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unity

박용필의 미국인 이야기 - 박윤수 ...
 
Notifications
Clear all

박용필의 미국인 이야기 - 박윤수 박사의 ‘아름다운 마무리’ -

1 Posts
1 Users
0 Reactions
5 Views
moonbyungk
(@moonbyungk)
Posts: 108
Admin
Topic starter
 
TalkMedia i 4so7v9.jpg

 

박윤수(경성대 예과·서울대 문리대 48) 미주 동창회 초대 회장이 지난 4월, 향년 96세로 뉴욕에서 별세하셨다. 7월 4일 독립기념일이면 97번째 생신을 맞으실 분이었다.

그런데 장례식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이 이상하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혹시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은 사연이라도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스쳤다.

그러나 얼마 전 큰딸 지니가 보내온 글을 읽고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회장님은 생전에 자신의 몸을 의학교육과 연구를 위해 기증하기로 뜻을 정하셨다. 그래서 마지막 가는 길에 일반적인 장례식을 치르지 않았던 것이다.

시신기증을 영어로는 ‘Willed Body’라고 한다. 자신의 몸을 의학교육과 연구를 위해 ‘자발적 의지’로 기증한다는 숭고한 뜻을 담은 표현이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박 회장님에게 참으로 잘 어울리는 마지막 모습이었다. 평생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나누고 베풀며 살아오신 분이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의 몸까지 내어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분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와 맞닿아 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전쟁을 모두 지나온 세대였다.

전공은 물리학이었다. 처음에는 핵물리학을 공부했지만 살상무기 연구에는 뜻이 없었다. 결국 반도체와 고체물리학 분야로 연구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훗날 한국 과학기술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됐다.

갈륨비소(GaAs)와 반도체를 연구하면서 서울대 연구실에 실험용 샘플을 보내는 등 젊은 과학자들의 연구를 꾸준히 도왔다.

큰딸 지니는 이메일에서 “우리는 아빠의 논문을 읽고 교정을 보면서도 갈륨비소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 아버지가 직접 만든 작은 노란색 반도체가 깜빡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즐거워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딸이 전한 아버지의 평생 좌우명은 이랬다. “성공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라.” 그가 평생 존경했던 아인슈타인의 말이라고 했다.

박 회장님에게 과학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었다. 자신이 배운 것을 다시 나누는 일이었다. 미국으로 건너온 후배들을 자신의 집과 연구실로 불러들여 연구를 돕고 격려했다.

1991년에는 서울대 미주 동창회를 만드는 데 앞장서며 미주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동문들을 하나로 묶는 일에도 힘을 쏟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86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남가주의 은퇴마을인 실비치 레저월드에서 한인문인협회를 만들고 계간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평생을 물리학자로 살아온 과학자가 노년에 시인이 된 것이다.

그가 남긴 시 가운데 ‘두 사람(Two People)’이라는 시가 있다. 평생을 함께한 아내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시다.

“두 사람이 바람의 길을 따라/ 함께 걸어가고/
모든 고통과 번뇌를 내려놓고/
달빛 아래 두 개의 그림자가/ 함께 걸어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묻는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 시를 읽고 있으면 박 회장님의 마지막 길이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아마 그에게 죽음은 모든 것이 끝나는 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이 평생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 걸었던 길처럼, 마지막 순간에도 누군가에게 새로운 배움과 희망을 남기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길에 자신의 몸까지 내놓았다. 생각할수록 고귀한 선택이다.

돌이켜보면 그의 인생 전체가 하나의 긴 ‘나눔’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식을 나누고, 재능을 나누고, 후학을 아끼고, 동문들을 하나로 모았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몸까지 의학교육과 연구를 위해 내놓았다. 아직 만나지 못한 미래의 사람들에게 주는 값진 선물이다. 오롯이 과학자로 살아온 한 사람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평생 무언가를 세상에 남기고 떠난 사람. 이제 달빛이 흐르는 그 길을 편안히 걸어가십시오.

그리고 회장님이 평생 세상에 나누어 주신 작은 빛들이 오래도록 우리 곁을 밝히기를 바랍니다.

 

            박용필 <문리대 66>

 

 
 
 

 
Posted : 27/10/2026 10:39 pm