.
오늘 학교의 일로 기분이 몹시 나쁜데 이제 즐거운 생각이나 하자.
방학 때 캠핑 가기로 했으나 갈 맘이 나질 않는다. 멤버가 시원치 않은 것이다. 형이 5000환 주면 그거로 기차 타고 돌아다녀야 하겠다. 먼저 황무_ 집에 가서 하루쯤 놀다가 세일 들어가 하루쯤 놀고 다음에 서산에 가서 한 열흘 놀 예정이다.
5000환 가지면 실컷 하리라 믿는다.
- 7. 16. 목요일
사진을 보다가 생각나는 게 있었다. 약 3주 전, 시골 내려 갔을 때 영숙조카가 사진 찍자 하기에 사진관에 갔더니 춘자도 와 있었다. 전후 가릴 것 없이 셋이 서 찍고 말았다. 나는 서고 춘자와 영숙은 앉은 자세로. 찍고 나니 후회됐다. 춘자가 영근이만 됐어도 얼마나 좋을까? 애꿎은 춘자나 영숙이가 그지없이 미웠고 또 덜컥 찍어 논 나 자신이 미워지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 사진이 누님한테 와 있었다. 나는 그 사진을 보자 일종의 수치심과 반발심에서 가위로 썩둑 베어 버리고 말았다. 가뿐했다. 이제 영숙이 한 테 사진 빼앗아 찢고 춘자한테서 사진 빼앗아 찢고 하면 된다. 시골 가서 그걸 해야 되겠다.
여자들 생각하니 또 하나 생각 나는 일. 이틀 전이다. 규_이네 놀러 갔는데 정_이가 ‘피터판’이라는 영화를 보러 간다 하니 날 보고 같이 가라고 했다. 결국 대한극장까지 동행했지만 나는 도무지 마땅치가 않았다. 그 주제에도 뭘 또 부끄럽다고 앞질러 가고 떨어져 오고… 여자가 퍽이나 건방지다. 그보다도 규_은 고소할 거다. 자칭 ‘고상한 인격자’인 규_은 나를 조소할 거다.
4992년(1959년) 7. 20. 월요일 고2
통지표를 받으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적이었다. 석차는 이 마음의 기록 서에까지 기재 못할 만큼 저하되었다. 저하가 아니라 발전이 없었다. 방에 우두커니 들어 앉아 한숨만 내 쉬실 아버님과 어머님과, 피곤과 싸우며 교단에 서는 형님의 얼굴이 문득 통지표 위에 포개진다. 내가 이렇게 떨어지다니…. 국민학교에서 1,2등을 다투던 나로서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나, 뭐 이것이 누구 탓이랴? 하숙시켜 주면 공부하겠다던 형과의 약속은 통지표 저쪽에 숨어 얼굴을 들지 못한다.
고 2에선 공부 못해도 괜찮아. 삼위일체만 때우면 돼! 이것이 통지표를 가장 적합하게 합리화하려는 나의 자위다. 그러나 이제 2학년도 반년이 지났다. 이 멍텅구리 놈아! 에잇, 집어 치자.
오후에 형님과 전세 방들을 두루 돌아다녔다. 세 집을 모두 돌고 혜화동 근처에 하나 정했다. 대단히 좋았다. 더구나 나는 학교 종소리 듣고 달려 갈 수 있는 거리,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그러나 형님은 고생이 될 것이다. 버스통학을 해야 되니 말이다. 이제 식모하나 구해서 들어가기만 하면 나의 하숙 생활은 청산되는 것이다. 영원히 청산되는 것이다.
4년 반 동안의 하숙 생활과는 이별을 고하게 된다. 한편 서글퍼지기도 하고 한편 시원하기도 하다.
그 동안의 갖가지 추억 중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건 상도동에서 중3때 한 주_이와의 자취 생활이다. 추운 날 쌀 씻느라 손끝이 빨갛다 못해 하얘지기까지 했던 일이 새삼스럽다.
청진동 행_네서 하숙 하다 하숙비 못 내 쫓겨난 일과, 같은 방을 쓰던 국정이와 싸운 일, 최씨 댁에서 하숙 아닌 하숙을 하며 독사 같은 아주머니의 눈총을 받든 일, 숙장 댁 비좁은 방에서 벼룩들과 싸우든 일, 청량리 판자촌 골방에서 원순 형님과 자취하든 일, 만_이와 명륜동에서 하숙 하며 밤에 싸우던 일, 박떠벌네서 혜자와 자취하던 일, 이곳 원서동에서 웬 처녀로부터 오빠 삼고 싶다는 편지를 받던 일...
기억이 잘 나지 않아 그렇지 재치 있게 나열하여 뼈와 살을 붙이면 좋은 소설이 될 듯도 싶다. 저녁에 누님이 오셔서 잤다.
4992년(1959년) 7. 21. 화요일
아침에 누님과 동대문 시장에 가서 빽을 샀다. 6000환 주고 두개 사 들고는 집에 돌아왔다. 짐을 싸며 주인한테 옮긴다는 말을 그때야 하였다. 섭섭해하였다. 주인은 곧장 어디로 가드니 이방에 들어올 학생이 생겼다는 것이다. 반가운 일이나, 어쩐지 야속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사실 하숙집 주인으로서는 아주 불성실하게 우리들을 대해 주었다. 찬을 재대로 해 주지도 않았다. 우리가 내는 하숙비는 자기네 빚 청산에 급급하고 상위에 반찬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맘 좋은 인순이만은 항상 그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었지만...
하여튼 이방에 들어올 학생은 복도 어지간히 없다.
