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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푸셔’ 거부한 주한미국대사
‘쿠키 푸셔(cookie pusher)’라는 평범한 단어가 세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2007년, 이라크전이 끝날 무렵이다.
당시 국무부가 외교관들을 바그다드 주재 미국대사관으로 발령하려 하자 외교관들 사이에서집단적인 반발이 터져 나왔다. “이라크 근무 명령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라는 격한 반응이었다. 곳곳에서 테러가 벌어지던 당시 이라크는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가야 하는 ‘험지’였다.
무려 300여 명의 외교관이 모여 정부 방침을성토했다. “제 기능을 못할 바에는 차라리 대사관 문을 닫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를 못마땅하게 바라본 것은 이라크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들이었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그린존(Green Zone)’의 현대식 건물 안에서 에어콘 빵빵 틀어놓고 서류나 뒤적이며 근무하는주제에 근무를 기피해?
군인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기껏 하는 일이 ‘쿠키 푸셔’와다를 게 뭐냐.” 언론도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외교관들을 비꼬는 이 말이 당시 유행어처럼 번졌다.
‘쿠키 푸셔’는 외교관을 빗대어 부르는 은어다. 외교관들이 주재국의 일반 시민들과 직접 만나고 현장을 누비기보다는 상류층 인사들과 파티를 열고, 그 자리에서 “이 쿠키 맛있네요”라며옆 사람에게 과자를 권하는 모습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국민과의 스킨십은 외면한 채 고급 파티에 참석해 사교나 즐기는 외교관을 조롱하는 표현인셈이다. 그래서 ‘쿠키 푸셔’는 단순한 별명이아니라 외교관의 무사안일과 특권의식을 비꼬는 멸칭에 가깝다.
그런데 요즘 미국 대사들 가운데 미셸 스틸만큼 화제를 몰고 다니는 인물도 드물성 싶다.
지난 5월 초, 상원 인준을 보름여 앞둔 시점에LA의 한 저택에서 미셸 스틸 주한 미국대사 지명자를 위한 작은 모임이 열렸다. 참석자는 30여명 남짓. 대부분 미셸 스틸의 연방하원의원시절 후원자들이었다. 한국에서 온 김종섭 총동창회장을 비롯해 필자를 포함한 전·현직 언론계 동문들도 자리를 함께했다.
이날 초청 대상은 하기환(공대 66) 박사가 직접 선정했다. 민주당 성향인 자신이 공화당원인 미셸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인간적인 매력 때문이라며 특유의 입담을 과시했다.
“대사 지명자가 벌써부터 ‘극우 성향이다’라는등 부정적인 말이 많이 나돌고 있다. 한국에 가서는 조용히 입 다물고 있다가 돌아오세요.” 하 동문의 우스개에 폭소가 터졌다.
미셸도 곧바로 받아쳤다. “그래서 사실은 인도네시아를 지망하려고도 했어요. 쉬었다 오려고요.”
당시로서는 ‘천기누설’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미셸의 설명에 따르면 백악관에서 자신을 불러지도를 펼쳐놓고는 한국을 포함한 20여 개 나라를 가리키며 “가고 싶은 데를 골라보라”고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선택한 곳이 바로 그가태어나 자란 대한민국이었다.
그날 만난 미셸의 모습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화장은커녕 립스틱조차 바르지 않았다. 꾸밈없는 ‘아줌마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편안하게 느낀다. 집안에는 김치찌개 냄새가 배어 있을 만큼털털하고 스스럼없는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부임하면 대사관저를 개방하겠으니 언제든 놀러 오라고 했다. 다만 자신이 쓸 수 있는판공비가 제한돼 있어 경비는 각자 부담이라는농담까지 곁들였다.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졌다.
미국 대통령들은 전통적으로 일본·중국·러시아 등 주요국 대사에는 자신의 측근이나 정치적 인사를 기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한국주재 대사는 주로 국무부 출신 외교관이 맡아왔다. 이번에는 그 오랜 관행이 깨진 셈이다.
그래서인지 미셸 스틸 대사는 ‘쿠키 푸셔’가 되기를 거부하는 모양새다. 부임 직후부터 그는대사관 담장 안에 머무르지 않고 ‘거리 행보’를시작했다. 마치 국회의원이 지역구 관리하듯시장을 찾아가 어묵과 떡볶이를 맛있게 먹으며상인들과 손을 맞잡았다. 화려한 외교 의전보다 서민들의 삶 속으로 먼저 들어간 것이다.
얼마 전 남가주의 한 동문은 서울 영락교회에서 미셸 대사와 함께 예배를 드렸다며 무척 신기해했다. 그는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등산반 카톡방에 올렸다.
사진 속 미셸 대사는 역시 화장기 없는 수수한모습이었다. 눈에 띄는 경호원도 없이 교인들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앉았다.
외교는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다. 거창한 외교 문서나 화려한 만찬보다 때로는 따뜻한 악수 한 번, 시장 상인의 손을 잡는 일,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조용히 앉아 함께 예배드리는 일이 더 깊은 메시지를 전할 수도 있다.
미셸 스틸 대사가 보여주는 소탈한 행보가 단순한 ‘스타일’에 그치지 않고, 한미 양국 국민과 정부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새로운 외교로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모습만 놓고 보면 그는 ‘쿠키 푸셔’가 되기에는 너무 바쁘게 거리를 누비고 있는 것 같다.
서울대 미주 동창회보 2026 9월호
박용필의 미국인 이야기.
편집고문 박용필 칼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