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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총장은 아무리 학사 일정이 바쁘더라도 해마다 한 번은 반드시 로스앤젤레스를 찾는다.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남가주에 거주하는 기부 동문들과의 만남이다. 대학을 묵묵히 후원해 온 선배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학교의 미래를 함께 이야기하는 자리다. 남가주 총동창회 회장과 임원들도 이 오찬에 초청받는다.
수년간 여러 차례 참석했지만,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오찬은 5년 전의 한 장면이다.
사회자가 한 동문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선배님께서 오래오래 사셔야 서울대에 더 많은 돈이 들어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약속해 주세요. 오래 건강하게 사시겠다고."
순간 좌중은 웃음바다가 됐다. 엄숙한 분위기로 진행되던 오찬장이 한순간 따뜻한 웃음으로 가득 찼고,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날의 주인공은 이창신(법대 57) 동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평생 일궈온 재산을 서울대학교에 유증했다. 부부가 모두 세상을 떠난 뒤 부동산을 처분해 전체의 40%를 서울대학교에 기부하도록 이미 법적 절차까지 마쳐 놓았다. 당시 서울대 몫은 약 100만 달러로 추산됐다. 사회자의 농담은 "오래 사실수록 부동산 가치도 올라 학교에 더 큰 선물이 될 것"이라는 뜻을 재치 있게 표현한 것이었다.
총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선배님,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건네자, 그는 손을 내저으며 수줍게 웃었다. "별일도 아닌데…." 그 한마디에는 평생을 살아온 그의 품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행사가 끝난 뒤 필자는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표정부터 달라졌다. "기사는 절대 쓰지 말아 주세요." 몇 번이나 거듭 당부했다.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칭찬도, 박수도, 명예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기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조용히 묻혀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 지병이 악화된 이 동문이 끝내세상을 떠난 것이다.
유홍림 총장은 직접 장례식장에 조화를 보내며 고인의 마지막 길을 애도했다. 유족들 역시 고인의 뜻이라며 조의금을 정중히 사양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남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그의 삶의 방식은 변함이 없었다.
미국 사회에는 '기빙 플레지(Giving Pledge)'라는 아름다운 약속이 있다. 생전에 또는 사후에 자신의 재산 절반 이상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선언하는 자발적인 기부 운동이다.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가 시작했고, 일론 머스크, 마크 저커버그, 오프라 윈프리 등 세계적인 부호들이 참여해 왔다. 특히 워런 버핏은 자신의 거의 모든 재산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말 그대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는 '공수래공수거'의 철학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기빙 플레지는 어디까지나 도덕적 약속이다. 법적 구속력은 없다.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철회할 수도 있다.
반면 이창신 동문의 결심은 달랐다. 이미 10여 년 전 변호사를 통해 유증 계약서를 작성했고, 공증까지 마쳤다. 부부가 세상을 떠나면 약속한 대로 자동 집행되도록 모든 절차를 끝냈다. 기부를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담보로 약속을 완성해 놓은 것이다.
누군가는 그의 재산이 세계 최고 부호들의 재산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부의 가치는 액수로만 측정되지 않는다.
자신의 전 재산이 아니라, 자신의 전 생애를 담아 내놓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큰 기부이기 때문이다.
이창신 동문의 재산은 일론 머스크의 몇백만 분의 1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기부가 지닌 숭고한 의미와 울림은 결코 작지 않다. 오히려 수백 배, 수천 배 더 깊은 감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름을 남기기 위해 기부한 사람이 아니라, 이름조차 남기지 않으려 했던 사람. 그래서 그의 마지막 선물은 더욱 아름답다.
서울대학교는 훗날 그의 유산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오래 기억해야 할 것은 그의 재산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다.
"별일도 아닌데…."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한 사람의 겸손한 한마디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큰 울림으로 남는다.
서울대 미주회보. 2026.8월호
미국인 이야기 <편집고문 박용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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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문병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