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unity

나의 일기장 -14-
 
Notifications
Clear all

나의 일기장 -14-

1 Posts
1 Users
0 Reactions
1 Views
moonbyungk
(@moonbyungk)
Posts: 106
Admin
Topic starter
 

4293(1960).  1.   28   木   晴   고2

  설 기분 내자고 나, 정_, 이_, 준_, 구_ 이렇게 다섯이 우리집에서 화투를 했다. 갑오잡기에서 내가 한 백 원가량 잃고 구_은 한 삼백 환가량 잃고 둘다 땄다.  화투로 돈 내기는 처음 해 본다.  과연 묘미가 있었다. 아무리 십원 이십원이라 해도 역시 자꾸 잃을 때 기분이 좀 언짢고 자꾸 딸 때는 하늘에라도 올라 갈 듯 기뻤다.

준_이가 끝판에 가서 좀 기분 나쁘게 심통을 냈지만 대체로 유쾌하게 끝났다.  정_하고 이_은 방에서 같이 잤다.

 

  1. 1. 29.    금요일   청

주_의 누나한테 편지함.  보고싶다.  쌀롱 음악 감상실 레코드부에 취직하고 있다 한다.  파하고 이_이네 가 화투해서 또 100환 잃었다………

 

  1. 1. 30   토요일   청

  순이 천안에 내려 감.

오늘 저녁. 나는 그간 큰형에게 품었던 오해를 깨끗하게 풀었다.  아주머니의 말이나, 또는 어쩌다 본 진_누나 편지의 ‘책임추궁’ 이라는 말 때문에 형님을 비열한 인간으로 치부했던 나의 생각을 오늘 저녁에 형이 털어 놓음으로써 나는 속 시원하게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형을 잠시나마 오해했던 나!  자신을 깊이 책망한다.  악착스러운 진_ 누나의 증오에 찬 눈매가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허나 이는 모두 과거지사!  깨끗이 잊자. 잊자.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는 중에 나는 나에게 유익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동시에 형님은 어느 경쟁 마당에서나 두각을 나타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요컨대 나는 잡념을 버려야 한다는 게 형님의 지론이었고 또한 나는 나대로 깊이 아로새겨야 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4293(1960).  2.   1     월요일

  여섯 시 즈음해서 나는 겨우 ‘무아쌀롱’을 찾을 수 있었다.  주_이 누나이자 곧 나의 누나같은 “분_”누님이 취직하고 있는 곳인 이 음악 감상실을 나는 애써서 찾은 것이다.

가슴이 좀 울렁거렸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학생은 들어 가지 못하는 곳이라 한다.  허나 거침없이 들어갈 용기쯤은 있었다.  만났다.  정말!  몇 달 만에 만난 셈이다.  어쩌면!  보자마자 대번 알아볼 수 있었다.  반가웠다.  하여튼 반가웠다.  얼굴이 검었던 것이 좀 희어졌고 살도 좀 찐 듯싶다.  허나 그 또랑또랑한, 어찌 보면 얼음같이 차갑고 칼날같이 날카로운 그 음성과, 또 하나! 눈매만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레코드 판만 돌리고 있다 한다.  음악이 취미여서 종일토록 앉아 있어도 실증 나지 않는다 한다.  직장을 합리화해 보려는 의도에서 나온 말이 절대로 아닌 것을 나는 확실히 안다.  왜냐고?  그녀는 음악에 너무나 심취하고 또 그 방면에 깊어 있기 때문에. 

앉아 있는데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다.  염치없이 빨개지는 귀를 주체할 도리가 없다.  마침내 나는 누나와 그 곳을 나와 옆 다방에 들어가 이야길 했다.  그렇게 많던 말들이 일순간 사라지고 단지 초침 움직이는 게 안타울뿐 침묵은 계속된다.  이 침묵을 어떻게 깨트릴 수 있을까? 하고 나는 궁리한다. 쓸데없는 말도 지껄여 본다.  허나 무의미하다.  오 분만 이야기하고 헤어져야 옳았을 거다.  5분만!  그래야만 다음에 들를 수 있기 때문에!  한 시간가량 앉아 있었다.  초조한건 아니다.  어쩐지 시간이 막 흐르는 게 아깝다. 

헤어져 집에 돌아와 보니 작은형이 내 책을 또 가져 갔다.  일순간 기분이 확 불쾌 해진다.  배우는 책을 가져 가다니!  허나 다음 순간 나는 또 얼굴이 붉어짐을 금할 수 없다.  이렇게 나의 마음이 좁다니! 다 잊자.  형에게 그까짓 책 한 권 선물 못하라?  다른 애한테는 마냥 하면서!

 

작은 형으로 말미암아 나의 이기심 많음이나 참을성 없음이 여지없이 노출되고 만다.

 

4293(1960).   2.   2

  저녁에 정_가 우미관에 가자 하기에 같이 가 ‘여로’를 감상했다.  율브리너 주연이었다.

