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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기장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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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기장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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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byungk
(@moonbyun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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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4293, 서기1960).  4.   25     월    고3

  시골 내려 갔다.  영_를 만나 보았다.  예뻣다.  어른이 다 됐다.

내가 어쩐지 어린애 취급받는 것 같아 조심스러워진다.

시간이 없어서 일기를 못썼나?  아니다!  일기 쓸 시간이 아깝도록 그렇게 지독스레 공부한 것도 아니다.  그 동안 겪은 일을 생각 나는 대로 적어 보아야 겠다.  4월 19일 우리가 경무대 앞에서 데모 중 사상자를 낸 후 계엄령이 발포되었다.  계엄 하의 서울……이때부터 나는 어쩐지 마음이 가라 앉질 않았다.  꼭 무슨 일이 일어 나고야 말 것 같았다.  24일 나는 시골 내려 갔다.  외조부께서 편치 않으시단다. 그러나 집에는 맞아주는 이 하나 없고 차디찬 방엔 깜깜할 뿐!  불도 없다.  울화가 치밀고 한편 처량하기도 했다.  영숙조카가 비벼주는 밥을 먹고 있자니 ‘내가 왜 시골 왔을까?’ 하는 후회가 태산 같다.  보고 싶던 영_를 찾아 갔다.  반가웠다.  기철 모친은 여전 하셨다.  거기서 나는 서울서 겪은 이야기를 주--욱 했다.  놀라는 표정들이라니! 영_는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참 예뻤다.  조런 것을 이다음에 마누라로 삼아야 할 텐데…그러나 야욕은 금물!  어찌 얘길 하다 결혼이야기가 나왔는데 나는 ‘나이가 같은 여자와 결혼할 테야!’ 라고 말하고는 쑥스러워 얼른 말 끝을 돌려 버렸다.

이곳에서 삼일 머무는 동안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영_가 해 주는 밥은 참 맛이 있다.  국물이 멀겋길래 ‘야 이건 뭐 대동강 물 같구나!’ 하고는 먹어보니 천만에!  그 맛은 천하 일미였다. 

할아버지는 좀 차도가 있으시다 한다.  반갑고 고마운 마음으로 나는 누워 계신 할아버지 곁을 떠나 왔다.

서울역에서 만년필을 소매치기당했다.  이 보다 더 기분 나쁜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으랴?

집에 오니 또 무의미하고 재미없는 스물 네 시간이 반복되었다.

 

(단기4293 서기1960)   5   3       화     고3

국제 학술원에서 주최하는 ‘우리는 이렇게 싸워서 이겼다’는 논제의 4.19혁명 회고 좌담회에 대학생 일곱, 고등학생은 나 하나!  이렇게 구성된 좌담회에 참석했다. 큰형이 주최했는데 날 끼워 넣은 것 같다. 떨렸지만 한번 말이 나오니 나도 모르게 술술 나왔다.

끝나고 나오니 진땀으로 젖어 있었다.

 

(단기4293, 서기1960).   5.   31    고3

  일기에 손을 못 댄지 한 달이 넘었다.  그 동안 과연 나는 일기 쓸 시간의 여유조차 없었을 만큼 바빴단 말인가? 아닌 것 같다.

어쩐지 일기장이 무서워진다.  나의 모든 행위와 감정이 솔직히 적혀 있는 일기장이 어쩐지 무서워만 진다. 이번 모의 고사에 내가 전체에서 8등을 했다.  수학은 내가 최고 점수다.  수학이 최고 점수면 다른 것들도 잘 해야 했을 텐데 영어는 37점이다.  내 실력은 절름발이다.

 

4293. 6. 7

  고3배지를 단지도 3개월이 지났다. 시간은 금덩이 보다 중요한 게 사실인데 여차하는 새에 한 두 시간을 무료히 흘려버리는구나.  이런 식으로 가다 가는 입학 시험이고 뭐고 아무것도 안 되겠다.  어휴! 어찌 하잔 말이냐?

오늘 EMI에서 영_ 형님을 만났다.  그 형님이 학관선생이 되겠다는 데는 약간 실망이 간다.  아니! 약간 정도가 아니다. 어째서 인간은 벌기 위해 이렇게 악착스레 굴어야만 하는가? 이해 못 하겠다.  돈! 돈! 이놈의 돈이 뭐길래 인간을 좌지우지 하나?   

