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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타운 뉴스’ 발행인 칼럼(제 823호)에 미국에 찾아온 중학교 동창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친구는 사업 실패를 겪었고, 병으로 인해 한동안 휠체어 생활을 했으며, 재활 치료 끝에 겨우 걸을 수 있게 된 상태였다. 함께 눈 덮인 마운틴 발디의 아이스하우스 캐넌 트레일을 걸어 새들까지 올랐다. 내려오는 길은 빙판이었다. 친구는 넘어졌다. 또 넘어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여덟 번이나 넘어졌다. 그는 넘어질 때마다 아무렇지 않게 다시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확신했다. “이 친구는 어디서든 살아남을 사람이다.”
산길을 거의 다 내려왔을 때 친구가 말했다. “한국에서 실패했고 중국에서도 실패했지만 미국에서는 성공할 것이다.” 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물론이다. 너는 할 수 있다.”
그날 이야기를 칼럼으로 썼던 것이 벌써 15년 6개월 전의 일이다. 그리고 지난 6월 1일은 그 친구의 생일이었다. 오랜만에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독자 여러분께 그 후일담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럼 속 주인공은 지금도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다. 미국 정착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LA에서 그의 삶은 결코 실패가 아니었다. 오히려 값진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시민권을 취득했고, 오랫동안 트레일러 운전사로 일하며 성실하게 삶을 일구었다. 은퇴한 뒤에도 한동안 우버 운전을 하며 부지런히 생활했다. 그리고 지금은 완전히 은퇴하여 새로운 인생을 즐기고 있다. 은퇴 후에 그가 보여준 학구적인 탐구 정신과 삶의 태도는 우리를 놀라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은퇴를 삶의 마침표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친구에게 은퇴는 또 다른 출발이었다. 그는 이것저것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이루지 못했던 꿈들을 하나씩 꺼내 보기 시작한 것이다. 어려서부터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어 친구들과 이웃에게 선물했다. 정성껏 만든 십자가에는 손재주뿐 아니라 그의 따뜻한 마음도 담겨 있었다. 우리 집에도 그가 만든 십자가가 여러 개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십자가 선물을 다 나누어준 뒤에도 그의 배움에 대한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하모니카였다. 처음에는 만날 때마다 취미 삼아 시작했다며 하모니카 연주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그의 실력은 일취월장(日就月將), 눈에 띄게 늘었다. 급기야 그가 속한 하모니카 팀이 LA의 프로 아이스하키 경기장에서 연주하는 기회까지 갖게 되었다. 그와 그의 팀이 작은 악기 하나로 수많은 관중 앞에서 미국 국가를 연주하는 모습을 TV 뉴스를 통해 보며 나 또한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친구가 요즘 가장 열중하는 분야는 그림이다. 그림이라고 하면 흔히 타고난 재능을 먼저 떠올리지만, 친구는 정식으로 기초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연필 잡는 법부터 차근차근 익혔고, 지금은 수채화에 깊이 빠져 있다. 얼마 전 내가 공원에서 촬영한 짧은 동영상을 친구에게 보내준 적이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작은 새 한 마리가 앉아 지저귀는 평범한 장면이었다. 며칠 뒤 친구가 카카오톡에 그림 한 점을 올렸다. 동영상 속 한 순간이 수채화로 다시 태어나 있었다.
푸른 하늘과 늘어진 가지들, 그리고 조용히 앉아 있는 작은 새 한 마리. 단순히 풍경을 옮겨 놓은 그림이 아니었다. 자연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과 평온한 마음이 그림 속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림을 보는 순간 나는 적지 않게 놀랐다. ‘정말 잘 그렸구나.’
15년 전 눈길에서 여덟 번이나 넘어지던 그 친구가 이제는 붓을 들고 또 다른 산을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의 인생은 빼어난 재능 때문이 아니라, 삶에 임하는 특별한 자세로 인해 더 아름답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사업에 실패해도 다시 시작했고, 병으로 쓰러져도 다시 일어났다. 새로운 나라에 와서 새로운 삶을 개척했고, 은퇴 후에는 또 새로운 배움을 시작했다. 남들이 마침표를 찍는 나이에 그는 여전히 모르는 분야에 도전하며 계속해서 쉼표를 찍고 있다.
나는 지금도 그 친구를 생각할 때마다 15년 전 눈 덮인 산길이 떠오른다. 그때 친구는 여덟 번 넘어졌다. 그러나 여덟 번 넘어졌다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가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났다는 사실이 대단한 것이다.
어쩌면 내가 15년 전 칼럼 제목으로 썼던 ‘산정무한(山頂無限) 팔전구기(八顚九起)’는 그날 산길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친구의 인생을 설명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산 정상에 오르면 또 다른 산이 보인다. 인생도 그렇다. 끝났다고 생각한 곳에서 새로운 길이 시작된다. 친구는 지금 새로운 산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걸어가고 있다. 생일을 맞은 친구에게 다시 한번 축하를 보낸다. 그리고 15년 전 내가 했던 말을 오늘도 그대로 전한다. “물론이다. 너는 할 수 있다.”
타운뉴스 2026.6. 1632호 안창해 칼럼 발행인 안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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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문병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