허나 마음 내키지 않은 채 본 것이라 그런지 집에 와서도 어쩐지 기분이 안 난다.

시간 보낸 것만 아깝다.

 

  1. 2. 5    金    고2

  마음은 초조해지기만 하고 실천은 되어 지질 않고…

나도 이제는 속절 없이 고등학교 삼학년이 되는 구나.  세월은 속이지 않는다.  눈 깜짝 하는 사이에 십년이 지나 버렸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허나 이건 비굴한 놈의 망상이다.  아니!  오히려 한 달이 몇 년으로 길어졌으면 좋겠다.  하루에 단어 한 개씩 만 외우고 수학문제 한 개씩 만 풀어도 입학 시험을 넉넉히 치룰 수 있게 세월이 늘어졌으면 좋겠다.  허나 이것 역시 비굴한 놈의 망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요사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버릇을 기르느라 나 자신 무척 애쓴다.  여덟시가 되어야 잠에서 깨든 것을 두시간 반이나 단축시켜 다섯시 반에 일어나기 시작한지 며칠이 되었다.  그 대신 전에 밤 세시, 네 시에 자든 걸 열 두시 정각에 자기로 했다.  하여튼 무슨 공부고 간에 12시 통금 사이렌만 불면 불을 딱 끄고 잠 자리에 들곤 했다.  사실 내가 일찍 일어나는 때는 고생하는 사람이 또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누나다.  날 깨워 주느라고 애쓰는 것이다.  기껏 깨우면 나는 잠결에 그만 듣기 싫은 소리를 ‘빽’ 지르곤 한다.  순간 나는 참 미안 해 지기 마련이다.  한 열흘만 계속하면 어느 정도 내가 알아서 깰 수 있겠지.  정 안되면 형한테 사발시계라도 사 달래서 귀 밑에 놓고 자야 되겠다고 굳게 다짐한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지금 고3 학생들이 연대에 약 스무 명 가서 열 댓 명 붙었다 한다. 서울대학에 80명이 응모한다고 한다.  한 40명은 붙을 게라.

“뭐 무더기로 들어 간다고 너도 어벌쩡 끼어 들 테지”하는 생각은 아예 버리라는 형님의 말씀, 그리고 정이돈 선생님 말씀이 다시금 떠 오른다.

하여튼 이제부터는 찬물에 항상 몸을 담그고 살아야 겠다.

수학 참고서는 엄상섭이 지은 “해석의 철저적 연구”를 이미 한번 보아 온 터이니 계속해서 보면 되겠고 삼위일체도 한 오분의 일가량 보았으니 계속해서 보면 된다.

하면 된다.  형님 말씀, “대학에 수석으로 붙겠다는 마음으로 공부해라” 하든 것이 생각난다.

그렇다. 수석 합격을 목표로 공부하자!

 

  1. 2. 6.    토요일

  대_이와 함께 대각사 룸비니 총회에 가 보았다.  불교 신도들이 모이는 곳이다.  경기고 애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상당히 진지하게 강의를 듣고 있었다.  큰 온돌방에 한 오 육십 명가량이 앉아서 강의를 듣고 있었다.  강의라기보다는 오히려 설법이라 함이 낳았을 거다.  그래!  설법이지.

어느 대학에 교수로 나가시는 분이라 한다.

집에 오면서 나는 또 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환멸에 사로 잡혀 버스 안에서도 줄곧 얼굴이 빨개졌다.

 

4293(1960).   2.   7    일요일

  새벽부터 목욕탕을 갖는데도 사람들이 꽉 차 있어 옷을 넣을 데가 모자랄 정도다.

보름동안 옷 속에 파 묻혀 갑갑해진 궁둥이를 비누질 몇 번을 해가며 말갛게 씻어 주었다.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씻어 주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더러운 부분’ 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욕탕을 갔다 오면 키스해 주고 싶도록 보들보들하게 된다.

국수가락 같이 밀리는 때를 얼른 얼른 물로 쓸어내리며, 혹시 누가 보면 어쩌나 하고 앞 뒤를 두리번거리고는 아주 섬세하게 닦는다. 비누로 몇 차례 씻는다.  옷 입고 나면 그 부분이 마구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이 쑤시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사정을 주지 않고 문지르게 마련이다.  벽 하나 사이에 두고 지금 저쪽에선 그 항상 꿈에 그리던 여자들의 아름다운 육체가 난무하는구나 생각 하니 염치없이 나의 밑엣것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려 한다.

욕탕 속에서 그런 류의 생각을 하는 건 확실히 금물이다.  아…암! 금물 이구 말구.

저녁에 주_이 찾아왔다.  주_은 여전히 실없이 웃기만 잘한다.

 

  1. 2. 11

  아침에 삼십초 지각했다.  첫 시간인 생물시간이 고병갑 선생님인데 선생님은 늘 10분가량 늦게 들어오신다.  그러니 지금 교실로 들어가면 절대로 지각이 아니다.  허나 나는 체육 선생한테 교문에서 붙들려 있다.  30초 늦었다고 30분 지각시키려는거디.  이때처럼 선생이 미운 적이 없다.