 

4293. 7. 5     화     고3

  오늘은 우리가 고2 애들에게 기합을 주었다.  체별 하려고 모두 방망이 하나씩 들었으나 차마 때리진 못하고 단체 기합만 주고 해산시켰다.

적막이 흐르는 밤이다

확실히 이미 나는 썩었다.  벌써 인생의 절반 맛을 안 놈이다.  그러니 썩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소위 더럽다고 여겨지는 짓은 모두 해 보았다.  술, 담배, 그리고 그짓… 씻지 못할 더러운 인간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제 나는 영영 깨끗해질 수 없다. 후회도 필요 없다.  이미 저지른 나의 모든 과오는 나를 영영 괴롭힐 것이다.  나는 내 과오를 생각할 때 마다 절망할 것이다.  내가 장년이 되어, 혹은 사오십이 훨씬 넘어 아들 딸도 거느리고 지내며 이 일기장을 꺼내어 바로 이 대목을 읽는다 하자.  그때에도 나는 하하 나 어렸을 때 퍽 방탕 했었구나! 하고 웃음으로 넘기진 못할 것이다.  내가 죽을 때도 그럴 것이다.  나는 영원히 씻지 못할 이 과오를 짊어지고 저승으로 가게 될 것이다.  아!  나는 지옥의 가시밭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을 것이다. 아 끔찍하다.  나의 씻지 못할 이 죄는 이제 앞으로 한 오육십년을 두고 나를 괴롭힐 테니 아! 나는 그만 폐인이 되어 버리고 말았구나.  내가 칠팔 년 뒤 결혼해서 아내를 얻었다 하자.  그때 나는 여우의 탈을 쓰고 아! 아내여 나는 순결하다! 하고 지껄이진 못 할 것이다.  차마 못 할 것이다. 내 주의의 모든 온갖 것, 사람이고 짐승이고 모두가 내 눈엔 신성하게 보이는구나.  최소한 저 거지도 나 보다 깨끗한 셈!  저 거지는 겉으로는 썩어 있으나 속은 진주 같은 것!  나는 겉은 번드르 하나 속은 이미 썩을 대로 썩은 것.  내 부드러운 살 갓을 한 꺼풀 벗기면 거기엔 고름이 질질 흐르고 구더기가 뭉쳐 있겠지. 

이광수의 시를 읽어 본다.

  내 가만히 자리에 누워 세상 사람들의 죄를 생각하다가 내 죄에 눈이 띄어 소스라치게 놀랐 나이다.

  내 입으로 지은 죄는 바다와 같사옵고 몸으로 지은 죄는 산과 같사옵고 마음으로 지은 죄는 허공과 같이 끝간데를 모르나이다.

  이러한 제 죄를 두고 남의 죄를 헤어 보던 나의 어리석음이여!  부끄럼이여!  나를 살펴보지 마옵소서

일원성신도, 산천초목도, 나를 보지 말지어다.

더럽고 부끄러워하는 나를 어디다 감추며 어디다 숨기오리까?

읽다가 나는 일기를 집어 던졌다.  내 죄가 너무 크다.  아! 시간은 왜 이리 빨리도 흐르는가?  나를 죽이려는 것인가?

 

(단기 4293 서기 1960)   8월 17일    고3

모처럼 시골 내려왔다가 하필 서울 올라오는 날, 왜 울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고향집 중 천안 역 앞 본채는 이미 팔리고 뒤채 만 덜렁 남아 서울로 이사할 때까지 거처가 바뀐 터였다. 나는 쓸쓸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비애와 고독을 느꼈다.  고독. 정말 나는 고독한 놈이다. 아버지의 아산 설화산의 금광업소가 문을 닫고 그 후 하시던 사업이 부진한가운데 이리 된 걸 익히 아는 나였지만 엄습하는 비애는 나를 끈질기게 덮치곤 했다. 그보다도 정든 집, 내가 살던 집이 이미 딴 사람이 들어와 요리조리 뜯겨지고 변해진 것을 보며 일시에 울컥 치미는 서러움으로 그만 남자답지 못하게 울고 말았다. 그것도 창피하게 영_이 앞에서.