하숙비 나머지를 주고 주인과 작별인사 하였다. 이것으로 나의 하숙 생활은 종지부를 찍게 될지 그 누가 아랴. 이것이 인생이요 흘러가는 체바퀴이다
4992년(1959년) 7. 24. 금요일 고2
집에 들어서자 놀랐다. 허수룩하던 뒷 집이 이렇게 산뜻해진 것도 물론이러니와, 앞집이 어떻게나 딴판으로 변했는지 입이 벌어졌다. 아무리 이제 더 이상 나의 집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순간적으로 흥분한 적은 없었다. 나의 집, 내가 수면을 한 온돌방이 막 뜯기고 내가 비벼댄 벽이 허물어지는 판국이다. 뒷집은 정말 깨끗 해졌지만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역시 의젓한 집 없는 설어움에서일까? 못난 놈의 약한 마음 때문일까? 아버님은 얼굴이 더욱 안되어 계셨다. 할 일이 없이 놀고 계신게 얼마나 고역인가를 나는 안다. 며칠 병으로 앓아 누웠을 때 얼마나 칠판이 그립고 공부가 그리웠더냐?
7. 25. 토요일
오늘 춘자와 영숙으로부터 그 사진을 뺏는데 성공했다.
이제 불에 태우면 되는 거다. 문제는 무슨 구실을 붙여서 태우는가? 바로 그거다. 우연히(아니 고의적으로) 병관형 일기장을 보게 되었다. 거기서 나는 이외의 사실을 발견하는데 눈을 아끼지 않았다. 형은 약혼자 이외에 사랑하는 여인이 있고 불의의 관계까지 맺고 있는 모양이다. 어쩐지 슬퍼만 보이고 고독해만 보이는 형이기도? 하다!
저녁에 순_ 누나하고 거닐기로 했다. 천안 남산공원을 다녀와 달빛을 벗삼아 감상에 잠기며 거니는 마음, 참으로 감명 깊은 밤이었다. 더구나 같이 동행한 순자 누나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들을 때, 시공관에서 일류 스타가 노래하는 것보다도 더욱 좋았다. 그저 좋았다.
7. 26. 일요일 고2
오늘은 만_ 형님댁에 마실 갔다. 문_ 때문에 발길이 내키지 않았지만 순_ 누나의 말이 생각났다. “남자는 남자답게 놀아야 돼” 하는 말이었다. 그 말이 이런 장소 이런곳에선 보약이 되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가니 진_누님이 계셨다. 물론 명_이 누님도 있었다. 진_이 누님은 내가 생각했든 것보다는 좀 얼굴이 들 됐다. 문_는 나중에 들어왔다. 재미있게 놀자니까 순_, 쾌_형 동생, 또 다른 친구, 이렇게 들 와서 놀았다. 노래를 하게 되었다. 사내 뱃장 똥뱃장이라고 나오지 않는 걸 억지로 고안하여 아리랑을 불러 제켰다.
오늘 할아버님 댁에선 잔치 곗날이라 해서 잔치를 했다. 나도 뭐 좀 얻어먹으려고 갔더니 손님보다도 부엌에서 서성대는 쿡들이 더 많았다. 난장판이었다. 날씨는 무더운데 이런 데서 무슨 잔치를 하겠다는 거냐?
그러나 이 년짜리 계라니 앞으로 24달 동안을 할아버님께서는 다니며 얻어 잡수시면 되는 것이다.
4992년(1959년) 7. 27 일요일
오늘은 동창회이다.
시간에 맞추어 가니 아이들은 별로 많이 오지 않았다.
여자들은 한명도 들어오지 않았다. 11시 가까워서야 옹기종기 모여 들었다. 한탄할 노릇이다. 소위 “코리안 타임”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명칭이 이런데 서 튀어나왔으리라 믿으니 늦는 자 모두가 밉게 보였다.
그네들은 무슨 딴 뜻이 있어 늦는 것이다. 고의적으로!
최순자가 왔다. 오오 최순자가 왔다! 국민학교 때 그렇게 싸우고 또 그렇게도 친하게 놀든 최순자 그자가 왔 다니, 너무나 반갑다. 허나 그림의 “떡”이다. 그를 정면에 두고 생각하자니 너무도 까물거리고 아기자기한 추억으로 내 머리는 물 들었다. 진주 홍 붉은 추억으로.
오늘 동창회는 무사히 끝이 났다. 그러나 무사하다는 것은 언제까지나 형식상 문제이다. 실은 알력이 있었다. 양--나 김--은 속절없이 싸우고야 말았다. 참으로 저하된 인간들이다. 5년 만에 자리를 같이 하여 겨우 하는 짓이 주먹 왕래뿐이니 말이다. 물론 그들에겐 양심의 가책이 별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골이 뭐 남달리 둔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영웅심리라는 병이 그네들에게 발병했기 때문이리라.
여자들은 사복을 하고 나온, 거의 부인에 가까운 옷차림을 하고 나온 숫자가 더 많은데 놀랐다. 상당히 놀랐다. 나는 동창회라 해서 뭐 좀 적어 놓고 싶은 것도 많다. 그러나 나는 적지 않겠다. 동창회가 한낱 악몽이 되었기 때문이다. 서울 놈들은 몰매의 대상이 되었다니. 오늘 재수 없었으면 성한 발로 집에 도착하지 못하게 됐을지 그 누가 장담하랴. 참으로 저하된 학생의 세계라 하지만 너무 심한 것 같다.
사회에서 말하는 학생들의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혹평하고 멸시하는 뭇 어른들의 견해에도 덮어 놓고 반박할 수는 없는 것이다.
5년 만에 만난 친우끼리 주먹 다툼이 벌어졌다면 그 누군들 곧이들을 것이며 그 누군들 고소를 금치 않으랴? 저열 된 인간들이다!
그네들이 의젓한 학생임에랴.
기념사진을 찍고 쓸쓸히 집에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