영어 시간에 나는 출석부 내 이름 난에 “/” 표가 그어져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지웠다.  허나 나는 종례시간에 바짝 떨었다.  들키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과히 유쾌하지 못하게 종례 시간을 보냈다.  공연히 지웠구나 하는 후회가 뒤통수를 수 없이 내리쳤다.

 

빠른 건 세월!  느린 건 결심!  불능은 실천!

무아 살롱의 누님을 찾아 가서 음악 감상을 하고 온 건 어제고 오늘은 일요일 지금 밤 세시다.  조금 전까지 은_이가 우는 통에 신경질이 나 책을 엎어 치기도 하고, 혀도 차 보고, 괴성도 내질러 보았는데, 이제는 그 잡아먹고 싶은 조그만 괴물이 쌔액쌕 잠들고 있기 때문에 너무나 조용하다. 이게 도대체 누가 준 금 덩어리 같이 고귀한데. 이런 시간이 앞으로 일년 만 계속된다면 오죽이나 좋으냐마는 셋방살이 하는 주제에 그런 것을 바랄 수는 없는 고로 그저 참고 참으면서 대성하는 그 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하니 모든 걸 참을 수 있는 정기가 넘쳐 흐르고, 이 또한 감회가 깊지 아닐손가?

 

  1. 2.   19

  저녁에 공부하고 있는데 작은 형이 왔다.

공부하고 있는데 부엌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온다.  순이하고 싸우는 소리다.  작은형이 순이 누이 한테 이년, 쌍년 하는 소리가 들린다. 창피하다.  나는 방에서 신문지를 요란하게 흔들며 집 주인 은_이 엄마가 저 추한 말들을 못 듣게 하려고 애썼다.

작은형이 나를 나오라 소리 지른다.  옷을 내 주지 않았다는 거다.

 

  1. 2. 20

  조병옥 박사님의 시신이 귀국하는 날이다.  이제 정권이 바뀔 가망은 거의, 아니 완전히 없다.  그 지긋지긋한 이승만 대통령이 또 당선되는 거다.  혁신!  혁신이 있어야 한다. 투표일자 닷새를 앞 두고 돌아가신 신익희 선생님이나, 선거일자 한 달을 앞 두고 천만리 타국에서 그 혼령을 하늘에 띄어 버리신 조병옥 박사나 그 무슨 사연이 있는 듯하다.

언젠가 이런 말을 들었다.  “거, 이대통령은 무슨 마술을 쓰는 모냥이여---. 아 신익히도 죽었지, 조병옥도 죽었지, 김구도 죽었지--- 하여튼 이대통령하고 맞서는 사람은 다 죽어만 가는 거여!”

그러나 정권이 바뀌면 대 변동이 일어날 게다.  경찰이니 관공서니 할 것 없이 다 우왕좌왕!  그저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헌 그릇을 때우랴, 헌 옷을 꾀메랴! 세상이 휙휙 돌며 모로 비틀 가로로 비틀 혼잡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공상도 조병옥 박사가 돌아 가심으로 해서 한 낱 수포로 되어 버리고 말다니!  하기는 조병옥 박사가 살아 계셨다 해도 대통령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었으니 원통하다.  나의 좁은 소견인지는 모르나 울분이 솟지 않을 수 없다.  조 박사께서 세상을 떠나 슬퍼하는 수많은 백성…중 하나가 여기 이 방에도 있다!

  저녁에 아버님께서 오셨다.  반가웠다.  지금 쓰고 있는 이 파카 만년필을 주셨다.  어머님은 이제 몸이 편하다 하신다.

 

4293(1960).  2.   22    월요일

  치과엘 갔다.  아래 어금니를 은으로 하는데 무려 4000환이 들었다.  오늘로써 이제 완전히 치료는 끝이 난다.  의사한테 나는 마음으로 부터 감사했다.  돈을 많이 받는 것 같아서 좀 기분 나쁘긴 했으나 하여튼 내 육체의 일부분을 고쳐 준 사람임엔 틀림없다. 오늘서야 나는 내 이중 세 개가 충치인 것을 알았다.  충치라면 고쳐야 되지 않겠는가?  의사 말에는 세 개 고치는데 약 육천환가량이 든다 한다.  하여튼 고치기는 고쳐야 된다.  ‘이는 곧 생명’…요사이 치과에 다니면서 만들어 낸 내 표어다.

  복잡한 기계가 돌아 가며 내 이를 마구 빠각 빠각 깎아 낼 때 마다 전율을 느꼈다.  그 감촉, 골이 울리는 그 미지근한 감촉!  지금도 자꾸 이를 가는 것 같아 신맛부터 난다.

뼈를 깎는 소리 …. 마치 백묵이 칠판 위를 미끄러지면서 나는 괴상한 소리 … 보다도 더 날카롭고 음흉한 … 사람 잡는 … 그런 소리다.