 

(단기 4293 서기 1960)     8월    22일    월    고3

오늘 저녁에 시골서 올라온 영_가 혜자와 함께 들렸다. 내 서재를 보여주니 책이 많음을 보고 놀라는 표정이었다. 데리고 나가서 명보 극장의 “페이톤 포레이스”라는 영화를 감상했다. 영화자체는 보잘 것 없었는데 사람들은 의외로 많았다.

거기서 종로 3가까지 걸어와 케익을 좀 사 먹고 헤어졌다.

집에 오니 허전하고, 어쩐지 무엇을 놓친 것 같은 공허감에서 공부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공부와는 인연이 먼 놈이란 말인가? 내 이래가지고 무얼 한다고…

나는 이렇게 또한 번 패륜아가 된다. 이제 나는 인생이 신비스러울 게 없다. 인간으로서 할 짓은 다 해본 거다.

 

(단기 4293 서기 1960)   10월   6일  목    고3

얌전한 개, 부뚜막에 올라간다 하더니, 아마 영_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나는 놀랐어. 국민학교 동창 동_이가 그토록 영_에게 정열을 받쳤다니 나는 미처 몰랐어. 나는 미처 몰랐어. 내가 생각했던 영_가 아니었단 말인가?!

어저께 나는 시골서 돌아왔다. 삼일간의 시골 생활, 나는 거기서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오직 잡념과 거리감만 얻고 왔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를 잊을 수 없다. 가련하게도 이 못난 놈은 그녀를 잊을 수가 없구나. 수학 문제를 풀면서도 그녀를 못 잊겠구나. 잊으려 해도 떠오르는 그녀의 모습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녀 이름은 길_. 이번에 우연히 천안서 만난 영_ 친구다. 인상깊은 자태가 나를 사로잡는구나. 아 어찌하면 옳단 말이냐! 나는 이제 고3인데.

그러나 섭섭한 게 있어. 나는 영_가 그런 류의 인간이었던 것을 몰랐어. 미처 몰랐어. 영_가 왼 남학생의 사진들을 가지고 있을까? 그 속에 그 속에 내가 모처럼 준 사진도 끼어 있는 것 아냐? 아 기분 나빠. 기분이 나빠.

 

4293   10   10     월

집 안은 적적하다. 오직 주인집 식구들의 소음만이 들릴 뿐 아무 소리도 없다. 이방엔 오직 나 밖에 없다. 순이 사촌누나도 가고 큰형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작은형은 부대에 가 있고 원_형님은 고시 보러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나는 지금 물리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은 엉뚱한 데 가 있다.

영_의 친구 길_인가 하는 그녀 에게로 내 정신은 쏠리고 있다. 아니! 그에게 보다도 영자에게 마음이 더 쏠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_는 마음씨가 곱다. 정말 순진하다. 나는 영_와 비교도 안 될 만큼 악한 놈이다. 처녀는 지켜줬지만 죄를 저지른 놈이다. 그렇다고 해서 길_이가 마음이 나쁘건 아니다. 아니 마음이 나쁜지 좋은 지 나는 모른다.

영_를 잊을 수는 없어. 영_는 내 가슴속에 영원히 존재하게 될꺼야.

 

(단기 4293 서기 1960)    10    14   고3

예상했던 대로 여섯 시쯤 해서 영_가 왔다. 천안서 직접 오는 길이란다. 반가웠다. 그러나 길_이 올라오라고 전보를 쳤기 때문에 급히 올라왔다 한다.

몇 시간 앉아 있다가 영_와 함께 서울역에 갔다. 영_와 길_과 길_이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나지는 못했다. 대전서 곧바로 올라오는 길이란다. 시간은 12시 15분 전! 영_보고 길_을 따라 가라고 나는 말했다. 영_도 그리하겠노라 대답했다. 영_는 길_을 따라 가버리고 말았다. 그뿐이다 보내고 나서 나는 지금 방으로 돌아와 이것을 쓰고 있다. 무의미하구나. 에잇! 나도 모르게 화가 난다. 화가 난다. 나는 이게 뭐냐?