집에 와 보니 … 와 보니 …. 와 보니 …. 아무것도 없다.

그 동안 한쪽만 쓰다가 밥을 양쪽으로 씹어 먹는데 마치 오랜만에 씹어 보는 느낌이다.

오늘 낮에 혜_가 다녀 갔다 한다.

 

  나는 요사이 갑자기 나 자신에 대한 회의가 크다.  나는 도대체 뭐냐?  문병길이라는 인간이 도대체 무엇 이길래 하루 세끼 밥 먹고 학교에 가 아는 체 위선을 해야 하며 집에 와서는 신경질을 부리고 앙탈을 하느냐?  나라는 인간이 뭐 그리 잘 난게 있어 학교에서는 뭣 좀 안답시고 떠들며…. 나라는 인간이 뭐 잘 난게 있어 집에서도 아주 많이 아는 체 떠 벌리는 것이냐? … 정말, 진실로 나는 바닷가 모래 중 한 알에 지나지 않으며 무한한 우주의 한 점에 불과하고 저 바다물의 한 컵에 지나지 못한다.  그 사소한 작은 존재가 …. 그 미물이 …. 그래도 사람이라고, 여자를 생각하고, 못 할 짓까지 하며, 또 인간 이랍시고 회개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남한테 자기를 심각하게 털어 놓고 감명받기 기대하는 나라는인간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참고서 몇 개 가지고 있다고 마치 남 보다 뛰어난 특출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떠 벌이는 나 …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닌가?  그래도 인간이라고, 어떤 때는 점잖은데 해야 되고 또 위선의 탈을 쓰고 인간 저하의 구렁텅이로도 거침없이 들어 가는 나!  도대체 철학이라는 게, 시라는 게, 문학이라는 게, 인생관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놈이, 그 근본을 캐 낸 듯 떠들어 대는 나!  나라는 인간이 도대체 뭐 잘나서 이렇게 떠든단 말인가? 나는 도대체 어떠한 인간이기에 도리어 위선 자체를 무기 삼고 있는 것인가?  24시간을 위선의 탈 속에서, 그 본성을 들어 내며, 눈 감고 아옹 식의 수박 겉 핥기와 냄새 좆는 동물적 후각으로 식별하고 아는 체하는 나!  나는 도대체 어떠한 인간인가?

 

아침에 일어나면 시끄러운 남의 소리에는 화를 내면서도 곧잘 자신은 떠들며 소란 피우는 나!  이불을 편한 대로 질겅질겅 밟고 다니면서도 순이 보고는 밟지 말라고 소리치는 나!  좀 순하고 단순한 이_에게 내가 마치 뭐나 되게 아는 놈처럼 떠 벌이는 나! 집에서 공부한 건 변변히 없으면서 학교에서는 노는 시간마다 책상에만 붙어 있는 나!  고등학교 3학년이 된다는 그것 하나로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만 생각 하려는 나!   

 

몇 십만, 몇 백만이 될지 모르는 학생가운데 나는 단지 한 티끌!  이 몸이 아무리 잘난 체해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  자중하며 절제하는 생활만이 나를 개선하는 유일한 방법 일 뿐!                                         

 

1960   2   24    수     맑음

학교에 다녀오니 외사촌 혜_가 왔다.  오늘이 졸업식이데 아무도 와 주질 않아

아주 쓸쓸하게 보냈다고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그런 줄 알았으면 가 줄 걸 이제 조것도 벌써 고등학교 학생이 되는구나 생각 하니 어쩐지 세월이 불공평하게 빠른 것 같다. 

일곱시쯤 되어 김경한 선생님 뵈러 밖에 나가는데 혜_도 같이 나가게 되었다.  같이 나가게 된 김에 사진이나 찍자고 사진관에 데리고 들어 갔다. ‘마치 연애하는 줄 알겠네’ 혜_가 한 소리다. 이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기분이 풀썩 나빠옴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하여튼 이미 사진관에 발을 들여 놓았으니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의자에 앉아 폼을 고치는데도 연상 수집은 체하며 입을 손으로 가리고 야단이다. 제기랄! 이것도 여자라고 이런 절차를 밟고서야 비로서 마그네슘의 강열한 빛을 안면에 받고자, 그 반반한 얼굴을 쳐든다.

아니! 연애하는 줄 알겠다고? 나는 이 소리를 혜_로부터 듣는 순간 어쩐지 무어 하날 잃어버리고 만 느낌이다. 이 소리를 듣고 나는 어째서 섭섭해진 것일까?  혜_를 나는 지금까지 철부지로 알아 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애로.   

 

혜자를 보낸 후 김경한 선생님 댁을 아무리 찾아도 결국 찾지 못하고 말았다.

 

(단기4293, 서기1960)   2   25   목   구름 비   고2

아침부터 부슬비가 내리는 걸 보니 마치 조박사님의 영결을 하늘마저 슬퍼 하는 듯하다.