나의 지금 심정은 뭐라 말할 수 없이 우울  하다. 한편 영_가 우리 집에서 자지 않게 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다행! 그렇지. 다행이지. 길_은 문득 나보고 ‘내일 한 시부터 서울 예식장에서 식구의 결혼식을 올리니 와 보라’고 하다가 ‘아니 별것 없다’ 하며 오지 말라고 한다. 나는 길_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다. 인사치례로, 그리고 할 말이 없으니까 결혼식 때 하면 와 달라고 했다가, 문득 생각해보니 나와 같은 웬 남학생이 오면 집안 식구가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걱정에서 오지 말라고 했을 것이 분명하다.

 

(단기 4293 서기 1960)   10월 16일   고3

여섯 시에 영_와 길_을 덕수궁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나는 학원에서 강의를 듣고 여섯 시에 덕수궁 앞을 왔다. 와 있었다. 어색했다. 천벌을 받을 놈이라고 나는 자책을 했다. 고3인데…

‘아카데미영화관’에서 하는 ‘연예인들’을 보기로 한 것이다. 극장의 현관에 들어서자, “어! 학생! 모자를 쓰고 이런 델 와?” 하는 어른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찔끔했다. 어찌하면 옳단 말이냐? 나의 죄 된 심정을…

그러나 나는 최대한 태연한 자세로 취해 들어갔다. 대만원이었다. 기다렸다가 우리는 좌석권대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내 옆에 영_가, 그리고 그 앞에 길_양이 앉았다. 아카데미라면 전에 진_누나와 “누명 쓴 사나이”를 감상한 기억이 난다. 그때는 어찌나 졸리던지 반은 보고 반은 졸았다. 하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영화가 재미도 있거니와 옆에는 영_가, 그리고 그 앞에는 길_이 앉아있는데 졸릴 것이냐! 천만의 말씀이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이런 때만은 영화 화면에 전심을 쏟아야 섧다. 고3인데…해가며. 그리고 시험도 한달 당겨 본다… 1달! 아흐! 수학 공식 x,y,z 가 생각나고 물리 t=2파이 루트l/g…이 생각난다. 그러다가 문득 화면을 보고 놀란다. 화면에 마음을 쏟아야지 해가면서도 머릿속은 끝없이 복잡해만 간다. 결국 보고 문을 나서니 머릿속에 남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도 영화냐? 스토리가 퍽 단순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초만 원이다. 이영화의 무엇이 매력이 있기에? 아닌 게 아니라 자극시킬 장면이 더러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쏟아져 나오는 신사숙녀들이 그걸 노리고 온 것은 아니겠지…

이런 생각을 하며 시청 앞까지 걸어왔다. 영_와 길_은 약수동 행버스를 타야 된다. 이제 영_는 한 넉 달간 못 본다. 길_은 영원히 못 보게 될지 모른다. 아니 책을 빌려간 게 있으니까 혹시 또 보게 될지 모른다. 나는… 나는 그녀를 보지 않았으면 한다. 그녀는 매혹적이다. 사람을 사로잡는 그 무엇이… 그 무엇이… 있다. 그러나 영_에게도 있다 그것은 영_가 예쁜 것이 아니라 영_의 고운 마음씨다. 나는 이제 악몽에서 벗어나야겠다. 그동안의 방탕한 생활에서 이제 벗어나야겠다. 그리하여 냉수 먹고 속 차려야 되겠다.

 

(단기4293, 서기1960)   10.   19   고3

우리는 내일 수학여행이다. 그리고 하루 잔단다. 오늘 하루 종일 한 일은 무엇이었던가? 오늘 학교가 파하자 무_의 짐을 날라 주었다. 오토바이로.

무_의 사돈 집에서 무_의 형수 여동생인 덕_를 처음 보았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예쁘고 귀여웠다. 나는 잊을 수가 없노라. 그녀의 그 귀여운 얼굴을.

덕_네 집인 청량리에서 이곳 명륜동 나 있는 데로 무_의 하숙 짐을 옮겨 주었다. 어쩐지 서글픈 심정이었다. 짐을 옮겨 주고 집에 와보니 영_가 왔다가 나를 기다리다 못해 그냥 갔노라고 한다. 슲다! 영_를 못 보다니. 무_의 하숙 짐 옮겨 주노라고 나는 영_를 못 만났다.  보고 싶은 영_와.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왜? 내 가장 사랑하는 친구 무_이기 때문에!

무_과 함께 사진기 빌리러 마포까지 가서 결국 성공했다. 기뻣다. 무_과 다시 명륜동에 와서 무_은 그 윗집으로, 나는 내 집으로 갔다.

형이 저녁에 돌아왔다. 그러나 서운하다. 트란제스타를 뺏기게 된 것이다. 라디오를 형한테 빼앗기다니…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다. 형도 경주 여행 가는 것이 아닌가…

 

(단기 4293 서기 1960)  10월  22일   고3

소풍에서 돌아와 집에 도착해 곧바로 이 글 쓴다.

엊그제 소풍을 떠나서 오늘 집에 도착한지 만 이틀 그 이틀 동안 나는 과연 무엇을 하였는가?

가는 날은 여관을 정하지 못해 온통 야단이었다. ‘삼랑각’이라는 큰 여관이 있기는 했는데 그 여관에는 인천 여상 애들이 먼저 와 들어있었다.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우리 몇은 형편없는 초가집 여관에 들었다. 거기서 노는데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우선 술이 한바퀴 돌았다. 나는 술잔을 내가 쥐고 돌렸기 때문에 다행히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결국 한잔 마셨다. 저녁상이 들어오는데 그것도 개판이었다. 죽을 악을 쓰고들 찾아먹었다. 나중에 보니 방에 떨어진 게 산더미를 이루었다. 내가 다 치웠다.

그러나 술 먹은 속은 결코 개운하지 못했다. 저녁 먹은 것을 죄다 토해버렸다, 마구 토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문병길이 술을 먹고 지금 토하고 있구나. 슬프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했다. 하룻밤 자고 식전에 일어났다. 집 근처 절에 가서 사진 좀 찍고 내려와 배 타고 왔다.

병길 공부 좀 해!

 

(단기 4293 서기 1960)   10  30    고3

 지금은 밤 네시. 불면제를 먹은 덕택으로 오늘은 두 시에 깼다. 깜짝 놀라 아궁이를 살폈다. 큰형이 잠시 집을 비웠지만 다시 맞는 자취생활이 쉬운 건 아니었다. 다행히 구공탄은 꺼지지 않았다. 구공탄을 갈았다.  식모살이 하기가 과히 수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하는 밥은 하는 족족 잘 되었다. 보들보들하니 기름기가 쪼르륵 흐르게 잘 되어 기분이 좋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한 삼일 계속하니 진력이 나서 못하겠다. 그렇지만 식모를 구하지 못했으니 내가 하는 수밖에…

지금 나는 좀 조용히 내 자신을 돌이켜 보려 한다. 내가 과연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를 나는 돌이켜 보려고 한다.

나는 지금도 영_를 생각하고 있다. 이러고 있는 내 자신이 다시금 모멸 된다. 아! 어째서 나는 이렇게 못난 인간이 되었단 말인가?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유일한 이 시기에 나는 한 여성한테 마음이 뺏겨 갈팡질팡 있단 말인가?

이렇게도 의지가 약하단 말인가? 나라는 인간은 도무지 비겁한 인간이다. 눈을 딱 감고 영_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는 없는가? 그 외에도 덕_니, 춘_니, 문_니, 길_이니… 이런 여성들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는 없는가? 나는 과연 어떤 의도로 이들을 생각하고 있는가?

나는 가끔 무_에게 위선을 부린다. 영_ 생각할 때마다 나는 성스러운 마음이 되어 추잡한 생각을 아니 한다고 했다. 그러나 과연 나는 그랬던가? 나의 가장 적나라한 상념의 대상은 무참이도 영_였다는 것을 나는 안다. 곧잘 자위를 하며 나는 영_의 얼굴을 머리에 떠올렸다. 나는 그러면서 간혹 이것이 인생이냐고 생각해 봤다. 정녕 그것 만이 인생인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절대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인생으로 오인하고 있으니 불행한 일이다.