조박사에 대해 나는 모른다. 무턱대고 슬퍼하긴 싫다. 나는 단지 슬퍼 하는 사람을 구경하며 같이 동감할 뿐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해산했는데 서울고교 학생들이 많이 들어왔다.   고2

아버님께서 상경하셨다.  사발시계를 사 주셨다

 

2   26    금   맑음  구름

큰형님이 만년필을 사 주셨다.   

 

1960  2  28

아침에 주_이 왔다 가고, 나는 종만형을 찾아가 함께 우미관에 들어 갔으나 영화는 하나도 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밀리느라 땀만 모질게 뺏다. 어찌나 기분이 나쁜지 모르겠다.  오후엔 원_이와 이_이 찾아왔다. 그들을 바래다주는 길에 임_이네를 들렸다.

 

(단기4293, 서기1960)   2  29   월    고2

오늘은 상급반 고 3들의 졸업식!

생 후 처음 나는 섭섭함을 느껴 보았다.  울컥 치미는 감정으로는 마구 눈물이 떨어지려는 것을 체면 때문에 참았다.  왜 이렇게도 슬퍼 지는가?  졸업식장에서 우는 건 참을성 없는 여자이고 그 눈물은 바닷가 한 컵의 물만도 못하다고 생각하던 내 자신이 이제 송사와 답사를 듣고, 그리고 어제까지 보아 오던 상급생이 졸업장을 받고 속속 퇴장하는 것을 보니 어쩐지 인생은 흐르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졸업생이 앉은 저 자리에 나도 일년 후면 앉게 된다.  저들은 지금 떠나는 회포에 가슴을 눌리고 있으리라.

윤성헌 형은 우등상에 노규남 주교상까지 받았다.

 

  1. 3. 8

  오래 만에 펼쳐 든 일기장이다.  금이 간 나의 생활 기록 인가?

며칠 간 허옇게 빈 일기장 그 자체가 나의 생활을 설명해 주는 듯 하다.  몸은 책상 머리에 붙어 있으면서도 정신은 이미 허공에 떠 있은 며칠 간의 마음 자리!  무질서한 나의 생활은 일기를 쓸 마음의 안정도 없는 채 매일 밤과 낮을 보내곤 했다.

오늘 이_이 온다 했는데 아마 오지 않으려는 가 보다

 

 

(단기4293, 서기1960).   3.   14   월요일     고2

 걱정이 되어 못 견디겠다.  어저께 밤을 새웠더니 골치가 띵! 하고 도무지 머리가 안 돌아 수학 시험지를 겨우 겨우 채웠는데 두 문제나 틀렸다.

 

  1. 3. 16   수요일

  친구를 잃은 기분은 확실히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걷는 기분이다.  허나 친구 아닌, 단지 얼굴과 이름만 아는 그런 자를 잃게 되면 시원하면서도 영원히 화합치 못 할 적이 되고 만다.

오늘 나는 생전 처음으로 동급생으로부터 뭇매를 당했다.  얼치! 그렇다!  얼치다!  이름이 뭐더라? 생각이 안 난다. 시험 끝나 기분이 좋았던 내 얼굴엔 지금 퉁퉁 부어오른 한쪽 눈만 있다. 

 

이 부은 눈!  집에 와서는 실수해서 다쳤다고 했다.  속였다.  부끄러워서였다.  나를 때린 이유는 내가 저보고 깡패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말 한적이 없다.  단지 그를 실없는 놈으로 인정하고 상대해 주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잘못했다고 빌지 않았는가!  뭐가? 뭐가 잘못했다는 말이냐?  단지! 주먹이 무서워서!  그 주먹이!  그래서 나는 비겁하게도 빌었다.  제발 때리지 말아 달라고!  아! 그때의 나의 꼴은 어떻게 보였을까?

홧김에 영화나 보려고 대한극장에 갔더니 할인을 해 주지 않아 창피만 당하고 경남극장에 가 ‘개척자’를 보았다.

 

  1. 3. 18   금요일     고2

  아줌마가 학교로 찾아왔다.   

 

  1. 3. 19.   토요일

  일기에 손을 댄지도 오래다.  이것이 그대로 내 생활을 비추는 거울이라면 이만큼 나의 생활은 흐트러져 있음의 반영이다.

오늘 나는 오랜만에 만_ 형님 집을 찾아가 보았다.  집은 꽤 큰데 좀 떠들썩 했다.  저녁 늦게야 돌아왔다.

 

(단기4293, 서기1960).  3.    20   고2

  이침(?)에 깨어 보니 12시가 넘었다.  내가 왜 이리 게으른가?

요사인 정말 심심하다. 할 것이 없다. 그대로 공백의 상태다. 주_이 찾아와 놀다 가다.

 

  1. 3. 21   월요일

  아침에 목욕하고 종만이 형에게 가 머리 깎고 임_네서 놀다가 집에 오니 7시!  지금 책상에 붙어 앉는 참이다!