나는 영_를 잊어야 한다. 그러기에 나는 저 책상 앞에 “오늘부터 영_에게 편지를 안 쓰겠다”고 써 붙이지 않았는가? 그러나 영_로부터 편지가 오고 또 답장을 해야 될 경우면? 그래도 하지 말까?

아니다! 이제 영_로부터 편지 오기는 글렀다. 그녀로 하여금 편지를 못쓰게 한 건 나다. 나는 생전 처음 영_에게 편지로 내 진심을 토로했다. 나 영_를 볼때마다 껴안고 싶다 했다. 눈 딱 감고 그 편지를 붙였던 것이다. 그것을 보는 영_는 어떠했을까? 그저께 식모일로 시골 내려간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물론 영_를 만났다. 교회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알은 채 안 했다. 도무지 영_ 보기가 무서웠던 까닭이다. 영_가 화낼까 보아 영_집에 가서도 나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그런 편지를 쓰고 도무지 눈길 마주치는 게 무서웠던 것이다.

아! 영_.  나는 혹시 다음에 올지도 모를 너의 편지에 떨고 있다. 영_가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쓸지? 이제 나는 모든 상념을 머리에서 지워야 한다. 영_의 얼굴도 내 뇌리에서 지워야 한다.

나는 영_를 죽도록 그리워하노라. 용감히 잊겠다.

나는 이제라도 마음을 잡고 공부할 수 있을까?

 

(단기 4293 서기 1960)    11     1   고3

오늘 저녁은 저쪽 집 처녀가 밥하는데 많이 도와주었다. 김치도 담아주었다. 저녁을 해놓고 나는 어쩐지 허전한 심정이다. 영_ 생각이 또 나려 한다. 생각을 하지 말자 결심하고, 뇌에서 깨끗이 씻어버리자 결심한다.

영_야 내 머릿속에서 어서 사라져 주렴.

 

(단기 4293 서기 1960)   11   3    고3

오늘 저녁 무_과 함께 있는데 길_이 찾아왔다. 그녀가, 내가 한때 사로잡혔던 길_이 찾아왔다. 빌린 책을 갖고서. 들어오라고 했다. 무_을 쫓아 내보냈다. 그러나 나는 조금 전까지도 영_를 생각하고 있었다. 무_이 떠나고 길_이 밥해주겠 노라 했다. 나는 한참 망설였다 그러나 길_은 이미 부엌에 나가 있었다. 이런 길_을 나는 오늘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되었다.

그릇을 깨끗이 치워주었다. 하여튼 부엌을 말끔하게 정리해 주었다. 나는 고마웠다 그러나 단순히 고마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혹시 큰형이라도 들이닥치면? 어머님이라도 올라오시면?

그러나 나는 구태여 영_를 생각하려 않는다. 편지에 좀 과격하게 썼더니 답장이 없다. 에잇! 영_ 생각을 하면 어쩐지 화만 나고, 분하기도 하고, 불안해지기도 한다. 길_은 갔다. 어저께로 영_ 생각은 안 하려 했는데… 그러나 오늘은 길_이 온 덕분으로 또 영_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쩐지 이상한 것은 내가 조금 전에 길_을 보았으면서도 길_의 얼굴이 영_의 얼굴처럼 강렬히 남지 않는다. 그것은 어쩐 이유일까?

 

(단기 4293 서기 1960)   12월 23일     고3

나는 여기 앉아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면서…그냥… 앉아만 있다.

정말! 그야말로 한 많은 6년간! 나는 지금 그 6년간의 생활을 이제 끝내려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고등학교 시절에 사귄 여성 그게 몇이나 될까 마는 그러나 역시 나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사람은 영_와 길_이다. 참 모두 다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어쩐지 영_로부터 답장이 없다. 궁금하기가 지나쳐 이제는 화가 난다.

제까짓 게 뭐 길래? 하며 일종의 안간힘도 써 본다. 길_이 방학 때 놀러 올테지? 어쩐지 그날이 기다려진다. 나의 마음이 자꾸 길_에게 쏠리는 것은?  길_과 이야기할 때는 어쩐지 마음이 탁 놓인다. 그리고 정다워지고 싶다. 그러나 나의 이런 심정을 길_에게 섣불리 말하지는 말아야겠다. 왜냐하면 길_이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뭐 그렇다고 떠는 것은 아니다. ‘제까짓 게 뭐 길래?’