 

  1. 3. 27   일요일     고2

  또! 일기에 손을 안 댄지 며칠이 지났다.  요사이는 봄방학이다.  갑갑한 봄에 더욱 답답한 방학!  사람은 시달려야 되는 동물이다. 시달려야 정상궤도를 찾을 수 있는 동물이다.  나는 지금 그 궤도를 잃고 있다.  그 옆을 마구 빠저 나가고 있다.  종일 아랫목에서 뒹굴다 보면 하루 해가 꿀 먹은 벙어리 모양 꿀꺽 지나가 버리고 만다.  지나가는 날을 탓할 수는 없다!  하물며 옆방의 어린애가 운다고 탓하는 것은 도무지 모순이리라.  나는 누구를 만나나 말한다. ‘어휴, 거 옆 방에 어린애가 너무 울어대서 공부를 못 하겠어!’ 라고.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처럼 파렴치한 위선이 없고 이처럼 자기 변명이 없다.  오늘 오후론 내내 조용했다.  그 애기가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한 것이 하나도 없다.  이불을 쓴 채 소설을 조금 읽다 잠에 빠진 것 밖에는.  이런데도 내 입에서는 ‘거, 옆방에서 나팔부는 통에 공부 한자 못하겠어!’ 하는 염치없는 말이 튀어나오곤 한다.  이 망할 놈의 입!  나는 거짓말 잘 하는 놈이다.  아마 나는 영영 이 근성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위선을 벗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 위선 때문에 내 인생을 망칠 어떤 장애물을 만들고 말 것이다!   이 위선의 옷을 벗어야 한다.  최소한 그것을 회피하려 노력해야 한다.  인식하고 있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밖에 나가면 자기 자신의 위치에 대해 가혹하게 멸시하는 나 자신도 여전히 난 체하는 것은 역시 내 수양과 인격이 부족함 이리라.  나는 잘났어!  누구 못지 않게 잘났어!  누구에게도 떨어지지 않아!  이렇게 자위해온 나!  이렇게 후한 마음으로 자기를 평가하는 사람에게 으레 따르는 자만심, 거만, 시기심 들이 나에게 없으란 법은 없다.  이런 사람에게 자기 보다 나은 어떤 것을 발견했을 때의 자아비판이란 처참하게 가혹한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은 세상에서 제일 못났고 또 보이는 사람마다 자기 보다는 잘난 것으로만 보여 그만 자기를 학대하고 만다. 

아니!  달밤에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누가 슬프게 하지도 않았는데 눈물을 쏟은 적도 있다.  이리 저리 옮겨 다니던 하숙방에서 느닷없이 고향 친구들 생각하며 눈물을 짠 적도 있다.  허나 이것은 다 지나간 과거 에피소드다.  사춘기면 누구나 당해보는 감정이다.  어쩔 수 없는 사춘기를 나 또한 맞아야 했기에 그런 감정을 가져 본 것이다. 

나는 흔히 말 했다.  ‘하숙을 너무 자주 옮겨서 공부하질 못 했어’ 라고. 허나 이것도 위선이었다.  하숙을 자주 옮긴 것은 부모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분명히 ‘나’ 때문이었다.  참을성 없고 옹졸한 ‘내 성격’ 탓이었다.  이제 대학문이 훤히 들어다 보이는 마당에서 나는 각성이 필요하다.  나의 지난날은 철부지였다.  절대로 각성이 필요한 것이다.  ‘하숙을 옮기느라고 공부할 여가가 있어야지’ 하는 내 변명에는 어느 누군가가 ‘고학을 하며 공부한 보람 있어 서울대학에 수석으로 합격!’ 이라는 신문 기사가 무색하다.  이제 나는 혁신해야 한다.  돌아다니면서 뿌려 놓은 나의 오만성, 되지 못한 자존심, 지나친 허위, 경솔함 등을 내 몸에서부터 떨구어야 한다.  아니 그게 불가능 하면 떼치려고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 

자신을 특별한 인간으로 취급해 오던 나도 별수 없이 여자 생각을 수 없이 했다.  않겠단 결심도 수없이 하고 그 결심 자체를 후회한 적도 수 없이 많다.  그러면서도 내가 좀 수준급 인간이라고?  절대로 아니다.

 

(단기4293, 서기1960).   4.   3     고2

  만원 버스 안에서 나는 언제나 하는 버릇이 있다.  뒤꿈치를 조금이라도 들고 서는 것이었다.  키 작은 놈의 본성!  이 더러운 위선을 나는 버려야 되겠다.  이 되지 못한 놈의 근성을 나는 버려야 되겠다.  운동화 보다 구두가 오래 가니 사 달라는 건 다 위선이다.  키가 좀 커지기 위해서 나는 필사적으로 조른 것이다.  버스 안에서만 아니다.  대로를 가다가 문득 쇼 윈도우 유리창 저쪽에서 오는 나의 모습이 눈이 비추이면 나는 곧 외면해 버리고 만다.   균형 없는 체구! 위는 떡 벌어진 게 어른을 뺨 치나 아래 다리는 내려 가다 잘린 것처럼 짧다.  키 큰 사람만 보면 무조건 부러워하게 되는 나의 비굴하고 졸렬한 마음을 없애야 한다.  허나 사람의 본능이란 어찌할 수 없는 것인가 보다.   

내 예감으로는 도저히 나의 이런 낮은 실력 가지고 대학에 들어가지 못할 것 같다.  정말로 들어가지 못할 것 같다.   

하여튼 해 보는 거야!  죽든 살든 해 보고 볼 문제야. 뭐 누군 지금부터 대학 합격할 자신을 갖고서 하는 건가?  다 떨면서 하는 것이지.

옥강희선생님 말이 떠 오른다. ‘너 일년간 죽어야 된다!’  그 말씀 옳은 말씀이다.  일년간 죽어야 한다.  일년간 죽어야 한다.  자신을 죽여야 한다.  오직 불덩이 같은 반성과 회오만이 나를 인도해 줄 것이다.

 

 

 

 

 

 

 

  1. 4. 4   청   고2

버스에 오르자 마침 빈 자리가 하나 있어 털썩 앉았다.  새벽에 나가는 기분이란 상쾌하다.  아침 6시!  종로 바닥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 이 한적한 도시, 이 깨끗한 거리. 그러나 앞으로 두시간도 못되어 이곳은 사람으로 미어터지게 마련이다.  차는 미친 듯 달리고 사람들은 서로 부딪지 않으려고 눈알을 부라리며 경주할 것이다. 문득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자리가 푹 꺼져 버릴 것만 같다.  그리하여 하수구를 통해 한강 물로 떠 밀릴 것만 같다.  이 조용한 거리가 얼마나 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을까?

아스팔트는 무슨 팔자를 타고 났기에 모든 이의 밑만 보며 산단 말인가?  염천의 펄펄 끓는 날씨에도 가끔 물자동차가 목욕시켜줄 뿐 조용하기 그지없는 이 아스팔트도 지금은 아직 잠에서 깨 있지 않은 것 같다.

 

  1. 4. 5    청   고2

  내 자리 앞에 웬 스커트 차림의 여자가 와서 선다.  흔들리는 대로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있던 나는 모자 차양 너머로 살그머니 위를 훑어보았다.  어? 여학생이다.  다른데도 자리(물론 앉을 자리는 없고 서 있을 자리)가 있는데 유독 내 앞에 와서 서다니!  여학생 치고 그리 추물은 아니나 잘 생겨서 두 번 보고 싶은 그런 상은 아니다.  얼굴을 정면으로 하니 보이는 게 바로 정통 그곳이다.  모자 채양으로 나의 눈이 가리워져 있어 그 여학생은 내가 자기의 그곳을 보는지 모르리다.  자세히 보니 속 팬티 자국이 밖으로 완연히 나타나 있다.  저 갈라진 틈, 그 틈에 바로 그것이 위치하고 있겠지?  얼굴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고개를 약간 돌려 위 주머니까지 시선을 가져 갔다.  엄연히 ‘고’자가 달려 있다. 흔들리는 차 속에서 그곳을 바라보며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자니 어느새 내 것은 비대 해지고 딱딱 해져 그만 나도 모르게 삼위일체 영문법 책으로 쓱 그곳을 가려 버렸다.  그리고선 공연히 계면쩍어 사방을 휘 둘러본 후 위를 쳐다보니 그 계집은 아랑 곳 없다는 듯 인상만 팍팍 쓰고 있다.

 

(단기4293, 서기1960).   4.   8   금   고2

  지금은 밤 한시, 째깍 거리는 시계 소리가 정적을 간지럽게 할 뿐 사방은 그지없이 조용하다.  달이 너무 밝아 나는 지금 불을 끄고 문을 열어 놓은 채 달 빛을 받아가며 이 일기를 쓰고 있다.  달을 한참 바라 보자니 별의별 생각이 다 나 문득 이 별난 기분을 기록으로 남겨 두고 싶어 일기장을 펴 들었다.  슈베르트가 월광곡을 작곡했을 때의 기분이 아마 이랬으리라. 지금 어느 누가 나처럼 이 달빛 아래서 로맨틱한 꿈을 그리고 있을까?  지금의 이 심정!  아 어찌 표현해야 옳으냐?

문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칼처럼 차다.  감기 들까 겁난다.  그러나 지금은 감기 드는 게 문제가 아니다.  저 달빛이, 저 포근한 달빛이 지금 이렇게 내 몸을 감싸 주는데 감기란 알토당도 않은 말!  이 달밤 아래서 나와 똑같이 이런 자세로…이불을 푹 뒤집어쓴 자세로 …… 달빛을 음미하는 여성이라도 있다면, 이는 떨쳐 버릴 수 없는 인연이겠다. 영_가 지금 그러고 있을까? 대학 들어가지 못한 서러움을 삼켜가며 달밤 아래 눈물이라도 흘리고 있는 게 아닐까?  저 빤히 보이는 가련한 달에 지구에서 쏘아 올린 로켓이 도달했다니 꿈만 같다.  저 먼 곳을 인간이 만든 기계가 두드렸고, 장차는 인간이 도착할 계획이라 하니 이건 도대체가 신비에의 도전이다.