사실 내가 길_에게 ‘나는 너에게 마음이 쏠려 있다’ 고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세월이 가고, 우리들의 지성이 발달하면, 이제 점차로 느껴질 게 아닌가?

영_ 와 나는 이미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우정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길_과도 그런 우정을 만들고 싶다. 언젠가 나는 영_에게 악수를 청했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한 적이 있다. 과연 길_도 그럴테지. 그렇다면 여자라는 인간은 정말 더 좁은 인간이구나. 손 한 번 잡히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단 말이냐? 손을 잡히면 육체가 더러워진다는 말이냐?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 볼 때 역시 수줍어하며 손을 내밀지 않는 영_가 고맙게 느껴진다

무_이 찾아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무_도 지금 우울해져 있었다. 시골서 부모가 방학 때 내려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숙비 때문에.

우리 둘은 서로 잠깐 신세타령하다가 술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것 좋다 술 좀 마시자 꾸나, 성대 앞에 있는 대포집에 들어갔다. 무_은 잠바를 입고 나는 교복 위에 군복을 걸쳤다. 그러나 우리가 고등학교 학생이라는 것은 대번 알 것이다. 대포집에 들어가니 어른들이 몇이 술 먹고 있었다. 텁텁한 술 냄새가 확 끼쳤다. 도루 나가고 싶었다. 이런 곳은 처음이다. 그러나 왔다가 도루 나가는 주책은 부리고 싶지 않았다. 그냥 앉았다. 막걸리는 한 주전자나 가져왔다. 안주를 가져온다. 마셨다. 그뿐이다 문병길이 술집에 가서 술을 먹었다.

그러나 정신은 말똥 하다. 나의 이런 추태를 부모님들이 보신다면? 영_나 길_이 보게 된다면 상상외로 실망할 것이다. 정말 패륜아라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그러나 영_여 길_이여 지금의 내 심정을 이해해달라.

나는 지금 술 냄새를 풍기며 이 글을 쓴다. 그러나 나의 정신은 말똥말똥하다. 형님이 들어와서 내가 술 먹은 것을 아시게 된다면?  어 차라리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형님이 나의 이러한 탈선 행위를 아신다면 나는 형님께 고백하겠다 지금의 나의 심정을!

형님이 나를 질책하시고 가혹하게 꾸짖어 주셨으면 좋겠다.

이 불타는 가슴을 어찌하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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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

 

나의 고3 일기는 이즈음 불연속이었으며 일정 노트 없이 낱장의 백지에 적는 등 체계적이지 못했다.

교실에서 수업 받으며 하던 입시준비보다는 내 나름대로 계획을 짜 입시 준비에 돌입하기 위해 2개월가량 시골에 가 혼자 공부하기로 작정했다.

고3때 담임 선생이셨던 고상흠 선생님께 나의 결심을 말씀드리니 선생님은 허락해 주셔서 3개월 장기결석에 들어갔다.

나는 입시준비 장소로 천안에서 30리 떨어진 성환 친구 황무돈의 고향집 과수원을 작정하고 황무돈과 의논한 후 무돈은 내가 서울에서 하숙하던 집으로 이사하고 나는 무돈의 어머님이 운영하던 성환의 과수원에서 지내기로 했다. 물론 이것은 무돈의 어머님께서 쾌히 허락해 주셔서 가능 해진 일이었다. 무돈은 가끔 주말에 고향 성환에 내려와 과수원 본체와 뚝 떨어진 오두막 집에서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2개월가량의 독자적인 입시 준비는 무돈 어머님의 자상함과 구수한 청국장 맛, 새소리 바람소리만의 삭막하지만 아늑한 과수원 외딴 방과, 방문만 열면 마당 건너 김이 무럭무럭 오르며 바로 보이는 여물통에 머리를 박고 작두로 잘게 썬 볏짚에 삶은 콩을 얹어 준 여물 먹기에 여념 없던 소와 눈길로 이야기하며 잠시 머리를 식히곤 하던 게 기억난다.

2026년 9월 첨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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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 24/10/2026 5:01 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