  아 춥다.  그만 문을 닫고 자야겠다.  내일 여섯시에 학관에 나가려면.

 

 

 

(단기4293, 서기1960).   4.   19   화    고3

  오늘 일을 여기 좁은 노트에 적기에는 너무나도 벅차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무작정 따라간 셈이다. 뭐 국가의 운명이 어쩌고 나라가 어떻게 되고 마산 사건이 어떻고 김수열 군의 참혹한 시체가 어떻고... 이리해서 내가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데모한 건 아니다.  교정에서 스크랩을 짜는데 무작정 끼어 교문을 나섰을 뿐이다. 

 

경찰의 방망이가 무서웠지만 혜화동 로터리에서 효자동 경무대 앞까지는 별 사고 없이 나아 갔다.

 

나는 보았다.  그 피를!  나는 보았다. 그 죽엄을!.  나는 보았다. 경찰의 만행을!  사람을 향해 발포하는 무자비한 인간들!  그들은 피고, 인정도 없는 인간이라는 말인가?  그들도 정녕 대한민국에서 태어났고 또 누릉지를 같이 긁어 먹는 동족 일진데, 잔악한 이 들이여, 어찌하여 자기민족에게, 연약한 학생에게 총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은 이런 때 은혜를 베풀지, 어찌 방관만 하고 있는지, 최루탄 때문에 비오듯 쏟아지는 눈물이 아니라도 우리는 우리 동료, 우리 동포가 쓸어지는 참상에 엉엉 울음이 나왔다.  두 시간 가량 경무대 앞 아스팔트에 엎드려 있으면서 나는 조용히 이 데모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확실히 ‘군중’이라는 하나의 집단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힘이 강하다는 것을 나는 새삼 인식했다.

 

그러나 저 옆에서 문교부 청사를 향해 돌을 던지는 저 폭도들은 도대체 무엇 들인가?  그들은 민주주의를 모르는 무식자 들이다.  이성이 올바르게 박힌 학생들은 이렇게 정정당당히 평화적으로 길에 앉아 연좌 데모를 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경찰은 발포했다.  이렇게 비 폭력으로 웅변하는 우리에게 경찰은 투석보다도 더 폭도화 한 총질을 했다.  문교부청사에 투석하는 무리들을 나무랄 순 없다.  저기 동족 에게 발포하는 더 무식한 경찰이 있지 않는가?  신무기를 들고 연약한 자기 민족을 꿰둟는 저 무식꾼들!  저들은 지금 총을 쏘면서 쾌감을 느끼고 있는 것인가?  아 저주받을 인간들!

 

모두 죽어야 된다.

 

나는 우리 학교에서 다섯은 죽었으리라 생각한다.  바로 우리학교 학생들 30m 전방에서 약 7분간 계속적인 실탄 사격이 있었으니 말이다.  발포가 중지된 후 골목에 피신 한 채 우리는 수없이 들리 워 오는 부상자와 사망자를 보았다.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땅에 띄엄띄엄 엉킨 시뻘건 핏자국!  영영 잊지 않으리. 이 참상을!  나는 발로 그 피를 문질러 보기도 했다.

 

나라를 위해 바친 고귀한 피라지만 역시 가 버리면 허무한 것! 나는 우리 대열에서 빠져나왔다.  혼자 있고 싶어서였다.  단! 혼자서!  체신부에서 국회의사당 앞까지 길은 인파로 꽉 찼다.  중앙청 쪽에선 여전히 사상자가 실려 나오고 어떤 청년은 피투성이 잠바를 펼쳐 들고 ‘사람이 죽었다!  경찰은 사람 죽인다.  쳐들어 가자!’  하며 피 나게 부르짖고 있었다. 

 

혁명!  말 그대로 혁명이었다.  부녀자들 있는 곳을 지나치게 되었다.  ‘아 그 경찰 놈들은 제 새끼들도 없나?! 원 빌어먹어 고꾸라져 되질 놈의 새끼들!’ 하며 욕설을 퍼 붓는 부인도 있었다. 

 

광화문 네거리가 사람으로 꽉 찼다.  광화문 파출소 주위에는 경찰이 삼엄하게 지켜서 있고 십 미터가량 떨어져 있는 데모 군중들이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은 대결! 대결이었다.  이윽고 돌 하나가 날아가 유리창을 깼다.  곧 이어 유리창이 모두 부서졌다.  경찰들은 뒤로 슬금슬금 빼더니 곧 사라지고 말았다.

IMG 7937

 
Posted : 26/09/2026 5:02 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